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3부 자연과 인간, 우리의 노래
시조문학의 최고봉, 윤선도
1. 세 곳의 연꽃과의 기이한 인연 윤선도(1587~1671)는 조선 중기 시조문학의 최고작가이다. 그는 시조를 문학자품으로 인식하여 작품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창작하고 손수 정성들여 필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 권의 책자로 묶어 간직하는 등, 시조를 즉흥적인 여기로 여기며 제작하던 당시 사대부의 경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그는 높은 학식과 충효를 겸비한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어려운 시대를 살다간 인물이기도 하다.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다 윤선도의 본관은 해남이요 자는 약이이며, 호는 고산 또는 해옹이다. 그가 출생한 곳은 서울의 연화방으로,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 대학로 부근이다. 고산은 6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특별히 스승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가 명문가 출신인데다가 재능이 비범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8세 때 그는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의 남부에 있는 명례방 종현의 종가에서 살았다. 지금의 명동성당 부근으로 지금은 '윤선도 선생 집터'라는 기념비만 남아 있다. 이곳은 고산이 유년기를 보낸 곳인데 풍수설에 의하면 "제비 집의 영국이어서 인재가 난다"는 좋은 터에 해당한다고 한다. 고산의 5세조인 효정은 강진 도암에서 출생하였으나 나중에 해남의 연동으로 이사하면서 집안의 부를 크게 일으켜 사방에 덕을 쌓은 뒤 해남 윤씨의 관향을 얻었다. 효정이 해남 윤씨의 득관조가 된것이다. 4세조인 구에게는 홍중, 의중, 그리고 공중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홍중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차남인 의중에게는 유심, 유기, 유순의 세 아들이 있었다. 홍중의 후사가 없자 의중의 둘째 아들인 유기를 양자로 들여 종손의 가통을 잇게 하였다. 하지만 유기도 후사가 없었다. 그런데 유심에게는 선언, 선도, 그리고 선하의 세 아들이 있었다. 이에 따라 둘째인 선도가 다시 유기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고산의 양자 입적 사실을 예조가 입증해준 '입안'(1602, 선조 35, 고산의 16세 때의 일)은 현재 보물 제482호로 지정되어 해남 연동의 고산 유물전시관에 전해오고 있다. 고산 윤선도는 큰아버지인 유기에게 입양되었지만 양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훗날 윤유기도 "효자를 얻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양자로 입양되던 해에 부친 유기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 그는 부친이 외직에 나갈 때면 그 임지를 따라다녔다. 13세 때는 부친이 안변도호부사에 임명되자 안변 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14세 전후에 지은 다음의 시를 보면 그의 시적 자질이 일찍부터 발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양에 찾는 길, 모래 섞인 흙먼지 자욱하더니 비 개인 뒤 앞 시내의 물빛이 한결 새롭구나. 임지의 산과 풍토 가까이서 깨닫고 보니 사람마다 하는 말소리 남쪽과 다름을 알겠네. - 「왕안변도중우음」
고산은 17세에 남원 윤씨 돈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 해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소과의 초시에 해당하는 승보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21세에는 장남 인미를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양모인 구씨를 여의고 또 다음해에는 자신의 생모를 잃었다. 25세가 되던 10월 모친의 상복을 벗은 윤선도는 비로소 11월에 종가의 선산이 있는 해남에 내려갔다. 이때의 감정을 「남귀기행」이라는 122구의 장편 기행시로 남겼다. 26세 봄에는 진사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9월에는 차남 의미를 얻었다. 그러나 이 해 12월에 자신을 낳아준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개인적으로 과거 합격과 자식의 출생이라는 가정의 행복과 함께 부모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잇달아 겪었다. 33세에는 예미를 낳았다. 이처럼 개인적인 슬픔을 겪은 그였지만 부친의 상복을 벗자마자 30세 때인 1616년 12월에는 유생의 신분으로 '병진상소'를 올렸다. 이이첨, 유희분 등 당시 조정의 집권세력이 권력을 남용하여 국사를 그르친다는 내용의 상소인데, 당시로서는 30세밖에 안된 백의의 신분인 그가 감히 이이첨의 비리를 공박하고 나선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이이첨 무리의 미움을 사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43수의 한시와 「견회요」 5수, 「우후요」 1수 등의 시조를 처음으로 지었다.
산은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크고 크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이것은「견회요」 제4수로 긴 산과 먼 물, 그리고 울고 가는 외기러기에 작자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어버이를 그리는 간절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고산은 1년 뒤 다시 경상도 기장으로 옮겨졌다. 그것은 당시 변방에 귀양온 선비들이 많았던 탓에, 조정에서는 고산이 나라의 기밀을 가진 그들과 내통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33세(1619)에 유배지에서 부친 유기의 부음을 접하였다. 부친은 고산이 병진상소를 올린 탓에 63세 때 삭탈관직되었다가 69세로 죽었던 것이다. 부친은 그가 상소문을 올리는 것을 간곡히 만류했었다고 한다. 당시 젊음의 의기가 앞서면서 광해군의 폭정에 격분하여 출사를 포기한 그였기에 '병진상소'를 올렸지만, 결과적으로 부친에게 불효를 저지른 것이다.
1623년(37세) 3월에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그는 유배에서 풀려났다. 실로 6년 4개월 동안의 귀양살이였다. 그리고 이 해 4월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7월에는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조정에서는 다시 의금부도사, 안기찰방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약 5년 동안 고산은 고향 해남의 연동에서 독서와 심신의 단련에 열중하였다. 그곳은 득관조인 어초은 윤효정 이래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 있었는데, 그 연동의 옛집은 아직도 남아 있다. 42세인 1628년(인조 6) 봄에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당시 시관이던 장유는 그의 글을 보고 '동국의 제일책'이라고 극찬했다 한다. 그는 장유의 추천으로 봉림대군(10세)과 인평대군(7세)의 사부가 되었다. 고산은 두 왕자에게『소학』을 교본으로 삼아 가르쳤다. 당시 이 책은 사림들에게 금서로 알려졌는데, 고산은 일찍이 이 책을 접한 뒤 평생 삶의 철학으로 삼았다. 고산은 43세에 공조좌랑을 시작으로 하여 공조정랑(44세), 호조정랑, 한성부윤(46세), 예조정랑, 세자 시강원문학(47세)을 거쳤다. 화려한 벼슬살이와 함께 가정적으로는 44세에 장남 인미와 차남 의미가 나란히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기쁜 일이 있었다. 47세(1633)에는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4월에 시행된 증광복시에서는 대책에서 일등으로 뽑혔다. 인조는 이를 축하하여 음식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인조의 고산에 대한 두터운 신임은 반대파의 시비를 불러일으켰으니, 48세에는 그의 승진을 못마땅하게 여긴 재상 강석기가 그의 벼슬길을 막으려고 모함한 탓에 종6품직인 성산현감에 좌천되었다. 치욕적인 강등이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목민관으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그는 이때 백성의 토지를 올바로 측량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 상달되지 못하고 오히려 상관인 경상도 감사 유백증이, "윤선도의 실정이 있으니 파직시켜달라"는 모략의 글을 임금에게 올렸다. 임금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고산은 그 해 겨울에 병을 핑계로 사직한 뒤 귀향하고 말았다. 이러한 당쟁으로 인한 벼슬살이의 좌절과 환멸은 그에게 세상을 멀리하고 은둔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에 깊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나이 50세 되던 1636년(인조 14)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 군사가 물밀듯 쳐들어오자 전세가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우선 봉림대군와 인평대군 등 왕자와 종실 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왕도 그 뒤를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다급해지자 왕은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45일 만에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굴욕적으로 삼전도에서 형제의 서약을 하고 말았다. 해남에서 청의 침략 소식을 접한 고산은 의병을 모집하여 배를 타고 바닷길로 서해를 거슬러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1월 29일 강화도에 이르렀을때 왕자와 빈궁이 있는 그곳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고산은 배에서 통곡을 하며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해남에 이르러 왕이 청나라에 굴욕적으로 항복했다는 사실을 안 그는 통분해하며, 배에서 내리지 않고 아예 탐라(제주도)에서 살겠다고 남으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보길도의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수려함을 보고 배에서 내렸다. 격자봉에 올라가 본 빼어난 산 기운과 수석의 기이함에 이끌려 이곳에 머물기로 하였다. 보길도가 국문학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일부터이다. 이 때가 1637년(51세) 2월이었다.
고산문학의 산실 부용동과 금쇄동 고산은 자신이 정착한 일대의 마을을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하여 '부용동'이라고 불렀다. 부용은 연꽃의 다른 이름이다. 그가 태어난 곳이 연화방이요, 조상의 선산이 있으며 자신의 학문을 연마한 곳이 곧 연동이니, 연꽃과는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이 세 곳의 연꽃마을은 고산의 삶과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음에 틀림없다. 고산은 격자봉 아래에 집을 지어 낙서재라 하였다. 그리고 그 후로도 오랜 기간에 걸쳐 보길도의 이곳 저곳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등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서 섬 전체를 자신의 낙원으로 가꾸었다. 부용동 정원이야말로 고산이 꾸민 새로운 이상향인 것이다. 그는 해남 윤씨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인력을 동원하여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고산은 85세로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이 섬을 왕래하면서 13년 정도 머물렀다. 그는 이곳의 산과 지역에 직접 이름을 붙였는데 동천석실, 언선대, 상춘대, 소은병, 낭음계, 미산 등등이 그것이다. 사실 보길도 전체는 고산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곳곳에 유적지와 그가 붙인 이름이 남아 있다.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은 방대한 편인데 크게 낙서재, 동천석실, 그리고 세연정 등 세곳으로 나누어진다. 세연정은 부용동 입구에 있는데 자연 연못과 인공 연못으로 이루어진 곳에 이 정자가 놓여 있다. 고산은 세연정 아래 동대와 서대에서 틈나는 대로 무동과 무희에게 춤을 추게 하고 악사에게 풍악을 울리게 하여 즐겼다. 낙서재는 세연정에서 조금 들어가면 격자봉 아래에 있는데, 강학과 독서에 열중하던 고산의 생활 공간으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동천석실은 낙서재에서 북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져 마주보이는 앞산 중턱에 있다. 바위 절벽 위에 세워져 자연과 인공의 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 제일의 경치로 생각하여 여기에 서적을 보관해두었다. 그리고는 이곳을 자주 왕래하면서 자연의 경치를 즐겼고 탈속의 경지를 누리고자 하였다. 보길도에 들어온 지 1년 뒤(52세) 봄에 고산에게 대동찰방과 사도시정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반대파의 모함이 심해졌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까지 당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뵙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과, 피난온 처자들을 붙잡아 섬으로 데려가 함께 살면서 벼슬에 나오지 않는 죄목으로 모함받아 1638년 6월 끝내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 이 유배지에서는 주로 장편의 한시를 지어냈다. 유배의 고통과 서정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시적 형상화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유배 기간은 오래되지 않았으니 그는 이듬해(53세) 2월에 풀려나 고향 해남으로 돌아갔다. 유배에서 풀려나 영덕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고산은 8세 된 아들 미아의 죽음을 전해들었다. 미아는 비록 천출로 태어났지만 고산이 늦은 나이에 얻어 상당히 애지중지했던 아들이었다. 일찍이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무렵에 둘째 아들 의미를 잃었던 그였다. 고산은 이때의 슬픔을 「도미아」, 「견회」 등의 장편 한시를 통해 읊었다. 고산은 인미, 의미, 예미, 순미, 직미 등의 아들을 두었다.
고산은 고향에 돌아온 뒤 집안일을 전부 첫째 아들 인미에게 맡기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았다. 시끄러운 세상사를 멀리하고 평소 품었던 은거 생활을 한 것이다. 이는 고산이 평소에 지녔던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현실의 갈등을 해소하는 대상으로서 자연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천하가 혼란할 때 선비가 갈 곳은 조정이 아니면 바로 산림이 아닌가" 하는 그의 말은 이를 증명한다. 53세 이후에는 수정동과 금쇄동에서 한가한 생활을 누렸다. 그는 귀양지에서 돌아와 백련동(지금의 연동)에 머무르지 않고 그곳과 가까운 수정동에 살 터를 찾아 집을 지었다. 그곳은 해남군 현산면에 있다. 그는 이곳에서 인소정을 짓고 못을 만들어 인공 원림을 조성하였다. 지금은 여러 집터나 연못의 축대 등이 남아 있어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당한 인공 원림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수정동이 있는 이곳을 수정산으로 불렀으며, 경치가 뛰어난 곳곳에 이름을 붙였다. 인소정 곁에 있는 병풍바위는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폭포수가 흘렀는데, 고산은 이러한 경관을 관조하면서 뛰어난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또한 수정동 근처에 있는 문소동을 찾아가 정사를 두었다. 고산은 54세 봄에 꿈에서 본 곳을 찾아가 새롭게 금쇄동을 발견하였다. 그가 그 해 봄에 쓴 수필인「금쇄동기」에서 "수정산의 거처를 가려면 5리가 못 되고 문소산의 거처를 가려면 1리도 못 된다"고 한 것을 보면, 금쇄동은 수정동과 문소동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듯하다. 그는 수정동과 문소동, 그리고 금쇄동을 왕래하며 산중에서 살았다. 이는 59세에 지은 다음의 시에서도 알 수 있다.
금쇄동 안에 꽃이 만발하고 수정동 아래에 물소리는 우레와 같다. 유인이라 일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죽장에 짚신 신고 날마다 오고 가는데. - 「우음」
이처럼 그는 이들 세 곳을 오가는 산중 생활을 10년 정도 계속하게 된다. 금쇄동은 많은 사람들이 고산문학의 산실 가운데 하나로 거론하는 지명이다. 그것은 그의 문집 속의「연보」등에 "나이 56세에 금쇄동에서 「산중신곡」을 지었다"고 되어 있으며, 그의 묘가 현재 금쇄동에 있는데다 그 무렵 산중 생활의 대표지로서 금쇄동이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금쇄동'은 바로 수정동과 문소동을 포함한다고 봐야 한다. 고산은 이 세 곳을 오가며 56세에 이르기까지 시조 19수를 지었는데 이들 모두를 「산중신곡」이라 불렀다. 그리고 56세에 자신이 만든 책자인 『금쇄동기』에 이들 작품을 수록하였다. 다음의 시조는 「산중신곡」 가운데 「만흥」 6수의 첫 작품이다. 이를 보면 수정동에 있는 인소정을 연상하는 시구가 중장에 나온다.
산수간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향암의 뜻에는 내 분인가 하노라
금쇄동을 그는 선경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풍수지리에 밝았던 고산은 직접 자신의 묘지를 택하였다. 지금 그의 묘가 있는 금쇄동이 바로 그곳이다. 그는 금쇄동을 발견하고는 회심당을 비롯하여 휘수정 등을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휘수정터만 남아 있다. 고산은 금쇄동에서 해남의 대둔산과 두륜산, 그리고 멀리 영암의 월출산을 바라보곤 하였다. 월출산의 기암절경, 그 가운데 천왕봉을 보면서 지은 「조무요」라는 시조가 있다.
월출산이 놉더니마는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왕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와다 두어라 해 퍼진 휘면 안개 아니 거드랴
이 시조는 「산중신곡」 가운데 하나로, 서경시이면서도 천왕복이 임금을 상징하고 그 봉우리를 가리는 안개가 간신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풍자시라고 할 수 있다.
연동의 녹우당 1649년(63세)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정이 즉위하였다. 고산은 병이 깊어 서울로 올라가 애도할 수 없게 되자 이 일을 상소로 올렸으나, 감사가 이를 올리지 않았다. 그러자 고산은 큰아들 인미를 대궐로 보내 사정을 아뢰게 하니 왕은 옛 사부에 대한 은혜를 밝히며 이를 잊지 않고 있노라고 말하였다. 1651년(65세)에 고산은 보길도의 부용동에 들어가 유명한「어부사시사」를 지었다. 효종은 즉위 3년(1652, 66세)에 고산에게 성균관 사예를 특별히 제수하여 불렀다. 그러나 반대파 서인의 모함이 계속되자 그는 거듭 상소를 올려 벼슬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효종은 다시 동부승지에 그를 제수하였다. 정언 이만웅이 고산을 비난하고나서자 임금은 노하여 이만웅을 관직에서 내쫓았다. 고산은 임금의 뜻을 알고 고향에 내려갈 수가 없어서 일단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 머물렀다. 그의 시조「몽천요」 3수는 이 무렵에 지어졌다. 이 해8월 예조참의에 제수되자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고산은 10월에 왕에게 「시무팔조」의 소를 올리면서 재차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공신 원두표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일로 그는 오히려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 해에 고산은 해남으로 돌아왔다.
이듬해(67세)에 고산은 부용동에 들어갔다. 2월에는 낙서재 남쪽에 무민당을 지어 침소로 삼아 기거하였다. 연못도 파고 연꽃도 심으면서 부용동을 손수 가꾸었다. 2년이 지난 69세에 효종이 다시 그를 부르자 서울에 올라가 잠시 벼슬을 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내려가 부용동에 들어갔다. 71세에도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았으나, 역시 사직을 청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왕은 이듬해(72세) 그를 공조참의에 제수하였다. 그러자 반대파에서는 벼슬을 항상 특명으로만 한다며 비판하였다. 이 무렵 을사사화 때 죽은 남인 출신 정개청의 서원이 송준길 무리에 의해 헐리자, 고산은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반대파인 송시열과 삼사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사직소를 올려 기어이 허락을 받았다. 효종은 해남으로 내려가혀 하는 그를 만류하며, 사부를 위하여 수원에 집을 지어주고 그곳에 머루르게 하였다. 고산은 그가 머물렀던 이 집을 훗날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난 뒤 해체하여 수원에서 남양으로, 다시 남양에서 뱃길로 띄워 해남까지 옮겼다. 그 집이 바로 녹우당 안의 사랑채이다.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르지만, 원래는 이 사랑채가 녹우당이었다. 이런 연유로 건축양식이 ㄷ자형인 일반적인 호남지방의 양반가옥과는 달리 서울의 양반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으로 되어 있다. 현재 녹우당 앞에는 「어부사시사」가 새겨진 '고산 시비'가 서있다.
1659년(73세) 효종이 즉위 10년 만에 돌연 승하하였다. 이때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터졌다. 소위 유명한 예송논쟁으로 조대비가 3년복을 입느냐 1년복을 입느냐 하는 것인데 송시열, 송준길 등의 서인측은 후자를,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의 남인측은 전자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예송에서 남인측은 패하였고, 이에 고산은 1660년(74세) 6월에 함경도 삼수로 귀양을 갔다. 세번째 귀양인 셈인데 삼수는 험준한 땅이라 원래 북청으로 이배될 수 있었으나 송시열의 반대로 오히려 위리안치되었다. 고희를 넘긴 나이인데다가 국경 끝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귀양살이의 고생은 무척 심했다. 더욱이 중죄인의 누명을 쓴 탓에 아전들의 구박이 심했다고 한다. 그는 함경도 생활 5년간 20여 편의 시를 지었는데 대개는 힘든 귀양살이에 대해 읊고 있다. 고산은 1665년(79세) 3월이 되어서야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되었다. 그곳에서 1년 4개월을 더 보낸 뒤 81세가 되던 해 7월에 왕의 특명으로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났다. 8년간의 기나긴 유배생활이었다. 8월에 해남에 돌아왔다가 9월에 다시 보길도의 부용동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5년 동안 유유자적하며 살다가, 낙서재에서 1671년 6월에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불멸의 시조문학
고산은 한국 고전시가사에서 단가, 곧 시조문학의 일인자이다. 그의 문집 『고산선생유고』에는 한시문이 실려 있으며, 「별집」에도 한시문과 시조 35수, 단가 「어부사시사」 40수가 실려 있다. 또한 친필로 된 가첩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2책이 해남의 고산 유물전시관에 전해온다. 고산은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시가 시인으로 불리는 데, 특이한 것은 이들과는 달리 그가 가사를 창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연 속에서 싹튼 시조문학 그는 문학적 자질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조예도 남달랐다. 고산은 젊었을 때 음악에 취미가 있어 거문고와 같은 악기를 좋아하였다. 심지어 여행을 갈 때도 늘 거문고를가지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시조를 짓는 데에도 흥미를 가졌을 것임은 당연하다.
보이는 것은 청산이요 들리는 것은 거문고 소리인데, 이 세상 무슨 일이 내 마음에 들리겠는가. 가슴에 가득 찬 호기를 알아줄 사람도 없이 한 곡조 미친 노래를 혼자서 읊네. - 「낙서재우음」
자연과 거문고 소리와 노래를 부르는 자신이 하나가 된 경지를 이 시에서는 그리고 있다. 거문고에 정이 깊었던 마음을 노래한 시조로 「증반금」, 「고금영」 등이 있으며, 한시로는 위의 작품외에도 꽤 있다. 그가 아끼고 사랑하던 거문고는 지금도 해남의 고산 유물전시관에 남아 있다.
소리는 혹 있은들 마음이 이러하랴 마음은 혹 있은들 소리를 뉘 하나니 마음이 소리예 나니 그를 됴하 하노라
버렸던 가얏고를 줄 연져 놀아보니 청아한 옛 소리 반가이 나는고야 이 곡조 알 리 업스니 집겨 노하 두어라
첫번째 시조는 '반금에게 준다'는 제목의 시조「증반금」으로 고산의 나이 59세에 지어진 것이다. 고산은 54세에 금쇄동을 발견하고 그곳에 머무르면서 많은 음악 친구를 사귀었는데, 반금은 그들 가운데 하나다. 반금은 권해의 호로 거문고 타기를 잘하여 그렇게 불렀다 한다. 두번째 시조는 고산이 두번째 유배에서 풀려나 금쇄동에 은거하고 있을 때 지어진 것으로, 그 동안 내버려두었던 가야금을 다시 타면서 느낀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청아한 옛 가야금 소리는 반갑지만 곡조를 아는 이가 없으니 다시 놓아 둔다고 하였다. 결국 이 시조를 통하여 고산은 자기를 알아줄 이가 없으므로 산중에 은거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밝힌 것이다. 고산은 음악이 음탕하고 환락을 불러일으킨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부정하고, 오히려 마음을 다스려서 맑게 해주며 중화의 기운을 기르고 욕심을 없애준다고 믿었다. 음악에 대해 적극적 긍정론인 셈이다. 퇴계 이황도 일찍이 "한시는 읊을 수 있지만 노래할 수 없어서, 만일 노래하고자 한다면 우리말로 지을 수밖에 없다"며, 「도산십이곡」을 창작한 바 있다. 고산의 시조창작은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의 소산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산은 부용동의 세연정에서 틈만 나면 무동과 무희를 시켜 춤과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한다. 고산의 후손 윤위가 지은 『보길도지』에 나오는 글귀 일부를 옮겨보자.
세연정에 이르면 자제들이 시립하고 여러 희녀들이 열지어 모신다. 연못 가운데는 작은 배를 띄워 남자 아이들로 하여금 채색 옷을 입게 하고, 배를 움빅여 빙빙 돌면서 공이 지은 어부수조 등의 가사를 느린 풍류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도록 하고, 정자 위에서는 관현을 연주하게 한다. 여러 사람에게는 동대와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며, 혹은 긴 옷소매 차림으로 옥소암에서 춤추게 하면, 바위 그림자는 연못 물 위에 비치고 너울너울 추는 춤은 풍류 가락에 어울린다. (...) 이러한 일은 질병의 걱정 근심이 없는 한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이르기를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거나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고산이 67세에 보길도 부용동에 가서 무민당을 지은 뒤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세연정에서 그는 아이들을 시켜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부르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어부사시사」도 바로 이러한 부용동 생활 속에서 가창을 전제로 이루어진 노래임에 틀림없다. 고산이 당시 부용동에서 누렸던 삶은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 이것을 지나친 향락 생활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을 통해 성정을 기르려 했다"는 사실은 고산뿐만 아니라 이현보나 이황 등에게 발견되는 사례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 시조가 불리는 연행 공간의 특성을 사실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그는 막대한 해남 윤씨 가문의 재력을 바탕으로 보길도의 부용동과 해남의 금쇄동에 정자와 정원을 꾸미며 은거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넉넉한 생활 속에서 자연미를 완상하며 그의 예술적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의 대표적인 시조 작품들은 바로 부용동과 보길도의 원림 속에서 창작된 것이다.
현재 전하는 고산의 시조는 모두 75수이다. 1차 유배 때 함경도 경원에서 지은 「견회요」 5수, 「우후요」 1수를 비롯하여, 그가 66세에 효종의 부름을 받고 벼슬길에 나섰다가 반대파의 시비로 양주 고산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지은 「몽천요」 3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조는 고산이 보길도와 해남 금쇄동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이다. 고산의 「연보」에 의하면 고산은 56세 때 금쇄동에서 「산중신곡」 18장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친필로 남긴 가첩 『산중신곡』에는 19수가 있으며, 해남의 고산 유물전시관에 전하는 책자 『금쇄동기』에도 19수가 있다는 점에서 「산중신곡」에 수록된 시조는 19수가 정확하다. 19수의 작품이란 「만흥」 6수, 「조무요」 1수, 「하우요」 2수, 「일모요」,「야심요」,「기세탄」 각1수, 「오우가」 6수, 「고금영」 1수 등을 말한다. 이들은 고산이 수정동, 금쇄동 등을 오가면서 지은 것인데, 그가 56세에 1차적으로 정리하여 「산중신곡」으로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59세 이후에 다시 금쇄동 생활에서 지은 작품들이 「증반금」, 「추야조」, 「춘효음」으로, 고산은 이들 3곡을 「산중속신곡」이라 불렀다. 고산이 역시 친필로 남긴 가첩 『금쇄동집고』에는 이들 세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한편 가첩 『금쇄동기』에는 「산중신곡」 19수, 「초연곡」 2수, 「파연곡」 2수, 「어부사시사」 40수, 「몽천요」 3수의 국문 시가가 들어 있으니, 여기에 나오는 「초연곡」과 「파연곡」은 그의 나이 59세 무렵에 지어진 것이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다 고산 시가문학의 특징으로, 우선 그가 시조를 본격적으로 문학 차원에서 창작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작품에 반드시 제목을 붙였으며, 그 작품들을 직접 써서 책자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이는 그가 시조 창작에 대한 의식이 뚜렷했음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그는 당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활용하였다. 고산은 일상적인 언어를 감칠맛나게 노래 속에 조합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그의 작품들은 익숙한 우리말이 많아 쉽게 대할 수 있으며 노래로 부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바람 분다 지게 닫아라 밤 들거다 불 앗아라 벼개예 히즈려 슬카지 쉬여 보쟈 아희야 새야 오거든 내 잠와 깨와스라
이 작품은 「야심요」인데 여기서는 당시의 옛말들이 활용되고 있다. 문을 뜻하는 '지게'가 그렇고, 불을 끄라는 말이 '불 앗아라'로, '베개에 의지하여'라는 말이 '벼개에 히즈려'로 사용되고 있다. 순수한 우리말을 구사하는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더욱이 화자가 청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화법적인 표현 방식도 신선하다. 그리하여 이 작품을 대하면 속세에서 벗어나 번뇌하지 말고 자연과 더불어 살자는 작자의 말에 공감을 하게 된다. 그의 작품을 보면 자연에 대한 통찰력과 심미안이 잘 반영되어 있다. 실생활에 밀착된 감흥이 드러나는가 하면, 어떠한 관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자연을 활용하기도 한다. 또는 그 자연이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되어 윤리적인 이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비오는데 들에 가랴 사립 닫고 쇼 머겨라 마히 매양이랴 잠기연장 다스려라 쉬다가 개는 날 보아 사래 긴 밭 갈아라.
「하우요」 2수 가운데 하나인데, 여름철 장마를 만나 한가롱누 정경이 잘 드러난다. '마', 곧 장마 때문에 농부가 사립문을 닫고 소를 돌보며 농기구를 간수하는 여유가 잘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연이 실생활 자체의 현장성을 드러내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자연은 고산의 생각을 표상하는 대상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것은 당쟁의 현실을 우의적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의 많은 작품들이 당대의 정치현실을 빗대어 나타내고 있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특히 「조무요」, 「하우요」, 「추야조」등에서는 그러한 면이 쉽게 찾아진다.
창승이 쓷뎌시니 파리채는 놓았으되 낙엽이 늣거오니 미인은 늙을 게고 대숲에 달빛이 맑으니 그를 보고 노노라.
「추야조」에서는 가을밤을 제재로 삼아 당대의 정치현실을 우의적으로 노래한다. 창승, 곧 쉬파리는 간신배를, 미인은 인조 임금을 가리킨다. 간신배가 물러갔으나 임금은 늙을 것이니 한스러운데, 대숲에 달빛이 맑으니 그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다고 하였다. 종장에 나오는 '대'와 '달빛'은 「오우가」에도 나오는 것으로 이들은 곧고(직) 밝은(청) 가치를 상징한다. 혼탁한 정치현실과 깨끗한 자연을 교묘히 대비하면서, 작자는 자연 속의 삶을 지향하고 있다. 자연이 유교적 가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오우가」를 들 수 있다. 이 노래는 자연을 유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각각의 자연 속에서 인간세계의 윤리를 찾고 있다. 그런데 고산이 추구하는 자연은 직접적인 대립상이나 생활현장의 생동하는 모습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생활의 어려움이나 시련을 겪지 않고 풍족한 삶을 영위한 데서 기인한다. 「어부사시사」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어부가 아니라 강호 자연을 즐기는 사대부로서 '가어옹'의 입장에서 지어졌기 때문에, 자연과의 갈등이나 투쟁 혹은 생계유지의 수단으로서 고기잡이 등은 그려지지 않았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연을 서경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미는 존재하나, 그 곳에 사는 생동하는 생활인은 없는 셈이다. 이처럼 현실적 삶이 결여되어 있는 모습은 다음의 시조 「기세탄」에서도 확인된다.
환자 타 산다 하고 그를사 그르다 하니 이제의 높은 줄을 이렁구러 알관디고 어즈버 사람이야 오 ㅣ랴 해 운의 탓이로다.
환자는 고을의 사창에서 백성에게 꾸어주었던 곡식을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는 일을 말한다. 그러한 환자는 오히려 백성들에게 과중한 이자가 매겨져 고충을 가증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고산은 그 환자의 폐해를 한 해의 운, 곧 시운으로 돌리고 있다. 현실을 그릇되게 보는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3. 고산 시조문학의 감상
다음의 작품들은 「산중신곡」 속에 실려 있는 「만흥」 6수와 「오우가」 6수, 그리고 『고산유고』에 전하는 「어부사시사」 40수 가운데 봄노래 10수이다. 「만흥」과 「오우가」는 「산중신곡」 전체 19수 가운데 가장 많은 편수를 차지하는데, 고산이 53세에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수정동과 금쇄동을 왕래하면서 지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또 「어부사시사」는 비교적 후반기인 65세에 보길도의 부용동 생활 속에서 지어진 것이다.
만흥 전6수
산수간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향암의 뜻에는 내 분인가 하노라
보리밥 풋나물을 알마초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슬카지 노니노라 그 남은 녀나믄 일이야 부롤 줄이 이시랴
잔 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옴이 이리하랴 말씀도 우숨도 아녀도 몯내 됴하 하노라
누고셔 삼공도곤 낫다 하더니 만승이 이만하랴 이제로 혜어든 소부 허유 냑돗더라 아마도 임천한흥을 비길 곳이 업세라
내 성이 게으르더니 하늘이 아르실샤 인간만사를 한 일도 아니 맛뎌 다만당 다툴 이 업슨 강산을 직히라 하시도다
강산이 됴타 한들 내 분으로 누 얻느냐 님군 은혜를 이제 더욱 아노이다 아므리 갑고쟈 하여도 하올 일이 업세라
오우가 전6수
내 벗이 며치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밧긔 또 더하야 무엇하리
구름빛이 조타 하나 검기를 자로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좋고도 그칠 뉘 업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스 일로 픠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야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손 바회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닙 디거늘 솔아 너는 엇지 눈서리를 모르는다 구천의 뿌리 곧은 줄을 글로 하야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븨엿는다 저렇고 사시예 프르니 그를 됴하 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어부사시사 : 춘사
앞개에 안개 걷고 뒷뫼에 해 비친다 배 떠라 배 떠라 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어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날이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닫 드러라 닫 드러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고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낚대는 쥐여 있다 탁주병 실었느냐
동풍이 건듯 부니 물결이 고이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를 바라보며 서호로 가쟈스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앞뫼가 지나가고 뒷뫼가 나아온다
우는 것이 뻐꾸긴가 푸른 숲이 버들숲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 두어 집이 냇 속에 나락들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말가한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나다
고운 볕이 쬐었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 이어라 이어라 그물을 주어 두랴 낚시를 놓을일까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탁영가의 흥이 나니 고기도 잊을로다
석양이 빗겼시니 그만하야 돌아가자 돋 디여라 돋 디여라 안류정화는 굽이굽이 새롭고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공을 불리소냐 만사를 생각하랴
방초를 밟아보며 난지도 뜯어보자 배 세여라 배 세여라 일엽편주에 실은 것이 무스것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갈 제는 내뿐이오 올 제는 달이로다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나리려다 배 매여라 배 매여라 낙홍이 흘러오니 도원이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세홍진이 얼마나 가렸나니
낚시줄 걷어 놓고 봉창의 달을 보자 닫 디여라 닫 디여라 하마 밤들거냐 자규 소래 맑게 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남은 흥이 무궁하니 갈 길을 잊었도다
내일이 또 없으랴 봄밤이 몇 번 새리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대로 막대 삼고 시비를 찾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부 생애는 이렁구리 지낼로다
작품 해설 「산중신곡」속의 「만흥」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고산이 두번째 유배에서 풀려나와 해남에서 가까운 수정동에 들어가 살면서 지은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벼슬을 하지 않고 자연 속에 사는 것이 분수에 맞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울분과 고독을 드러낸다. 그리고 임금을 위해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첫번째 수에서는 자연 속에서 띠집을 짓고 사는 생활을 남들이 비웃지만 이것이 곧 나의 분수에 맞는 생활이라고 겸손해한다. 두번째 수에서는 거친 밥을 먹은 뒤 물가의 바위에 앉아 실컷 노는 일은 그저 부러울 것이 없는 최고의 삶이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세번째 수에서는 술잔을 들고 먼 산을 바라보며 그리던 임이 온다는 소식에 좋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임은 임금일 수도 있으니 비록 작가가 자연 속에 묻혀 살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임금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현실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네번째 수에서는 삼공의 호사스런 지위를 누리는 벼슬살이가 자연에서의 삶보다 못하다면서, 자신을 소부 허유로 비유한 뒤 자연과의 흥취는 비길 데 없는 즐거움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다섯번째 수에서는 자신이 벼슬을 하지 않는 이유를 게으른 탓으로 돌린 뒤, 이 때문에 하늘이 자기에게 자연을 지키며 살아가라고 말했다 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굳이 자연 속에 사는 자신의 모습을 미화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여섯째 수에서는 이러한 자연 속에서 사는 만족한 삶을 임금의 은혜로 돌리고 있다. 강산을 지키는 삶은 내 분수로는 얻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오직 임금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감군은'을 작품의 말미에 외치는 사대부의 시가 전통을 잇고 있다.
「산중신곡」에 들어 있는 「오우가」는 모두 6수로서, 첫번째 수에서는 물(수), 돌(석), 솔(송), 대(죽), 달(월)의 다섯 벗을 총괄적으로 거론하고, 나머지 다섯 수에서는 이들 벗에 대하여 하나씩 노래하였다. 두번째 수에서는 구름빛과 바람 소리는 각각 검은 빛을 띠고 그치기도 하지만, 물은 이들 두 자연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깨끗하면서도 끊임없이 흐르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세번째 수에서는 꽃은 쉽게 지며 풀은 푸른 듯하면서도 누렇게 되지만, 바위는 끝내 변하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네번째 수에서는 꽃은 추우면 떨어지지만 소나무는 눈서리를 이기며 푸르고 곧은 자태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다섯번째 수에서는 대나무가 비록 나무도 풀도 아니지만 곧고(직) 사시에 늘 푸르니 좋아한다고 노래한다. 마지막 여섯번째 수에서는 달은 작으면서도 어두운 밤중에 만물을 비추는데, 세상 일을 보면서도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모습이 좋다고 말한다. 여기서 작가는 다섯가지 자연물을 각각 거론하면서 반대 속성의 자연물을 대비하고 있다. 즉 물은 구름빛과 바람소리에, 돌은 꽃과 돌에, 소나무는 꽃에, 대나무는 나무와 풀에 각각 대비된다. 그러나 달은 대비되는 자연물을 거론하지 않은 채 작지만 높이 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다섯 번은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자연물로서, 각각 부단함과 청결성, 불변성, 불굴성, 불욕과 강직성, 침묵성 등의 규범을 가리킨다. 이들 다섯 가지 자연물과 대비되는 구름빛, 바람소리, 꽃, 풀, 잎, 나무 등은 물론 위의 규범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고산은 규범적 가치를 지닌 다섯 벗을 택하면서 찬양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의 순수성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그 윤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사람의 도리를 수단으로 삼아 자연물을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처럼 자연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자신에게 좌절을 안겨준 현실정치의 무상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부사시사」는 고산이 65세(1651) 때 보길도에 들어가 지은 것이다. 어부의 흥취를 흉내내면서 부르는 「어부가」는 고려 후기부터 있었는데, 조선 초에 이현보가 이를 개작하여 각각 장가와 단가로 만든 적이 있었다. 고산 역시 이 「어부가」 계열의 노래를 「어부사시사」로 재창작한 것이다. 고산의 이 노래는 「어부가」 계열 가운데 가장 시적 구조가 치밀하게 짜여져 있고 문학적 표현이 우수하여 「어부가」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이 「어부사시사」는 시조와 근접한 단가이면서 협의의 시조는 아닌 '독자적인 갈래의 노래'라 할 것이다. 이 「어부가 」 계열의 노래는 조선 후기에도 이형상의 「창부사」, 이한진의 「속어부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는 본래의 모습에서 크게 쇠퇴한 것이고, 나중에는 잡가의 「어부가」 또는 「배따라기」로 유행하였다. 전체 작품은 춘하추동 네 계절에 각각 10수씩 총 40수로 구성되어 있고, 또 각 작품의 장마다 여음이 삽입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여음은 고기잡이를 나섰다가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이 차례대로 보여지고 있다. 곧 배를 띄우는 데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배를 육지로 닿게 하는 데까지의 과정으로 짜여져 있다. 실제로 위의 자료 10수를 놓고 차례로 읽어보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여음구의 하나인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는, 노를 젓고 닻을 감을 때 나는 소리 '지국총'에, 힘을 함께 내어 부르는 '어기여차'를 입소리(구음)로 형용한 '어사와'가 합쳐진 것이다. 이러한 여음구의 반복으로 음악적인 효과는 물론 노래를 부르는 흥취를 배가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강호에 노닐며 흥취를 자랑하는 사대부 시조의 가장 세련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정치에서 실패를 경험한 고산이, 대신 찾은 강호자연 속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면서 자연과 하나되는 세련된 경지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이 노래 속의 자연은 실생활 속에서의 자연이라기보다는 관찰자로서 바라본 자연이다. 이 노래는 유흥 공간을 염두에 두고 창작되었기 때문에, 실제 어부가 부른 뱃노래가 아닌 가어옹으로서 뱃노래라는 성격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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