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3부 자연과 인간, 우리의 노래
가사문학의 일인자, 정철
1. 창평에서 무르익은 송강문학 정철(1536~1593)은 박인로, 윤선도와 함께 한국 고전문학사에서 3대 시인이자 가사문학의 제일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쟁의 소용돌이가 가장 극심했던 16, 17세기를 살면서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하는 파란만장한 일생 속에서도 찬란한 문학의 꽃을 피웠다. 그의 문학은 조선 중엽 전라도 창평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어진 스승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문학적 공간의 중심은 자연히 전라도 창평이 될 터이다.
용이 나무에 올라가는 꿈 정철의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계함이며, 호는 송강, 임정, 칩암거사 등인데 주로 송강으로 불린다. 그는 서울의 장의동(지금의 삼청동)에서 정유침의 4남 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으나 맏딸이 인종의 귀인이 되면서 음보로 돈녕부 판관이 되었고 조부 위는 건원릉참봉이 되었다. 송강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그것은 큰누님이 궁실에 들어간데다 막내 누이가 종실인 계림군 유에게 출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덕분에 동궁에 빈번하게 출입하였으며 훗날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과 나이가 같아 서로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송강의 나이 10세(1545) 되던 해, 집안은 을사사화로 풍비박산되고 만다. 이 사화로 인하여 매형인 계림군은 무고를 받아 처형되었고, 송강의 맏형 자는 매를 맞고 경원으로 유배가던 도중에 죽었으며, 부친도 유배되어 관북 정평으로 귀양 갔다가 다음해에 영일로 옮겨졌다. 게다가 둘째 형 소는 과거를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순천으로 은거하고 말았다. 송강은 부친이 풀려나기까지 5년 동안 부친을 따라다니느라 공부를 거의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조부 위의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의 창평 당지산 아래로 가족들과 함께 내려와 살게 되었다. 16세의 송강은 27세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약 10년간 이곳에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으면서 자연 속에서 뛰어난 스승들을 만나 심신을 단련하고 시적 자질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송강은 17세에 그의 스승인 사촌 김윤제의 외손녀인 문화 유씨 강항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송강이 모친과 함께 순천에 은거한 둘째 형의 집으로 가던 도중 날씨가 무더워 환벽당 아래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낮잠을 자던 김윤제는 용 한 마리가 나무에 올라가는 꿈을 꾸고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냇가에 나가보라고 했다 한다. 이때 이끌려온 소년이 바로 송강인데 그의 총명함을 알아본 김윤제는 자기의 문하에 두고 글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유씨와의 혼인도 바로 그가 주선한 것이다. 더욱이 서하당 김성원도 김윤제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터라 둘은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되었다. 서하당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이 되기도 하며 유명한 정자인 서하당과 식영정을 지은 인물이다. 이후 둘은 막역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환벽당은 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식영정과 마주하고 있다. 김윤제는 나주목사로 있던 중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인 충효리로 돌아와 이 정자를 짓고 자연과 벗하면서 후학을 길렀다. 이 환벽당 아래에는 그가 손님들과 낚시를 즐겼던 조대가 있고 그 앞에는 송강이 목욕했다는 용소가 있다. 사철 푸른 소나무들 사이에 자연석으로 된 '조대쌍수비'가 1986년에 세워졌는데, 그 비문에는 성산의 사선(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성산 아래의 지실 마을에서 살게 된 송강은 송순의 문하인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에게 학문을 배우고, 호남의 사종으로 일컬어지는 석천 임억령에게 시를 배웠다. 뿐만 아니라 고암 양자징,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구봉 송익필, 고죽 최경창, 우계 성혼, 율곡 이이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들은 모두 16세기 무렵 사림의 거물로서, 학문과 문학의 뛰어난 인재들이 한 곳에서 교유하며 절차탁마한 예는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26세 때 진사시험에 일등한 송강은 이듬해 27세(1562) 되던 해 3월 문과별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명종은 송강이 합격했음을 알고 옛 정을 생각하여, 곧장 그를 사헌부 지평에 제수하였다. 파란만장한 그의 벼슬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특출난 성격은 출발부터 순탄치 못하였다. 명종의 종형인 경양군이 그의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처남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왕이 개인적으로 송강에게 선처를 부탁하였지만 그는 왕의 요청을 묵살하고 경양군의 부자를 처형하고 말았다. 이 일로 그는 왕의 미움을 사서 승진하지 못하고 낮은 벼슬을 전전하였다. 31세 때는 함경도어사를 지냈고, 32세에는 홍문관 수찬으로 있었는데 이때 옥당에 뽑혀 율곡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를 하기도 하였다. 사가독서란 나라에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대개 6명 내외의 인원을 선발하기 때문에 여기에 뽑힌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다. 33세에 이조좌랑, 34세에 홍문관 교리, 호남어서, 예조정랑 등을 거친 후 35세 4월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이후 3년간 경기도 고양 신원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37세에 벼슬길에 나아간 그는 다시 38세에 어머니 안씨의 상을 당하여 41세 때까지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고양의 신원에서 시묘하였다.
그 동안 비교적 조용한 벼슬살이를 하던 송강은 모친의 상복을 벗은 이후로는 낙향과 출사를 반복하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그것은 마침 동서분당이 시작되고 당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동인과 다투면서 싸움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러나 친구인 율곡이 분당의 조정을 포기하고 낙향하자, 송강도 40세인 1575년(선조 8) 10월에 일단 창평으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43세에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그는 율곡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동인의 우두머리인 이발과 다투면서 동서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사간원 대사간을 제수받았으나 탄핵을 받아 나아가지 못한 그는, 결국 44세에는 사헌부의 상소에 못 이겨 벼슬을 버리고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두번째 낙향을 포함하여 송강이 40세 초반에 창평에 거주한 이 기간은 그에게 정치적으로 실의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술과 풍류를 즐기며 자연을 벗하고 학문을 익히며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 그가 낙향하여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 문학과 풍류를 즐기던 터전인 창평의 식영정과 여러 정자들은 송강의 중요한 문학적 공간이었다.
주옥 같은 작품의 산실 식영정과 송강정 무등산 동북쪽 기슭 10리 남짓한 거리에는 10여 개의 정자가 있으니, 이곳은 호남가단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명사 문인들이 교유하면서 문학작품을 낳았던 곳이다. 송강이 젊은 시절에 머물며 수학하던 환벽당을 필두로 그 아래로는 성산 언덕에 자리한 식영정이 있다. 식영정은 원래 서하당 김성원이 지어서 임억령에게 준 것으로 이곳에서 수 많은 인사들이 강론과 토론을 나누었다. 이 정자를 둘러싼 주변 경치는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식영정 앞으로 흐르는 시내와 펼쳐진 산야의 빼어난 경치로 이름났으니, 송강은「식영정이십영」, 「잡영」 10수 등을 지어 이를 묘사한 바 있다. 지금은 식영정 앞으로 도로가 놓여 차들이 다니고, 들판은 광주호로 인해 침수되어 그 아름답던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다.
용이 이 물을 말려버렸다면 지금 와선 응당 후회하겠지. 연꽃 희고 붉게 활짝 피니 거마가 앞 시내로 몰리는 것을. - 「식영정이십영」 중 부용당
「식영정이십영」 가운데 맨 마지막 시이다. 식영정 아래에는 부용당이 있고 그 아래 연못의 연꽃이 고왔던 모양이다. 「성산별곡」에서도 그 광경을 "홍백화 섞여 피니 만당에 향기로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1972년에 식영정이 새로 단장되면서 함께 연못이 복원되었지만 그 옛날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부근에는 송강의 후손들이 세웠다는 '송강정철가사의 터'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 수많은 차운시들의 편액이 걸린 식영정이 있고, 그 정자 앞에는「성산별곡」이 새겨진 시비가 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창평의 "죽림에 누웠"던 송강은 45세 정월에 왕의 사은을 입어 외직인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관동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가사 「관동별곡」을 남기고 시조「훈민가」16수를 지었다. 크게 선정을 베푼 그는 46세 때 임지에서 서울로 돌아와 병조참판, 대사성을 지냈지만, 왕명으로 지어 올린 노수신에 대한 비답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자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창평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송강은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은 12월에 전라도 관찰사의 특지를 받아 1년간 근무하였고, 이듬해 9월에는 도승지에 올랐으며, 다시 12월에는 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몇 개월 만에 중앙의 관직에 복귀한 송강은 그 뒤 동인의 무리로부터 탄핵을 받았는데, 이는 국왕 선조가 송강을 지나치게 두둔하고 나섰던 탓도 있었다. 이 무렵 송강에게 슬푼 일이 일어났다. 그의 나이 49세 되던 해 자기를 아끼고 변호해주던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 해에 대사헌,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사에 제수되었지만 점차 동인들의 논박이 극심해지면서 급기야 송강의 나이 50세 되던 해 8월에는 양사의 공박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조정에서 물러나 고양에 퇴거해 있다가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송강은 이곳에서 약 4년 동안 자연을 벗삼아 독서와 풍류를 즐기면서 시작에만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송강정을 지었다. 이 정자는 식영정과 거의 20리 정도 떨어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다. 이 정자 옆으로 죽록천이라는 조그만 시내가 흐르는데, 따로 '송강'으로 부르기도 한다. 정철의 호인 송강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송강은 송강정에서 연군의 정을 노래한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조들을 창작하였다. 이곳 창평에서 사는 동안은 정치적으로 실의와 역경에 처했던 시기에 해당하지만, 문학적으로는 그 아픔을 딛고 주옥 같은 작품을 산출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송강정은 1770년(영조 46)에 세월이 흐르면서 소실되어 드 흔적만 남은 것을 정철의 후손들이 언덕에 소나무를 심으면서 다시 지은 것이다. 사람들이 그 동안 죽록정이라고 불렀던 탓에, 지금도 이 정자를 보면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관이, 그 옆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옆에는 1955년에 세운 「사미인곡」 시비가 서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 어쨌든 송강정, 그리고 가까이 있는 식영정 등을 오가며 심신을 위로받고 휴식을 취하면서 불후의 명작을 낳은 송강이기에, 어린 시절 학문과 문학을 익혔던 창평이야말로 그에게는 소중한 문학의 모태라 할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실의하여 낙향한 곳이기도 하지만 울분을 달래며 재기의 의지를 불태웠던 곳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훗날 당쟁의 와중에 수많은 전라도의 인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역사적으로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호남 사람들에게 송강은 한편으로는 몹쓸 사람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랑거리이기도 한 이중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송강에 대한 평가가 이중적으로 된 것은 바로 기축옥사 때문이다. 그의 나이 54세인 1589년(선조 22) 8월, 큰아들 기명(당시 31세)이 죽어 그가 경기도 고양에 머물러 있을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이라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송강은 이 일이 자신의 반대파인 동인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하고, 고양에서 즉시 대궐로 들어가 임금을 아뢴 뒤 반역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일로 왕으로부터 충성심을 인정받아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그 사건의 조사를 담당하게 된 그는 정언호, 이발, 정개청, 최영경 등의 동인을 박해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옥사로 인하여 전라도는 반역향이 되고, 호남인들의 등용은 제한되었다. 그는 이 일을 처리한 공으로 55세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인성부원군이 되었다.
56세 때 왕세자의 책봉 문제가 일어나자, 그는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와 함께 공빈김씨 소생인 광해군을 옹립하기로 하였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졌다. 이산해가 송강을 모해하기 위하여 송강 혼자서만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게 한 것이다. 이 일로 평소에 인빈김씨 소생의 신성군을 마음에 두던 왕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그리고 양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된 송강은 급기야 명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주, 강계 등으로 이배되었다. 그러나 57세인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피난을 하게 되었는데, 개성에서 왕은 송강을 방면하여 불렀다. 이에 그는 평양에서 임금을 배알하고 곁에서 모셨다. 9월에 충청, 전라 제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송강은 "명나라 조정에 왜군이 이미 물러갔다는 거짓보고를 올렸다"는 동인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게 되고, 강화도 송정춘에서 머무르게 된다. 여기서 그는 울분과 빈한으로 병을 얻어 추운 겨울인 12월에 둘째 아들 종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8세, 실로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마감한 것이다. 송강은 이듬해 2월에야 고양의 신원에 장사되었다. 그러나 그 해 6월에는 김우웅의 건의로 송강의 관직이 삭탈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뒤 인조 4년(1626)에 신원되어 관작이 내려지고, 현종 6년(1665) 3월에는 송시열의 주선으로 충북 진천의 지장산에 이장되었다.
송강이 젊은 시절을 보냈고 환로 후 실의할 때마다 찾았던 곳이 창평이다. 그러나 그가 창평에만 줄곧 머물렀던 것은 아니고 경기도 고양의 신원에도 한때 머물렀다. 신원은 그가 죽어서 한동안 묻혔던 곳이자 그의 부모와 아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송강은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면 이곳 신원에가서 머무르곤 하였다. 경기도 고양의 신원은 그 동안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상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으로 되어 있는데, '송강마을'로 불리는 마을의 뒷산에는 송강의 부모와 그의 큰아들 기명의 묘가 있다. 그리고 송강의 부모 묘소 아래에는 송강의 형과 누이도 묻혀 있다. 인종의 귀인이었던 송강의 큰누나와 송강의 셋째 형인 황의 묘가 그것인데, 위쪽에 있는 것이 누나의 묘이다. 이들 두 무덤은 마을의 인가 바로 위쪽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보인다. 현재 정철의 묘소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있다. 송시열이 주선하여 후손 정양이 이장했다고 하는데, 1978년부터 4년여에 걸쳐 묘역이 정비되어 단장되었다. 이때 세워진 사당 송강사에는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 앞에는 「사미인곡」 시비가 서 있다. 송강의 묘소는 사당의 왼쪽 산에 있으니,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일렬로 묘 2기가 있는데 앞쪽은 강릉부사를 지낸 그의 둘째 아들 종명이 묘이고, 그 뒤쪽이 송강의 묘이다. 송강은 적출 소생으로 4남 3녀, 서출 소생으로 1남 1녀를 두었다. 첫째는 기명으로 요절하고, 둘째가 종명으로 강릉부사를 지냈으며, 셋째는 진명으로 진사에 그쳤고 넷째가 홍명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대사헌, 대제학을 지내 형제들 가운데 학문과 벼슬이 가장 높았다. 이 가운데 넷째 홍명의 후손인 송강의 16대 종손이 담양의 지실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2. 연군의 정을 노래한 시가문학
송강이 활동하던 조선 중엽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격화되어 혼란스러웠지만, 문풍이 크게 일어나 한문학에서는 소위 목릉성세를 이룩하였고 시가문학에서도 시조와 가사가 본격적으로 창작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송강이 정치가로서보다는 대문장가로서 우리 국문학사상 단연 최고의 위치에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술벗을 찾아 소를 타고 송강의 문학은 시문집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에 전한다. 『송강집』은 1894년(고종 31)에 간행되었으며, 『송강가사』는 목판본으로 다섯 종류가 전한다. 곧 황주본, 의성본, 관북본, 성주본, 관서본 등이 그것인데,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일부만 전한다. 이 가운데 황주본은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장진주사」외에 단가인 시조 51수가 전하며, 성주본은 상, 하권으로 묶여져 하권에 단가 79수가 전한다. 현재 전하는 송강의 시조는 107수 정도로 그 수량이 만만치 않거니와 질적인 수준도 윤선도의 시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의 시조를 보면 애써 어휘를 다듬어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생활에서 얻은 감흥을 즉흥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생동감과 일상성을 획득하고 있다. 일상적인 소재를 택하면서도 연군의 정을 담고 있음은 그의 정치 역정을 생각할 때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또 이러한 특징은 당시 문인들이 가졌던 사고방식의 소산이기도 하다. 송강의 시조 작품에는 술과 관련된 내용이 많은데, 이는 술을 좋아하는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구가하는 서정적인 묘사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내 마음 버혀내여 저 달을 만들고져 구만리 장천의 번드시 걸려 있어 고은 님 계신 데다 빗최여나 보리라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 가지 것거내여 님 계신 데 보내고져 님이 보신 후제야 노가지다 엇디리
임금을 사모하는 정이 절절히 우러나오는 시들이다. 첫째 작품은 「속미인곡」에 나오는 "차라리 싀여디어 낙월이나 되야이셔 님 계신 창 안에 번드시 비최리라"라는 구와 그 시상이 유사하다. 또한 둘째 작품도 「사미인곡」의 "저 매화 것거내여 님 계신 데 보내오져 님이 너를 보고 엇더타 너기실고"라는 시구와 유사하다. 이로 미루어 이 두 시조는 가사인 「전후미인곡」을 지을 무렵에 같은 심경을 노래하며 창작되었을 것이다.
화작작 범나비 쌍쌍 유청청 꾀꼬리 쌍쌍 날짐승 길짐승 다 쌍쌍 하다마는 엇디 이 내 몸은 혼자 쌍이 업나다
마을 사람들아 올흔 일 하쟈스라 사람이 되여 나셔 올티곳 못하면 마소를 갓 곳갈 씌워 밥 먹이나 다르랴
시조를 지어낸 솜씨가 놀랍다. 첫번째 시조를 보면, '화작작' 과 '유청청'은 '범나비'와 '꾀꼬리'를 대조시키면서도 '쌍쌍'으로 매듭지어 율동미를 드러냈고, '날짐승'과 '길짐승'에서 오는 음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렸다. 시조가 노래로 불린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이 시에서 보여준 형식미아 언어 기교, 그리고 운율미는 뛰어난 데가 있다. 두번째는 널리 알려진 「훈민가」16수 가운데 하나이다. 기존의 「오륜가」 계통의 교화적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어려운 한자를 굳이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그 뜻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이 옳은 일을 하지 못하면 마소처럼 고깔을 씌워 밥 먹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여 짐승과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름을 경계하고 있다.
재너머 성궐롱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은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아희야 네 궐롱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송강의 시조에는 술과 관련된 것이 많다고 하였는데, 위의 작품이 그러하다. 술벗을 찾아 소를 타고 가는 운치도 멋있거니와 금방이라도 둘이서 익은 술로 정담을 나눌 듯하다. 자연 속에서 사는 여유와 풍류가 넉넉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술과 관련된 노래 가운데는 「장진주사」가 가장 주목된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혀(졸라매어) 매여 가나 유소보장에 만인이 울며 가거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 속에 가기곳(가기만)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고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 제야 뉘우친들 엇디리
이 노래를 가사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사설시조로 보는 이들도 있어서, 사설시조의 발생 시기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곧 평시조의 정형에서 벗어나면서도 3장의 형태를 유지하며, 중장이 길어진다는 점에서 사설시조의 형식적 특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성주본 『송강가사』에는 상권에 다른 가사 작품들과 함께 수록되어, 하권에 수록된 단가(시조)들과 구분되어 있다. 최근에는 단가와 장가(가사)의 중간 형태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이 작품이 이태백의「장진주」를 본받고 두보의시에서도 뜻을 취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단지 소재와 시상만 따왔을 뿐 독창적인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권주가라 할 수 있는데,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하고 죽으면 거적에 덮여 묘지에 갈 뿐이니 후회 없이 술이나 먹자고 권유하고 있다. 아마도 송강이 50세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창평에서 실의와 울분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백구를 벗삼아 잠깰 줄 모른다 송강의 가사는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4편이다. 김만중은 특히 뒤의 3편을 '동방의 이소'로 평가하면서, 자연스러움이 저절로 드러나고 상스러움이 없으니 우리의 '참된 문장'(진문장)이라 하였다. 「성산별곡」은 송강이 서하당 김성원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김성원은 송강보다 11년 연상이지만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이 가사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송강이 50세에 양사의 탄핵을 받고 창평에 물러나 있을 때 지었다는 설과, 동서분쟁에 불안을 느끼고 창평에 은거하던 40세 초반에 지었다는 설이 맞선다. 그런데 송강 가사의 경우 「관동별곡」과 같은 전기작은 호탕하고 화려한 데 비하여, 「전후미인곡」과 같은 후기작은 비장한 내용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성산별곡」은 송강의 나이 41세에서 44세 무렵에 지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작품은 특히 송순의 「면앙정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내용뿐만 아니라 그 어구 구사와 표현면에서 유사한 데가 많다. 그러나 모방이 아닌 환골탈태의 창작에 가깝다는 점에서 송강의 독창적 문학성이 발휘되고 있기도 하다. 모두 168구로 이루어진 「성산별곡」은 먼저 서하당, 식영정에 머물며 세상에 나아가지 않는 김성원의 풍류와 기상, 그리고 식영정의 자연경관을 노래한 뒤, 춘하추동으로 변하는 주변의 경치를 읊었으며, 산중에서 술 마시고 거문고나 타는 진선 같은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남풍이 건듯 불어 녹음을 헤쳐내니 절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로셔 오돗던고 (...) 노자암 건너 보며 자미탄 곁에 두고 장송을 차일 삼아 석경에 앉자 하니 인간 유월이 여기는 삼추로다 청강의 떴는 오리 백사에 옮아 앉아 백구를 벗을 삼고 잠깰 줄 모르나니 무심코 한가함이 주인과 어떠한고
이 가사의 본사로서, 성산의 여름 경치를 읊은 것이다. 한가로이 풋잠을 자고 일어나 갈건을 쓰고 물고기를 보며, 붉은 연꽃이 온 산에 향기로운 때 소나무 그늘 삼아 앉아서 시내에서 오리가 백구와 벗하며 노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사는 비록 다른 3편에 비해 독창성이 떨어지고 한문구와 고사가 많이 사용되지만, 작자의 소박한 자연 속에서의 삶과 개성이 잘 묘사되고 있다.「관동별곡」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가 내외금강과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고 그 절경을 노래한 것이 이 가사이다. 한문구의 사용이 줄어들고 대구법, 점층법 등의 수사법이 활용되고 있으며, 운율미가 뛰어나 절창으로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은 관동유람 기행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연군의 정을 간절히 드러내면서도 호탕한 풍류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합쳐서 「전후미인곡」이라고도 하거니와, 송강이 50세에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창평에 한적하게 지낼 무렵 지은 것이다. 『송강집』의 기록에 따르면, 이 두 작품은 '정해년(1587)에서 무자년(1588) 사이'에 씌어진 것이라 하였으니, 그의 나이 52세에서 53세 때 창작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제작 동기가 비록 조정의 탄핵을 받고 물러났지만 왕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만큼은 변함이 없음을 호소하는 데에 있으면서도, 그 연군의 정이 은근하고 정적이라는 점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찾아볼 수 있다. 형식면에서 볼 때, 「사미인곡」은 일인칭 서술로 되어 있으나「속미인곡」은 보기 드물게 두 여인의 대화체 형식을 취하고 있다.「사미인곡」은 임금을 사모하는 정을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연모하는 심정에 비겨서 고백한 작품이다. 126구로 이루어졌는데 서사에서는 창평에 내려온 자신을 광한전에서 하계로 내려온 것으로 비유하였고, 본사에서는 춘하추동 네 계절별로 자신의 원망을 드러내면서 봄에는 매화를, 여름에는 비단옷을, 가을에는 달과 별의 맑은 빛을, 겨울에는 따뜻한 볕기운과 햇빛을 각각 임에게 보내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설흔날 져근덧 생각마라 이 시름 잊자하니 마음에 맺혀 있어 골수에 깨쳐시니 편작이 열이 오다(와도) 이 병을 어찌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식여디어 범나비 되오리다 꽃나무 가지마다 간데 족족 안니다가 향 묻힌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
결사는 이처럼 1년 내내 임을 생각하는 마음에 편작 같은 명의도 이 병을 고칠 수 없으니,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가 되어 임의 옷에 앉아 따라다니고 싶다고 하였다. 전편을 통하여 여인의 독백으로 되어 있고, 여성적인 정조와 어투가 계절적 소재와 맞물려 사용되면서 임에 대한 연모의 정이 절실히 드러나고 있다.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이 노래를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비기고 있다. 또한 굴원의 「사미인」을 모방하여 지었다는 지적이 있으나 한 구절도 인용한 것이 없고 표현기교는 훨씬 뛰어나 그 곡을 능가한다고 평가된다.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의 것을 보충하여 임금에 대한 작자의 심정을 진솔하게 노래한 것이다. 96구의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두 여인의 문답체 형식을 띠는 새로운 구성을 보여준다. 「사미인곡」에 비하여 은근하고 소박한 심정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시어의 구사력이 한결 뛰어난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송강의 문학적 역량이 「사미인곡」을 지을 때보다 훨씬 더 원숙한 경지에 도달했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사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 절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임 계신 곳 오색무지개 둘렀네 송강의 시문집에 실린 한시는 750여 수가 넘으며, 그 가운데 5,7언 절구시가 550수 정도로서 상당히 많은 분량이다. 한문 산문으로는 편지글이 50편이나 되는데 그 밖의 것들은 공적인 글이 대부분이다. 그의 한시 작품을 살펴보면 작품이 많은 탓에 주제의 경향도 다양하나 당연히 연군의 정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 가운데 몇 가지 경향만을 거론하기도 한다.
새해에 비나이다, 새해에 비나이다. 새해에는 우리 조정 더욱 맑아져 동서니 남북이니 붕당을 없애고 한마음 한뜻으로 태평성대 만드세. - 「신년축5수」, 『송강집』 권1
대궐을 떠났으나 마음은 자주 가고 시절을 슬퍼하니 머리는 이미 셌네. 남산은 일천리 길인데 그만두고 돌아가길 꿈에나 기약하네. - 「거국」, 『송강집』 권1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송강이지만 시에서만은 붕당의 폐해가 없어지기를 바란 듯하다. 낙향과 출사를 반복하면서도 마음만은 늘 임금이 계신 조정에 있었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실히 우러나오는 사이다. 가사 작품 속에서도 멀리 창평에 몸은 있지만 연군의 정은 더욱 깊어간다고 노래한적이 있다.
하장은 평생의 벗이니 꿈에도 잊을 수가 없구려. 나는 바야흐로 속세를 헤매오만 그대는 홀로 구름 산에 누웠겠지. - 「요기하당주인」, 『송강집』 속집 권1
송강과 막역한 정을 나누던 서하당 김성원에게 보낸 시이다. 그를 위하여 「성산별곡」을 지었음을 이미 확인하였는데, 벼슬길에서 고통을 받고 있던 송강이라 자연 속에서 독서와 시작으로 풍류를 즐기고 있는 김성원이 한없이 부러웠을 것이다. 자연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드러냈다.
물고기가 노니는 즐거움을 알고자 한나절 돌여울을 구부려 본다. 남들은 나를 한가롭다 부러워하겠지만 오히려 저 물고기의 낙에도 미치지 못한다오. - 「수함관어」, 『송강집』 권1
죽록정을 조그맣게 새로 얽어서 송강이라 물이 맑아 내 갓끈을 씻는다. 세간의 거마를 모두 사절하고 그대와 더불어 강산풍월을 논하리라. - 「중도문사」, 『송강집』 속집 권1
물고기를 보는 즐거움 속에서 자연과의 친화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물고기가 물 속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즐거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한다. 진정한 자연 친화의 경지에 도달하기 어려움을 그는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잠시 낙향하여 송강정을 지은 뒤, 현실 정치를 떠나서 자연 속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일 뿐 그는 곧장 왕의 부름을 받고 벼슬길에 다시 나선다.
소양강 물이 서쪽으로 흘러드는 곳 피리소리 처량한데 누대에 기댄 나그네. 곧 바로 배에 올라 신선을 찾고 싶지만 거기에선 아마도 대궐이 안 보일 걸. - 「소양강수서귀입한」, 『송강집』 속집 권1
초산이라 첩첩산중에 낙향한 지 오랜데 때때로 님 계신 곳 바라보면 오색 무지개 둘렀네. 듣자니 대궐에선 춤판이 시끄러이 벌어졌다 하니 흰 머리 늙은 신하 옷깃에 눈물 젖네. - 「실제」, 『송강집』 속집 권1
첫번째 시에서는 「관동별곡」의 "소양강 나린 물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의 구절에서와 같은 연군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임금에 대한 사모의 정을 물에 띄워보내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두번째 시는 송강이 50세에 대간의 탄핵을 입어 사직한 뒤 창평에 내려가 울분으로 세월을 보낼 때 지어진 듯하다. 송강은 낙향했지만 늘 조정에서 일어난 일에 귀기울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모시지 못하는 임금을 그리워하며 즐거움이 넘치는 그런 자리에 있지 못하는 통한의 심정을 연군의 정으로 승화하고 있다. 이 밖에도 술과 풍류를 읊은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미 그의 시가문학을 통하여 확인한 바이므로 굳이 거론하지 않는다.
3. 「속미인곡」 감상
「속미인곡」은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 가운데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더욱이 고전가사 작품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절창으로서 훗날 연군의 정을 노래한 가사의 원본 노릇을 하고 있다. 가사의 전문을 원문으로 제시하되 가능한 한 읽기 쉽게 현대어로 바꾸었다.
속미인곡
졔 가는 져 각시 본 듯도 한져이고 천상 백옥경을 어찌하야 이별하고 해 다 저문 날에 눌을 보러 가시는고 어와 네여이고 이내 사설 들어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한가마는 어떤지 날 보시고 네로다 여기실새 나도 님을 믿어 딴 뜻이 전혀없네 이래야(아양이며) 교태야 어지러니 하였더니 반기시는 낯빛이 예와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 앉아 헤아리니 내 몸의 지은 죄 뫼같이 쌓였으니 하늘이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허물하랴 설워 풀어내니 조물의 탓이로다 글란 생각마오 맺힌 일이 있습니다 임을 뫼셔이셔 님의 일을 내 알거니 물 같은 얼굴이 편하실 적 몇 날일고 춘한 고열은 어찌하야 지내시며 추일 동천은 뉘라셔 모셨는고 죽조반 조석뫼 예와 같이 셰시는가 기나긴 밤의 잠은 어찌 자시는고 님다히(임쪽의) 소식을 아무려나 알자 하니 오늘도 거의로다 내일이나 사람 올가 내 마음 둘 데 없다 어드로러 가잔 말고 잡거니 밀거니 높은 뫼에 올라가니 구름은 커니와 안개는 무슨 일가 산천이 어둡거니 일월을 어찌 보며 지척을 모르거든 천 리를 바라 보랴 차라리 물가에 가 뱃길이나 보랴 하니 바람이야 물결이야 어둥졍(어수선하게) 되었구나 사공은 어데 가고 빈 배만 걸렸는고 강천에 혼자 서서 지는 해를 굽어보니 님다히(임쪽의) 소식이 더옥 아득한뎌이고 모첨 찬 자리에 밤중만 돌아오니 반벽청등은 눌 위하야 밝았는고 오르며 나리며 헤매며 바장이니 져근덧 역진하야 풋잠을 잠깐 드니 정성이 지극하야 꿈에 임을 보니 옥 같은 얼굴이 반이나마 늙었어라 마음에 먹은 말씀 슬카장 사뢰려니 눈물이 바라나니 말씀인들 어이하며 정을 못다 하야 목이조차 메여 하니 오뎐된 계성에 잠은 어찌 깨었던고 어와 허사로다 이 님이 어데 간고 곁에 일어앉아 창을 열고 바라보니 어엿븐 그림자가 날 쫓을 뿐이로다 차라리 싀여디어 낙월이나 되야이셔 님 계신 창 안에 번드시 비최리라 각시님 달이야 커니와 궃은 비나 되쇼셔 - 이선본 『송강가사』
작품 해설 모두 96구로서 기본 율조는 3, 4조가 우세한 편이다. 가사의 내용 전개는 두 여인의 대화체로 되어 있다. 작품 속의 제1화자(갑녀)는 작품의 내용을 이끌어 가는 설명 역할을 하고, 제2화(을녀)는 길 가는 각시님으로 설정된 주인공이다. 갑녀가 을녀에거 "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구나"라고 말한 뒤 천상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석양에 누구를 보러 가느냐고 물으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을녀가 자신의 신세를 자탄하자, 다시 갑녀는 "그런 생각을 말라"며 생각을 고치게 한다. 그러자 을녀는 임을 모시지 못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홀로 지내는 임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며, 낙월이나 되어 임의 창 안을 환하게 비추고 싶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갑녀는 달보다는 궂은 비나 되라고 권한다. 달보다는 차라리 비가 더 임에게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갑녀와 을녀는 작자의 분신으로서 송강이 자신의 의도한 바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미인곡」과는 임을 그리워하는 측면이 달리 묘사되어 있으며, 한자어와 고사가 덜 사용되고 있는데다가 진솔한 심정이 더욱 간절하여, 작품의 질적인 수준이 월등하다. 「속미인곡」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능란하게 구사하는 솜씨로 인하여 고금의 평자들로부터 단연 제일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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