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14. 맹자.순경열전 孟子.筍卿列傳
맹자는 유가(儒家).묵가(墨家)가 남긴 문헌을 섭렵하고 도덕의 대강을 분명하게 했으며 양(梁) 혜왕(惠王)의 이익 본위의 마음가짐을 꺾어 놓고 지난날의 흥망성쇠를 개진했다. 그래서 제14에 <맹자.순경열전)을 서술했다. < 太史公自序>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맹자의 저서를 읽어 가다가 양(梁:魏)의 혜왕이 '무엇으로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하시렵니까'라고 맹자에게 묻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책읽기를 그치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아, 이익이란 진실로 난을 일으키는 근본이구나'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는 이익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논어(論語):<子罕篇>>의 대목은 언제나 그 근본 원인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 본위로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고 <논어>의 <里仁篇>에서 말하고 있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익을 좋아하는 데서 오는 폐혜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맹가(孟軻)는 추국(鄒國: 山東省 鄒縣) 사람이다. 그는 자사(子思:孔子의 孫子)의 제자에게서 학업을 닦고 학문의 도를 통달한 후에 제(齊)나라에 노닐며 선왕(宣王)을 섬겼다. 그러나 선왕은 맹자의 주장을 응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맹자는 양(梁)으로 갔다. 양 혜왕 역시 맹자의 주장을 실행하기에는 무리라 생각하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무렵에 진(秦)에서는 상앙을 등용해 부국강병책을 썼으며, 초나라와 위(魏)나라에서는 오기(吳起)를 등용해 무력으로 승리를 거두어 적국을 약화시켰으며, 제에서는 위왕(威王).선왕이 손빈(孫빈).전기(田忌) 같은 인물들을 기용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므로 제후들은 동쪽을 향하여 제를 종주국으로 받들고 있었다.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과 연횡의 외교에 힘을 기울이고 침략하고 정벌하는 일만을 능사로 치던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맹가는 이와 반대로 요임금이나 순임금 및 하.은.주 3대 성왕의 덕치(德治)나 역설했으니 어디를 가든 용납될 턱이 없었다. 맹자는 하는 수 없이 정계에서 은퇴해 제자인 만장(萬章)과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시경>이나 <서경>을 정리하고 중니의 사상에 몰두해 7편으로 구성된 <맹자>를 저작했다. 그 뒤에 추자(騶子) 일파가 대두됐다.
제나라에는 추라는 성을 가진 세 명의 학자가 있었다. 최초의 추씨는 추기(騶忌)였다. 거문고를 잘 연주한다 해서 위왕에게 벼슬을 구했는데 그것을 인연으로 성후(成侯)에 봉해져 재상의 인수를 차기에 이르렸다. 맹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두 번째는 추연(騶衍)인데, 맹자보다는 나중 사람이다. 추연은 제후들이 더욱 사치해지고 음란해져 덕을 숭상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보았다. 즉 <시경>의 <대아편(大雅篇)>에 보이는 것처럼 먼저 자신을 수양하지만 일반 서민에게 미치지 못 하는 현실을 본 것이다. 그래서 음양(陰陽)이 소장변화(消長變化)하는 이치를 깊이 관찰해 <괴우(怪迂)의 변(變)> <종시(終始).대성(大聖)>편 등 10만 자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학설은 광대하고 상식을 초월했다. 그는 먼저 반드시 작은 사물을 검토해 어떤 결론을 가지고 이것을 유추(類推) 확대해 무한에까지 도달했다. 시대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도 먼저 현대를 논하고 여기서 거슬러 올라가 태고의 황제(皇帝)에까지 논급하는 바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방법론이지만 거기에다 세상의 흥망성쇠를 덧붙여 논하는 점이 다른 학자들과 그는 또 다른 점이었다. 이와 관련해 각 시대 길흉의 징조와 법령제도를 기술하고 다시 이것을 유추 확대해서 천지가 아직 생기기 이전의, 유원(悠遠) 혼돈해서 그 근원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까지 논급했다. 지리적 고찰에 있어서도 먼저 중국의 명산.대천.계곡이나 금수(禽獸), 기타 땅과 물 위에서 번식하는 것들, 진기한 물질들까지 열거했으며 여기서도 유추해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해외의 사물들에까지 논급했다. 그리고 땅과 하늘이 갈라져서 세상이 만들어진 뒤로 목.화.토.금.수의 5행(五行)이 움직임에 따라서 거기에 적합한 치세가 각각 성립되며 시간과 공간의 구조 역시 이에 부합되고 대응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또 유자(儒者)들이 흔히 말하는 중국이란 땅은 지상의 전체가 아니라 세계의 81분의 1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중국을 적현신주(赤縣神州)라 명명했는데 적현신주 안에는 스스로 구주(九州)가 있었다. 우왕이 정리한 9주[翼州.형州.靑州.徐州.揚州.荊州.豫州.雍州.梁州]가 바로 그것인데 그 9주가 원래 세상 주(州)의 숫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 밖에서도 적현신주와 같은 것이 아홉 개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9주다. 비해(裨海)라는 작은 바다가 있어 9주의 하나하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나 새나 짐승도 서로 교통할 수 없는 독립된 구역을 이루고 있는 것이 하나의 주다. 이런 대주(大州)가 아홉 개 있어 대해(大海)가 그 밖을 에워싸고 있다. 이것이 천지의 한계다."
추연의 학설은 모두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그 귀착되는 바를 요약하면 반드시 인의(仁義)와 절검(節儉)을 강조했으며 군신.상하.육친(六親: 父母.兄弟.妻子) 사이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도리로 끝난다. 시작이 너무 크고 황당해 허망한 느낌이 없지 않다. 왕후(王侯)나 귀인들이 그의 학설을 대하고 처음에는 충격을 받아 감화되는 듯했으나 현실적으로 실제에 응용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어서 모두 아쉬워했다. 추연은 특히 제나라에서 존중되었다. 그가 양으로 가자 혜왕은 교외로까지 출영나와 주객이 대등한 예를 갖추었다. 조나라로 갔을 때는 평원군이 경건한 태도로 그의 곁에 서서 보좌했고 그의 좌석 먼지를 자신의 옷자락으로 털어 줄 정도로 정중했다. 연으로 갔을 때는 소왕이직접 비를 들고 길을 쓸어 그의 길잡이가 되고 제자들의 좌석에 끼여 가르침 받기를 청할 정돌였다. 뿐만 아니라 소왕은 갈석(碣石)에 궁을 지어 몸소 그리로 가서 추연에게 배웠다. 추연은 여기서<주운편(主運篇)>을 저술했다. 그가 제후들 사이에서 존중받은 것은 이 정도였다. 공자가 진(陳).채(蔡)에서 잘 못해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맹가가 제.양에서 곤욕을 겪은 것과는 판이한 대접이다. 주의 무왕은 인의를 내세워 포악한 은의 주왕을 정벌하고 왕위에 올랐는데도 백이는 굶어 죽으면서도 주의 곡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위(衛)의 영공(靈公)이 진(陳)을 치는 법에 대해 질문을 했지만 공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논어><衛靈公篇>]. 양의 혜왕이 조를 공략할 작전계획을 짤 때 맹가는 지난날 주의 태왕(太王: 古公亶父)이 빈에서 떠난 일([蠻族의 침략을 받자 太王은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땅을 양보하고 빈(빈: 陝西省 乾縣의 북쪽)으로 떠나자 백성들은 어진 지도자를 놓칠 수 없다면서 빈까지 따라옴]을 찬양했다[<맹자><梁惠王篇>]. 이러한 행위는 세속의 풍조에 영합한다거나 그저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는 뜻은 없었을 것이다. 네모난 각목을 둥근 구멍으로 들이밀려 해도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말했다.
"현인이라는 이윤(伊尹)도 처음에는 솥[鼎]을 지는 요리인이 되어 은의 탕왕에게 접근해 그를 격려하여 왕업을 성취시켰으며, 저 백리해도 수레 밑에서 소를 치다가 목공(목公)에게 등용되어 그가 패자가 되게 했다. 이 두 사람은 처음 접근하는 수단으로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다가 나중에는 주인들을 위대한 길로 인도했다. 그러하니 추연도 또한 그의 언설이 상궤(常軌)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소를 친 백리해, 솥을 진 이윤과 같은 의도를 품고 있지나 않았을까."
추연을 비롯한 제나라 직하 선생(稷下先生: 齊의 위왕.선왕시대에는 제의 수도 임치의 성문인 직문(稷門) 부근에 많은 학자들이 모여 살았다)들 가운데 순우곤(淳于곤). 신도(愼到). 환연(環淵). 접자(接子). 전변. 추석(騶奭)과 같은 인물들이 각기 책을 지어서[<신자> 10권은 法家, <접자> 2편과 <田子> 25편은 道家, <추석> 12편은 陰陽家이다] 국가통치의 문제를 논해 당시의 군주에게 등용되기를 원했다. 이들의 일생을 어떻게 이루 다 말할 수 있을까.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박문(博聞)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학문상의 특별한 주장은 없다. 군주에게 충고하고 설득하는 면에서는 안영(晏영)의 사람됨을 사모하고 본받았다. 그러면서도 군주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얼굴빛을 살피기에 힘썼다. 어떤 사람이 순우곤을 양의 혜왕에게 소개해서 면회시킨 적이 있었다. 혜왕로서는 좌우 측근을 물리친 상태에서 혼자서만 두번이나 순우곤을 만나 본 셈이었다. 그러나 순우곤은 끝내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혜왕은 뒤에 순우곤을 소개한 사람을 불러 꾸짖었다. "어찌된 일이오? 그대는 순우 선생을 칭찬하면서 관중이나 안영도 따르지 못할 인물이라 하지 않았소." "어디 순우가 말에 실수라도 하였습니까?" "실수고 말고 할 여지도 없소. 그 자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소개자는 괴이쩍게 여기며 왕의 말을 순우곤에게 했더니 순우곤은 화를 내었다. "당연하지 않소. 내가 왕을 처음 만났을 때는 왕은 경마에 정신이 팔려 있었소.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왕은 음악에 정신이 쏠려 있었소. 그러한데 내가 언제 무슨 말을 할 겨를이 있었겠소." 소개자는 그 말을 다시 왕에게 자세히 전했다. 왕은 가만히 듣다 말고 깜짝 놀랐다. "아, 그건 과인의 실수였소." "무슨 뜻이온지요?" "순우 선생이 처음으로 왔을 때 마침 어떤 사람이 훌륭한 말을 내게 바치고 있었는데, 아직 그 명마를 시승(試承)해 보기도 전에 선생께서 오셨던 거요." "그랬었군요. 음악 때문이었다는 건 또 무엇입니까?" "선생이 다음에 왔을 때는 하필 어떤 사람이 내게 명창(名唱) 한 사람을 바쳤는데 미처 내가 명창의 노래를 들어 보기도 전에 선생이 오셨던 거요. 내 정신이 그런 것들에 쏠려 있었던 건 사실이오. 사과하겠으니 한 번 더 그를 불러 줄 수 없겠소." 그 후 혜왕은 다시 순우곤을 만났는데 일단 순우곤이 입을 열자 밤낮 사흘 동안 말해도 지치지를 않았고 혜왕 역시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고 감동해서 경청했다. 다 듣고 난 혜왕은 순우곤에게 대신이나 재상의 지위를 주어 그를 우대하려 하였다. "아닙니다. 벼슬을 얻고자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한사코 사양하고는 물러갔다. 할 수 없이 혜왕은 그를 안락한 사두마차에 태우고 비단 다섯 필에 벽옥(璧玉)과 황금 1백 일(鎰: 약 4백 킬로그램)을 더해 그를 극진히 환송했다. 순우곤은 생애가 다하도록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신도는 조나라 사람이며 전변과 접자는 제나라 사람이고 환연은 초나라 사람이다. 모두가 황제(皇帝).노자의 학문을 닦고 각각 자기 견해에 따라 도가사상(道家思想)을 체계화했다. 이렇게 해서 신도는 12편의 논문을 쓰고 환연은 상.하편의 저서를 남기고 전변이나 접자도 모두 논저가 있었다. 추석은 제나라 추자 일파의 사람으로 그 또한 추연의 학문을 많이 받아들여 논문을 썼다. 이래서 제왕(齊王)은 그들의 학문적인 활동에 흡족하여 순우곤 이하 모든 학자들에게 열대부(列大夫)라는 칭호를 주었다. "과인은 천하의 현사(賢士)들이라면 모조리 초치(招致)해서 존중했다." 제왕은 그 점을 긍지로 삼아 사통팔달의 일급 도로변에 커다란 집을 지어 주며 우대하며 그것을 과시했다.
순경(筍卿)은 조나라 사람이다. 나이 50이 되어 처음으로제나라에 유학한 그는 말했다. "추연의 학설은 현실과 거리가 멀면서도 그 우원소대(迂遠疎大)한 장광설은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추석의 학설 역시 현실에는 적용키 어려우나 그 문장만은 절묘하게 구비되어 있다. 순우곤은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지내도 그의 입에서는 좋은 말만 쏟아져 나온다." 그뿐 아니라 순경은 다시 그 세 사람을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유원(悠遠)한 천(天)을 말하는 광대한 기우(氣宇)의 추연이여, 용을 아로새긴 것처럼 아름다운 문장의 추석이여, 수레바퀴의 기름통이 끓을 때 끝없이 흐르는 기름처럼 유창하게 흘러나오는 지혜의 순우곤이여." 그들이 모두 죽은 뒤에는 순경이 가장 장로격의 학자였다. 제나라에서는 열대부의 결원을 보충하다 보니 순경이 세 차례나 제주(祭酒: 官名, 列大夫의 長)가 되었다. 제의 어떤 사람이 순경을 참소하자 순경은 초나라를 떠났다.
초의 춘신군이 순경을 난릉(蘭陵: 山東城 역縣 동쪽)의 현릉으로 임명했으나 춘신군이 죽자 그도 면직되었다. 그러나 그런 인연으로 순경은 그대로 난릉에 눌러 살았다. 훗날 진의 재상이 된 이사(李斯)가 그 때 순경의 제자로 있었다. 순경의 시대에는 정정(政情)이 혼탁 부태했고 멸망하는 국가와 난폭한 군주가 계속 나타나 성인들이 가르친 기본적인 도리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세상은 무(巫: 女巫)나 축(祝: 男巫)에게 미혹돼 길흉화복의 전조 따위나 믿었으며, 못난 유자(儒者)들은 사소한 일에도 얽매였고, 장주(莊周: 莊子) 같은 이들은 역설적인 방론(放論)을 마구 토해 풍속을 어지럽혔다. 순경은 이것을 미워해 유가.묵가.도가의 실정과 흥괴(興壞)를 추론 정리하는 등 수만 자의 저서를 남기고 사거했고 난릉에 매장되었다.
조나라에서는 공손룡(公孫龍)이란 학자가 나타나 견백동이의 변(辯:堅石은 石이 아니고 白馬는 馬가 아니라는 일종의 형식논리를 전개해 同을 異라 하고 異를 同이라고 하는 詭辯)을 주장했다. 또 극자(劇子: 趙의 學者 劇孟 아니면 劇辛)도 논리를 세웠다. 위(魏)나라에선 이회(李회: 위나라 文侯의 宰相인데 부국강병책을 주장했다. <李子> 32편이 있으며 <지방을 모두 이용하라[土地生産開發論]>이 유명하다)가 있었다. 초나라에는 시자(尸子)와 장로(長盧)의 저서가 있었고, 아(阿: 山東省東阿縣 서쪽)에서는 우자(우子)가 저서를 남겼다. 맹자에서 우자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의 저서가 많지만 일일이 그들의 전기를 논하지는 않겠다.
묵적(墨翟: 墨子)이 문득 생각나는데 그는 송나라 대부이며 방전수성(防戰守城)에 뛰어났다. 경비절약을 덕목으로 주창했으며 공자와 동시대인 아니면 조금 후대인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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