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3부 자연과 인간, 우리의 노래
호남가단의 터잡이, 송순
1. 면암정에서 무르익은 풍류와 자연애
송순(1493~1582)은 하서 김인후, 금호 임형수, 옥계 노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 등의 수많은 문인을 배출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시가는 송강 정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 송강문학을 낳게 하였다. 그가 길러낸 이들 문인은 호남의 대표적 인물들로서 고전문학사에서도 그 비중이 크다. 그런 점에서 송순은 호남 제일의 가단을 형성한 장본인이며 강호가도의 선구자라 할 수 있으니, 분명히 그는 호남시가뿐만 아니라 우리 고전문학사에서 빛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꽃이 진다 슬퍼마라 송순은 자가 수초, 성지요, 호는 기촌, 면앙정으로 1493년에 전남 담양군 기곡면(지금의 봉산면)의 기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관향은 신평으로 원래 면앙정의 제5세인 현덕까지는 충청도 신평, 홍주, 연산 등지에서 살았는데, 제4세인 희경(고조)이 아우 구와 함께 전라도 담양으로 이주하였다. 희경은 조선 태종 2년에 등과하여 20년간 벼슬을 하였으나 그의 아우 구가 조선을 섬기지 않으면서 고향을 등지고 전라도 장성으로 옮겨와 살게 되자, 그도 51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동생이 있는 전라도로 내려와 지금의 담양에 터를 잡은 것이다. 송순의 자질은 어렸을 때부터 뛰어나 3세 때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9세에는「곡조문」이란 시를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다음의 그 시를 보면 송순의 시적 자질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사람이고 너는 새이니 새의 죽음을 사람이 곡하는 것은 맞지 않으나 네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슬퍼하노라.
유년기에는 숙부 송흠으로부터 인격과 학문을 배웠으며, 21세에 진사가 되어서는 당시 담양부사인 눌재 박상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그 뒤 박상의 아우인 박우의 지도를 받았으며, 26세 때는 능성현감이던 취은 송세림에 나아가 사사했다. 박상은 조광조에게 배워 영남 사림파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한 인물이었으니, 송순은 호남인으로는 드물게 사림파의 학문을 체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상은 성현, 신광한, 황정욱과 함께 서거정 이후 4대가로 칭송될 만큼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하여 송순은 스승의 학문 외에도 뛰어난 문학을 아울러 익힐 수가 있었다. 박상은 송순에게 "남을 다스릴 때는 경으로써 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직으로써 하라"고 굳게 가르침으로써, 훗날 그가 벼슬길의 격랑에 나가서도 관용과 대도로 일관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송세림은 「상춘곡」의 작가 정극인과 같은 고향인 태인 사람으로 골계야담집 『어면순』을 펴냈는데, 송순에게는 인간적인 영향을 준 사표가 되었다. 송순은 27세(1519, 중종 14)가 되던 해 10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광조, 김구 등은 그를 보고 김일손 이후 이처럼 뛰어난 문장가는 없었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는 득의의 벼슬길을 시작하면서 사림들이 조정의 간신들에게 해를 입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남곤, 심정 등이 조광조, 김정 등을 귀양 보내자 이를 통분히 여기며 벼슬을 그만두려 했지만 부모를 생각하여 단념하기도 하였다. 그는 28세에 동호에 사가독서할 때 올렸던 한시들 속에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마음을 드러냈는데, 남곤의 일당이던 승지 최세절이, "이 시에는 중상의 뜻이 있다"며 시비를 거는 바람에 하마터면 화를 입을 뻔하였다.
날은 저물고 달은 아직 돋지 않아 뭇 별이 다투어 반짝이는 저 하늘 산천의 기운은 가라앉아 가네. 그 누가 알랴, 이속에서 홀로 아파하는 이 마음을. - 「모사」
송순은 간신 김안로의 전횡을 극간하다가 미움을 사게 되었느데, 1533년(41세)에 김안로가 권세를 잡아 세상이 어지럽자 고향 담양에 면앙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임금인 중종이 김안로 일당에게 사약을 내리면서 5일 뒤에 송순은 홍문관 부응교로 제수 되어 다시 중앙의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후 그는 승정원 우부승지(47세), 경상도 관찰사(48세), 사간원 대사간(49세), 전라도 관찰사(50세), 한성부 우윤(51세)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나이가 많아지자 외임을 자청하여 광주목사로 옮기면서 정성껏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리고 그는 53세 되던 해 12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하였다. 그 사이에 인종이 즉위했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였으나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윤원형 일당이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일찍이 송순은 명종 때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를 죽인 일을 비분강개하여 시를 지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가 공교롭게도 어느 잔치 자리에서 불려졌다.
꽃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퍼 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하리오 - 「상춘가」
시조로 지어졌을 이 노래를 진복창이 같은 자리에서 듣고는, 이는 누군가를 비방하는 노래라고 단정지으며 누가 지었는지를 그 기녀에게 캐물었으나 그녀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송순이 정적으로부터 위험을 벗어나게 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시 출사한 그는 끝내 진복창, 허자 등으로부터 '사특한 언론을 편 자'라는 모함을 받고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을 갔다. 그러다가 며칠 만에 평안도 순천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수원부로 갔다가 1년 6개월 만에 풀려났다. 황윤석은 이 일을 두고 면앙정의 「가장」을 쓰면서, "여러 무리에게 해를 입으면서도 오직 한 번만의 귀양살이로 평생을 지낸 분이 또 어디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인격이 어느 정도 원만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귀양에서 풀려난 송순은 선산도호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영남 사림들과 친교를 맺었다. 선산은 길재가 이곳에서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를 가르쳐 영남 사림파의 터전을 닦었던 고장이다. 이 해(1552)에 지은 지 20년이나 되어 비가 새던 면앙정을 당시 담양부사로 있던 오겸의 도움을 받아 고쳐 지었다. 이때 기대승이 기를 짓고 임제가 부를 지었으며, 김인후, 박순, 고경명이 30편의 시를 주고받았다. 송순은 전주부윤(66세), 나주목사(69세) 등을 거쳐 70세에는 기로소에 들었고, 한성부 우윤(76세)에 이어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 겸 춘추관사를 끝으로 77세에야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이 후에도 송순은 선조의 부름을 받았지만 고사하고 14년 동안 면앙정을 오르내리면서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다가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을 때는 흰 기운이 지붕에서 하늘에 닿아 무지개와 같았고, 또 붉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 찼다가 흩어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면앙정에서 꽃피운 호남문학 50여 년 동안 송순은 비록 재상을 역임하지는 못했지만 두루 내외직을 거쳐서 비교적 평탄한 벼슬살이를 했다. 이것은 온화하면서도 강직함을 굽히지 않은 그의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기묘사화 때 죽은 명현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공론을 세우고, 권신 진복창을 소인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간신 김안로와 그 무리의 죄를 당당히 비판할 줄 알았다. 이는 그가 벼슬살이를 위하여 세태에 영합하지만은 않았음을 말해준다. 송순이 평생 관용의 대도를 걸었음은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을 해관과 해용으로 붙인 데서도 잘 드러난다. 두 이름의 끝자를 합치면 곧 '관용'이 되니, 이것은 그의 삶의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조선시대에 걸쳐 가장 사화의 참극이 극심했던 시기에 살면서도 큰 고통을 겪지 않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송강 정철은 송순이 죽자 "조정에 있는 60여 년을 대로로만 따랐다"고 흠모했으며, 퇴계 이황도 그를 일러 '하늘이 낸 완인'이라고 하였다. 송순은 이러한 성품 외에도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즐길 줄 알았으며, 수많은 문인묵객과 교류하였다. 송순을 따른 친구나 후배는 80여 명에 이른다. 그의 「행장」을 보면 "김인후, 임형수, 정철 이하 20여 명의 후배들이 존경하고 따랐으니, 일찍이 성수침은 온 세상의 선비가 공의문하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릭 그와 동년배로서 의리를 지키며 친교를 나누었던 이로는 신광한, 성수침, 이황, 주세붕, 윤두수, 이안눌 등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당대의 대학자요 정치가들이다. 그의 문집에는 이들과 나눈 교유시가 매우 많다.
송순의 삶은 벼슬을 얻어 관직에 나아간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는 고향인 담양, 그것도 그가 지은 면안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거대한 문학을 이루었으니, 면앙정 주위로 모여든 문인들은 이후로 호남문학을 찬란히 꽃 피우게 된다. 이 정자의 터는 원래 곽씨 소유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곽씨의 꿈에 금어옥대를 두른 선비들이 그 터위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 뒤 곽씨가 자식을 가르쳤지만 크게 되지 않고 집안만 가난해지자 나중에 송순에게 팔았는데, 그 꿈은 과연 면앙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수많은 문인, 학자, 관료들이 이곳을 무대로 시를 수작하고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익혔기 때문이다. '면앙정'이란 "허리를 구부리니 땅이요, 우러러보니 하늘이라" 하는 대목에서 따온것으로, 송순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사람에게 굽어도 부끄럽지 않다고 다짐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정자 뒤쪽에서 멀리 들녘을 바라보면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는 산줄기가 이어져 호연지기를 느끼게 한다. 송순이 그의 시우들과 즐겼을 당시 풍류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다만 송순이 살았을 때는 넓은 들을 굽이쳐 흘렀을 그 시내가, 지금은 양쪽에 제방이 쌓여 수량이 적어지는 바람에 "쌍룡이 흐르는 듯 긴 깁을 펼쳤는 듯"이 흐르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면앙정은 이후로 김인후, 임억령, 고경명, 정철, 임제, 양산보, 김성원, 기대승, 박순 등이 찾아와 시를 짓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호남가단의 중심무대가 된다. 실제로 이 정자에는 퇴계 이황, 김인후, 기대승, 임제 등의 글들이 판각되어 걸려 있다.
16세기 무렵의 호남문인들 사이에는 사화를 피하여 경치 좋은 강산을 찾아 정자나 초당을 짓고 문우들과 어울려 선비정신을 다지는 풍조가 있었다. 이들 정자는 시적 교유의 무대로서 시문학 산출의 장소였으니, 오늘날 국문학계에서는 여기서 이루어진 시문학을 따로 '누정문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송순의 문집을 보면 그가 찾았던 누정이 약 70여 군데나 나온다. 특히 양산보의 소쇄원, 김성원의 식영정과 서하당, 김윤제의 환벽당 등은 그가 시심을 고르며 풍류와 자연미를 즐기고 느꼈던 대표적인 곳이다. 이들 누정은 주로 무등산 북쪽 원효계곡에 집중적으로 세워졌으니 이곳은 가히 누정문학의 중심지요 본고장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면앙정은 담양군 읍내를 출발하여 창평, 남면 일대에 퍼져 있는 정자의 첫머리에 놓여 있는데다가, 위에 열거된 여러 정자들은 면앙정이 창건되면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 의의가 크다. 이 면앙정이 창건된 이후 여기서 많은 시가문학이 산출되었고 하나의 가단 역할을 하였으니 가히 호남 시가문학의 원류를 이룩했던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송순의 회방연이 이곳 면앙정에서 열렸다. 회방연은 과거에 급제한 지 60돌의 잔치를 일컸는데, 공의 나이는 이미 81세(혹자는 87세라고도 한다)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국왕도 꽃과 술을 하사하였다. 이 잔치에는 정철, 기대승, 임제를 비롯하여 도 관찰사, 각 고을의 원님 등 1백여 명을 헤아리는 수많은 명사들이 모여 밤이 깊도록 즐겼다. 송순이 침소에 들려고 할 때 정철이 "선생의 남여를 직접 메어 드리자"고 제안하여 정철, 고경명, 임제, 기대승이 일시에 가마를 붙들고 옹위하여 사람들이 찬탄했다고 한다. 송강이 타계한 지 2백 년 뒤에 정조대왕은 전라도에서 과장이 열렸을 때, 시제로 '하여면앙정'이라는 구절을 내려 송순의 회방연 때 그일을 기렸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이 깃든 면앙정은 선조 30년(1597)에 임진왜란으로 불탔다가 1654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어 보수하였다. 면앙정에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1972년에 세운 '도기념물 제6호 기념비'가 서 있다. 한편, 송순은 사후 1704년에 담양의 구산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무덤은 현재 면앙정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며, 담양군 봉산면 상덕리 소재로 되어 있다. 송순을 생각하고 면앙정 누각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면앙정 정자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의 무덤에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좋으리라.
2. 송순의 시가문학과 한문학
송순은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면앙정에 머물면서 시객들과 시유를 즐기고 자연을 완상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생애는 농암 이현보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애일당을 세운 뒤 시가를 지으며 영남가단을 이룩한 일고 유사하다. 이 때문에 이 둘을 호남과 영남의 강호가도를 이룩한 선구자로 각각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송순의 시가는 새로운 강호문학을 개척하였으며, 정철로 이어지는 한국 시가의 맥을 형성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초려 한칸에 청풍명월 채워두고 송순의 문학은 크게 시가문학과 한문학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에 관한 자료는 거의 그의 문집인 『면앙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우리말로 된 송순의 시가는 정철이나 윤선도처럼 문집에는 전하지 않고, 다만 「연보」나 「가장」에 그 면모가 대략 전하고 있다. 곧 「치사가」3편, 「몽견주상가」1편, 「오륜가」5편, 「면앙정장가」1편, 「단가」7편, 「잡가」2편, 「자상특사황국옥당가」1편, 「농가」1편이 그것이다. 여기서 거론된 작품들 가운데 「농가」1편을 제외한 20편이 이 문집에 한역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사 「면앙정장가」1편 외에 나머지는 시조로 보인다. 그것은 문집의 「연보」에 "방언과 이어를 사용하였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송순이 을사사화 때 선비들이 희생된 것을 보고 지었다는 「상춘가」는 문집에 한역되어 있으며, 다른 가집에 그 원사로 추정되는작품이 국문시조로 전하고 있기도 하다.
송순의 국문시가 작품은 이 밖에도 중년에 지어진 것이 더 있는데, 흩어져 수습되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그의 시가는 각종 가집에 흩어져 전하는데, 더러는 작자를 다른 인물로 표기하거나 작자 미상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익히 아는 「자상특사황국옥당가」를 포함한 5편의 시조가 송강 정철의 『송강가사』에는 송강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여러 가집에 실린 시조들과 『면앙집』속에 한여된 작품을 비교하여 송순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대략 11수 정도이다. 송순의 이들 시조는 전반적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거나 오륜을 강조하는 주제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제명을 붙여 주제를 내보인데다가 대개 연시조의 형태로 우리말 위주의 능란한 조사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호남시가의 원류가 되며 나아가 조선조 시가문학 발전의 계기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여전히 시조 작품 가운데 일부분만이 원가사로 전하고, 그의 연시조 작품의 사이에 유기적인 결속력이 약하며, 작품에 대한 작자 자신의 생각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특징이 곧 송순의 시가문학의 전반적인 특징이 된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풍상이 섞어친 날에 갓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인 체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송순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자상특사황국옥당가」라는 시조이다. 명종이 궁중에 핀 황국화를 꺾어 옥당관에게 주면서 노래를 지어 바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옥당의 관리들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당황해하였다. 이때 숙직하고 있던 송순이 이 말을 듣고 이 시조 한 수를 옥당관에게 지어 올렸다. 왕이 이 작품을 보고 놀라며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 옥당관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왕은 감탄하며 송순에게 상을 내렸다. 순간적으로 지어냈으면서도, 풍상이 섞어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암시하면서 황국화와 도리를 은유적으로 비교하여 선비의 높은 뜻을 드러낸 솜씨가 가히 놀랍다. 강호시가는 조선 초기 맹사성의 「강호사시가」를 시작으로 간간이 제작되다가 송순 이후에는 성행하게 된다. 송순의 시조 「단가」7편과 「잡가」2편은 면앙정 주변 경치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이다. 다음의 2편은 「단가」와 「잡가」가운데 각각 들어 있는 것이다.
넓으나 넓은 들에 시내도 김도 길샤 눈 같은 백사는 구름같이 펴 있거든 일 없은 낙대 든 분네는 해 지는 줄 몰라라
십 년을 경영하야 초려 한 간 지어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 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 듸 없으니 둘너두고 보리라
첫번째 시조는 『근화악부』에서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고, 두번째는 『병와가곡집』에서 김장생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자연 속에서 낚싯대를 든 사람은 작자이다. 자연 속에 도취된 작자의 생활이 잘 드러나는데, 이러한 자연 생활은 무욕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초려 한 칸에 각각 청풍명월을 채워두고 나머지 강산은 두고두고 지켜보겠다는 작자의 태도는 그야말로 자연과 합일된 달관하는 삶 자체일 것이다. 이러한 자연 속의 강호는 세속의 정치현실과는 뚜렷이 대비된다. 송순은 당시의 사림들이 했던 것처럼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백성을 위하고, 강호에 물러나서는 심성을 닦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늘 벼슬살이 속에서도 자연에 귀의하고픈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늙었다 물러가자 마음과 의논하니 이 님 바리옵고 어듸러로 가쟌 말고 마음아 너란 있거라 몸만 먼저 가리라
「치사가」3편 가운데 1편으로 『병와가곡집』에는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세속과 자연 사이에 갈등하는 작자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마음을 드러내기 전인 세속에 들어서 있을 때는 인륜의 도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시조 「오륜가」5편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백성을 훈민, 교화하는 데에 두지 않고 선비가 몸을 닦고 이를 실천하려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어서 주세붕의 「오륜가」와는 사뭇 다르다. 그런데 이들 5편의 작품 가운데 무려 3편이 송강의 「오륜가」속에 들어 잇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이 송강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다음의 시조는 '부자유친'을 읊은 것으로 『송강가사』에 실려 있다.
아바님 날 나으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아실가 하늘 같은 가없은 은덕을 어듸 다혀 갑사오리
송순에게 있어서 강호는 만년에 득의의 벼슬길을 자의로 물러난 것이기 때문에 폐쇄적인 도피처라기보다는 '열린 공간'으로서 현실과 자연을 함께 영위할 수 있는 조화로운 공간이다. 이 점은 조선 중기 이후 사림들에 의해 세속과 거리감을 두며 '닫힌 공간'으로 자리잡은 강호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 조화로운 자연에 대한 노래는 가사 「면양정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모두 146구로 된 이 가사 작품은 조선 초기 시가사에서 작자가 분명히 밝혀지고 있으며,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고, 가사 작품 가운데 최초로 정자를 중심으로 삼아 노래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아닌게아니라 『지봉유설』이나 『순오지』 등에서는 이 노래의 뛰어남을 한결같이 칭찬하고 있다. 그 제작 연대는 송순이 면앙정을 지은 41세 무렵이라는 주장과 벼슬에서 물러난 77세 이후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면앙정 축조 후 지어진 그의 한시「면앙정삼언가」와 대비할 때, 그 시적 분위기가 서로 유사하다는 이유를 들어 40대에 지어졌으리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작품은 문집에 한역되어 실려 있다. 「면앙정가」는 한마디로 정자 주위 자연경치의 아름다움과 사계절의 경물을 읊어내면서 자연을 완상하고 호연지기를 즐기는 작자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의 구조를 보면, 우선 서사에서는 면앙정의 위치를 밝힌 뒤 여기서 바라본 경치를 노래하고 있다.
무등산 한 활기 뫼가 동쪽으로 뻗어 있어 멀리 떨쳐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무변대야에 무슨 짐작 하느라 일곱 구비 한데 뭉쳐 우뚝우뚝 벌려논 듯(...)
넓고도 길구나 푸르거든 희지 말고 쌍룡이 뒤트는 듯 긴 깁을 펼쳤는 듯 어디로 가느라 무슨 일 바빠서 닫는 듯 따르는 듯 밤낮으로 흐르는 듯(...)
그리고는 이어서 사계절의 생활을 자세하게 노래한다.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의 경치가 소개되고 있는데, 봄에는 꾀꼬리가 우는 모습을, 여름에는 난간에 기댄 채 낮잠 자는 재미를, 가을에는 단풍과 함께 벼가 익어가는 들판의 풍경을, 겨울에는 눈 온 뒤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풍경들은 간결하면서도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다. 다음으로 일상의 생활과 취흥을 드러내면서, 이러한 삶의 즐거움을 옛 사람의 고사와 대비하고 있다.
술이 익어가니 벗이라 없을 쏘냐 불리고 타게 하며 켜면서 이으며 온갖 소리로 취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붙었으랴 누으락 앉으라 굽으라 젖히락 읊으락 휘파람 불락 마음대로 놀거니 천지도 넓고 넓고 일월도 한가하다
벗과 함께 술을 먹는데, 노래를 부르면서 악기를 타고 켜고 계속 이어지게 하니 온갖 취흥이 일어 근심 걱정이 없다는 말이다. 온갖 소리를 악기에 맞추어 흥을 돋우는 술좌석은 작자의 거리낌 없는 일상의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런 뒤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모든 즐거움을 임금의 은혜로 돌리며 감사하는 구절로 끝맺고 있다. "이 몸이 이렁굼도 역군은이샷다"라는 구절은 조선 전기의 가사에 관용적으로 나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작자가 세속과 단절한 채 완전히 강호에 몰입하거나 은둔해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중국의 「악양루기」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시가의 전통 속에서 이룩되었으니, 이 작품은 정극인의 「상춘곡」에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완상과 흥취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며, 정철의 「성산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국어의 아름다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솜씨를 보여줌으로써 호남 시가문학이 장차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예견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작년 양식 이미 떨어지고 송순의 한문학의 경우, 그의 문집 『면앙집』을 보면 다양한 문체의 글이 있는데 5, 7언의 한시는 500수가 훨씬 넘는다. 이들 시는 그가 수많은 인사들과 교류를 나눈 덕분에 수창과 차운시가 대부분이다. 이 시들은 교유시이거나 누정시의 성격을 띠고 있어 송순 개인의 감정과 생각들이 국문시가에 비해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송순의 시적 자질은 국문시가에서도 발휘되고 있지만 한문학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는 29세에 예문관에 있을 때 왕이 세 개의 시 제목을 내리자 칠언율시를 지어 일등하여 활(궁)을 상으로 받았고, 47세 때는 「도원팔경시」로 말안장을 상으로 받았다. 68세 때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이황, 임억령 등과 함께 조정에 불려 나갔으니, 그의 시적 재주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등과 후 비교적 젊은 시기에 이룩된 송순의 시는 주로 사회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중기 이후에는 친구들과 차운하거나 여러 정자를 찾아 자연을 완상하는 시들이 많은 편이다. 후자의 시들은 서정적 세계를 지향한 것이어서 여느 작자들의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전자의 시들은 애민정신에 입각하여 백성의 고통과 아픔을 직시한 유학자 본연의 자세에서 나온 것으로, 당대의 현실을 그려내려는 날카로운 현실주의적인 작자의식을 드러내고 있어서 주목된다.
백 리 안의 여러 산이 평야를 에워싼 곳 시내 가까이에 겨우 초옥을 만들었네. 벼슬길 벗어난 자유로운 이 몸 갈매기와 더불어 좋은 짝을 이루었네. - 「면앙정」
송순이 32세 때, 매입해두었던 땅에 면앙정을 짓고 지은 시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갈매기와 벗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다. 물아일체의 심경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백성의 처지를 이해하는 내용의 시는 많지 않으나 그 울림의 정도와 무게는 대단하다.
어찌 이 속세에서 학을 만나볼 줄 있으랴. 몸에는 날개가 없으나 저 하늘 날고픈 마음뿐. 아픈 다리 끌며 가다가 울려고 해도 나오는 건 신음 소리. 앉은 채 받는 뭇 닭의 업신여김에 눈물이 소매를 적시네. - 「병학」
송순이 34세에 지은 것으로 자신을 병든 학에 비유하여, 아픈 다리를 끌며 닭들의 조소를 받는 처지를 노래했다. 사화 속에 살아가는 자신을 자학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을 담고 있는 시라 할 것이다.
천 년 된 나무, 크기가 소(牛)를 가릴 만하고 구천에 깊은 뿌리 하늘을 받칠 만하네. 하루아침에 시들어 참담한데도 마을에선 예사로 알아 가엾다 안하네. 대들보감 아끼는 늙은이 있어 종일토록 어루만지며 마음 아파한다. 어디서 갑자기 날아온 새 한 마리 나무 꼭대기에서 박박 탁탁 쪼는 소리. 부리는 길고 발톱은 날카로워 나무 속 파먹은 벌레 다 잡으려 하네. 남쪽 가지 북쪽 가지, 또 서쪽 가지로 나무껍질 온통 만신창이 성한 데 없네. 벌레는 깊이 숨고 딱따구리는 힘이 부쳐서 얼룩진 피만 부리에 흐르네.(...) - 「탁목탄」
칠언고시로 송순이 37세에 지은 시이다. 딱따구리는 나무 깊이 박힌 벌레를 잡아 나무를 살리려는 유능한 인재이다. 나무를 쪼다가 부리는 상하고 발톱은 빠지고 날개는 닳아지도록 충성을 보인다 해도 그 누가 어질다 하겠느냐고 작자는 자조한다. 그러면 과연 나무를 병들게 하는 해충은 누구인가. 바로 부정과 탐욕에 가득 찬 못된 관리가 아닐까. 이 시에는 백성의 고통을 치유하고 싶은 작자의 심정과 함께 그러한 일을 감당하려는 의지도 엿보인다. 당대의 체제의 모순에 따른 백성들의 삶의 고통을 그려낸 시들이 「전가원」, 「문개가」, 「문인가곡」등이다. 이 가운데 「전가원」전문을 살펴보자.
작년 양식은 이미 떨어지고 새로 핀 이삭 여물 날 언제런지. 날마다 서쪽 언덕의 나물 뜯지만 허기를 채우기에 부족하다. 아이들 배고파 보채는 거야 참는다지만 늙으신 부모님 어찌하리오. 사립문 밖에 나가 보아도 어디로 갈지 막막하구나. 아전이란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공세 바치라 닥달하고 뜯어만 가네. 쌀독을 바라본들 쌀이 있겠으며 베틀을 바라본들 베가 있겠는가. 아전인들 무슨 도리 있겠는가 소리치고 성내며 아이들을 묶는다. 붙잡아다 원님 앞에 바치니 원님도 인정 사정 없구나. 목에다 큰 칼 씌워 치고 때리고 야단이구나. 해질녘에야 서로 끌어안고 우는 소리가 우리안을 맴돈다. 하늘에 죽여달라 부르짖지만 들어줄 사람 뉘 있으랴. 슬프고 슬프구나 구원받지 못해 쌓인 시체가 빈 구렁을 메우네.
이 시를 읽다보면 농가의 원망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든 백성들이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더 가혹한 것은 세금 독촉이다. 관리는 세금 대신에 사람을 잡아다 구타하니 저녁에야 풀려날 정도로 포악함이 심하다. 서로를 껴안고 울면서 하늘을 향하여 죽여달라고 울부짖으니 백성의 절망과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다. 관리의 가렴주고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현실의 모순을 심각하게 인식하는 작가의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실비판의 의지는 국문시가에는 없던 것이다. 그는 당대의 실상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비판하려는 문제의식을 지닌 사대부였음이 분명하다.
3. 한시 감상
송순의 한시 가운데 조선 중기의 사회적 실상을 냉철하게 그려내고 있는 일종의 사회시「거지의 노래를 듣고」와 「이웃집의 곡성을 듣고」 두 편을 소개한다. 이는 일반인들에게 송순이 뛰어난 시가문학 작자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상대적으로 예리한 사회적 인식을 담은 한시들도 짓는 뛰어난 현실인식의 소유자인 것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지의 노래를 듣고
새벽 꿈 깰 무렵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베개 밀치고 들으니 타령소리 늘어진다. 얘야 나가서 웬일인지 물어봐라 늙은 거지 하나가 아침밥을 빌러왔다는구나. 그 거지 시름없고 애걸 않고 구걸하는 소리조차 의젓한데 허리춤에 찬 동냥자루 늘어져 보이누나. 그 늙은이 내력이나 알아보려 불러서 오게 하니 누더기 기운 저고리에 아래는 가리지도 못했네. 저는 본래 태어나길 부잣집 자식으로 농중에 의복이 남아돌고 마당에 곡식이 남았었지요. 슬하에 아들 손자 알뜰한 아내가 옆에 있고 이 한세상 살아가기 남부러울 게 다시 없었지요. 동네 친구들 불러모아 고기 굽고 술잔 돌리고 늘상 잔치를 벌여 웃고 이야기하고 재미있게 놀았으니, 좋은 팔자 타고났다 남들이 시샘하고 나 또한 믿었다오 한없이 가업이 전할 것이라고. 슬프다, 인간사 덧없음 그 누가 알리오. 갑자년 여름에 미친 왕을 만나고 보니 아침에 나온 법령 독사와 같고 저녁에 나온 법령 호랑이 같고 폭풍에 우레 치는 곳에 피할 겨를 전혀 없네. 본디 날개가 없으니 높이 날 수가 있나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백 년의 가업이 졸지에 망하려니 하루 아침거리도 안됩디다. 집도 땅도 다 잃고 남은 것이라곤 맨몸뿐 하늘로 날아갈까 땅으로 꺼질까 이 몸 간수할 곳 전혀 없어 아내는 동쪽이요 자식은 서쪽, 나는 남쪽으로 구름처럼 흐르고 빗물처럼 흩어져서 천지간에 아득하게 되었소. 영락한 떠돌이 신세 이제 어언 삼십 년 생사도 잊은 지 오래이니 근심 기쁨 생각이나 있으리. 이 세상 어디간들 발붙일 곳 없으랴 지팡이 하나 표주박 하나로 사방을 떠돌았지요. 구구한 이 육신 별것 아닌 줄 알았으니 남에게 비는 것이야 목숨하나 건지면 족하다오. 뱃속에 넣은 음식 주림이나 면하면 그만이요 몸 위에 걸치는 옷가지 추위를 막아주는데 무슨 근심 다시 남아 나에게 덤벼들 게 있으리요. 이 몸 한가롭게 노닐며 평안히 해를 마치리라. 정승이고 장군이면 영화롭기야 하지마는 그대도 보셨지요 걸핏하면 재앙에 걸리던 일. 지팡이 흔들고 문을 나서 노랫소리 다시 높으니 백수노인의 의기가 어찌 저리도 당당한가. 득실이 자신과 관계 없음을 스스로 깨달은 때문이지 비렁뱅이 거지라고 모두 심상하게 보지 말아라. - 『면앙집』 권1
이웃집의 곡성을 듣고 쓸쓸한 마을 해는 저물어 행인도 드문데 담장 밖에서 통곡소리 무수히 들린다. 이 소리는 서쪽 이웃집에서 들리는 것인데 먹을 것도 없고 옷도 없는 가난한 한 노파의 울음이네. 책 덮고 눈물 흘리며 나도 모르게 탄식하네. 그 노파 한창 시절 나는 보았다네. 지난날 어진 정치 펼치던 시절 생각해보면 반드시 어진 이가 우리 고을 맡았고 세금은 백성의 능력에 맞게 매겨졌지. 일년 먹고 남은 곡식 곳간에 가득했네. 서쪽 집의 풍요한 재물 온 마을에서 으뜸이라. 곡식 꾸어가는 사람으로 문전을 메웠고 닭 잡고 돼지 잡아 마을에 잔치하니 앞마당 뒷길에는 노래와 춤이 벌어졌네. 이전부터 세상 운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 백성들의 살림살이 모이고 흩어짐이 있게 마련 자애로운 원님 떠나고 어진 사또 다시 오지 않으니 혹독한 정치 범보다 무서운 줄 이제 알겠네. 아침에는 논 팔아 동쪽의 빚을 갚고 저녁에는 집을 팔아 서쪽 빚에 충당하고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폭정과 독한 법령 벌떼같이 찔러오네. 뒤주 항아리 텅 비고 빈 베틀만 남아 부뚜막의 솥들은 진작 빠져나갔고, 남편은 칼 쓰고 자식은 차꼬 차고 감옥에 갇혔으니 채찍질에 남은 살갗 썩은 냄새 나지요. 사람이 사는 것이 이 지경에 어찌 견디리 차라리 죽어 땅 속에 묻힌 것만 못하네. 하늘을 부르짖으며 울 밑에서 진종일 울어도 하늘조차 대답이 없으니 다시 누구를 믿으리오. 슬프다 너의 운명 참으로 애통하구나 사정을 듣는 사람 누군들 분노하지 않으랴. 이제 바야흐로 나라에선 상벌이 신중하니 군왕의 어진 은덕 옛 성군에 이르도다. 내 마땅히 너를 위하여 대궐에 아뢰어 혹독한 관리놈들 처벌을 받을 뿐 아니라, 돌아오지 않은 아들 풀려나게 하리니 늙어 기울어진 가업 다시 일으킬 수 있으리다. 할멈은 내 말에 머리를 흔들고 울며 부르짖기를 이웃의 어르신네 저를 지금 놀리시나요? - 『면앙집』 권1
작품 해설 먼저 첫번째 한시 「거지의 노래를 듣고」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은 새벽녘에 늙은 거지가 타령소리로 아침밥을 구걸하는 내용이다. 제2단은 그 거지가 직접 자신의 내력과 거지가 된 이유를 털어놓는 이야기로 짜여졌으며, 제3단은 그 거지가 퇴장하면서 속세의 득실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말을 들려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비록 거지 신세이나 제법 당당한 태도에 작자는 이상하게 여기고 관심을 갖게 되어 이 시를 쓰게 된다. 거지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자신의 전답을 잃고 처자식과 헤어져 유리걸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시에서는 정승, 장군들도 잘못하면 화를 당한다고 하여 당시 당쟁의 위협을 풍자하고 있다. 이 거지는 자영농민층의 몰락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무기력한 백성이 아니다. 소위 '주체적 인간'이니, 허균이 말한 '호민'에 가깝다. 당대의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면서 역사의 주체적 동력을 확신한 송순의 의식이 배어 있기도 하다. 두번째 한시 「이웃집의 곡성을 듣고」는 가렴주구 때문에 행복한 가정이 파탄된 비극적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풍요롭게 살던 살림을 학정으로 다 빼앗기고 남편과 자식까지 감옥에 보낸 노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시에서도 작자는 역시 듣는 입장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그 백성이 하늘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무리 어진 왕이라 하더라도 결국 전과 똑같을 뿐이라고 강하게 믿기 때문에, 작자가 이 사실을 국왕에 아뢰어 해결하겠다고 말하자 자기를 놀린다고 조소를 보낸다. 왕도 믿지 않는 당시 백성의 한탄과 좌절에 가슴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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