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2부. 문학과 이념의 거리
고산구곡을 노래한 유학자, 이이
1. 강물은 끝없이 바람을 머금고 이이(1536~1584)는 위대한 유학자요, 교육자이자 대정치가이다. 그는 사림파와 훈구파간 세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의 길을 걸어나갔다. 그리고 백성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밤낮으로 국사에 전념하다가 비교적 젊은 나이인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이는 천재적인 자질을 타고났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과 생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시대적 고민은 정치와 교육을 위한 경륜과 학문으로 표출되었고, 자신을 둘러싼 삶의 공간에 따로 희로애락의 고민을 글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지은 시조「고산구곡가」나 한시, 그리고 문학론은 문학가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마음의 안식처 강릉 오죽헌 이이의 본관은 덕수요 자는 숙헌이며, 호는 율곡, 석담, 우재이다. 그는 1536년(중종 31) 12월 26일에 강릉의 북평촌(지금의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친정으로 강릉 경포대 호숫가 근처에 있다.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검은 용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오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어렸을 때 이름도 현룡이라 했다. 외조부 신명화와 외조모 이씨는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사임당은 둘째로, 그녀가 결혼하던 해에 율곡의 외조부는 세상을 떠났다. 외조모는 대단히 인자하고 현명한 분이었다. 사임당은 홀로 된 어머니를 염려하여 부친의 3년상을 마칠 때까지 친정에서 머물렀다. 이 때문에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강릉 처가와 서울을 왕래하곤 하였다. 3년상을 마친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갔지만 강릉의 친정집을 자주 내려갔다. 그 때문에 율곡은 6세 되던 해에야 비로소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 동안 외조모가 율곡을 돌보았으니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율곡은 나중에 장성해서도 자주 외조모를 찾아갔으며, 위중할 때는 조정 대신들의 비난에도 불고하고 왕에게 말미를 얻어 강릉에 가서 보살피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율곡의 외가가 있는 강릉의 오죽헌은 율곡에게 단순히 출생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곳은 율곡이 마음의 안정과 화평을 누릴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오죽헌은 원래 단종 때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의 집으로 우리나라 주택 건물로서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로 올라온 율곡은 7세부터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임당 신씨는 시문에 능하고 그림과 글씨가 뛰어났는데, 율곡은 어머니의 총명함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3, 4세 때부터 말과 문자를 알았으며 3세에 외조모가 석류를 보여주자,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스러졌다"고 대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9세에는 여러 형제가 부모를 봉양하며 함께 사는 그림을 그렸으니, 이것도 어머니 사임당의 재주를 물려받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8세에는 부모를 따라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로 옮겨가 살았다. 율곡리는 그의 조상이 살던 터전이었는데, 그의 호 '율곡'은 이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임진강가에는 5대조 이명신이 지은 화석정이 있다. 율곡은 이사온 그 해 가을에 이곳에 올라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었으니 시인의 생각은 가이 없구나. 멀리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른데 서리 내린 단풍은 햇볕에 붉게 빛나네. 산에서는 외로운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강물은 끝없이 바람을 머금네.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느냐 황혼의 구름 속으로 소리는 끊겼다. - 「화석정」
이 시는 그의 시적 자질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율곡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몸이 아프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이곳 율곡리에 내려와 머무르다가 다시 벼슬을 부름 받으면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죽은 뒤 이 근처의 자운산에 묻혔으니 파주는 율곡의 영원한 안식처라 해야 할 것이다. 율곡은 13세(1548, 명종 3) 때 이미 진사 초시에 합격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기는 "책을 읽을 때 한꺼번에 겨우 열 줄밖에 못 읽는다"고 말했다. 범인들이 어려운 한자 어구를 한 줄도 제대로 읽기 어렵거늘 열 줄밖에 못 읽는다고 겸손해하는 것을 보면 그는 타고난 천재였던 모양이다. 그는 이후로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차지하여, 사람들은 그를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렀다. 율곡은 16세에 자상하고 인자한 어머니이요 스승인 사임당 신씨를 잃게 된다. 아버지가 수운 판관으로 조운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평안도로 출장을 가자 율곡도 맏형 선과 함께 따라 나섰는데, 율곡 일행이 한강 하류인 서강 나루터에 오던 도중 어머니는 병이 갑자기 위중해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가 5월 17일, 신사임당의 나이 겨우 48세였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그의 슬픔과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파주 천현면 동문리 자운산에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3년상을 지낸 율곡은 삶과 죽음에 대한 회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19세에는 금강산으로 입산하고 말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불교서적 『능엄경』을 읽었을 만큼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 특히 18세 때에는 봉은사(지금의 서울 강남 소재)를 찾은 적도 있었다. 친구들에게 보낸 작별의 편지에는 "기를 기르기 위해 산수를 즐긴다"는 말을 했으나 모친의 명복을 빌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율곡은 입산한 뒤 금강산 절경을 두루 탐승하기도 하였으며 스스로 '의암'이라 칭했지만 본격적인 승려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훗날 정적들이 이 문제를 공격하였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유학자로서 순수하게 불교에 대한 관심과 진리를 깨치는 방법으로서 '돈오'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을 뿐이다. 그는 불교의 수행과 정진 방법에 회의를 느껴 금강산을 하산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불교에 관한 생각은 평생을 지배하였다.
1년 만에 하산한 율곡은 다시『논어』등의 유교경전을 읽었다. 그리고 외가인 강릉의 오죽헌을 찾았다. 그는 76세가 된 외할머니와 넷째 이모부 권화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으며, 그 유명한「자경문」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는 지표로 삼았다.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있던 강릉은 이처럼 율곡의 출생지이자 마음을 안정시키고 지친 삶을 어루만져주는 안식처였다. 20세가 되자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한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율곡은 22세에 성주 목사 노경린의 맏딸과 결혼하였다. 그의 부인은 엄한 가정교육 속에서 자라 어질고 검소하였으나 몸이 허약하였다. 율곡도 건강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려서 죽은 딸외에 소생이 없었다. 율곡은 23세가 되던 해 봄, 결혼하여 머물고 있던 성주의 처가에서 강릉으로 가는 도중 예안에 사는 퇴계 이황을 방문하였다. 58세인 퇴계는 초면이면서도 어린 율곡의 뛰어난 재주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틀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퇴계는 제자들에게 율곡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 뒤 두 사람은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퇴계는 율곡을 끊임없이 격려하며 학문적인 논의도 서슴지 않았다. 뛰어난 인물들은 서로를 알아본 것일까. 이로부터 12년 뒤 퇴계가 죽자, 율곡은 만사를 지었으며 스승에 대한 예로써 흰 띠를 둘러 심상하였다. 율곡은 23세 때 강릉에 머물다가 서울로 돌아온 해 겨울에 실시된 별시에 「천도책」이라는 글로 장원을 차지하였다. 이 글은 그가 이미 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당시 시험관이던 정사룡, 양응정 등을 감탄시켰다. 이 글은 또한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그가 47세에 중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 사신들이 그를 알아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였다. 26세 되던 해 5월에 율곡은 부친상을 당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어머니의 묘에 합장한 뒤 3년간 묘를 지켰다. 상을 벗은 그는 이 해 7, 8월에 잇달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에 이어 호조좌랑을 제수받았다. 29세에야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한 것은 그의 재능에 비하여 비교적으로 늦은 감이 있다. 이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3년 동안 과거공부를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여윈 뒤 새로 맞이한 서모가 살림을 제대로 꾸리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서모는 남은 자식들과의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동서분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벼슬길에 나아간 그는 이후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력을 다하게 된다. 30세에는 예조좌랑으로 옮기고 31세에는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의 일을 맡아보았다. 32세에는 명종이 승하하고 16세의 어린 왕 선조가 즉위하였는데 신왕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으로 왕을 적극적으로 보필하고자 하였다. 그는 33세가 되던 5월에 명나라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온 뒤, 11월에 다시 이조좌랑이 되었다. 이조좌랑의 자리는 관리를 관직에 임명하는 강력한 인사 추천권이 있었는데, 율곡이 이를 두 번씩이나 맡았다는 것은 그의 청렴성을 말해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그는 이때 "관리의 임용을 공도에 따라 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조좌랑으로 있던 그는 강릉의 외할머니가 위중하자 사직소를 올리고 강릉으로 내려갔다. 이 문제를 두고 조정에서는 외조모를 위해 벼슬을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그의 파직을 건의했지만 왕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계속된 왕명으로 결국 홍문관 교리를 제수받아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면서도 임금은 병환 중인 외조모를 그가 봉양하도록 이조에 명하여 사직하지 않은 채 강릉에 다녀올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해 10월, 율곡은 임금의 배려로 특별휴가를 받아 강릉으로 내려간 뒤 90세의 외할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면서 임종을 지켜보았다. 아마도 어머니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회한의 심정에서 더욱더 그랬는지 모른다. 이때 율곡은 자신의 출행지이자 정신적 안식처를 지키던 외할머니를 여읜 슬픔이 상당히 컸을 것이다.
34세가 되던 이듬해 서울로 다시 올라와 홍문관 교리로 벼슬을 하던 율곡은 조정의 무사안일주의에 실망하였다. 그러던 차에 8월 맏형 선의 상을 당하였다. 죽은 형의 네 자녀를 자신이 돌봐야 하는데다가 몸이 좋지 않아서, 그는 10월에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가 있는 해주 야두촌으로 갔다. 그는 이후 벼슬할 때를 제외하고는 파주와 해주를 번갈아 오고 가면서 병든 몸을 다스리거나 학문에 전념하였다. 36세에 잠시 파주 율곡리에 머물던 율곡은 조정에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번번이 병으로 사퇴하였다. 해주에 머무는 동안 그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그에게 배우려고 찾아오는 제자들이 점차 늘어갔다. 문인들과 함께 고산의 석담구곡을 구경하던 그는 각각의 아홉 골짜기에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는 이곳에 은거하려고 마음먹으면서 장차 제자들을 가르칠 서원을 세울 계획도 세웠다. 해주에 있는 처가는 현재 황해도 벽성군 가좌면에 속해 있다. 취야리에 있는 취야정은 율곡의 장인 노경린이 세운 정자로, 그는 장인의 집에 자주 머물면서 취야정에 나가 독서로 소일하였다. 그가 장차 은거할 석담구곡은 가좌면 위쪽인 고산면 석담리에 있는데, 석담은 선적봉과 지남산에 있는 계곡으로 석담천의 아홉 구비가 뛰어난 풍광을 이루고 있다. 율곡은 구곡의 이름을 제1곡부터 차례대로 관암, 화암, 취병, 송애, 은병, 조협, 풍암, 금탄, 문산이라 불렀다.
율곡은 36세 되던 이 무렵 청주목사에 제수되었다.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외직인지라 기꺼이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이곳에서 향약을 만들었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해 조정에서 향약 제정이 논의될 때 반대하였다.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10개월도 채 안되어 다시 부응교에 제수되자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 율곡리로 돌아갔다. 이때 그는 성혼과 함께 이기설, 사단칠정설, 인심도심설에 대하여 편지를 통하여 아홉 차례나 논쟁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철학 논변'이니, 강릉이 그의 정신적 고향이라면 파주는 율곡 철학의 기틀이 확립되는 성소라 할 만하다. 36세에 청주목사에서 물러난 후부터 다음해 7월까지 율곡에게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지만 모두 병으로 사퇴하였다. 그러나 다시 직제학을 제수받자 할 수 없이 조정에 나가 세 차례나 상소를 올린 뒤 사직을 허락받고 율곡리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다시 직제학에 제수되자 조정에 올라와 벼슬을 하였으니, 이듬해에는 우부승지가 되면서 「만언봉사」를 지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진언은 논의만 있었을 뿐 실제로 시행이 되지 않았다. 왕과 조정의 무사안일에 실망한 그는 사직하고 율곡리로 다시 내려갔고, 몇 번에 걸쳐 관직이 내려졌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하지만 다시 10월에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6개월 근무하는 동안 그는 학교를 크게 일으키고 군정을 정비하는 등 선정을 베풀기 위해 밤낮으로 힘쓰다가 몸을 상하고 말았다.
이 무렵 율곡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율곡은 목민관으로 황주에 들렀을 때 어린 기생 유지를 만났다. 16세의 어린 나이의 유지는, 대학자요 정치가인 율곡을 시중들면서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율곡은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으니, 그가 47세에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로 황주로 왔을 때도 끝내 유지를 받지 않았다. 유지는 율곡과 이별하고 난 뒤에도 차마 잊지 못하여 밤중에 율곡의 숙소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이에 놀란 그는 이런 시를 써주었다.
문을 닫자 하니 인정이 상할 것이요 같이 자자 하니 의리를 해칠 것이라.
유지는 율곡의 별세 소식을 듣고는 3년상을 치른 뒤 머리를 깎고 산 속에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대학자와 기생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너무나 고결한 인격이 차마 어린 기생의 마음을 들어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안타까운 느낌도 든다. 선조는 몸이 쇠약한 율곡을 가만히 있게 두지 않았다. 사직을 간청하는 그를 기어코 조정에 불렀고, 율곡도 왕의 선정을 기대하며 벼슬을 맡았지만 이미 동서붕당의 틈이 생기고 있었다. 율곡은 날로 심해지는 동서 갈등을 중계하려고 힘쓰면서 당사자인 심의겸과 김효원을 외직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자신의 직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다가 조정 신하들의 반목에 염증을 느낀 그는 이듬해(41세, 1576) 2월, 은퇴를 결심하고 사직하여 파주로 내려갔다.
십만양병설 여러 번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나아가지 않던 율곡은 해주 석담에서 후진 양성에 힘쓸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청계당과 거처할 집들을 짓고는 일가를 모아 해주로 생활의 근거지를 옮겼다. 해주에서 율곡의 일가는 함께 모여 살았다. 1백여 명에 이르는 대식구라 먹을 것도 변변치 못하였다. 가족들간의 상호 차례와 규칙을 지키기 위한 규약을 만들고 자신도 서모와 형수를 극진한 예로 모셨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율곡은 손수 대장간을 세우고 호미를 팔았다. 형편이 그러한지라 제자들을 가르치러 해주 석담에 와서는 점심을 굶었다. 이런 딱한 사정을 알고 재령군수인 친구 최립이 쌀을 보냈으나 율곡은, "그것은 나라의 곡물이니 받을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해주에 사는 동안 율곡은 『격몽요결』, 『학교모범』을 짓는 등 교육을 위한 집필 작업에 힘쓰는 한편, 은병정사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해주향약'을 만들어 사회를 위한 교육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해주향약은 해주의 풍속을 교화할 뿐만 아니라 민생에 실제로 도움이 되도록 실용적인 면을 강화하였다. 그는 송나라의 철인 주자를 흠모하였으니, 은병정사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친 것도 주자가 무이정사를 세워 제자를 가르쳤던 일을 본받은 것이다. 율곡은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들였으며, 규약을 만들어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였다. 『문인록』에 오른 율곡의 제자만 해도 85명이며, 이 가운데 김장생, 조헌, 이귀, 변이중 등이 뛰어났다.
그 사이에 조정에서는 율곡을 몇 차례 불렀으나 모두 간곡한 말로 사직하였다. 그가 특히 걱정했던 문제는 동서붕당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였다. 그러나 그의 충정어린 상소를 이해하지 못한 조정의 신하들은 그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4년여 기간 동안 율곡은 한가하게 제자를 가르치거나 자연과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그러나 율곡은 45세(1580)에 젊은 임금 선조가 병환으로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려다, 자신이 대사간에 제수되었다는 명을 받고는 취임하였다. 왕의 선정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경륜을 펴보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6월에는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가 삼사의 비판을 받아 잠시 벼슬을 그만두었으나 다시 이 해에 호조판서, 대제학 등을 맡았다. 47세가 되는 해 1월, 율곡은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는 공정하게 인사를 했으며 유능한 인재를 중요시하였으니 훗날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이덕형, 이항복, 이순신 등은 그가 천거한 인물들이다. 이 해 8월에는 형조판서, 9월에는 의정부 우찬성에 올랐다. 임금이 그를 특별히 아꼈기 때문이다. 이 해에 그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가 되었다. 명의 사신들은 「천도책」을 지은 율곡을 알아보고 예를 표하였으며, 그는 사신들과 즉석에서 시를 주고받아 뛰어난 시적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율곡은 12월에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사임하려는 그를 왕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북방의 오랑캐가 자주 침노하자 왕에게 부국강병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유명한 '십만양병설'이다. 그의 나이 48세가 되던 해 4월의 일이다. 십만의 군대를 양성하여 장차 있을 외적의 침입을 막자는 것인데, "평화로운 때에 군사를 양성하여 화란의 단서를 만드는 일"이라며 유성룡을 포함한 조정의 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 해 6월 북쪽의 오랑캐가 국경에 침입해온 일로 탄핵을 받은 율곡은 벼슬을 내놓고 파주로 갔다. 이대 평상시 율곡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사람들로부터 소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율곡은 양화진에서 배를 타고 파주로 가는 도중 답답한 심정을 다음과같은 거국시로 읊었다.
사방은 멀리 구름으로 캄캄한데 중천에 뜬 해는 밝기도 하구나. 외로운 신하의 한 줄기 눈물 한양성을 향하여 뿌리네. - 「거국주하해주」
탄핵을 받고 물러난 율곡을 왕은 계속해서 여러 차례 벼슬을 주며 불렀다. 이조판서에 제수된 그는 서울로 올라가 왕에게 나아가 사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왕과 나라를 위해 동서를 가리지 않고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는 등 성심껏 일하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쇠약해진 뒤였다. 이듬해 1월이 되자 율곡은 병석에 드러눕게 되었는데도 나라 일만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죽기 이틀 전에도 국방의 임무를 맡아 순무어사로 떠나는 서익에게 병든 몸을 이끌고 좌우에 부축을 받으며 '육조방략'을 가르쳐주었다. 1584년 정월 16일 새벽에 율곡은 서울 대사동(지금의 종로 옛 화신백화점 일대)에서 49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가 죽은 뒤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지 못했다 하니 아마도 어지러워진 나라 일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으리라. 왕은 사흘 동안 조회를 파하고 예관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재산을 남기지 않은 탓에 친구들이 돈을 모아 수의를 만들고 염습하였다. 발인하는 날에는 백성들까지 나와 횃불을 밝히며 눈물을 흘렸다. 장지는 부모가 묻혀 있는 파주의 자운산이었다. 현재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동문리 자운서원 경내에 있는 그의 묘소는 "자손이 없어도 제사가 끊이지 않는 터"이다 율곡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자운서원은 1615년 (광해군 7)에 창건되어 효종이 사액을 내렸으며,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제향이 올려졌다. 그러다가 대원군 시절에 철폐되었는데 1970년에 복원되었다. 여기서는 매년 8월 두번째 정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 서원에는 율곡의 덕을 기리는 묘정비, 기념관 등이 있다. 문성문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가면 율곡 가게의 묘 13기가 있다. 이 가운데 율곡의 묘는 부모의 합장묘 위쪽에 있다. 그런데 율곡의 묘는 합장묘가 아니라 위아래로 연이은 형태의 묘로 부인의 묘가 그 위에 있다. 여기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부인 노씨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편의 무덤을 여종 한명과 함께 지키다가 왜적들이 오자 자결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후손들은 흩어져 있는 부인과 여종의 유골을 구분할 수 없자 이 두 유골을 모아 묘를 썼다고 한다.
2. 율곡의 문학세계 율곡은 위대한 사상가요, 정치가이면서도 뛰어난 문학적 자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러한 자질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어머니 사임당 신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율곡은 16세기 사림파 문인으로서 조선 전기 사대부의 성리학적 문학사상을 가장 극명하게 체계화한 인물이다. 그는 문학론에 해당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그의 주장은 당대 사대부 문인들의 공통된 견해라 할 만하다.
세상을 바로 세우는 문학 먼저, 그는 "도가 드러난 것을 문이라 하니, 도는 문의 근본이요 문은 도의 말단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고려 말 이제현, 이색 등이 내세우기 시작하여 조선 초 삼봉 정도전에 의해 확립된 유가적 문학관으로서 소위 '제도지기론'의 입장에 서는 말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도를 이루면 문이 따라오는 것으로 문은 도를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문학은 덕행과 학문에 의한 내적인 자기 완성에 의하여 저절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문학은 문학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반면에 문장을 애써 전공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집단도 있었다. 이를 사장파라 부르거니와 그 당시에는 대개 중앙 정계에서 권력을 잡은 훈구파 관료들이 이러한 견해를 존중하고 있었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신진사림들은 "오로지 사장에만 힘쓰며 과거장에 드나들고 문예를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당대의 훈구파의 풍조를 비난하고 나섰다. 율곡 역시 사장파의 이러한 풍조가 세상을 망쳐 삼대(중국의 하, 은, 주)의 도통이 끊어졌다면서, 그들의 문학을 '속유의 문'이라고 비판하고 '성현의 문'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문학을 사대부의 교양이나 취미로 보는 사장파의 입장을 비판하고, 영달의 수단으로 삼게 하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하여 율곡은 표현보다는 마음에 얻은 바 이치가 먼저 중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퇴계 이황 역시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문학을 배워야 한다고 하여 인격수양의 수단으로서 문학을 강조하였으니, 이는 율곡과 같은 생각이라 할 것이다. 율곡도 제자들에게 "음악과 문학으로 마음을 맑게 하고 정서를 함양하는 것과 학문하는 일은 곧 하나로 통한다"고 가르쳤다.
율곡에 의하면 문학은 '소리'로써 이루어지는데, 사람이 낸 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고 그것이 글에 합당한 '선명'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선명은 천인합일의 이상적인 경지에서 사람의 마음을 잘 울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문학의 절대적인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도심을 갖추고 세상을 바로잡는 문학이야말로 완전한 것임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율곡은 시, 즉 한시를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시하였다. 산문보다 시를 우위에 두는 사고방식은 당대의 사대부들에게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는 시가 성정에 근본을 두고 있으며 성정을 읊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고, 나아가 시는 마음을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정을 움직이되 마음을 방탕하게 하는 기질지성보다는 인간 본연의 성품인 본연지성을 회복해주기 때문에 시는 심성을 도야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참된 시를 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율곡은 자신의 이러한 시적 관점에 따라 시선집을 엮은 바 있다. 아마도 중국의 역대 시들을 대상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이 바로『정언묘선』이다. 모두 8편으로 분류되어 각 작품마다 평설이 붙었을 이 책은 현재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서와 총서만이 남아 율곡의 시에 대한 인식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그는 여기서 시의 품격을 몇 가지로 나누었다. 이는 그가 갖고 있는 시적 미의식과 상통한다. 그는 가장 높은 경지의 시로서 인위성을 배제한 자연스러운 시를 내세웠다. 기교주의를 반대한 무기교의 미의식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율곡이 이처럼 문장을 갈고 닦거나 어휘를 단련하는 일을 인정하지 않은 데 반해, 퇴계는 문장이나 단어를 다듬어야 한다는 견해를 인정하고 있어서 두 사람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율곡은 이러한 경지를 '충담소산'이라 하여, "꾸미고 장식하는 것을 힘쓰지 않고, 자연스러운 데서 현묘한 뜻, 고조, 고의가 깊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여기서 "자연 속에서 조용히 자적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우연한 흥취"를 담은 시를 높이 평가했다. 현실을 멀리하며 마음속에 침잠하는 이러한 시는 서경덕, 이황 등이 탐구했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크게 발달한 산수시 내지는 자연시의 경향과 상통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에서 "세도의 성쇠와 국운이 치란을 볼 수 있고, 나아가 시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음"을 믿었다. 전자는 시가 도를 실어야 한다는 소위 성리학적인 문학관을 나타낸다면, 후자는 시의 서정성을 인정하는 견해라 할 만하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시를 읽으면 정서가 무르녹아 정서가 메마른 자에게는 그 마음을 살찌게 한다"(「정언묘선총서」, 『율곡전집』)고 하여 서정성으로서의 시적 본질을 깨닫고 있다. 이 점 역시 시적 교화성을 크게 강조한 퇴계 이황과는 다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율곡이 퇴계보다는 시의 주제와 본질을 훨씬 넓고 적극적으로 인식하여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율곡은 '세상과 부딪치는 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입장을 개진하지는 않았다. 사림파 문학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풍자나 비판이 눈에 띄게 돋보이지 않는데, 이는 이미 퇴계 이황이 배척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조선 후기 실학파 문인들에게서 다시 한번 크게 강조되고 있다.
「고산구곡가」와 한시 율곡의 작품세계는 크게 국문으로 된 것과 한문으로 된 것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국문시조 10수인「고산구곡가」를 말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그의 문집에 있는 한시로 약 490여 수 정도, 그리고 사 2편과 부 7편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서발, 서, 기, 설 등의 산문이 남아 있다. 여기서는 그의 국문 시조와 한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율곡이 지었다는 국문 문학으로는, 우선 가사 「낙빈가」,「자경별곡」,「낙지가」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18세기 무렵 사대부의 위기의식의 소산으로 도학가사가 산출된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과연 율곡 이이의 작품인지 의심가는 부분이 많다. 다시 말하면 이이의 이름을 가탁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황을 가탁하여 지은 도학가사 계열 작품으로 「퇴계가」, 「금보가」, 「상저가」, 「효우가」 등이 있으니, 이에 대해서도 온전히 퇴계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많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이들 작품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율곡은 43세에 주자가 무이산에서 무이정사를 짓고 무이구곡의 자연을 읊은 「무이도가」를 본떠, 자신도 해주 석담에서 은병정사를 세운 뒤 석담구곡의 경치를 국문시조 「고산구곡가」로 읊었다. 그 시조의 내용은 서곡을 시작으로 각각 아홉 계곡의 경치에 대한 흥취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각 작품마다 "일곡은 어드메오..."라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일부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본떠 지었다고 주장하지만 단순한 모방작은 아니다. 그것은 이 작품이 「무이도가」의 유희적인 분위기를 배제하고 도교적인 면모를 극복하면서 서정적인 측면을 짙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창적인 시세계를 율곡이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이도가」 계통의 노래는 중국과는 다른 세계상과 독자성을 이미 이 무렵에 갖추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율곡이 「무이도가」를 시조의 형태로 변용시킨 데 반하여, 퇴계는 이를 한시로 차운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림파 문인들 사이에서도 「무이도가」 계통의 노래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시조로서의 변용은 율곡에게만 나타나고 그 대신 이것을 한역하여 한시로 제작한 경우는 이후 송시열 등의 문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율곡은 퇴계의「도산십이곡」과는 달리, 이 작품을 통하여 훈계나 설교 등 기타 교훈적인 말들을 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는 서정적인 측면도 퇴계의 것에 비하여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주리파 사림과 주기파 사림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율곡은 주기파에 가까운 인물이다. 율곡의 한시를 보면, 치국과 치세를 위해 평생을 바친 그답게 임금과 나라에 대한 생각을 담은 작품이 우선 눈에 띈다.
처세에 억지로 따르지 않아 유연히 바삐 돌아갈 마음뿐. 임금께선 변할 리 있으랴마는 변하는 세태를 누가 알리오. 푸른 바다 가랑비 자욱한데 석양에 외로운 배 저어 가네. 좋구나, 도도한 저 바닷물에 온갖 생각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임 향한 일편단심은 아홉 번 죽어도 끝내 못 돌리겠네. - 「승주서하」
그의 나이 48세에 소인배들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뱃길로 낙향할때의 심정을 읊은 시이다. 낙향하는 억울한 심정 속에도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다. 흡사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를 연상하게 한다. 율곡은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 그가 병을 얻어 직책을 감당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벼슬이 내려졌다. 38세 되던 해 홍문관 직제학에 제수되었을 때도 그는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겨우 사임을 허락받았다. 그는 이 일을 감격하여 「감군은」 4수를 남겼다.
임금의 은혜로 속박에서 물러남을 허락받았네. 들길이 쓸쓸하니 홀로 문을 닫고 네 벽에 가득 쌓인 책을 볼 뿐. 초당의 밝은 햇살은 임금의 은혜로세. - 「감군은」, 2
임금의 은혜 바다 같아 갚을 길 없고 뱃속의 시서마저 말하지 못하네. 따뜻한 날의 미나리도 임에게 바치기 어려우니 평생을 감군은만 읊고 지내리. - 「감군은」, 4
물러나 있어도 임금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노래하는 작자의 마음은 의례적인 말이 아니다. 선조의 병환 소식을 듣고 그는 서울로 달려가 문병을 하기도 하였다. 시골에서 임금의 은혜를 갚을 길은 미나리를 정성을 다하여 바치는 것이다. 초당의 밝은 햇살도 임금의 은혜로 돌리는 생각은 맹사성의 시조 「강호사시가」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율곡이 바라본 농촌은 가난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 율곡은 이러한 실상을 시로 그려내기도 하였다. 다음은 「대화도중」 시의 일부이다.
노인네 헐떡이며 숨찬 소리로 울타리를 사이 두고 누군가 묻네. 할멈은 아이를 안고 나오더니 문을 막고 머무는 것 허락치 않네.(...) 한밤중에 잠 설치고 깨니 아이들이 뒷방에서 시끄럽구나. 춥다고 이불을 끌어당기며 나그네 때문이라 원망소리 높네. 씁쓰레 장탄식을 할 뿐이나 이것을 어찌 백성의 풍습이 나쁘다고 할 것인가. 어느 때 식량 걱정을 하지 않고 도처에서 소박한 인심을 볼 수 있을까.
백성들은 가난한 탓에 잠시 쉬어가는 사람마저 문전 박대했던 듯하다.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손님을 후대하는 미풍양속은 존속하기 힘들다. 맹자도 "의식이 족해야 사람들이 예절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율곡도 이를 두고 백성의 풍습이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다 하였다. 그는 어진 정치를 기대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될 때 비로소 미풍양속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백성들이 어렵게 사는 실상이나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율곡의 시 가운데 유명한 것이 바로 기행시 「풍악행」이다. 율곡은 19세에 모친을 여의고 금강산에 입산하였는데, 이 무렵에 이 시를 비롯하여 「만폭동」 등 10여 편의 기행시를 남겼다. 「풍악행」은 600구 3000언으로 된 장편인데, 그는 여기서 내외금강을 구경한 일이며, 각 봉우리와 절, 암자, 못 등의 생김새, 그리고 이와 관련된 각종 고사 등을 소개하고 있다.
평생에 산수를 사랑하다 보니 일찍이 내 발걸음이 한가롭지 않아. 지난번 꿈에서 보았을 때도 하늘 끝이 잠자리에 옮겨왔네. 오늘 호연히 당도하니 천 리가 함께 가까이 있구나.
그는 경치가 빼어난 곳을 찾아다니기 좋아했으며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금강산을 찾았다고 하였다. 그는 단발령을 지나고 외금강에 있는 장안사, 유점사, 은선대, 불정대, 십이폭포를 거쳐 여러 암자들을 지났다. 그리고 다시 내금강에 있는 백운동, 묘길상, 마하연, 표훈사, 정양사, 만폭동, 보덕굴, 발연동을 지나고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금강산의 뛰어난 경치와 신비를 노래했다. 이 시 「풍악행」은 단순히 장편시라는 점 외에도 이와 같이 탐승의 과정과 여정이 뚜렷히 밝혀진 한 편의 기행문학이라는 데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밖에도 당대의 명사들이나 승려들과 주고받은 교유, 수창, 송별시 등이 많다. 다음 시는 달을 보고 쓴 것이다.
그지없이 맑은 유리 싸늘한 구슬 구름 속에서 반쯤 얼굴을 내밀어, 예쁘게 단장한 서시와 같이 교태로이 비단 잡고 낯을 가리네. - 「운간월」
공중에 뜬 달을 유리알로 그려낸 솜씨가 놀랍거니와, 구름이 흐르면서 달이 가렸다가 다시 나타나는 모습을 둘째 구에서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달이 구름에 반쯤 가린 모습을 작자는 슬쩍 그 유명한 미인 서시의 교태로 돌리고 있다. 자연미를 그려내는 작자의 솜씨가 대단함을 이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고산구곡가」 감상 「고산구곡가」는 일명 「석담구곡가」라고도 한다. 율곡이 43세 때 황해도 해주에 있는 고산 석담에 은거하면서 지은 10수의 시조로서 연시조 형태를 지니고 있다. 『율곡전서』를 비롯하여 『악학습령』, 『병와가곡집』, 『청구영언』, 『해동가요』 등에 실려 있다. 『시가』, 『악부』, 가람본 『청구영언』, 주씨본, 일석본 『해동가요』에는 오언으로 된 송시열의 한역시가 덧붙여 있다.「율곡선생연보」에 의하면 작자가주자의 「무이도가」를 본떠서 지었다고 하였지만, 실제로 둘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단순한 모방작이 아님이 분명하다. 작품의 원문은 한자로 적혀 있지만 여기서는 괄호 안에 넣고 음을 먼저 달았다.
고산구곡가
고산 구곡담을 사람이 모르더니 주모복거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를 상상하고 학주자를 하리라
일곡은 어드메오 관암에 해 비쵠다 평무에 내 거드니 원산이 그림이로다 송간에 녹준을 노코 벗 오느 양 보노라
이곡은 어드메오 화암에 춘만커다 벽파에 꽃을 띄워 야외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를 모로니 알게 한들 엇더리
삼곡은 어드메오 취병에 닙 퍼졌다 녹수에 산조는 하상기음 하는 적의 반송이 바람을 받으니 녀름 경이 업세라
사곡은 어드메오 송애에 해 넘거다 담심암영은 온갓 빗치 잠겻세라 임천이 깁도록 됴흐니 흥을 계워 하노라
오곡은 어드메오 은병이 보기 됴타 수변정사는 소쇄함도 가이 없다 이 중에 강학도 하려니와 영월음풍 하리라
육곡은 어드메오 조협에 물이 넘다 나와 고기와 뉘와 더욱 즐기는고 황혼에 낙대를 메고 대월귀를 하노라
칠곡은 어드메오 풍암에 추색 됴타 청상이 엷게 치니 절벽이 금수 로다 한암에 혼자 안자셔 집을 잇고 잇노라
팔곡은 어드메오 금탄에 달이 밝다 옥진금휘로 수삼곡을 노는말이 고조를 알 리 업스니 혼자 즐거 하노라
구곡은 어드메오 문산에 세모커다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무쳐세라 유인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업다 하더라
작품 해설 율곡은 일찍이 석담천이 흐르는 수양산의 아홉 계곡을 구경한 뒤 각각의 계곡에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 은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특히 다섯번째 계곡인 은병에 은병정사를 짓고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율곡은 이곳 석담에 지내면서 이미 주자가 지었던 「무이도가」를 전례로 삼아 이 노래를 지었다.「무이구곡」과 주변의 강호를 노래한 주자의 시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사림파의 형성과 이들의 정계 등장과 관련이 깊다. 퇴계 이황과 하서 김안후 등이 본격적으로 이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사림파의 생활과 세력기반이 그들의 고향인 강호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게다가 주자학에 대한 사림들의 높은 관심도 여기에 일조했을 것이다. 특히 중국 무이산의 구곡은 사림들이 숭모하던 바가 되어 우리나라 도처의 뛰어난 경치에는 사림들에 의해 '구곡'이 경영되었다.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등이 대표적이다. 주자의「무이도가」 10수와 함께 '무이구곡도'도 사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림들이 중국을 여행할 수 없자 '무이구곡도'를 그려 주자를 숭모하는 마음을 내보였기 때문이다.
이 「고산구곡가」는 성리학적 문학관에 입각한 시적인 교화보다는 시 고유의 서정성을 드러내고 있다. 삼강오륜 같은 유가적인 덕목을 강조하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의 한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비록 한자어가 많이 들어 있지만 일상적이며 평범한 어휘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하여 율곡은 고산구곡의 자연경치에 대해 단순한 서경에 그치지 않았다. 곧 자연을 대하면서 느끼는 성정을 음영한 것이다. 예컨대, 제이곡을 노래한 시조를 보면, '봄의 꽃'을 통하녀 중국적인 이상향이 아닌 나름대로의 이상향을 그려보이며, 제삼곡을 노래한 시조에서는 '잎과 산새'에서 자연이 흐르는 이치를 간파하고 있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짐승과 수목들을 보고 즐거워하며, 자연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자 하였다. 이는 강호를 노래한 사림들의 자연시 경향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을 보면, 먼저 서곡에서는 고산구곡담을 사람이 모르다가 띠를 베어 집 지으니 벗님들이 온다고 한 뒤, 주자의 무이산 생활을 생각하며 성리학을 배우겠다고 다짐한다. 서곡 종장의 구절로 인하여 「고산구곡가」는 주자의 「무이도가」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제일곡은 관암을 읊은 것으로, 잡초 뒤덮인 들에 안개가 걷히니 먼산이 그림 같은데, 솔밭에 술통을 놓고 벗이 오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노래한다. 제이곡은 화암을 읊은 것으로, 푸른 물에 꽃을 띄워 야외로 보낸다면서 사람이 이와 같은 명승지를 모르니 알게 하고 싶다고 하였다. 제삼곡은 취병을 읊은 것으로 푸른 나무에 산새가 위아래로 우짖는데 반송이 바람을 받으니 여름 경치가 그지없다고 노래하였다. 취병은 말 그대로 푸른 병풍같이 나무나 풀로 덮인 절벽을 말한다. 한편, 제사곡은 송애를 읊은 것으로, 못 가운데 바위 그림자가 온갖 빛으로 잠겼으니 수풀 속 샘이 깊도록 좋아 흥에 겹다고 말한다. 제오곡은 은병을 읊은 것으로, 냇가의 은병정사는 무척 깨끗한데 여기서 제자를 가르치면서 음풍영월하며 소일하고 싶다고 하였다. 은병은 굽이진 곳이 있어 눈에 띄지 않는 절벽을 말하는데, 율곡이 은거하면서 사는 해주의 고산을 지칭할 수도 있다. 제육곡은 조협을 읊은 것으로, 나와 물고기 중 누가 더 자연을 즐기는가 하고 물은 뒤, 황혼에 낚시대를 메고 달빛을 받으며 돌아온다고 노래한다. 조협은 낚시질하기 좋은 골짜기를 말하는데, 이곳에서 낚시질하는 자신과 물고기를 견주어 자연과의 합일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제칠곡은 풍암을 읊은 것으로, 가을 색깔이 좋은데 맑은 서리가 엷게 치니 절벽이 흡사 수 놓은 비단 같다면서, 찬 바위에 혼자 앉아 돌아갈 집을 잊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팔곡은 금탄을 읊은 것으로, 달이 밝은데 좋은 거문고로 서너 곡을 노래하니 옛 가락을 알 사람이 없어서 홀로 즐긴다고 하였다. 옥진금휘란 아주 좋은 거문고를 뜻하며, 금탄은 거문고를 타듯이 물소리가 흥겹게 들리는 여울목을 말한다. 끝으로 제구곡은 문산의 경치를 읊은 것으로, 돌산에는 해가 다 저물고 기암 괴석이 눈 속에 묻혔는데 노는 이(유인)는 이곳을 와보지도 않은 채 이곳 겨울 경치가 별로 볼 것이 없다는 말만 하고 있다고 하였다. 작가는 여기서 자연을 직접 찾지도 않으며 실제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이가 많음을 지적하면서, 기암 괴석이 뒤섞여 아름다운 문산이야말로 풍류를 능히 즐길 만한 곳임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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