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12. 양후열전 穰侯列傳
황하와 주변의 산들로 둘러싸인 위(魏)의 수도 대량(大梁)을 포위해 다른 제후들이 손도 내밀지 못 하게 할 만큼 진을 잘 섬긴 것은 위염의 공적이다. 그래서 제12에 <양후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양후 위염은 진나라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의 동생이다. 그 조상은 초나라 사람이며 성은 미 씨다. 진의 무왕이 죽고 자식이 없자 그의 아우가 서서 왕이 되었으니 그가 곧 소왕이다. 소왕의 모친은 원래 미팔자(미八子: 미는 姓이고 八子는 婦官名. 天子의 后宮에는 美人.良人.八子.七子.張使.小使.첩여.첩仔.형娥 등이 있다.)라 불렸으며, 소왕이 즉위하자 팔자를 올려 선태후로 불렀다. 선태후는 무왕의 어머니가 아니고 무왕의 모친을 혜문후(惠文侯)라 불렀는데 무왕보다 먼저 죽었다. 선태후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다. 그의 의붓아버지가 낳은 큰 동생을 양후라 했다. 성은 위 씨고 이름이 염이다. 친아버지의 아우를 미융이라 불렀으며 화양군(華陽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소왕과 동모(同母)의 아우를 고릉군(高陵君).경양군(涇陽君)으로 불렀는데, 이들 중 위염(魏염)이 제일 현명했다. 위염은 혜왕.무왕 때부터 요직에 임명되어 국사에 관여했다. 무왕이 죽자 여러 아우가 왕위를 다투었으나 오로지 위염의 힘으로 소왕이 즉위할 수 있었다. 소왕이 즉위하자 위염을 장군으로 삼아 함양을 지키게 했다. 계군(季君: 公子 壯이 대신들과 모의해 참람되게 즉위하고 스스로 季君이라 부름. 함양을 지키던 위염이 계군과 혜문후를 함께 죽였다. 혜문후는 화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음)의 난을 평정하고 무왕의 후(后)를 위나라로 추방하고 소왕의 여러 형제 중에서 반란에 관계된 자는 모조리 멸하니 그 위세가 진나라에 떨쳐졌다.
소왕이 어리므로 선태후가 몸소 조정에 나가 섭정하게 되고 실제의 국정은 모조리 위염에게 맡겨졌다. 소왕 7년에 저리자가 죽고 경양군을 제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조나라 사람 누완(樓緩)이 와서 진의 재상이 되었다. 조는 불리하다고 생각되어 구역을 진에 보내어 위염을 진의 재상으로 삼아 주기로 청원키로 했다. 구역이 진나라를 떠나려 할 때 구역의 식객 송공(宋公)이 구역에게 말했다. "진나라가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게 되면 누완은 반드시 당신을 원망할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구려." "그러니까 당신이 미리 누완을 찾아보고 '공을 위해 진나라에 그토록 급하게는 청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 두시오. 진왕은 위염을 재상으로 삼아 달라는 조나라의 청원이 그토록 급하지 않은 줄을 알면 오히려 위염을 재상으로 임명할 것이고, 당신이 청원하고도 재상으로 임명되지 않으면 누완에게 덕을 끼친 셈이 됩니다. 물론 위염이 재상으로 임명되면 그는 당신께 고마워할 것이고요." 구역이 송공의 의견을 따랐더니 과연 진왕은 누완을 파면하고 위염을 재상으로 삼았다. 여례(呂禮)가 위염의 재상 임명을 반대했으므로 위염이 여례를 죽이려 하자 그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소왕 14년에 위염이 백기(白起)를 발탁했다. 상수를 대신하여 장군으로 삼아 한.위를 쳐서 이궐(伊闕: 河南省 洛陽縣 남쪽)에서 깨뜨리고 적의 목을 자른 것이 24만, 또 위의 장군 공손희(公孫喜)를 사로잡았다. 이듬해에는 또 초의 원(宛: 河南省 南陽縣)과 섭(葉: 河南省 葉縣)을 탈취했다. 위염이 병을 핑계로 재상직을 그만두었는데 객경인 수촉(壽燭)을 등용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위염이 재상이 되었다. 이때 진은 위염을 양(穰:河南省 鄧縣)에 봉하고 다시 도(陶: 山西省)을 더하여 양후(穰侯)라고 불렀다. 양후에 피봉된 지 4년 후 위염은 진의 장군이 되어 위나라를 치니 위가 하동(河東: 山東省 黃河 동쪽)의 사방 1백 리를 바쳤다. 나아가 위의 하내(河內: 河南省 黃河 이북)까지 쳐서 대소 60여 개의 성을 탈취했다. 소왕 19년에 진은 서제(西帝)라 칭하고 제나라가 동제(東帝)라 자칭했다. 한 달 남짓 뒤에 여례가 와서 설득했으므로 진.제가 각각 제(帝)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왕(王)이 되었다. 위염이 다시 진의 재상이 된 지 6년 만에 그만두었는데 2년 후 다시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그 4년 후 백기를 시켜 초나라의 국도 영(영: 湖北省)을 함락시키고 그 땅에다 진나라의 남군(南郡)을 두었다. 이에 백기를 무안군(武安君)으로 봉했다. 백기는 양후가 천거한 인물이며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았다. 그로 인해서 양후의 재산은 왕실보다 더 넉넉했다.
소왕 32년 양후는 상국(相國: 宰相보다 격식이 높은 宰相職)이 되었다. 병사를 이끌고 위(魏)를 쳐서 위의 장군 망묘(芒卯)를 패주시키고 북택(北宅: 宅陽, 河南省)으로 침입해 대량(大梁)을 포위했다. 위의 대부 수가(須賈)가 양후를 달래어 말했다. "저의 위나라 고관 한 사람이 위왕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옛날 위의 혜왕이 조를 쳐 삼량(三梁: 南梁)에서 이기고 한단을 빼앗았으나 조는 땅을 위에게 할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단은 다시 조로 돌아왔습니다. 제나라가 위(衛)를 쳐서 고도(故都: 楚兵)를 뺏고 대부 자량(子良)을 죽였지만 위는 조에게 땅을 할양하지 않아 고도는 다시 위로 되돌아왔습니다. 위(衛).조는 강한 병사로 나라를 온전히 지켜 그 땅이 제후들에게 병합되지 않은 것은 능히 그 어려움을 참고 땅의 할양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송.중산(宋.中山)은 자주 공략되면서 계속 타국에 땅을 할양했던 탓으로 결국은 망해 버렸습니다. 신은 위(衛).조를 본받아야 하며 송.중산은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은 탐욕스럽고 비뚤어진 나라라 선린의 정이 없으며 위(魏)를 잠식하고 옛 진(晋)의 땅을 모조리 탈취하려고 일찍이 우리 장군 포자(暴子: 暴鳶)를 이기자 여덟 현을 떼내 가졌으며, 그 땅이 진나라에 채 편입도 되기 전에 군대를 다시 파견할 정도로 진나라는 만족이란 게 없습니다. 지금 또 망묘를 패주시키고 북책에 침입했지만 이것은 구태여 위를 침략한다기보다 대왕을 위협해 보다 많은 땅을 베어 가지려는 술책입니다. 대왕께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들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 초.조를 저버리고 진과 강화하면 초.조는 노하여 대왕과 손을 끊고 대왕과 다투어 차라리 진을 섬길 것입니다. 진은 반드시 이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초.조의 군사가 진과 합세해 다시 위를 친다면 위는 망하지 않을래야 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대왕께서는 강화하지 마십시오. 굳이 강화해야 될 처지라면 땅을 조금 떼어 주는 대신 반드시 진에서 볼모를 받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속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저는 위나라에서 들었습니다." "그것은 위나라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 아니겠소." "아닙니다. 그토록 사정이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천명은 일정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행이라는 것이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포자와 싸워 이겨 8현을 할양받은 것이 병사가 정예로워서 가능했습니까. 또 계략이 교묘했었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천행이었던 것입니다." "천행이 항상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오?" "지금 망묘를 패주시키고 북택에 침입해 대량을 치고 있습니다만 이것 역시 천행이 항상 곁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지혜로운 자요?" 양후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투로 대꾸했다.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위나라는 백 현에서 선발된 정예병들만 골라 뽑아 대량을 지킨다.'고 합니다. 병력은 대략 30만명은 되겠지요. 은의 탕왕이나 주의 무왕이 오더라도 30만명의 정병이 7인(七인: 1인은 4자)높이의 성벽을 지키고 있으니 결코 함락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성을 함락시켰다는 사례는 아마 천지개벽 이래로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진군이 공략해 실패해 지친 진군이 지키고 있는 도읍(도읍: 穰候의 封邑)을 역습받는 날이면 상국의 군사는 전멸하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이제까지의 공은 수포로 돌아가겠지요." "그렇다면 지금 위나라의 결정은 무엇이오?" "어떻게 할까 하고 다소 의심하고 주저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니 지금 얼마만큼의 땅을 할양해 사태수습을 할 가능성은 있지요." "땅을 조금 떼어받는 정도로 위나라와의 관계가 수습될 수 있다는 얘기를 했소?" "그나마도 초와 조나라 군대가 위나라에 이르기 전에 결행해야 합니다. 위나라가 강화를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뿐이니까요. 아무튼 상국께서도 땅을 얻을 수 있게 되니 좋지 않겠습니까." "음......." "더구나 초 조는 자기들보다 위나라가 먼저 진과 강화한 것을 두고 반드시 노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도 다투어 진에 입조할 듯합니다." "합종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겠군." "좋지 않습니까. 상국께선 그 때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십시오." "어떤 선택을 말이오?" "그 땐 굳이 진나라가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아도 되겠지요. 옛 진(晋)땅을 갈라 가지고 싶으면 진(秦)군이 나서지 않아도 위나라가 틀림없이 강(絳: 山西省)과 안읍(安邑)을 내놓을 것이 분명하며, 도(陶)로 통하는 남북의 두 길도 열릴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원래의 송 땅을 거의 얻게 되면 위(衛)는 반드시 선보(單父:山東省 單縣 남쪽)를 내놓을 것입니다. 진은 군사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천하를 제어할 수가 있으니 이것보다 더 좋은 책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원컨대 숙고하여 대량을 포위하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좋다. 대량의 포위를 풀겠소." 일시적 위기를 모면하려는 미봉책이었던지 이듬해 위나라는 진을 배반하고 제나라와 종친했다. 분노한 진나라는 양후를 시켜 위를 치게 했다. 격렬한 공격을 했기 때문인지 위군 4만의 목을 자르고 장군 포연(暴鳶: 暴子)을 도망치게 하고 세 현의 땅까지 차지했다. 양후는 봉을 더했다. 다음 해에도 양후는 백기와 객경인 호상(胡傷)을 데리고 조.한.위를 좌충우돌로 치고 위의 권(卷)과 채양(蔡陽: 湖北省 棗陽縣 남서)과 장사(長社: 河南省 長葛縣 서쪽), 조나라의 관진(觀津:山東省 觀城縣 남서)을 탈취했다. 그런 다음 제나라를 치는 조건으로 조에게 관진을 돌려 주고 원군을 보냈다. 제나라 양왕은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어 소대를 시켜 진의 양후에게 살며시 편지를 보내게 했다.
-저는 행인들이 '진은 이제 막 갑병 4만을 조나라에 원군으로 주어 제나라를 치려 한다'고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만히 제왕에게 '진왕은 현명하고 계략에 숙달하며 양후는 지혜로워 매사에 능숙하므로 조에게 갑병을 4만씩이나 주어 제를 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단언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릇 삼진(三晋: 원래의 晋에서 韓.魏.趙 세 나라로 독립해 나갔다.)이 연합하도록 유도하는 일이 진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삼진은 1백 번이나 진을 배반하고 1백 번이나 진을 속이면서도 자신들은 신의가 없다고 생각지도 않고 불의하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이 제를 격파해서 조나라를 살찌게 한다 하시니 이건 어떻게 되는 일입니까. 필시 조는 진의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진이 불리해지는 이유의 첫째가 됩니다. 진의 참모는 반드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삼진과 초가 제나라를 치면 제는 격파될 것이고 삼진과 초 역시 지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삼진과 초를 쳐서 승리할 것이다.' 그런데 제나라는 피폐한 나라입니다. 천하가 이런 제나라를 치는 것은 마치 천균(千鈞)이나 되는 쇠뇌로 터지려는 종기를 쏘는 것과 마찬가지로 쉽게 멸망할 것이겠지만 삼진과 초를 지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그 이유의 둘째입니다.
"이것은 일리가 있다."
-진이 약간의 원군만 내 준다면 삼진과 초는 믿지 않을 것이고, 원군을 크게 내 준다면 삼진과 초는 진군에 제압되어 결국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나라는 두려워진 나머지 진을 좇지 않고 삼진과 초를 좇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이유의 셋째입니다. 진이 제의 땅을 할양받아 삼진과 초에게 주면 그들은 병사를 배치해 그곳을 지키게 될 테니 진은 결국 도리어 적을 만들어 놓는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이것이 그 이유의 네째입니다. 진이 삼진과 초를 도와서 제나라를 치는 것은 삼진과 초가 진나라를 이용해 제의 땅을 빼앗고 제를 빌미로 진나라 땅을 빼앗는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삼진과 초나라는 그토록 슬기로운데 진과 제는 어찌 그리도 어리석은지요. 이것이 그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어찌한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안읍(安邑: 韓의 땅)이나 얻어 잘 통치하면 아무 우환이 없을 것입니다. 진이 안읍을 보유하면 한은 반드시 상당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천하의 위장(胃腸)이라고 하는 상당을 얻는 일과 출병하여 무사한 귀환을 예측할 수 없는 일 중 어느 쪽이 유리합니까. 그래서 저는 제왕께 '진왕은 현명하고 계략에 숙달하며 양후는 지혜로워 매사에 능숙하므로 조에게 갑병을 4만씩이나 원군으로 주어 제를 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깊이 혜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다 읽은 양후는 입맛만 쩍쩍 다시다가 진격하지 않고 병사를 이끌어 귀향해 버렸다. 소왕 36년이었다. 상국 양후가 객경인 조(조)와 상의해 제나라를 쳐서 강(剛: 山東省 寧陽縣 북동)과 수(壽: 山東省)을 빼앗아 자신의 봉읍인 도읍(陶邑)을 확장하려고 했다. 이 때 위나라 사람 범수(范수)가 장록(張祿) 선생이라 자칭하면서 진의 소왕에게 유세했다. 양후가 삼진을 넘어 제나라를 치는 무모함을 비난하는 내용이었지만, 범수의 실제 목적은 이런 기회에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고 자신의 재능을 소왕에게 인식시키는 것에 있었다. 범수는 선태후가 제멋대로 정권을 휘두르는 일과 양후가 제후들 사이에서 권세를 떨치는 일과 경양군과 고릉군 등의 무리가 왕실보다 더욱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일의 불가함을 역설했다. 소왕도 깨닫는 바가 있었던지 상국 양후를 파문하고 범수를 등용했다. 경양군 등의 일족 모두를 함곡관 밖으로 밀어내 자기 봉읍에 가서 살도록 했다. 양후가 함곡관을 나갈 때 그의 짐수레는 1천 대가 넘었다. 양후는 자기의 봉읍인 도읍에서 죽었으며 거기에 묻혔다. 진나라가 다시 도읍을 거두어 군으로 삼았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양후는 소왕의 친외삼촌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켜 한때 천하에서 제호(帝號)를 사용케 하고 천하 제후 모두를 서쪽으로 향해 머리 숙이게 한 것은 오로지 양후의 공적이다. 그의 귀함이 극도에 달하고 부함이 넘쳐흐를 때 단 한 사람 범수의 지탄을 받더니 신분은 좌절되고 권세는 박탈되었다. 그는 근심과 번민 속에서 만년을 살다가 죽었다. 왕족의 일원인 그도 하물며 그리했거늘 타국 출신 신하의 경우에 있어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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