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11. 저리자 감무열전 樗里子.甘茂列傳
진나라가 동쪽의 여러나라를 쳐부수고 웅대한 제후국이 된 이후에는 저리자, 감무의 책략이 큰 역활을 했다. 그래서 제11에 <저리자 감무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저리자의 이름은 질(疾)이다. 진(秦)나라 혜왕의 이복 동생이며, 모친은 한(韓)나라의 공주다. 저리자는 변설이 유창하고 지혜가 풍부해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지혜주머니[智囊]라고 불렀다. 진의 혜왕 8년에 저리자에게 우경(右更: 泰의 제14 爵位名)의 작위를 주고 장군으로 삼아 곡옥(曲沃)땅을 치게 했다. 그곳 백성들을 모조리 내쫓고 성읍을 차지해 진의 판도로 들어오게 했다. 진의 혜왕 25년에는 저리자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조나라를 치게 했다. 조나라 장군 장표(莊豹)를 포로로 하고 인(藺: 山西省 離石縣 서쪽)을 빼앗았고, 이듬해에는 위장(魏章)을 도와 초를 쳐서 장군 굴개(屈개)를 깨고 한중의 땅을 얻었다. 진은 저리자를 봉해 엄군(嚴君)이라 불렀다. 진의 혜왕이 죽고 태자 무왕(武王)이 섰다. 장의.위장을 내치고 저리자.감무(甘茂)를 좌우의승상(丞相)으로 삼았다. 진이 감무를 시켜 한의 의양을 빼앗았다. 저리자에게 전차 1백대를 주어서 주나라에 들어가게 했다. 주나라에서는 군사를 내보내 그를 정중한 예의로 경의를 표했다. 초나라 왕이 그 소문을 듣고 '진나라 일개 손님'을 지나치게 받들었다고 화를 냈다. 세객 유등(游騰)이 주나라를 위해 초왕을 설득했다. "옛적 진(晋)의 지백(智伯: 晋의 鄕)이 구유(仇猶: 춘추시대의 작은 오랑캐 나라, 山西省 孟縣)을 칠 때 길이 험난하여 행군이 불편했으므로 대종(大鐘)을 주조해 이것을 광거(廣車: 적의 측면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戰車)에 실어서 보내는 것처럼 하여 광거 뒤에 군사를 좇게 해 결국 구유를 덮쳤습니다. 구유가 망한 것은 방심하여 방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제나라 환공(환公)이 채나라를 칠 때도 초를 주벌(誅伐)한다는 핑계로 실은 채를 덮쳤던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리 같은 나라입니다. 진이 저리자를 시켜 전차 1백대를 이끌고 주나라에 들어가게 했는데 주나라에서는 구유 채나라처럼 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긴 갈래창을 가진 병사를 앞세우고 강한 세뇌[여러 개의 화살이 잇달아 나가게 만든 활의 한 가지]를 가진 군사를 뒤로 배치해 저리자를 호위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은 그를 압송한 것이 됩니다. 주나라라고 해서 어찌 사직의 앞날이 근심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초왕은 그제서야 화를 풀었다.
진의 무왕이 죽고 소왕(昭王)이 즉위했는데 그는 저리자를 무왕보다 더욱 존중했다. 소왕 원년에 저리자는 장군이 되어 포(蒲: 衛의 邑, 河北省 長垣縣)을 쳤다. 포의 태수(太守)는 두려워하여 호연(胡衍)에게 구원을 청했다. 호연이 포를 위하여 저리자를 설득했다. "공께서 포를 치는 것은 진(秦)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위(魏)를 위해서입니까. 위를 위해서라면 좋습니다만 진을 위해서라면 이로울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그건 어째서 그렇소?" "생각해보면 위(衛)가 위(衛)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포를 치면 포는 화를 면하기 위해 위(魏)로 귀속될 것입니다. 위(衛)가 사기를 잃고 위(魏)를 따를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지난 날 위(魏)나라가 서하(西河) 바깥의 땅을 잃고도 회복하지 못한 것은 군대가 약했기 때문이지요. 지금 위(衛)나라가 위(魏)에 합병된다면 위(魏)는 반드시 강해집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진왕께서 귀공의 이번 군사행동이 진에게 해롭고 위(魏)에 이롭게 된다는 것을 진왕께서 감지하신다면 귀공께 상이 아니라 벌을 주실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란 말이오? 기왕에 공격하러 온 줄 알고 있는데 말이오." "공은 포를 용서하시고 치지 마십시오. 대신 제가 공을 위해 포로 들어가 위(衛)를 치지 않은 것은 모두 공의 덕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좋소, 그렇게 해 보시오." 그래서 호연이 포로 들어가 태수에게 말했다. "저리자는 포가 연약한 것을 알고 반드시 함락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말해서 공격하지 못하도록 해 드리지요." 포의 태수는 몹시 두려워하며 두 번 절을 하고 말했다. "제발 좀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수는 금 3백 근을 호연에게 내놓고 다시 말했다. "진나라 군사가 진정으로 물러간다면 위(衛)의 임금한테 말씀 드려 귀하가 위에서 봉읍을 받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호연은 포에서 금 3백 근을 받았으며 위에서 귀하게 되었다. 저리자는 포의 포위를 풀고 돌아가면서 대신 피지(皮氏: 魏의 邑, 山西省 萃陰縣 서쪽)을 쳤으나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다. 소왕 7년에는 저리자는 죽었다. 위남(渭南: 陝西省 峯陰縣 서쪽)의 장대(章臺: 臺名) 동쪽에 묻히기 직전에 그는 말했다. "내가 죽은 후 1백 년이 지나면 이 곳에 천자의 궁이 들어서서 내 무덤을 둘러쌀 것이다." 저리자 질의 집은 소왕의 무덤 서쪽 위남의 음향(陰鄕) 저리(樗里: 陝西省 渭南縣)에 있었다. 그래서 그를 세상에서 저리자라 부르게 되었다. 한(漢)이 일어나자 장락궁(長樂宮)이 그 무덤의 동쪽에, 미앙궁(未央宮)이 그 서쪽에 세워지고 무기고(武器庫)가 무덤의 정면에 세워졌다. 진나라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힘은 임비(任鄙: 秦의 力士名), 지혜라면 저리자다."
감무는 하채(河蔡: 楚의 邑, 安微省 鳳臺縣) 사람이다. 하채의 사거(史擧) 선생 문하에서 백가(百家)의 학설을 배우고 장의.저리자를 통해 진의 혜왕을 뵈었다. 혜왕은 그를 만나 보고 금세 그를 좋아했다. 장군으로 임명해 위장을 보좌해서 한중 땅을 공략케 했다. 그러던 중 혜왕이 죽고 무왕이 섰다. 장의와 위장이 진을 떠나 동쪽 위(魏)나라로 가버리고, 촉후(蜀侯) 휘(煇)와 그 재상 진장(陳壯)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진왕은 감무를 시켜 촉을 평정하도록 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때 진왕은 감무를 좌승상으로 저리자를 우승상으로 삼았다. 진의 무왕 3년에 왕은 감무에게 말했다. "과인은 삼천(三川: 伊水.洛水.黃河)까지 수레가 지나다닐 만한 길을 얻어 주실(周室)을 엿보고자 하오. 그렇게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소." 감무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위(魏)로 가서 맹약을 맺고 한(韓)을 치겟습니다. 상수(向壽: 宣太后의 一族)도 함께 가도록 해 주십시오." 감무는 위나라에 이르자 상수에게 말했다. "그대는 진나라로 돌아가 대왕께 이렇게 전해 주시오. '위나라는 저의 말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대왕께선 한나라를 치지 마십시오'라고 일이 이뤄지면 모두 그대의 공으로 돌리겠소." 상수가 귀국해 감무의 말을 왕에게 보고했다. 감무가 빈 손으로 돌아오자 왕은 식양(息壤: 秦의 땅, 湖北省 江陸縣 남쪽)까지 나가 감무를 맞았다. "그런데 한나라를 쳐서는 안 된다니 그 이유가 궁금하오." "한의 의양(宜壤)은 큰 고을이고 상당(上黨).남양(南陽)에도 재물과 양곡을 저축한 지가 오래입니다. 말은 현(縣)이라고 하나 실은 군(郡)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함곡(函谷)이나 오곡(五谷) 등의 험난한 곳을 지나 1천리를 행군해 공격하라 하시니 몹시 난처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한 장애가 있습니다." "더 심한 장애라니, 그게 무어요?" "옛적 효자로 유명한 증삼(曾參)이 노(魯)의 비읍(費邑)에 있었을 때 일인데, 노나라 사람 중 증삼과 이름이 똑같은 어떤 자가 살인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증삼의 모친에게로 달려와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모친은 전혀 동요됨이 없이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또 와서 증삼이 살인을 했다고 모친에게 일렀습니다. 그래도 증삼의 모친은 역시 태연하게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증삼의 살인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모친은 겁이 나서 베 짜던 북[저]을 던지고 담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어째서 그대는 그 얘기를 굳이 과인한테 들려 주는가." "그의 모친은 증삼이 어진 아들임을 굳게 믿고 있었지만 세 사람이 달려와서 고자질하자 모친도 끝내 믿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은 증삼처럼 어질지가 못합니다. 대왕께서 저를 믿는 마음 또한 증삼의 모친만 못합니다. 그러하니 저를 의심하는 사람이 어디 세 사람뿐이겠습니까. 저는 대왕께서 북을 던진 증삼의 어미처럼 저를 의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난 날 장의가 서쪽으로 파.촉의 땅을 병합하고, 북쪽으로 서하 밖의 땅을 개척했으며, 남쪽으로 상용(上庸)을 얻었지만 천하 사람들은 장의의 공이 크다 말하지 않고 선왕(先王: 惠王)의 현명함만 칭송했습니다. 위나라 문후(文侯)가 악양(樂陽)을 장수로 삼아 중산(中山)을 공격하게 하여 3년만에 함락시켰습니다. 악양이 돌아와 승전의 공을 논하게 되었을 때 문후는 그 동안 악양을 비방했던 문서 한 상자를 꺼내 보였습니다. 악양은 감격하여 두 번 절하고 아뢰었습니다. '이번 승리는 신의 공이 아니라 바로 대왕의 승리이십니다.' 대왕, 신은 나그네로 와 있는 신하입니다. 저리자[모친이 韓의 公主]와 공손석(公孫奭: 본시 韓의 公子)이 한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신을 끊임없이 비방하게 되면 대왕께선 반드시 저들의 말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왕께서는 위왕(魏王)을 속이게 되고 신은 공중치(公仲侈: 韓의 宰相)의 원망을 사게 될 것입니다." 진왕이 대답했다. "걱정마시오. 과인은 저들의 참언을 결코 듣지 않겠소. 맹세하리다." 진왕은 드디어 승상 감무를 시켜 의양을 치게 했다. 적의 수비가 완강해 감무는 5개월이 지나도록 의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아니나 다를까 저리자와 공손석 등이 감무를 맹렬히 비난했다. 결국 진왕도 그들의 비난을 받아들여 감무를 회군케 했다. 감무가 완강하게 주장했다. "대왕, 식양(息壤: 王과 甘茂가 맹세한 곳)은 아직도 저기에 있습니다." "아, 그랬었지. 맹세한 바가 있었지." 그렇게 되어 감무는 다시 돌아가 의양성을 맹렬히 공격했다. 결국 적의 목 6만을 베고 끝내 의양을 빼앗았다. 한의 양왕(襄王)은 공중치를 사자로 진에 보내 사죄한 뒤 화평을 맺게 했다. 무왕은 마침내 주나라에 도착했으나 거기서 죽고 말았다. 그의 아우가 뒤를 이었으니 그가 곧 소왕(昭王)이다. 소왕의 모친은 초나라 공주인 선태후(宣太侯)이다.
초의 회왕은 전날 진나라가 단양으로 쳐들어왔을 때 한이 구원해 주지 않은 사실에 앙심을 품고 한의 옹지(雍氏: 邑名, 河南省)를 포위했다. 한은 재상 공중치를 시켜 진나라에 그 위급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진에서는 소왕이 새로 즉위한데다 태후가 초나라 사람이므로 한을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공중치가 감무에게 매달리자 감무는 한을 위하여 소왕에게 진언했다. "공중치는 지금 진나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초나라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지금 옹지가 포위되었는데도 진의 군대가 효(효: 秦의 要塞, 河南省 효山)로 내려가지 않으면 공중치는 하늘 우러러 절망한 나머지 결국은 진으로 입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공숙(公叔: 韓의 公子)도 나라를 들어 남쪽으로 초나라와 합세해 버릴 것입니다. 초와 한이 하나가 되면 위나라 또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 세 나라가 진을 상대로 공격대형의 진을 치는 결과가 됩니다. 앉아서 남이 쳐들어오는 것을 기다리는 경우와 이쪽에서 남을 치는 경우 어느 편이 더 유리할지는 신도 알 길이 없습니다." "좋소. 군대를 효로 보내 한나라를 구원하시오." 그렇게 되어서 진군이 출동하자 초나라 군대는 곧 물러갔다. 진나라는 상수를 시켜 의양을 평정하고 저리자와 감무를 시켜 위의 피지(皮氏)를 치게 했다. 상수는 선태후의 외척인데다가 소왕과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함께 자랐으므로 진에서 증용된 터였다. 일찍이 상수가 초나라에 갔을 때 진나라가 상수를 중히 여긴다는 소문을 듣고 초에서도 상수를 극진히 대접했다.
상수가 의양을 지키다가 진나라를 위해 자진해서 한나라를 치려고 했다. 이 때 한의 공중치는 소대(蘇代)를 시켜서 상수를 달래게 했다. "금수도 몰리게 되면 수레라도 뒤엎는다고 했습니다. 귀공께서는 한나라를 깨뜨리고 공중치를 욕뵈이려 하시는데 그는 지금 나라를 들어 다시 진을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진으로부터 봉읍(封邑)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께선 초나라에다 진나라 해구(解口: 韓에 가까운 秦邑)의 땅을 주고 초의 소영윤(小令尹: 楚의 官名)을 두양(杜陽: 秦邑, 陝西省 麟遊縣의 북서)에 봉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진나라와 초나라가 합세해 다시 한을 친다면 한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이 망하면 공중치는결국 자기 사병을 이끌고서라도 진나라에 저항할 것입니다. 공께선 이 점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상수가 대답했다. "내가 진나라와 초나라의 힘을 합하려는 까닭은 한나라를 치려고 하기때문이 아니오. 그대는 나를 위해 공중치를 만나서 '진나라와 한나라는 화합할 여지가 있다'고 대신 전해 주시오." 소대가 다시 말했다. "저도 공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존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을 귀중히 여기는 자는 귀중하게 된다.'고 합니다. 왕께서는 공을 사랑하는 것이 공손석(公孫奭)만 못하고 공의 지혜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감무만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 두사람이 진의 정사(政事)에 관여치 못하고 오로지 공 혼자서만 왕과 함께 나라일을 보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 생각합니까. 그것은 두 사람이 왕의 신임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신임을 잃었다?" "공손석은 한나라와 짜고 감무는 위나라와 짜고 있기 때문에 왕이 신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진 초가 강대함을 다투고 있는 판국에 공이 초와 짜려 하고 계시지만 그것은 공손석이나 감무나 다를 바 없어 결국 같은 길을 걷게 될 전조일 뿐입니다. 남들은 초나라가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하는데 공은 그것을 부정했습니다. 이것은 공이 스스로 왕에 대하여 초의 태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일입니다." "예민한 지적이요." "그러니 공께서는 진왕과 함께 초의 변절에 대응하는 대책을 세우고 한과 친선하여 초에 대비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렇게 해야 우환이 없어집니다. 한나라가 전에는 나라를 들어 공손석에게 따랐고 나중에는 감무에게 나라를 맡겼습니다. 그 두사람은 공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 한나라는 결국 공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지금 공이 한과 친선하여 초에 대비코자 한다면 자기의 원수라도 필요에 따라서는 추천하기를 피하지 않는 공명정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옳은 말씀이오. 나도 한나라와 연합하기를 바라오." "감무는 한의 공중치에게 무수(武遂: 秦이 탈취한 韓邑. 山西省 臨汾縣 남서)의 반환을 약속하고 또 의양에서 포로가 된 백성을 돌려보내기로 내락했습니다. 지금 공이 부질없이 내놓지 않으려 해도 매우 난처한[무수와 의양은 본래 韓의 고을이었는데 진나라가 쳐서 빼앗았다. 의양의 땅을 한나라에 돌려 주면서 그 땅에 원래 살았던 한나라 백성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해준것이다. 진나라 소왕 원년에 무수를 돌려 주었다.]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무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놓아서는 안 되는데." "공은 어째서 진의 위세를 빌려 한을 위하여 영천(潁川)을 초에게 요구하지 않습니까? 영천은 본시 한의 땅으로 초에게 빼앗긴 땅입니다. 공이 요구해서 얻게 된다면 진의 위령이 초에 미치고 잃은 땅을 찾아 주었으니 한에게는 덕을 베푸는 일이 됩니다. 만일 요구해 얻지 못하면 한.초 사이의 원한은 베풀지 않고 두 나라가 모두 진의 환심을 사려고 할 것입니다. 진.초가 서로 강대해지기를 다투고 있는 때에 공이 점차로 초의 죄를 책하고 한을 진에 끌어들이도록 하는 일은 진을 위해 매우 유리한 계책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어떤 방법이 있겠소." "좋은 수가 있지요. 감무는 지금 위를 시켜서 제를 치려하고 공손석은 한을 시켜 제를 치려 합니다. 지금 공께서는 의양을 공략해 공을 세웠으니 초 한을 이쪽으로 끌어들여 안심시키고 제와 위의 죄를 책하시지요. 이렇게 하면 공손석과 감무는 꼼짝 못할 것입니다." 감무는 마침내 진의 소왕에게 말해 무수를 한에게 돌려 주었다. 상수와 공손석이 이 문제를 가지고 반대했으나 이들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다. 이들 두 사람이 이로 인해 감무를 원망하고 헐뜯었다. 감무는 두려워서 위의 포판(포阪: 山西省)을 치는 일을 중지하고 진에서 도망쳤다.
저리자가 위와 강화하고 전쟁을 중지했다. 감무는 진은 도망쳐 나와 제로 가서 소대를 만났다. 소대는 때마침 제를 위해 사자가 되어 진으로 가려 하고 있었다. 감무가 사정했다. "저는 진에서 죄를 얻고 주살될까 두려워 도망했으나 몸둘 곳 조차 없습니다." "거참, 딱하게 되셨군요."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여자와 부유한 여자가 한자리에 모여 길쌈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여자가 '나는 초를 살 돈은 없지만 다행히도 당신의 촛불에는 남는 빛이 있으니 제발 그 남는 빛을 나누여 쓰게 해 주십시요. 당신의 밝음에 손상이 가지 않고 나도 편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곤궁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진으로 사신 가는 요로의 인물입니다. 저의 처자가 그곳에 있으니 제발 당신의 남는 빛으로 그들을 구해 주십시요." "그렇게 해 보지요." 소대가 승낙하고 사신으로 진에 갔다. 소기의 일을 처리한 소대는 그제서야 진왕에게 감무에 대해 말했다. "감무는 비상한 인물입니다. 진에 있을 동안에는 대대로[惠王.武王.昭王의 三代]중용되고 효의 요새에서 귀곡(鬼谷)에 이르기까지의 험준한 지세와 평탄한 곳까지 그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가 만약 제를 시켜 한 위와 맹약을 맺게 하고 도리어 진을 치게 한다면 진에게 하등 유리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어떻게 대우하는 게 좋겠소." "대왕께서 그에게 봉록을 후하게 내리어 감무를 맞이해 들이는 게 좋습니다. 그가 오게 되면 그를 귀곡에 두고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좋은 생각이오." 진왕은 소대의 말을 받아들여 감무에게 상경(上卿)의 벼슬을 내리고 재상의 인수를 보내어 그를 맞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감무는 진으로 가지 않았다. 소대가 이번에는 제나라 민왕에게 부탁했다. "감무는 현인입니다. 지금 진에서는 그에게 상경의 벼슬을 내리고 재상의 인수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감무는 사양하고 진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 감무를 대왕께서는 어찌 우대해 쓰지를 않으십니까." "좋소. 그를 부르겠소." 제왕은 즉시 감무에게 상경의 벼슬을 내리고 제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자, 진나라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몰수했던 감무의 집안을 복구시켜 주는 등 우대하며 그를 데려가려고 제와 다투었다. 마침 감무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초의 회왕은 진나라와 혼인관계를 맺고 새로이 친선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진은 재빨리 초나라로 사람을 보내어 감무를 돌려 주도록 청했다. "원컨대 감무를 진으로 보내주시오." 초왕은 숙고하다 말고 범현(范현)에게 물어 보았다. "과인은 진나라에다 재상을 추천하고 싶은데 누가 좋겠소?" "신은 그런 인물을 추천할 만한 식견이 없습니다." "감무를 추천하면 어떻겠소?" "그건 불가합니다." "불가? 어째서 그렇소?" "감무의 스승 사거라는 인물은 하채(下蔡)의 문지기로서 크게는 인군을 섬기지 못하고 작게는 가정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구차하고 비천하면서도 청렴 정직하지도 못했다면 그 인물됨을 알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감무는 바로 그런 인물을 묵묵히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혜왕이나 명찰한 무왕이나 능변의 장의까지도 감무를 잘 대접했으며, 허다한 관직을 역임하면서도 감무는 죄를 입은 적이 없습니다." "감무가 그토록 현명한 인물이오?" "그렇게 때문에 그를 진의 재상으로 삼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논리가 그렇소?" "진나라에 현명한 재상이 있으면 초에 이로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대왕께서는 전에 소활(召滑)을 월나라 재상으로 추천했다가 소활이 대왕의 은혜를 생각해 월나라 사람 장의(章義)에게 내란을 일으키게 해 월이 어지러워진 틈을 타 우리 초나라가 남쪽으로 여문(여門: 嶺南地方으로 가는 要路)을 막고 월의 강동(江東)을 우리 속군(屬郡)으로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대왕께서는 그런 수단을 월에는 쓰실 줄 알면서 왜 진에 쓸 것은 잊고 계십니까." "그래서 감무를 진으로 보낸다면 안 된다는 뜻이구려." "차라리 대왕께서 추천하실 생각이라면 상수를 추천하십시오." "상수를?" "상수는 진왕과 친밀한 사이로 어렸을 때에는 함께 옷을 입었으며 성장해서는 같은 수레를 타고 국사를 논했습니다. 상수는 고만고만한 인물이므로 상수가 진의 재상이 되어야 초나라에는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초왕이 진에 사자를 보내어 상수를 진의 재상으로 삼을 것을 강력히 추천했다. 진은 드디어 상수를 재상으로 삼았고, 상수는 초에 대하여 고마워했다. 그로 인하여 감무는 끝내 진나라로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감무에게는 감나(甘羅)라는 손자가 있었다. 감나는 나이 12세에 진의 재상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를 섬겼다.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는 연(燕)을 회유하려고 강성군(剛成君) 채택(蔡澤)을 사신으로 연에 보냈다. 채택이 사명을 끝내고 3년 만에 돌아오면서 연왕 희(喜)의 태자 단(丹)을 볼모로 데리고 왔다. 진은 즉시 장당(張唐)을 연으로 보내 연의 재상이 되게 한 뒤 연과 합세하여 조나라 하간(河間)의 땅을 넓히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당이 여불위한테로 와서 사정했다. "저는 일찍이 진의 소왕을 위해 조나라를 쳤습니다. 조는 저를 원망해 '장당을 잡는 자에게는 사방 1백리의 땅을 주겠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지금 연으로 가자면 반드시 조나라를 거쳐야 되는데 무사히 제가 부임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갈 수 없다는 얘기요?" "다시 한 번 고려해 주십시오." 문신후는 불유쾌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요할 수도 없었다. 가타부타 말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감나가 쪼르르 문신후 앞으로 달려왔다. "어른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디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내가 강성군 채택을 시켜 연나를 섬기게 한 지 3년이 되어 연나라 태자 단을 이미 진의 인질로 데려왔다. 그래서 즉시 장경(張卿: 鄕은 張唐의 字)을 청해 연으로 가서 재상이 되라 했건만 그는 도무지 가지 않으려 한다." "그 일 때문이라면 제가 가서 장경을 달래 보지요." "무어라고? 내가 청해도 듣지 않는데 어린 네가 무슨 재주로 그를 연으로 가게 한단 말인가. 그냥 물러가거라." "그래도 항탁(項탁)은 불과 일곱 살에 공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열 두 살입니다." "부질없는 짓이다." "저를 한 번 시험이나 해 보시지요." "맘대로 하려무나." 그래서 감나는 장경을 만났다. "그대의 공적은 무안군(武安君: 白起)과 비교해 어느 쪽이 더 큽니까?" "무안군은 남쪽으로 강한 초를 꺽고 북쪽으로 연 조를 위협하고, 싸우면 이기고 치기만 하면 취하고 성읍을 공략한 것이 부지기수인데 어찌 나의 공적과 비교할 손가." "응후(應侯: 范추. 본래 魏나라 사람으로 秦에 가서 昭王을 설득해 재상이 되고 應侯에 封해짐)가 진에 등용되었을 때와 지금의 문신후가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것과 어느 쪽의 권세가 더합니까." "그야 문신후겠지." "분명히 문신후지요?" "그래." "응후가 조를 치려고 했을 때 무안군이 그것을 비난했다가 해직된 뒤 함양(咸陽: 秦의 國都)에서 7리 떨어진 두우(杜郵: 陝西省 咸陽縣 동쪽)에서 당장 피살되었습니다. 그런 혁혁한 공훈자도 문신후의 심기를 건드리면 죽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이 연의 재상이 되어 가라고 문신후 자신이 청했는데도 가지 않으니 제가 보기에는 당신이 어디서 죽게 될지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장당은 곰곰 생각해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네 말대로 길을 떠나겠다." 장당은 길 떠날 채비를 하면서 출발 날짜를 정했다. 감나가 돌아와 문신후에게 보고하니 문신후는 깜짝 놀랐다. "네가?" "그렇지만 저에게 수레 다섯 대를 먼저 빌려 주십시오. 장경의 안전을 위해 미리 조나라에 다녀오겠습니다." "어린 너로선 놀라운 일이다!" 문신후가 감탄하면서 시황전 어전으로 들어 아룄다. "옛날 감무의 손자 감나는 어린 나이지만 무척 영특합니다. 명가의 자손인데다 매우 영리하여 제후들 사이에서는 그의 명성이 자자합니다. 장당이 병을 핑계대고 연에 가려 하지 않는 것을 감나가 설득해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가 지금 조나라에 장당의 연나라행을 통고하러 가겠다고 하니 보내 주시지요." 시황제도 감나를 불러 보고는 대견해 마지 않으며 정식 사자로서 조나라로 가게 했다. 감나는 조왕을 만나서 말했다. "대왕께서는 연의 태자 단이 진에 들어와 볼모로 있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들었다." "장당이 연의 재상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지." "연의 태자 단이 볼모로 진에 들어온다는 것은 연이 진을 속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장당이 연의 재상이 되는 것은 진이 연을 속이지 않겠다는 증거입니다." "그럴 테지." "연과 진이 서로 속이지 않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조를 쳐서 하간의 땅을 넓히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무어라고?" "대왕께서는 차라리 이 기회에 저를 통해 하간의 다섯 성시(城市)를 넘겨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시면 연의 태자를 돌려보내고 진.연의 국교를 끊으며 또 진나라와 조나라가 함께 약한 연나라를 쳐서 땅을 넓히도록 제가 주선하겠습니다." "좋다." 조왕은 그 자리에서 다섯 성시를 쪼개어 감나에게 주었다. 진에서는 연의 태자를 돌려보냈다. 조에서는 자연스럽게 연의 상곡(上谷: 察哈미省 延慶縣 북쪽) 30성시를 쳐서 그 중에서 11성시를 진나라에 주었다. 감나가 귀국하여 보고하니 진은 이에 감나를 봉하여 상경(上卿)으로 삼고 전날 감무의 것이었던 전지(田地)와 주택을 되돌려 주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저리자는 진나라 혜왕의 아우라는 골육지친이어서 중용된 것은 당연한 이치라 하겠으나, 그가 지혜 있는 자로 칭찬을 받았으므로 그의 등용은 일리가 있다. 그의 사적은 꽤 많이 채록된셈이다. 감무는 하채의 여염집 출신으로 일어나 제후들 사이에 그 이름을 드러내 강한 제나라와 초나라에 중용되었다. 감나는 소년이었지만 하나의 기계(奇計)를 생각해 내어 후세에까지 그 명성을 칭송받았다. 비록 행실이 돈독한 군자는 아니지만 역시 전국시대의 책사(策士)임에는 틀림없다. 진나라가 강대했던 때에는 천하가 도도하게 권모술수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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