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1부 한문학의 대가들과 그 유산
백세의 스승, 김시습
1.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다
김시습(1435~1493)은 『금오신화』로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려 말기부터 설화에서 가전체문학, 그리고 전기의 형태로 이어지던 서사문학이 『금오신화』로 말미암아 비로소 고전소설의 탄생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 시대적 모순에 저항했던 '문제적 개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문학과는 다른 방외인의 문학을 산출해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세종이 불러 재주를 시험하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이요, 호는 매월당·동봉·청한자·벽산청은·췌세옹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그는 신라 원성왕의 동생인 김주원의 후손인데, 여러 대에 걸쳐 무관직에 종사하던 한미한 집안이었다. 조부 겸간은 오위부장을, 부친 일성은 음보로 충순위를 지냈다. 그의 모친은 울진의 선사 장씨였다. 김시습은 유년 시절을 대부분 서울에서 보냈다. 그러나 성장의 공간이요 학문의 공간인 이곳도 나중에는 좌절과 번뇌의 공간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서울의 반궁, 곧 지금의 성균관 북쪽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8개월만에 능히 글을 깨우치자, 이웃집에 사는 집현전 학사 최치운은 그의 이름을 '시습'이라 하였다. 이는『논어』의「학이편」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3세 때에는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아 외할아버지에게 시 짓는 법을 배웠다. 유모가 보리를 맷돌로 갈자 "비도 없는데 어디서 천둥소리 나는가 /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에 흩어지네" 라 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김시습은 후세 사람들이 '생지지질'이라고 일컬을 만큼 영민한 자질을 일찍부터 드러냈다. 5세 되던 해 김시습은 이웃에 사는 수찬 이계전의 문하에 들어가 『중용』과 『대학』을 배웠다. 하루는 정승 허조가 찾아와 '노'자를 넣어 시를 짓게 하였다. 그랬더니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노목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라고 시를 지어 뭇 사람들을 탄복시켰다. 이 소문은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들어갔다. 그러자 세종은 승정원 지신사 박이창에게 명을 내려 김시습을 불러다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박이창은 김시습을 불러온 자리에서 "동자의 글재주는 백학이 하늘 끝에서 춤추는도다" 라는 글귀에 대구를 맞추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린 김시습은 곧바로 "성군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에서 번득이는 듯하다"라고 시구를 지었다. 그밖에 몇 번의 시험이 있었지만 막힘이 없이 지어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다. 이 일을 전해들은 세종은 기뻐하며 김시습에게 비단 50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고 싶으나 남이 들으면 놀랄까 두려우니,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함을 기다려 장차 크게 쓰겠다." 이때 김시습은 하사받은 비단 50필의 비단 끝을 각각 이어서 한쪽 끝을 허리에 차고 유유히 끌고 대궐문을 나갔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김오세'라고 불리웠다 한다. 김시습은 13세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뒤 후진양성에 힘쓰던 김반의 문하에서 사서를 배웠고, 또한 국초의 사범지종으로까지 불리던 윤상에게 제자백가를 두루 배웠다. 그의 타고난 재질은 이들 스승을 통하여 더욱 갈고 닦여졌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그리 순탄치 못하였다. 15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외가의 농장에 내려가 몸을 의탁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 전에 다시 그의 외숙모마저 세상을 떠나 그는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이 무렵 그의 아버지까지 중병이 들어 집안 일을 거의 돌볼 수 없게 되자 곧 계모를 맞이하게 되었다. 김시습도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과 혼인하였다. 원래 김시습은 재주가 뛰어났지만 가문이 한미한 탓에 정규학교 사부학당에서 공부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수학하는 신세였다. 이렇듯 학문에 몰두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 즉 집안의 한미함과 가정의 불행으로 그는 과거시험을 한 번도 치르지 못한 채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가 오로지 학업에만 열중하였다.
어찌 속세를 미워할 것인가
김시습이 21세 되던 해에 그의 일생을 좌우할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일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대성통곡하며 읽고 있던 책을 모조리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법명을 설잠으로 한 후 그는 전국을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평소부터 벼슬살이가 쉽지 않음을 알았던 그는 단종양위 사건을 계기로 입신출세의 길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산수를 유람하며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택하게 되었다. 이제 서울은 그에게 출세를 보장해주기는커녕 저주와 울분을 가져다주는 곳이었다. 김시습은 먼저 관서지방을 유랑하면서 이때 지은 글을 모아 24세에 「탕유관서록」을 엮었다. 다음으로는 관동지방으로 가 금강산, 강릉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26세에는「탕유관동록」을 엮었다. 그는 다시 발길을 남으로 돌려 삼남지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풍부한 물산과 넉넉한 인심을 보고 놀라며 국왕인 세조의 치적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29세에는 삼남을 기행하면서 쓴 글을 모아 「탕유호남록」을 정리하여 엮었다. 북에서 남으로 정처없이 유랑의 길을 떠난 지 어느덧 9년째였다. 김시습은 29세(세조9) 되던 해 가을, 책을 사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효령대군을 만났다. 그는 대군의 간청을 못이겨 세조가 벌이고 있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그 일도 얼마 가지 않았다. 김시습은 자신이 경멸하던 인사들이 중앙 관직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저주하며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31세(1465) 봄에는 경주 남산의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산실을 짓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해 3월에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하라는 세조의 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치하와 찬시를 지어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그에게 원각사에 머무르도록 하였으나, 그는 여러 날을 보내고는 재물을 기울여 책을 사서 서울을 떠났다. 세조가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지만, 끝내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경주로 내려갔다. 그가 잠시 왕의 명을 받들어 서울로 올라왔던 것은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조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풀렸고, 그에게 아직 벼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 현실에 대한 그의 긍정적 인식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지금의 경주 남산)의 금오산실은 용장사였던 듯하다. 『동경잡기』를 보면, 그가 머물던 곳이 용장사의 옛터이며 그가 기거하던 집이 '매월당'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37세까지 약 7년간을 머무르게 되는데, 이 시기는 그의 가장 정력적인 활동기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금오신화』가 이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 밖에도「유금오록」과 집구시인「산거백영」(1468)도 이곳에서 지어졌다. 김시습이 당호를 매월당이라 한 것은, "매화의 달 그림자가 창에 가득하다"는 시구를 통해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동경잡기』가 지어진 당시에도 매월당의 옛터 뜰 아래에 꽃이 있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김시습이 살던 그 시기에는 용장사에 염불소리와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이 함께 어우러졌을 것이다. 금오산 생활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금오산에 거처한 이래 멀리 떠나서 놀기를 즐겨하지 않았고, 날씨가 추울 때는 질병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다만 바닷가를 즐겨 노닐고 들판을 마음대로 거닐며 매화와 대나무를 찾아 벗삼고 늘 시를 읊조리고 취하여 스스로 즐겼다.
비록 병을 앓긴 했지만 김시습에게는 금오산에서 보낸 이 시기야말로 가장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유유자적했던 시기였던 듯하다. 금오산실에서 사색과 번뇌를 하며 병마와 싸우던 김시습은 예종에 이어 새롭게 성종이 즉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자, 37세가 되던 해 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는 그와 친분이 두터운 서거정이 예문관 대제학을, 정창손은 영의정, 김수온은 좌리공신, 노사신은 영돈녕부 등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이를 안 그는 이듬해 가을 성동에 폭천정사를 짓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다음은 이때의 심정을 읊은 시 일부이다.
나이 들어 성 동쪽 변두리에 거처하니 수석이 여산보다 아름답구나. 한암을 의지하여 집을 짓고 좁은 거처에서 몇해를 지냈도다. (...) 명리의 세상을 한번에 박차버리니 만사가 모두 한가로울 뿐. 북쪽 창 아래서 의젓히 웃으며 스스로 기꺼워 즐겨하도다. (...) 세상이 이미 나와 뜻이 다르거늘 내 어찌 속세를 미워할 것인가. (...) 비록 인수를 차는 영화는 누리지 못하나 마음은 한가로우니 만사가 흡족하구나. 도리어 세상 사람을 탄식하노니 흡사 개미떼 같은 세상이구려. (...) - 「귀전원시」, 5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번잡한 속세를 벗어난 자신의 신세와 생활을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속의 갈등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는 서울 시내를 왔다갔다 하면서 광인 행세를 가끔 했다. 시정의 상가를 지나가다 우두커니 서 있거나 길거리에서 남이 보는데도 버젓이 오줌을 누었다. 아이들은 그런 그를 놀리며 돌맹이를 던지면서 뒤쫓아다녔다. 김시습의 친구 남효온이 지은 『사우명행록』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하루는 그가 술을 마시고 지나다가 영의정 정창손을 보고 "너 종의 신세가 편안하냐"고 말했다. 하지만 정창손은 못 들은 체하며 그냥 지나갔다. 이율곡이 지은 유일한 전인 「김시습전」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김시습이 벽제소리를 울리며 대궐에 가는 서거정을 발견했다. 김시습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행차의 앞을 가로막으며, "강중(서거정의 자)아, 편안하신가" 하고 말하였다. 서거정이 웃으며 행차를 멈추고 응대하자 사람들이 놀랐다 한다. 김시습은 산 속에서 생활할 때도 몇 두락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었으나, 심은 벼의 이삭이 나오자 술에 잔뜩 취한 채 낫을 휘둘러 모조리 베어버린 뒤 통곡하기도 하였다. 또한 나무를 깎아 시를 써놓고 읊조리다가 이내 곡을 하며 깎아버리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종이에 시를 써서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버리기도 했다. 또한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을 나무에 조각하여 책상 위에 놓고 종일토록 보다가 내다버리기도 하였다. 김시습의 이러한 광인 행세는 세상이 자기의 뜻에 맞지 않음에 대한 저항으로 보인다. 지난날의 친구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 영화를 누리는 데 비해 자신은 그렇지 못한 비참한 처지에 있음을 알고는 크게 실망한 데서 오는 몸부림이었으리라. 그는 10여 년 동안 성동의 폭천정사 외에도 양주에 있는 수락산의 수락정사에서도 오래 생활하였다.『동국명산기』에는 "수락산이 도봉산의 동쪽에 있는데 그 꼭대기에 김시습의 옛 거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도를 단련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이 산의 경치를 몹시 아꼈다고 전한다.
목메어 우는 한계의 물아
김시습은 47세 되던 해에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날의 죄과를 뉘우치는 제문을 짓고는, 주위 사람의 권유로 안씨 집안의 딸과 혼인하여 환속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 되어 부인이 죽고 말았다. 더욱이 이듬해에 '폐비윤씨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럽자 그는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환속에 실패한 만년의 불행과 실의는 젊었을 때 유랑과는 사뭇 달랐다. 그로 하여금 탄식 속에서 속세를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정치현실의 좌절보다는 오히려 가정적인 비극이었던 듯하다. 관동 땅에 갔을 때 당시 양양부사로 있던 유자한과 교유하며 주고받았던 편지(상유자한서)속에서 그는 세상에 머무를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를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처에 관한 것이고, 두 가지는 자신의 호구지책에 관한 것이다. 다음의 시에는 가정적 불행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오십이 되어도 자식 하나 없으니 남은 내 생애가 가련하기만 하구나. 어떻게 나쁜 운수가 좋아지리오 사람도 하늘도 원망하지 않겠네. - 「자탄」
김시습은 관동으로 간 뒤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각 지방으로 전전하며 설악산·춘천·강릉·한계·청평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육경자사를 끼고 관동의 명산과 물을 찾아다니면서 지방의 젊은이들을 계몽, 훈도하거나 산수를 완상하며 시를 짓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머무는 곳마다 자취를 남겼으니, 각종 문헌에는 매월당 김시습에 관한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춘천 청평사의 남쪽 마을인 세향원이나 설악산의 오세암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청평사는 원래 고려시대 때 이자현이 머물면서 번성한 절이다. 이자현은 이곳에 여러 암자와 문수정원을 지었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때에는 나옹화상이 2년간 머물렀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김시습이 잠시 은거하였고, 명종 때에는 보우선사가 절을 크게 짓기도 하였다. 한편, 설악산 가운데 내설악은 김시습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다. 인제를 지나 한계령에 이르는 길에 있는 한계천을 그는 '오열탄' 이라 부르며 "목메어 우는 한계의 물아, 빈 산을 밤낮 흐르네" 라는 시구를 남기기도 하였다. 내설악의 대표적인 명승지인 백담계곡에 있는 오세암은 원래 관음암으로 불렸는데, 매월당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의 고승인 보우선사, 그리고 근세에는 만해 한용운 등으로 널리 알려진 암자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설정선사가 부모를 잃은 5세 된 조카를 잠시 절에 남겨둔 채 월동 준비를 하러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폭설로 길이 막혀 이듬해 3월에야 돌아와 보니,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 아이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한다. 이 일로 인하여 관음암은 오세암으로 바꿔 불리게 되었다. 김시습이 삶을 마감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충청도 홍산(지금의 부여)의 무량사였다. 이때 그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던 듯하다. 다음 시는 그가 병상에 누워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지은 시들 가운데 한 수이다.
봄비가 흩뿌리는 이삼월이라 몹쓸 병 겨우 지탱하며 선방에 앉으니 인생을 묻고 싶네, 서쪽에서 온 뜻을. 하지만 두려워라 다른 중이 떠들까봐. - 「무량사와병」
김시습은 이곳 무량사에서 59세 되던 해 3월에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율곡 이이가 지은「김시습전」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안치해두라고 하였다 한다. 그의 유언에 따라 3년이 지난 뒤 그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부처라고 경탄했다 한다. 그 뒤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와 부도를 세우고 안치하였다. 율곡은 그 글에서, 절의를 드러내고 윤기를 세운 것이 해와 달의 빛과 다르지 않다며 그를 일러 "백세의 스승"이라 하였다. 율곡의「김시습전」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이미 자신의 노소의 자화상을 두 점 남겼으며 자찬을 지었다고 한다. 그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너의 형상은 지극히 작고 너의 말버릇은 지극히 어리석으니 너를 굴헝 속에 두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의 생애가 두 글귀에 집약되어 있는 듯하다. 그런데 현재 무량사에 걸려 있는 그 화상이 과연 그가 직접 그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화상은 오랫동안 절간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홍산현감 곽시가 절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한다.
2. 김시습의 사상과 문학
김시습은『금오신화』의 작자로 알려졌지만 뛰어난 시인인데다가 유불선에 대한 입장과 생각을 나타내는 글을 다수 남겨 조선 초기의 문학과 사상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문집으로는『매월당집』이 있으며, 이 밖에 전기소설집인『금오신화』가 있다. 그의 사상적인 실상은 대부분 문장을 통하여 밝혀져 있지만, 수많은 한시에서도 그의 생애와 사유세계를 찾아볼 수 있다. 김시습을 가리켜 이이는 '심유적불'이라 하였고, 이자는 '행유적불'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의 사상이 유교와 불교의 두 요소가 서로 뒤섞여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이를 두고 퇴계 이황은 "세상을 피하고 괴이한 짓을 하는 하나의 이인"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본을 유교에 두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는 산사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지만 불교를 크게 좋아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산림처사로 자처하였다. 다음의 글에서 그러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본디 불교·노장과 같은 이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중들과 짝하게 된 것은 그들이 원래 물외인이요 산수도 물외경이라, 내가 물외에 놀고 싶어서 중들과 더불어 산수 사이를 노닐었습니다. - 「상유자한서」
유교적인 사유체계를 기초로 삼아 거기에 불교사상을 적용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조선 초기 유교와 불교가 교체되는 과도기에 살았던 신흥지식인으로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당연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국문학계에서는 이처럼 불문에 의지한 것을 두고 가정과 벼슬, 그리고 돌아갈 고향을 갖지 못한 그가 생활의 방편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가 불문에 의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불교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유가의 합리주의로 불교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자기 합리화의 논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에게서 사상의 괴리를 엿볼 수 있으니, 모순된 현실의 삶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김시습의 인간적인 약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율곡 이이는 김시습이 불가의 심오한 뜻을 두루 통하여 비록 노승, 명승이라도 그의 예봉을 당해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김시습이 저술한 『잡저제일범십장』에는 10장으로 된 문답식 불교이론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 내용은 부처의 자비정신을 제대로 갖춘 나라의 임금만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중생을 구제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김시습은 어디까지나 불교를 유교적인 논리로 해석하여 정치를 올바로 실현하는 방편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는 또한 불승은 국정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 밖에 그가 불교에 관해 저술한 것으로 「묘법연화경별찬」, 「십현담요해」등이 있다. 김시습은 술을 즐겨 마셨으니 계율을 지키고 규칙적인 금욕생활을 고집하는 승려라기보다는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추구하는 사상가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그는 「신귀설」, 「태극설」,「천형」등을 통하여 불교와 도교의 신비론을 부정하고 적극적인 현실론을 펴고 있다. 실제로 도선사상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었으며 선도를 수련을 통하여 체득한 인물로 알려진다. 『해동전도록』이나 『해동이적』에는 그가 도교적 인물로 기술되어 있을 정도이다. 김시습은 대체로 유교사상이 드러나는 글을 많이 썼다.「고금제왕국가흥망론」,「고금군자은현론」,「고금충신의사총론」에서는 치국평천하의 원리를 말하였고,「인재설」,「생재설」,「명분설」에서는 경세제민의 방법을 논하였다. 또한「인군의」,「인신의」,「애민의」,「덕행의」에서는 경전과 고금 성현의 논설을 비판하고 주석하였다. 이 가운데「고금군자은현론」에서는 성현이 세상에 나가거나 은둔하는 것은 도를 행할 수 있는 의로운 세상이냐 도를 행할 수 없는 불의의 세상이냐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도를 행할 수 없을 때는 본인만이라도 깨끗이 하는 것이 어진 자의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단종의 양위사건 이후 세상을 등진 이유를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삶의 자취를 시로
김시습의 문집 『매월당집』의 23권 가운데 15권이 시로 채워져 있다. 현재 시문집에 전하는 시는 2,200여 수에 이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다. 남효온은 『사우명행록』에서 "매월당의 시는 수만 편에 이르나 거의 흩어졌다"고 하였다. 이율곡도 「김시습전」에서 그의 시문은 십분의 일 정도만 남았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김시습의 작품들을 보면 당연히 문장보다 시가 뛰어나며, 고체시보다 근체시가 더 뛰어나고, 그 가운데 율시가 뛰어나다. 더욱이 다양한 시체를 창작할 정도로 그의 시적 능력은 대단했다. 그에게 있어서 시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자취이자 정신적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였다. 김시습만큼 모든 것을 시로 나타낸 시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는 시를 쓰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시에는 그의 정서나 감정뿐만 아니라 생활에 관한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유가적 문학관으로 본다면, 문장은 도를 위주로 삼아야 하며 문장으로 나라의 다스림에 올바르게 기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시는 문장보다 중요시되지 않았다. 시는 여기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온통 시에 몰두한데다가 불문에 의지한 탓에 기존의 사회적 규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행적이나 시작에 대해 후대 사대부 문인들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시습의 시에는 감정을 자연발생적으로 표출하는 시들이 많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술회할 때도 대부분 시로 드러냈다. 대표적인 시는 「여민」6수로, 그는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썼던 편지글 「상유자한서」에서 일찍이 밝혔던 자신의 생애를 이 시에서 그대로 그리고 있다.
조상 제사 못 받들어 한스럽기 그지없네. 본래 기약한 뜻 저버릴까 염려했네. 세상 맑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임금의 부르심이 오지 않았소. 몸과 세상 어그러짐이 이렇게 심한데 세월은 덧없이 흘러만 가네.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긴다면 반드시 나쁜 운명 기울어질 때 있으리라.
김시습은 이 시에서 몸과 세상이 어긋남을 한탄하며 세월이 자꾸 흐르는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하늘에 이것을 호소하는 심정은 아직 세상살이에 미련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시에는 이러한 심리적인 갈등이 잘 드러난다. 그의 또 다른 시에는 고금의 흥망성쇠에 눈물 짓고 역사 속의 어진 임금을 추모하는 회고의 정이 서려 있다. 그는 또한 역사, 시간 등의 소재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대부분 방황·굴절·원망의 심정을 그리고 있다. 그의 시에는 사랑이나 고향을 노래하는 시는 거의 없다. 대신 그가 속세를 버리고 자연과 벗하며 평생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자연을 노래한 시들이 많다. 김시습의 시 가운데 후세의 평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각종 시 선집에 오르내리는 작품은 20여 수 정도이다. 다음 시는 생각이 깊고 뛰어나 초매하다는 평을 받은 것이다.
저녁 되자 산빛이 하도 좋아서 옛 역 다락에 올라보았네. 말이 우니 사람은 멀리 떠나고 물결 치는 노젓는 소리 부드럽구나. 유공의 흥취도 얕지 않은데 왕찬의 시름도 가시지 않네. 내일 아침 관문 밖에 나갈 때에는 구름 가에 여러 봉우리 빽빽하겠지. - 「등루」
자연을 멀리 바라보며 그 속에서 느끼는 심정이 마지막에 가서는 아련히 먼 산까지 뻗어난다. 애써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런 시정이 잘 드러난 시이다.
아이는 잠자리 잡고 늙은이는 울타리를 고치는데 작은 시내 봄 물에는 물새가 멱을 감는다. 청산은 끝났지만 돌아갈 길은 멀어 등나무 한 가지 꺾어 비스듬히 메고 가네. - 「산행즉사」
아이와 노인의 정겨운 모습이 그려지고 평화롭게 시내에서 멱을 감는 물새가 눈앞에 다가온다. 그러나 시인이 걷는 길은 끝이 없다. 등나무 지팡이를 메고 가는 모습은 방랑하는 시인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다. 고향과 가정을 온전히 가져보지 못한 시인에게는 앞의 두 구절이 마음에 간직하고 싶은 꿈일 지도 모른다. 한편 그의 시에는 어렵게 살아가는 농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사회비평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호가」, 「영산가고」, 「기농부어」,「산여」 등이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의 글「애민의」에서는 민심이 돌아오면 만세에까지 군주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민심이 떠나가면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필부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백성을 사랑해야 통치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자갈밭엔 바위돌이 많고 높고 낮은데 등라 덩굴 얽혀, 땅은 척박한데 나무만 무성하고 밭두둑 높아 곡식이 자라지 않네. 굶주린 까마귀 나무 끝에서 울고 여윈 송아지 언덕에 누워 있네. 비록 이같이 깊은 산속일지라도 해마다 세금이야 면할 길이 있겠는가. - 「산여」
한 해 동안 몰아친 비바람 고생이 얼마더냐. 온갖 세금 다 바치고 나머지 겨우 창고에 들이면 무당과 중은 굿하라 적선하라 하니, 쓰일 곳이 많아 내년 봄도 또 굶주릴 테지. - 「영산가고」
첫번째 시에서는 척박한 산골에서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과 이들에게까지 세금의 가혹함이 뻗쳐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두번째 시에서도 세금의 가혹함을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농민에 대한 지배계층의 횡포와 수탈상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무당과 승려들조차 농민의 곡식을 노린다고 하였다. 백성을 교묘히 꾀어 곡식을 축내는 무리로 승려와 무당도 함께 거론하고 있으니, 그가 민간신앙과 전통 종교인 불교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의 「기농부어」는 한 편의 서사시이다.
지난해엔 이른 가뭄에 늦장마가 심해서 강가에 진흙 묻힌 것이 한 자나 되었네. 모래와 돌이 메워져 끝내 채소까지 더럽히고 풍성한 건 유룡과 능석뿐. 길가엔 여인과 아이가 배고프다 우니 보는 이들은 이를 탄식하네. 사채와 관가 세금은 밤낮으로 독촉하니 나는 더욱 백정의 부역 피하기 어렵네. 한 몸의 장정 부역이 어지럽기는 삼과 같아 동쪽의 침입과 서쪽의 시끄러움이 번거롭고 가혹하네. 해마다 마와 밤을 주워도 지탱 못하는데 봄 밭에 흰 차조기 뜯는 사람 가득하네. 올해도 갈아서 싹이 이제 처음 돋아나는데 흙비 오고 음산하기 한 달이 지나서, 보리는 싹이 돋고 벼 뿌리는 썩었으니 천운도 어렵지만 백성들은 지쳐 절름거리네. 팔월 늦벼에 꽃이 한창 필 적에 동북풍 부는 탓에 여물지 못하는데, 도토리는 좀이요 채소는 벌레 먹는데다 오이까지 말라 기근이 해마다 들어 살 수가 없네. 내게는 좋은 밭 수십 두락 있지만 지난해에 벌써 힘센 자에게 빼앗겼고, 튼튼한 머슴 있어 밭 갈고 김매더니 작년에 병사로 충원되었다네. 어린 자식 옆에 있어 시끄럽게 떠들며 번갈아 나를 나무라나 못 들은 체할 뿐. 하늘이 들으실까 구중궁궐 깊은 곳에 달려가서 하소연하고픈 마음 한이 없어라. 비늘 달고 날개 달아 하느님께 외쳐보리라. 근심으로 병이 나서 아픈 마음 타는 듯하네.
이 시에서도 농민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가난과 가뭄, 그리고 세금수탈과 병역의무 등 당시 백성들이 겪던 고충이 시인의 목소리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딱한 사정을 하늘에 알리고 싶은 심정이며 백성의 처지를 생각하다 보니 마음에 병이 날 뿐이라고 말한다.
한문 단편소설집 『금오신화』 한문 단편소설집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31세에서 37세까지 경주의 금오산에 머물면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창작 동기면에서, 그가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장 활달한 시기에 이르러 인생을 해석하고 우주의 신비를 추구했던 지적 노력의 결과물로 파악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 대한 불신이 이상의 추구로 바뀌는 시점에서 창작되었다는 것인데, 이 시기 가 곧 금오산에 머물렀던 기간인 것이다. 김시습은 이 작품을 지은 뒤 곧바로 세상에 발표하지 않고 석실에 감춰두고는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아는 자가 있으리라 하였다. 이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금오신화』는 임진왜란때 왜군이 약탈하여 일본에서 두 차례나 판각되었다. 첫번째 판은 1658년 한 권으로 '내각문고목록'에 실렸으며, 두번째 판은 1884년 일본 동경에서 간행된 대총본이다. 두번째 판본을 개화기에 육당 최남선이 가져와 1927년 『개명』19호에 수록함으로써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상·하권으로 된 이 판본은 하권의 말미에 '서갑집후' 라고 씌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갑집'에 이어 을집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다섯편 외에도 원래의 작품 수는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오신화』는 국내의 문인들에게도 읽혀졌던 듯하다. 『용천담적기』에서 김안로는 이를 『전등신화』와 비교하고 있다. 또한 퇴계 이황도 읽었다 하였으며, 하서 김인후도 이 작품에 관한 시를 쓰고 있고, 우암 송시열도 이를 읽고자 하였으나 구득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특히 조선 중기에는 김집이 직접 옮겨 적은 전기소설집에도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소설문학의 서장을 연 『금오신화』에 대하여 일찍이 김안로는 명나라 구우가 쓴 『전등신화』를 본받아 썼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김시습은『전등신화』를 읽고 쓴 시「제전등신화후」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적 이후 이 작품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모방하여 씌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생각은 최남선, 김태준 등을 비롯하여 몇몇 학자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등신화』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작품 속의 세계관이『금오신화』와 본질적으로 상이하다고 보거나,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 서사문학의 전통 속에서 『금오신화』가 씌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후자의 경우 『삼국유사』속의「조신몽설화」나 『수이전』속의 여러 설화들에서 그 서사적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임형택교수는 사상적 측면에서『금오신화』가 기일원론적 사상에 의한 무신론적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전등신화』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금오신화』속의 저항성이나 시대 거부의 의지는 현실세계에서 외면당한 작자가 유자적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의 표현이며, 인간성을 옹호하고 긍정하려는 현실참여의 정신이 이러한 작품으로 구체화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작품은 김시습의 내면적인 고민의 소산이다. 곧 유불선을 탐구하던 30대 지식인의 사상과 세계관의 갈등이 뒤섞인 것이며, 그가 입신양명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러한 갈등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말이다. 따라서 『금오신화』는 그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현재『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외에도「취유부벽정기」,「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 다섯 편이 남아 있다. 이들 다섯 편의 대강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만복사저포기」에서, 남원에 사는 총각 양생은 만복사의 부처와 저포놀이 내기를 하여 자신이 이기면 아름다운 배필을 맞게 해달라고 하였다. 양생이 이겨 불전에 기도드리던 여인과 만나 정을 통하는데, 그녀는 왜구에게 죽음을 당한 처녀의 혼령이었다. 여인의 처소에서 나날을 보내는데 여인은 정한 날이 오자 신표를 주며 이별하였다. 나중에 보련사에서 둘은 다시 만나 지냈으나, 여인은 이승의 인연이 다하자 저승길로 갔다. 총각은 이후 지리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이생규장전」에서, 송도의 서생인 이생은 서당에서 돌아오다 최낭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 일을 안 이생의 부친은 그를 울주농장으로 보냈고, 낭자는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이에 낭자의 집에서 구혼하매 둘은 혼인하였다. 그 후 홍건적의 난으로 부부는 이별하여 가족이 모두 죽고 이생만 살아남았다. 전란이 끝나 고향에 돌아온 이생은 죽은 낭자의 혼과 만나고 3년 뒤 낭자는 죽은 혼령임을 밝히며 저승으로 떠났다. 이생은 낭자의 뼈를 찾아 묻어준 뒤 그리워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취유부벽정기」에서, 홍생은 부벽정에서 놀다가 옛날 기자왕의 딸을 만났다. 그녀는 기자왕의 묘로 돌아가는 길에 홍생이 시를 읊는 소리를 듣고 온 것이다. 둘은 밤새 사랑을 나누다 여인이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고향에 돌아온 홍생이 여인을 그리며 병들어 눕자 흰 옷 입은 여인이 나타나 상제가 선녀의 추천으로 그대에게 천국의 벼슬을 내린다는 말을 전하였다. 홍생은 꿈에 깨어나 재계한 뒤 죽어 신선이 되었다.
「남염부주지」에서, 귀신, 무당, 부처를 믿지 않는 경주의 유생 박생은 『주역』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박생은 저승사자를 따라 염라왕을 만나 여러 가지 일에 대해 문답하였다. 왕은 그에게 지옥 나라의 선위문을 줄 테니 잠시 인간세상에 다녀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박생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세상을 떠났다.
「용궁부연록」에서, 한생은 용왕의 초대를 받아 용궁에 갔다. 왕의 청으로 상량문을 써주니 용왕은 잔치를 베풀었다. 용궁의 보물과 궁전들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왕이 구슬과 비단을 선물로 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명산으로 들어간 후 종적이 끊겼다.
『금오신화』의 다섯 작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들면, 우선 작품의 대부분이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함께 향토색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곧 남원, 송도, 평양, 경주 등이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점은 후대 고전소설이 주로 중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다음으로 작품의 소재 또한 낯설지 않고 흥미로운 점이 특징이다. 용궁이나 용왕, 염부주와 염마왕 등은 물론이고 죽은 여자의 환생이 나타나고 있으니, 이것들은 우리의 민간신앙이나 전통적인 이야기 속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금오신화』에는 작자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기도 하다. 불교와 유교에 관한 작자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는데, 특히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작자는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으로 다섯 작품은 주인공들이 모두 세상을 등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지 주어진 운명에 대해 순종하기보다는 잘못된 세계의 질서를 거부하는 작자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즉 작자는 중세적 이념과 질서로 대변되는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함으로써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작자가 당대의 현실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주어진 현실에 맹목적으로 안주하지 않고 그것들을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이념과 질서를 지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금오신화』가 갖는 현실주의적 성격 내지는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추출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금오신화』에서 작자가 인간성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남녀의 자발적인 애정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중세적 질서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남녀는 주어진 운명과 환경에 의해 타율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오신화』의 주인공 남녀들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 만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보수적 윤리·규범이나 또는 외적의 침략과 같은 세계의 횡포에 맞서서 죽음으로써 애정을 완성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작자가 남녀의 애정과 그 인간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표현형식에 있어서 『금오신화』는 문장체를 구사하면서도 대상을 시를 통하여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삽입시는 인물의 심리와 분위기 묘사에 큰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나친 삽입시의사용은 오히려 초기 한문소설의 한계로 간주되기도 한다. 서정적 성격의 시가 많다는 것은 오히려 소설이 갖는 본래적인 서사적 성격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금오신화』에 나오는 시들의 대부분은 사랑의 시, 곧 염정시이다. 이는 작자가 일찍이 누려보지 못한 순수한 애정의 감정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경이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전설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 또한 역사적 사실이나 특정 민속 등이 지나치게 개입하여 교술성이 두드러진다는 사실 또한 『금오신화』가 초기 한문소설로서 그 장르적 미숙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 주는 증거가 된다.
3. 『금오신화』감상
『금오신화』에 첫번째로 실려 있는 「만복사저포기」는 김집의 수택본 한문 단편소설집에도「이생규장전」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작품의 소재지가 된 만복사는 실제로 전북 남원시 왕정동 기린산에 있었던 사찰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발굴 결과 상당히 큰 규모의 절임이 밝혀졌다. 다음의 글은 이재호 번역본(『금오신화』, 1987)을 대본으로 삼아 약간의 윤문을 거쳤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오는 한시, 제문 등도 원작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지면 관계상 표시만 남긴 채 생략하였다.
만복사저포기 전라도 남원부에 양씨 성을 가진 서생이 살고 있었는데,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는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한 채 만복사 동쪽 방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방 밖에는 배나무 한 그로가 서 있었는데, 마침 봄이 되어 꽃이 활짝 피어서 마치 백옥나무에 은 덩어리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서생은 언제나 달밤이면 그 나무 밑을 거닐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곤 했다.(한시생략) 다 마치자 별안간 공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 좋은 배필을 얻고자 할진댄 그 무엇을 근심하리오." 서생은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기뻤다. 이튿날은 3월 24일이었다. 이 고을에는 이날이 되면 만복사에 가서 등불을 켜고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는데 청춘 남녀들이 많이 몰려가서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해가 저물어 저녁 불공이 끝나자 사람들이 드문 틈을 타서 서생은 소매 속에 저포(주사위)를 품고 부처님을 찾아갔다. 그는 저포를 던지기 전에 소원을 말하였다. "제가 오늘 부처님을 모시고 저포놀이를 할까 합니다. 만약 제가 지면 불공을 드리지만, 부처님이 지시면 아름다운 배필을 구하여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빌기를 마치고 저포를 던지니 뜻대로 서생이 이겼다. 그는 부처님 앞에 꿇어앉아 말씀을 드렸다. "인연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속이지는 마십시오." 그는 불좌 밑에 숨어 약속한 배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에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타났는데, 나이는 열대여섯 살 가량 되어 보였다. 머리를 두 가닥으로 갈라서 쪽을 찌고 깨끗한 차림을 했는데, 얼굴과 태도가 흡사 하늘나라의 선녀와 같았으며 바라볼수록 얌전했다. 그녀는 고운 손으로 등잔에 기름을 따라 불을 켜고, 향로에 향을 꽂은 뒤 세번 절하고는 꿇어앉아 한숨을 짓고 탄식하며 말했다. "인생이 박명한들 어찌 나 같을 수 있을까?" 아가씨는 품 속에서 축원문을 꺼내더니 불탁 위에 얹어놓았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축원문 생략) 여인은 축원을 마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때 서생은 불좌 밑에서 여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 뛰어나가 말을 건넸다. "조금 전에 부처님께 글월을 올렸지요. 무슨 일입니까?" 그는 여인이 올린 글월의 사연을 읽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 흘렀다. "아가씨는 어떤 분입니까? 왜 여기에 홀로 오셨습니까?"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도 사람입니다. 무슨 의심나는 일이 있으십니까? 당신께서는 다만 아름다운 배필만 얻으면 되지 않나요? 꼭 이름을 물어야 합니까? 그렇게 당황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만복사는 이미 허물어져 승려들은 한편 구석진 방에 살고 있었으며, 법당 앞에는 다만 행랑만이 쓸쓸히 남아 있었고, 행랑이 끝난 곳에 좁다란 판자방이 하나가 있었다. 서생이 슬그머니 여인을 유인하여 그곳으로 들어가니 여인도 어려워하지 않고 따라갔다. 그들은 서로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보통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윽고 밤은 깊어서 달이 동산에 떠올라 달 그림자가 창살에 비쳤다. 문득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이 입을 열며 물었다. "누구냐? 시녀가 온 것이냐, 아니냐?" "예, 접니다. 요즘 아가씨께서는 출타하시더라도 중문 밖을 더 나가지 않았고, 보행을 하더라도 서너 걸음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우연히 나가시더니 어찌 이곳까지 오셔서 이런 일이 있게 하셨습니까?" 여인이 말하였다. "오늘 일은 아마 우연이 아닐거야. 하늘이 도우시고 부처님이 돌보셔서 한분의 고운 님을 만나 백년해로하기로 하였다. 부모님께 알리지 않은 것은 예절에 어긋났다 하겠으나 서로 즐거이 맞이하게 된 것은 또한 기이한 인연이라 하겠다. 너는 집에 가서 앉을 자리와 주과를 가져오너라." 시녀는 분부에 따라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뜰에 술자리가 베풀어졌는데, 밤은 이미 사경이 되려 하였다. 시녀는 안석과 술상을 품위있게 펼쳐놓았는데, 기구들이 모두 말쑥하며 무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술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이는 인간 세상의 것은 아니다.' 서생은 비록 의심이 나고 괴이하게 여겼으나, 여인의 말씨와 웃음소리가 맑고 고우며 얼굴과 몸가짐이 얌전했으므로 틀림없이 귀한 집 처녀가 담을 넘어온 것이려니 생각하고는 더 의심하지 않았다. 여인은 술잔을 건네면서 시녀에게 노래를 불러 술을 권하게 하고는 서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얘는 옛 가곡을 그대로만 부릅니다. 제가 새로운 가사를 하나 지어서 술을 권해도 괜찮겠습니까?" 서생은 기뻐하면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에 여인은 만강홍 곡조에 맞추어 가사를 지어 시녀에게 부르게 하였다.(노래 생략) 노래가 끝나자 여인은 수심에 잠겨 안색이 달라지면서 말했다. "일찍이 봉래산에서는 약속을 어겼지만 오늘 이곳에서 옛 낭군을 다시 뵙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준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낭군께서 저를 멀리하여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끝내 낭군의 시중을 들까 하오며, 만일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영원히 멀리 떠나겠습니다." 서생은 이 말을 듣자 한편 느꺼웠으나 또한 놀라면서 말했다. "어찌 당신의 분부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여인의 태도는 심상치 않았으므로 서생은 그녀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때 달은 이미 서쪽 봉우리에 걸려 있었고 먼 마을에는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절의 종소리가 처음 울리면서 날이 바야흐로 새려 하였다. 여인은 시녀에게 말했다. "너는 자리를 거두어 집으로 돌아가거라." 시녀는 대답하자 곧 없어졌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여인은 서생에게 말했다. "인연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함께 제 집으로 가셨으면 합니다." 서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마을을 지나가니 개들은 울타리 밑에서 짖고 사람들은 길을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길 가는 사람들은 서생이 여인과 함께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렇게 물었다. "서생은 어디서 이렇게 일찍 돌아오시오." 서생이 대답했다. "마침 만복사에서 술에 취해 누워 있다가 친구가 사는 마을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날이 새자 여인은 서생을 인도하여 깊은 숲을 헤치고 가는데 이슬이 흠뻑 내려서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생이 여인에게 물었다. "사는 곳이 왜 이렇습니까?" 여인이 대답했다. "홀로 사는 여인의 거처는 원래 이렇답니다." 여인은 다시 시경의 옛 시 한 수를 외면서 농담을 걸었다. (시 생략) 서생도 또한 시경의 옛 시를 외어 화답했다. (시 생략) 두 사람은 읊고 한바탕 웃고 나서 마침내 함께 개녕동으로 갔다. 다북쑥이 들을 덮고 가시나무가 공중에 높이 늘어선 속에 집 한채가 있는데, 자그마한 것이 매우 화려했다. 여인의 인도에 따라 들어가니 이부자리와 휘장이 잘 정돈되어 있는데 벌여놓은 품이 어젯밤과 같았다. 서생은 그곳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즐거움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시녀는 아름다우면서도 교활한 태도가 없었고, 좌우에 진열된 그릇은 깨끗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서생은 그것들이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여인의 은근한 정에 이끌려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흘 후 여인이 서생에게 말했다. "이 곳의 사흘은 인간 세상의 3년과 같습니다. 낭군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옛날의 살림살이들 돌보셔야 합니다." 드디어 이별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서생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왜 이렇게 이별이 빠릅니까?" 여인이 대답했다. "작별하더라도 다시 만나 평생의 소원을 다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낭군이 누추한 이곳까지 오시게 된 것은 반드시 묵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이웃 친척들을 한번 만나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생이 말했다. "예, 좋습니다." 여인은 곧 시녀에게 이웃 친척들에게 알리게 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정씨, 오씨, 김씨, 유씨 등 네 여인인데, 모두 번영한 귀족집 따님으로 이 여인과는 한 마을에 사는 친척들로서 성숙한 처녀들이었다.성품이 온순하고 인자하며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고 또한 자질이 총명하며 문장에 능했다. 그들은 칠언절구 네 수씩을 지어 서생을 전별해 주었다. 정씨는 태도와 인품이 갖추어진 여인인데, 곱게 쪽진 머리채가 귀밑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내쉬어 즉흥시를 읊었다. (시 4수 생략) 오씨는 쪽진 머리에 요염하고도 날씬한 몸매로, 일어나는 정서를 가누지 못하면서 뒤를 이어 시를 읊었다. (시 4수 생략) 김씨는 그 몸 자세를 바로잡고 얌전한 태도로 붓에 먹을 찍더니 앞에 읊은 시가 너무 음탕하다고 책망하면서 말했다. "오늘의 모임에서 여러 말 할 것이 없이 다만 이 자리의 광경만 읊어야 할텐데, 어째서 마음의 회포를 털어놓아 우리들의 절조를 잃어야 할 것이며, 우리들의 소식을 인간 세상에 전해야 하겠습니까?" 그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지어 읊었다. (시 4수 생략) 유씨는 엷게 한 화장과 하얀 옷이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법도가 있어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하지 않더니 방그레 웃으면서 시를 지어 종이에 적었다. (시 4수 생략) 여인은 유씨가 읊은 마지막 시구의 사연에 감동되어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나도 또한 자획은 대강 분별할 줄 아는데 나만 홀로 소감이 없겠습니까?" 그녀는 곧 시를 지어 읊었다. (시 2수 생략) 서생도 또한 글을 잘하는 사람이어서 그들의 시 짓는 법이 깨끗하고 운치가 높으며 음운이 맑음을 보고 감탄하여 칭찬하였다. 그는 즉석에서 재빨리 시 한 장을 적어 화답했다. (시 생략) 잔치가 끝나자 다들 작별하게 되었다. 여인은 주발 하나를 내어 서생에게 말했다. "내일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보련사(남원 소재)에서 음식을 대접받게 되어 있습니다. 낭군께서 저를 버리지 않는다면 보련사로 가는 길가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저와 함께 절로 가셔서 저희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주십시오." 서생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튿날 서생은 여인이 시킨 대로 주발을 쥐고 보련사로 가는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과연 어떤 귀족 집안에서 딸의 대상을 치르기 위하여 수레와 말을 길에 늘어 세우고 보련사를 찾아오는 길이었다. 그때 길가에서 한 서생이 주발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자, 종자가 주인에게 말했다. "우리집 아가씨 장례 때 무덤 속에 같이 묻었던 물건을 벌써 어떤 사람이 훔쳐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이 말했다. "뭐라고?" "저기 서생이 가지고 있는 주발이 그것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말을 서생에게 다가서게 하여 물었다. 서생은 그 전날 여인과 약속한 일을 그대로 일러주었다. 여인의 부모는 놀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 슬하에 다만 딸 하나가 있었네. 그런데 그 딸이 왜구들의 난리 때 싸움판에서 죽었어. 미처 정식으로 장례도 치르지 못해서 개녕사(남원 소재) 옆에다 가매장을 한 뒤, 오늘내일 장사를 미루어오다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네. 오늘이 벌써 대상일이라. 절에서 재를 베풀어 명복이나 빌어줄까 해서 가는 길일세. 자네가 약속을 지키려거든 내 딸을 기다리고 있다가 같이 오게. 그리고 조금도 놀라지 말게." 말을 마치자 부모는 먼저 보련사로 떠나갔다. 서생이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약속한 시각이 되자 과연 한 여인이 시비를 데리고 갸우뚱거리면서 오는데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들은 서로 기뻐하면서 손을 잡고 함께 절간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절 문에 드어서자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더니 흰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친척들고 승려들은 모두 그녀를 보지 못했다. 다만 서생의 눈에만 보일 뿐이었다. 여인이 서생에게 말했다. "진지 드십시오." 서생은 여인이 한 말을 그녀의 부모님께 아뢰었다. 부모는 그 말을 시험해 보기 위해 밥을 같이 먹게 했더니, 다만 수저 놀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으나, 인간이 먹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여인의 부모는 이에 놀라더니 서생에게 권하여 휘장 옆에서 함께 자도록 했다. 그들의 얘기소리가 밤중에 분명히 들려왔으나 사람들이 가만히 엿들으려 하면 갑자기 중지되곤 했다. 여인이 말했다. "제 행동이 법도를 넘은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시경과 서경을 읽었으므로 예의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시경에서 이른 내용이 다 부끄러운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북쑥 우거진 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어 들판에서 버림받은 몸이 되고 보니 사랑의 정서가 한번 일어나자 끝내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번에 절에 가서 복을 빌고 부처님 앞에서 향불을 피우면서 한평생의 박명을 스스로 탄식했더니 뜻밖에도 삼세의 인연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검소하고 부지런한 여자로서 낭군을 받들어 평생을 모시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업보는 피할 수 없어 저승으로 떠나야 하겠습니다. 즐거움을 채 다하지도 못했는데 슬픈 이별이 닥쳐왔습니다. 저는 이제 떠나야 합니다. 밤이 지나고 날이 새면, 구름과 비는 양대(보련사)에서 떠나야 하고, 저희들의 복을 빌러온 이들과도 다 이곳에서 헤어져야 합니다. 이제 한번 가면 훗날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낭군님, 정말 슬프고 황급하여 무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윽고 영혼은 떠났다. 여인은 전송을 받을 때 울음소리가 끊어지지 않더니, 문 밖에 이르러서는 다만 은은히 소리만 들려왔다. (시 생략) 남은 소리는 점점 사라지면서 목메어 우는소리와 분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여인의 부모는 그제야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고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다. 서생도 또한 그 여인이 귀신임을 알고는 더욱 슬픔을 느끼어 여인의 부모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울었다. 여인의 부모가 서생에게 말했다. "은주발은 그대에게 맡기겠네. 그리고 내 딸에게는 토지 몇 백 이랑에다 노비 몇 사람이 있으니, 자네는 그것을 신표로 가지고 내 딸을 잊지 말게." 이튿날 서생은 고기와 술을 가지고 개녕사 옛 자취를 찾아갔다. 과연 시체를 임시로 안치한 무덤이 있었다. 서생은 제물을 차려놓고 슬피 울면서 그 앞에서 지전을 불사른 뒤, 정식으로 장례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제문을 지어 조상했다. (제문 생략) 장례를 지낸 후에 서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토지와 가옥을 다 팔아 절간으로 가서 연달아 사흘 저녁 재를 올렸다. 이에 여인이 공중에 나타나 서생을 부르며 말했다. "저는 낭군의 은덕을 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이 막혀 있지만 낭군의 은덕에 깊이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낭군께서도 이제 다시 착한 업을 닦으시어 저와 함께 속세의 누를 벗어나십시오." 서생은 그 뒤 다시는 장가가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면서 살았는데, 그가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작품 해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이승의 남자와 저승 여자와의 사랑을 그린 애정소설인데, 학계에서는 이를 명혼소설이라고 부른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영혼과 만나 관계를 맺는 이야기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것으로, 따로 시애설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내용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속의 「조신몽설화」나 『수이전』속의 몇몇 이야기와 상통한다. 「만복사저포기」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연애지상주의를 부르짖으면서 동시에 억압과 위선에 둘러싸인 중세기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거나,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낸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사랑이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사랑보다 강렬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러한 사랑의 의지를 좌절시키려는 세계의 횡포를 함께 고발하고 있다. 그 세계는 여인을 죽게 만든 왜구의 침입일 수 있으며, 둘을 헤어지게 만든 유한한 운수일 수도 있다. 이처럼 현실에 일어나는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실주의를 지향하며 비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 결말의 비극성을 달리 해석하여 도교적 초월주의의 반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작품 속의 주인공 양생은 김시습의 분신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온전한 가정을 누리지 못한 작자의 꿈이 반영된 것이 곧 양생의 삶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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