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1부 한문학의 대가들과 그 유산
고려시대 최고의 문장가, 이규보
1. 강화도에 몸을 묻고 이규보(1168~1241)는 한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문장가로서 동국의 시호요, 시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고려 전기와 후기의 분수령이 된 무신집정기를 살아간 신흥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이다. 또한 무신의 지배로 인한 국내 정치의 혼란뿐 아니라 국토를 파괴시키는 몽고의 침략에 온몸으로 저항하면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힘을 쓴 지식인이었다. 그는 대내외의 정치적 문서를 도맡아 처리하고 더러는 최고권력자를 칭송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지만, 뛰어난 작가정신으로 다양한 문학양식을 실험하고 새로운 시학을 수립하였다. 더욱이 이규보는 우리의 신화를 괴이하고 허탄하게만 생각하던 당시 지식인의 사고를 배격하고 이를 올바르게 인식함으로써, 자세한 주석과 함께 호한한 필치로 구성된 장편 영웅 서사시「동명왕편」을 창작하는 역사의식을 보여주었다.
백운처럼 거리낌없이 이규보는 1168년 12월 개성에서 태어났다. 무신의 난이 일어난 지 2년 뒤의 일이었다. 본래 그의 이름은 인저요, 자는 춘경이다. 본관이 황려(지금의 여주)인데, 이 본관을 근거로 이규보의 출생지를 여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 윤수는 벼슬이 호부낭중에 이르렀지만, 이규보가 자신의 글 속에서 누차 '한미한 집안'이라고 밝힌 점으로 보아 그의 집안은 지방의 토착세력층인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무신의 난 이후에는 이러한 지방의 토착세력이 새롭게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신흥사대부가 되었다. 따라서 이규보의 생애로 미루어볼 때 그 역시 이러한 계층에 속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규보는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온몸에 심하게 종기가 나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때 아버지가 개성 북쪽의 송악산 사우에 가서 점을 쳤는데 '살아난다'는 점괘가 나왔다. 하지만 아이의 모습이 너무 흉칙하여 문밖에 내다버렸다. 그런데 웬 신인이 나타나더니 "천만금보다 귀한 아기"라며 잘 보살피라고 당부했다 한다. 이규보는 어렸을 때부터 젊은 시절까지 대부분 개성에서 생활하였다. 이는 당시 고려의 서울인 개성에서 부친이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출세를 위해 개성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14세에 당시 사학 12도 가운데 대표적인 일문이던 문헌공도 9재학당의 하나인 성명재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예비학교 구실을 하던 이 학당에서는 매년 여름 글짓기 모임[하과]이 열리곤 하였다. 하과에서는 각촉부시라 하여 누가 빨리 시를 짓는지 내기를 했는데 그는 항상 일등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규보는 과거에 합격한 선배 함순의「내직옥당」이라는 제목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혼자서 숙직하니 전각이 쓸쓸한데 연꽃 같은 촛불만 대궐을 비추네. 이슬 맺힌 선인장(그릇)에는 가을 기운이 싸늘한데 달 밝은 사창에는 밤도 참으로 길구나. 칠보상 앞 궁루(시계)는 더딘데 구화장 속 향로에는 향내만 풍기네. 샛별이 돋을 때까지 시 한 편 끝냈으니 보기도 즐겁구나, 높은 하늘 아침빛.
함순은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라며 일등으로 뽑았다. 내직에 들어가 숙직하는 벼슬아치의 심정을 그린 것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고 싶은 이규보의 심정을 잘 그려낸 빼어난 작품이다.
이규보는 나이 16세 되던 해에 아버지 윤수가 수주(지금의 수원)로 벼슬길에 나아갔음에도 그는 개성에 머무른 채 과거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응시한 사마시에 낙방하였고, 이어서 18세에 또다시 낙방의 쓴 잔을 마셨다. 그는 수주를 왕래하다가 19세 때 아버지가 수주원님에서 퇴임하자 개성으로 올라왔다. 이 무렵 그는 30년 연상의 오세재와 나이에 구애됨이 없이 벗으로 지냈다. 그는 오세재의 소개로 '강좌칠현'의 시회에 출입하였다. 그런데 오세재가 경주로 내려가게 되자 다른 회원이 이규보에게 그 시회의 가입을 권유하였는데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자신의 시재를 믿었던 탓이다. 20세 때 이규보는 세번째 사마시에 낙방하였다. 그러나 사마시에 네번째 응시한 22세 되던 봄에야 마침내 장원에 급제하였다. 시험을 보기 전날 밤에 이규보는 꿈을 꾸었는데 규성이 자신에게 금년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한다. 규성은 28수의 하나로 문장을 담당한다는 별이다. 그는 이름을 '규성의 보답'이라는 뜻에서 '규보'로 개명한 뒤 과장에 나갔다고 한다. 23세 6월에는 예부시에 응시하여 동진사에 뽑혔다. 말과에 급제하자 자존심이 상한 그는 사퇴하려고 했으나 부친이 이를 준엄하게 꾸짖어 사양하지 못하였다. 24세에 부친상을 당한 이규보는 개성 북쪽의 천마산으로 들어갔다. 이때 자신의 호를 '백운거사'라고 하였는데, 이는 "백운처럼 거리낌없이 거사처럼 도를 닦고자 한다"는 뜻이었다. 호방하고 구속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에 들어맞는 호라고 할 수 있다. 천마산은 이규보에게 문학과 정신수양에 많은 도움이 된 공간이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개성과 천마산은 젊은 시절 이규보의 삶과 문학의 중심 공간이라 할 것이다. 그는 이 무렵 천마산의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차츰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불멸의 대작 「동명왕편」 한편 이규보에게는 선친이 물려준 개성 서쪽 근교의 별장이 있었다. 이 별장을 '사가재'라고 불렀으니, 이는 "식량을 마련하고 옷을 마련하며 물을 마실 수 있고 땔감을 마련할 수 있다." 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이곳에 지내면서 그는 손수 풀도 뽑으며 정원을 손질하였다. 이 사가재는 현재 강화도의 이규보 묘소 옆에 복원되어 있으며, 그가 지었던「사가재기」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그는 천마산과 서교의 별장을 오가면서 공부하였으며 심신 수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규보는 천마산을 오가던 시기인 26세(1193) 때에 우리 문학사에서 불멸의 대작이라 할「동명왕편」을 완성하였다. 당시에도 찾아보기 힘들었던「구삼국사」를 얻어보았던 그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이 동명왕 사적이 널리 구전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이 신성한 사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신화를 사실로 믿고 과감히 이를 토대로 장편의 대서사시를 지은 것은 기존의 유가적 입장에 익숙한 문벌 귀족층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주의적 의식의 발로이자 신흥사대부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역사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27세에는 당나라의 역사를 소재로 삼아 치란의 근원을 읊은「개원천보영사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그가 과거에 급제한 이후 10년 동안 관직을 얻지 못한 채 불우하게 보내고 있었던 때였다.
최충헌 형제가 새로운 왕인 신종을 옹립하던 1198년에 이규보의 자부가 황려로 귀양을 갔다. 이에 그는 누이동생을 데리고 고향 황려로 내려가 모처럼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어머니가 계신 상주로 내려가서 몇 개월을 머무르기도 했다. 그는 다시 반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곧바로 개성에 들어갔다. 이듬해 30세에는 조영인, 임유 등이 연명하여 임금께 이규보의 벼슬을 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농간으로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이규보에게도 기회가 왔다. 32세(1199) 되던 해 5월 어느 날, 권력자 최충헌이 당대 일류시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시를 짓도록 하였다. 그 자리에는 이규보를 포함하여 이인로, 함순, 이담지 등도 있었다. 이때 이규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최충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옥 같은 얼굴 술기운 처음 돌아 발그레한 빛 온통 감도네. 겹친 꽃잎 천연스레 공교롭고 예쁜 자태에 객의 마음 설레네. 향을 피운 듯 맑은 날엔 나비가 모이고 불빛 흩어진 듯 밤에도 새들이 놀라누나. 예쁜 빛 아끼어 늦게 피라고 시켰으니 뉘라서 조물주의 마음을 알리오.
- 「천엽유화」
최충헌의 집에 석류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모습을 한껏 묘사하면서도 은연중에 석류꽃이 늦게 피었다는 데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말하고 있다. 이 시로 시적 자질을 인정받게 된 이규보는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과거에 합격된 뒤에도 영광과는 거리가 먼 불우한 삶의 공간으로만 비쳐졌던 '개성'이, 이제는 출세의 발판으로서의 '개성'이 된 것이다. 그러나 개성이 이규보의 벼슬살이의 출발점은 아니었다.
지금 8품이니 7품이면 족합니다. 이규보의 첫 벼슬살이는 전주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전주는 그에게 치국의 길을 걷게 한 소중한 경험의 장이었다. 그는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로서, 9월 13일 부임길에 올랐다가 열흘 뒤 전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각 고을의 민정을 시찰하고 억울한 죄인을 풀어주는 등 백성을 위하여 선정을 펼쳤으며, 바쁜 생활 속에서도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 작업의 성과 가운데 하나가 수필문학으로 인정되는「남행월일기」이다. 이「남행월일기」에 따르면 이규보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채집하여 방언이나 속어 그대로 적어두기도 했다. 그는 전주 근처의 경복사를 들러 진안을 거쳐 변산에 가서는 벌목하는 일을 감독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해의 섬들인 위도·구도의 섬을 보았다. 또한 남원, 임피, 옥구를 거쳐 고창의 선운사에 들렀으며, 변산의 소래사(지금의 내소사)에 가서는 수십 길 절벽 위에 있는 원효방에도 올랐다. 그곳에서 그는 신라의 고승인 사복과 진표율사에 관한 사적을 들었다. 이 두 승려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전해오는데,「남행월일기」는 이규보가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지은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규보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년을 겨우 넘긴 뒤 개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것은 그와 공사처리 문제로 자주 부딪혔던 전주목의 통판랑장이 그를 모함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규보의 전주생활은 마감되었는데 아마도 그가 임기를 다 채웠더라면 전주에서의 체험과 감상 등이 수많은 문학작품으로 승화되어 남았을 것이다. 훗날 이규보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먼 발치로 바라보았던 그 위도에 들어가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벼슬의 시작을 맛보았던 전주에서 인생의 좌절까지 겪게 되었으니 그와 전주는 상당히 인연이 깊은 셈이다. 다시 개성에 머물던 이규보는 35세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그런데 이 해 12월 경상도 경주, 운문(지금의 청도), 합천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국난을 회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다"며 자원하여 병마녹사 겸 수제원으로 종군하였다. 상중이면서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종군한 것은 그의 투철한 애국심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규보는 경상도 청도의 운문산에 머무르면서 공사에 관한 많은 글을 지었다. 그러다가 37세 되던 해에 민란이 진압되어 비로소 개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논공행상에서 누락되어 어떠한 상이나 관직도 얻지 못하였다. 이는 그의 집안이 지극히 한미하여 혈연이나 지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규보는 30대 후반까지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40세 이후로는 관직에 나아가고 벼슬이 크게 오르는 득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40세가 되던 해에 최충헌은 개성 남쪽 남산리 자기 집 옆에 모정을 짓고 이인호, 이윤보, 이규보 등을 불러 기문을 짓게 하였다. 그는 여기서 일들을 하였으니 이때 지은 글이 유명한 「진강후모정기」이다. 이로 인해 그는 이 해 12월 권보직한림원에 제수되었다. 이후로그는 벼슬길이 높아졌다. 46세 되던 해 12월에 최충헌의 아들 진양공 최우가 고관대작들을 초대한 연회에 이규보도함께 초청되었다. 최우는 그의 재주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인로에게 운자를 부르게 하였는데, 내리는 운자에 따라 '촉'이라는 제목으로 단숨에 시를 지었다. 다음날에는 최충헌으로부터 다시 그의 재능을 시험받았다. 금의가 내리는 운자에 따라 '공작' 이라는 시제를 단숨에 써 내려갔다. 최충헌이 감탄의 눈물을 흘리며 원하는 관직을 물으니 이규보는 "지금 8품이니 7품이면 족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재능을 과시하되 결코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그의 뛰어난 처세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 해 12월에 사재승이 되었다. 이때부터 이규보는 당대의 권력자인 최우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으며 그의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규보는 48세에 우정언지제고, 50세에는 우사간지제고가 되었다. 52세 봄에는 팔관회의 하표를 잘못 마련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면직되었고, 4월에 계양도호부의 부사병마금할에 좌천되었다. 그러나 1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에 올라와 벼슬에 복직되었다. 그것은 최충헌이 죽은 후 최우가 권력을 잡게 되면서 그를 개성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벼슬은 높아만 갔다. 그러나 10년 뒤인 63세 되던 해 11월에 그는 팔관회 연회가 규례에 어긋났다는 죄로 문책받아 전북 부안의 위도로 다시 유배되었다. 현재 위도는 '띠뱃놀이' 라는 민속놀이로 유명한 곳이다. 추운 겨울 섬에서 지내게 된 그는 외로움 속에서 매우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그는 유배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옛날에 이소경을 읽고 슬퍼했는데 어찌 오늘 내가 이럴 줄 알았으랴. 선비 되기는 틀렸고 중 되기 또한 늦었으니 잘 모르겠네, 어떤 사람이 될지를.
- 「입도작」
그는 이듬해 정월에야 감형되어 자신의 고향인 황려로 돌아왔으며 다시 65세가 되던 해 4월 관직에 복귀하였다.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벼슬을 맡은 65세에는 몽고의 침략으로 나라가 지극히 위태로운 때였다. 조정에서는 항전을 위하여 수도를 강도(지금의 강화도)로 옮기게 되었다.
문장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다 이때부터 이규보의 강화도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그리고 말년에까지 이어져 그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는 조정을 따라 강화도에 들어가 유수중군지병마사가 되었다. 69세 때인 12월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70세 되던 12월에야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문하시랑 평장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례부사한림원사 태자태보'라는 직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40세 이후부터 이어진 현달한 벼슬살이를 마감한 것이다. 이규보는 벼슬살이하는 동안 네 번씩이나 과거시험을 주재하는 시관이 되었고, 조정의 국사를 위한 공문서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문장으로 보국'하는 소위 '이문화국'의 이상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특히 몽고와 주고받는 통상문서의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갔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도 각종 외교문서를 맡아 국정에 참여하였다. 이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그의 애국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한다. 74세가 되던 해인 7월, 이규보의 병은 더욱 깊어졌다. 이에 최우는 의원을 보내 위로했으며 그가 평소에 저술한 시문을 문집으로 간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규보는 자신의 문집이 출간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 해 9월 2일 마침내 세상을 떠나 12월에는 강화도의 진강산에 안장되었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시를 짓고 불교에 귀의하여 불경을 외우는 일로 소일하였다. 그리고 죽기 전에는 아내와 자식들을 물러가게 한 뒤 조용히 운명하였다고 한다. 이규보는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 조정을 따라 강화도에 왔다가 다시는 개성에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끝내 객지에 쓸쓸히 묻혔다. 고려 조정이 다시 수도를 개성으로 옮기게 되고 그의 자손들도 강화도를 떠나는 바람에 훗날에는 그의 묘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잊혀졌던 그의 묘소는 후손들에 의해 다시 찾아졌고, 1967년에는 정부의 지원으로 묘역이 정비되어 원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 새로운 시학을 수립한 이규보 문학의 참모습
이규보는 무신의 난 이후 등장한 신흥사대부의 대표적인 관인이자 문인이다. 문학사적으로 무신의 난 이전 문벌귀족 문신들의 문학적 경향은 특권의식, 사대주의와 형식주의, 보수성 등의 낡은 관습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무신의 난은 이러한 문학을 타파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뒤이어 새롭게 등장한 신흥사대부는 이전 세력과는 다른 새로운 문학, 창조적인 문학을 건설하였다. 이규보 문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주도하는 주역을 담당한 것이다.
심간을 깎아 시를 짜내네 이규보의 문학적 성과물은『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전한다. 이 책은 아들 함의 요청으로 이규보가 손수 편차를 짜고 문집의 이름까지 붙인 것이었으나 1241년 그가 죽은 후에야 41권의 전집으로 간행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는 여기서 빠진 시문들을 다시 모아 후집 12권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서둘러서 간행하다 보니 누락이 심하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1251년에는 고종의 칙명으로 그의 손자 익배가 진주분사대장도감에서 교정, 증보하여 개간하였다. 오늘날 그의 문집의 판본은 조선 영조시대에 복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에는 그 영인본이 여러 곳에서 간행되었으며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본이 나와 있다. 또한 이규보가 찬 한 것으로 알려진「백운소설」은 한국한문학의 비평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고려시대 시화와 잡록의 선구가 되며, 시 비평 저작물의 효시작 성격을 지니는데다가 그의 시론과 다른 시 작품에 대한 품평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백운소설」은『동국이상국집』에는 실려 있지 않고 조선시대에 홍만종이 찬술한 『시화총림』의 첫머리에 '이규보 찬'이라는 기록과 함께 놓여 있는 탓에 그 편찬자가 과연 이규보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분분하다. 즉 이것의 편찬자는 홍만종이며, 아울러 이때 '백운소설'이라는 명칭도 붙여졌을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31장 가운데 15장에서 이규보의 시가 거론되고, 46편의 시 가운데 23편이 이규보의 시라는 점은 후대인이 편찬하였음을 방증하는 사례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동국이상국집』을 보면 부와 사를 포함한 시가 2,000수가 넘으며 산문도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이규보의 문학에 대한 입장은 「백운소설」이나 문집 속의 각종 산문과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문학관 가운데 주목할 만한 내용을 지적한다면, 우선 시 창작론으로서 신의와 신어, 그리고 독창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시는 의를 으뜸으로 삼고(...) 사를 연결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의는 또한 기를 으뜸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란 시의 뜻, 즉 내용이나 주제에 해당하며 '사'는 시어 곧 시의 표현에 해당된다. 그리고 '기'는 시인의 타고난 기질이나 성질을 말한다. 그는 시인의 타고난 자질을 중요시하였으며 시의 표현보다는 그 속에 담긴 뜻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당시 문인들은 글을 쓸 때 일정한 격식을 따르되 고사를 인용하여 활용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중국의 고전을 암송하여 그 속에서 글귀를 시에 차용하려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그 당시에는 소동파의 시를 흉내내는 것이 큰 유행이 되어 해마다 과거 급제자의 방이 붙고 난 후에 사람들은, "올해도 30명의 소동파가 나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다. 이규보는 이러한 풍조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도 중국의 각종 고전 경서를 읽었지만 이를 직접 인용하지 않고, 새로운 말이나 단어[신어]를 만들어 시를 지으려고 하였다. 고전의 글에서 시구를 인용하는 일은 표절이며 이는 곧바로 '도둑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의 수립이야말로 시 창작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은 당시의 문학풍토를 쇄신하는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직접적인 체험과 깊은 사색을 강조하였으며, 시를 짓는 과정에서 각고의 노력을 중요시하였다. 이규보가 즉석에서 시를 짓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나, 시상을 구상해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규보는 시 짓기를 몹시 좋아하였다. 그런 탓에 그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한다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삼혹호선생'이라고 붙이기까지 하였다. 그는 시를 지을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낮이나 밤이나 심간을 깎아서 몇 편의 시를 짜내네. 비계나 기름은 말할 것 없고 살갗조차 남지 않았네. 뼈만 남아 괴로이 읊조리는 이 모습 참으로 가소로워라.
- 「시벽」
그가 말하는 시 짓기의 어려움과 괴로움은 육신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고질이 되어 그만둘 수 없는 까닭에 그는 시마와 싸우려 하였다. 그래서 「시마」라는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시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어이하여 애태우며 찾으려는가. 좋은 바람 밝은 달 처음엔 좋아하지만 오래 되면 홀리나니 이게 바로 시마라네.
이러한 시의 마를 쫓기 위하여 산문「구시마문」을 지어, 시의 죄 다섯 가지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 글에서 그는 시마와 싸웠지만 그의 주장에 항복하고 오히려 스승으로 모신다고 하였다. 결국 시 쓰는 일을 합리화한 셈이다. 또한 그는「논시」를 통하여 작시법을 시화하기도 하였다. 시 짓기의 괴로움을 알고 있었던 그는 실제로 시를 지은 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태우기도 하였으니, 그가 자신의 혼이 담긴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규보는 사대부이자 관료이며 문인으로서 문장으로 나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으며, 실제로 그런 역할을 담당하였다. "문장은 도를 실어야 하며 유가적 정치이상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인데, 이는 정통 관인문학의 이념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관료의 소임으로 문장보국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그는 조선 초기 관인문학의 문학관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처처럼 농부를 공경하라 그러면 그의 문학작품의 참모습은 어떠할까. 먼저 시를 살펴보자.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규보는 장편의 시를 즐겨 쓴다는 점이 주목된다. 절구시의 경우 5언보다는 7언을 즐겨 택하며, 500수가 넘는 고시를 지었다. 물론 고시 가운데 10행 미만의 짧은 시도 있지만, 대개는 장편이고 이 가운데 대작들이 많다. 「동명왕편」이나 「차운오동각세문정고원제학사 삼백운시」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의 시는 크게 사회와 자연에 관련된 작품들로 나누어진다. 그는 시를 통하여 국가와 사회에 두루 관심을 보였다. 그는 만년에 고려 사회의 이념인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평소에도 승려들과 교유를 나누었고 절에도 자주 들러 시를 읊었다. 다음은 「와송능엄유작2수」가운데 한 수이다.
늙어지자 경서는 손에서 놓아두고 옮겨서 능엄경을 익히네. 밤에 누워서도 욀 수 있으니 이불 속이 바로 도량이네.
이 시에서 그는 늙어서 능엄경을 외우니 이불 속이 곧 도량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불문에 보냈을 만큼 불심이 두터웠다. 또한 그는 당시의 무속에 관한 글과 시도 남겼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무당을 천시하고 혹평하면서 미신타파를 주장하는 「노무편」이 있다.「노무편」의 서문에서 그는 이웃에 늙은 무당이 있어 날마다 사람들을 모아 굿을 하는 바람에 괴로움을 겪었는데, 나라에서 명을 내려 그 무당을 성 밖으로 내쫓자 기뻐하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당시 무당의 성격과 굿하는 모습 등 무속신앙의 귀중한 실상을 알려주고 있으니, 그는 일찍부터 국문학과 민속학의 연구에 유용한 자료를 제공한 셈이다. 그는 또한 시를 통해 고려사회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리고 있으며, 가난과 굶주림에 처한 농촌의 현실에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다.
햇곡식은 푸릇푸릇 논밭에서 자라는데 아전들 벌써부터 조세 거둔다고 성화이니, 힘들게 농사지어 부국케 한 우리들이거늘 어찌 이리도 극성스럽게 침탈하는가. - 「대농부음」
한 알 한 알을 어찌 가벼이 여길 것인가 생사와 빈부가 여기에 달렸는데. 나는 부처처럼 농부를 공경하노니 부처도 못 살리는 굶주린 사람을 농부만은 살린다네. 기쁘다 늙은 이 몸 또다시 금년 햅쌀 보게 되니 죽더라도 부족할 것 없네. 농사에서 오는 혜택 내게까지 미치는 것을. - 「신곡행」
첫번째 시는「대농부음」두 수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에서는 부패한 관리들의 침탈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두번째 시에서 작자는 농부를 부처님처럼 공경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부처님도 가난을 살리지 못하지만, 농부만큼은 곡식을 키우고 거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피폐한 농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도 민중들의 고통을 향리에서 보고 성장한 신흥사대부이기에 가능했다. 농촌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은 그의 다른 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규보는 우리나라를 침략한 외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남은 오랑캐 도망 안 가고 이미 우리 울타리 안에 들어왔네. 만일 저들의 고기를 나누어준다면 만인이 그 회를 달게 먹으리라. - 「문호종입강동성」
오랑캐, 즉 몽고군을 회로 씹어먹겠다는 생각은 그가 얼마나 외적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는 고려 조정이 결사항전 의지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길 때 같이 들어가 외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미 젊었을 때부터 자리잡은 것이었으니, 26세 때 지은「동명왕편」도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나라사랑의 의지가 잘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국가적인 행사 때나 연희 공간에서 지은 공식적인 성격의 시들이 많다. 사회와 역사를 다룬 시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역시「동명왕편」이다. 『동국이상국집』 제3권에 실려 있는 이 작품은 282구의 오언고시 장편으로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탄생과 신이한 행적, 건국의 과정, 그리고 그의 아들인 유리왕의 행적이 호한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현재 남아있는 장편 한시 가운데 가장 탁월한 '영웅서사시'인데다가, 이규보라는 걸출한 문인의 손으로 그려진 본격적인 건국서사시라는 점에서 국문학적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특히 이 작품의 서문에는 건국신화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식하려는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유가적 입장에서 보면 신화는 괴이하고 환상적이어서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작가는 이 신화가 오히려 성스럽고 신이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사서가 단지 윤리적인 교화를 목적으로 기술되어 신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면서, 이 신화를 기술함으로써 온 나라 사람들에게 "우리나라가 원래 성인의 나라"임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다음으로 자연을 노래한 그의 시들을 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리거나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시들도 있다.
흐르는 물소리에 해는 지고 뜨는데 어촌의 인가가 듬성듬성 쓸쓸하구나. 맑은 호수에는 기묘한 달이 찍혀 있고 넓은 포구는 한껏 밀물을 들이킨다. 오래된 돌은 물결에 닳아져 평평해지고 부서진 배는 이끼 덮여 누운 채 다리가 되었구나. 강산의 온갖 경치 읊어내기 어려우니 화가를 시켜 그려야만 묘사할 수 있겠구나. - 「제포구소촌」
호수에 비친 달을 수면에 달이 찍혔다고 말하며, 해안에 부딪히는 밀물을 해안의 입장에서 들이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시인의 관찰력은 실로 놀랍다. 자신이 그려낸 자연의 정겨운 모습이지만, 그것도 오히려 충분히 묘사하지 못했다며 이 일을 화가에게 넘기는 데서 차라리 넉넉한 그의 시적 감식안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자연에 돌아가서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특히 40세 이후의 벼슬살이가 비교적 순탄했던 그였기에 자연에의 귀의는 순전히 마음속으로만 남아 있었던 듯하다. 다음은 현실생활에 얽매인 자신을 돌아보고 한탄하는 시이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조그만 몸뿐이니 하루에 먹는 것은 결국 얼마나 되나. 그런데도 구복을 채우기 위해 구름 낀 푸른 산에 돌아가지 못하네. - 「우음이수유감」
단지 구복을 위하여 힘쓰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서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연귀의는 조선 중기 사림파 문인들에게 보이는 귀거래와 사뭇 다르다. 관직에 대한 열망이나 꿈을 이루지 못한 데서 오는 안타까움을 자연으로 잠시 돌렸을 뿐 궁극적인 자연귀의의 심정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가 깃든 가전체문학 이규보는 시뿐만 아니라 뛰어난 산문도 많이 남겼다. 그의 산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문집의 20권에 수록되어 있는 네 편의 전이다. 「국선생전」과 「청강사자현부전」은 가전체이고, 「백운거사전」과 「노극청전」은 실전이다. 이 가운데 「국선생전」과 「청강사자현부전」은 임춘의 「국순전」, 「공방전」과 함께 고려시대 가전체문학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그것은 우리 고전소설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전체문학이 설화와 소설을 잇는 교량적인 구실을 담당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국선생전」은 술을 의인화하여 술과 인간의 미묘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술에 관련된 작품으로는 임춘의「국순전」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술을 부정적으로 그리면서 주색에 빠지고 권모술수로 국가와 사회를 문란케 하는 아첨배와 국왕을 동시에 풍자하였다. 반면에 이규보는「국선생전」에서 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덕과 재주로 등용되어 왕의 총애를 받고 국정에 도움을 주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였으며 끝내 분수를 지켜 온전히 자기의 삶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평생을 불우하게 보낸 임춘과 난세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말년까지 순탄하게 벼슬살이를 한 이규보의 인생 역정이 작품세계와 맞물려 드러나 있어서 흥미롭다. 곧 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도 결국 작자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그 형상화 과정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청강사자현부전」은 거북을 의인화하여 지극히 작은 것을 살피고 그것의 나쁜 징조를 미리 알아내 대처하는 데는 성인도 간혹 실수할 수 있음을 지적하여, 매사에 조심할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이규보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작품에서도 난세에 처신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난세를 살아가는 지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년까지 비교적 순탄한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던 듯하다. 바로 그러한 작자의 생각이 잘 드러난 가전체문학에서는 당시 벼슬아치의 입신과 치국의 도리, 그리고 수난상을 제시하면서 안분지족의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 「백운거사전」은 이규보가 20대에 개성의 천마산에 은거하면서 도연명의「오류선생전」을 본떠서 지은 작자의 자서전적 전기이다. 여기서는 시와 술을 벗하며 청빈생활을 하고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 도연명과 같다고 하였다.「노극청전」은 그가 『명종실록』을 편찬할 때 지은 것으로, 노극청이라는 인물의 청렴결백한 일화를 통하여 난세에도 전혀 사리를 탐내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밖에 이규보의 산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있다면 12편에 이르는 '설'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대개 사소한 데서 세상살이의 이치를 터득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예컨대 「경설」에서는 자기가 거울을 대하되 맑은 것보다는 희미한 것을 취하는 이유가, "세상에는 못난 사람이 더 많아서 못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맑은 거울은 결코 용납되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라 하였다. 모난 정이 돌 맞는다는 말이 있듯이 온전한 처신을 강조한 글이다.「주뢰설」에서는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 데도 뇌물이 있어야 함을 예로 들며, 타락한 세상의 형편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옥설」에서는 퇴락한 집을 수리하면서 작은 잘못이라도 발견한 즉시 고치지 않으면 나중에는 고치기 어려움을 깨우치며 나라 일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칠현설」에서는 무신의 난으로 속세를 등지고 스스로 고고함을 자랑하던 강좌칠현을 조롱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하여 오세재를 뒤이어 강좌칠현의 무리에 들어오라는 청을 거절하고, 자신의 능력 곧 문재로서 70세까지 순탄한 벼슬살이를 하였던 이규보의 인생관을 알 수가 있다.
3. 이규보의 작품 감상
강화도에 있는 이규보의 묘를 찾아가면 그의 사당이 있는데, 그 안에 「사가재기」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그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문을 여기에 수록한다. 두번째 글은 생활 속의 단상을 짤막한 분량으로 그려낸 작품들 가운데 한 편이다. 이규보는 사물을 대하면서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사소한 물건이나 일에서도 삶의 지혜를 찾아내려고 했는데, 「집 고치기」에서도 역시 그러한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가재기 옛날 나의 부친이 일찍이 서쪽 성곽 밖에 별장을 두었다. 그곳은 계곡이 으슥하고 경지가 후미져서, 하나의 다른 세상을 이루어놓은 것같이 좋았다. 나는 그 별장을 물려받은 뒤, 자주 왕래하면서 글을 읽으며 한적하게 지낼 곳으로 삼았다. 밭이 있으니 갈아서 식량을 마련하기에 적합하고, 뽕나무가 있으니 누에를 쳐서 옷을 마련하기에 적합하고, 샘이 있으니 물을 마시기에 적합하고, 나무가 있으니 땔감을 마련하기에 적합하다. 나의 뜻에 맞는 것이 네 가지가 있기 때문에 이 집을 '사가'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또 녹봉이 많고 벼슬이 높아 위세를 부리는 자는 얻고자 하는 것이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거니와, 나 같은 사람은 곤궁하여 평생을 돌아보아도 백에 하나도 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 갑자기 내 뜻에 맞는 것을 네 가지나 얻었으니, 그 얼마나 분에 넘치는 일인가? 무릇 성대한 음식을 먹는 것도 명아주국에서 시작하고, 천 리를 가는 것도 문 앞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일은 대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내가 이 집에 사는 것은 전원의 즐거움을 얻게 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곧 그것은 세상 일을 팽개치고, 옷을 떨치며 발[족]을 싸서 옛 전원으로 돌아가 늙는 것이다. 그곳에서 태평성대의 늙은 농부가 되어, 땅을 두드리며 배를 두드려 성군의 가르침을 관현에 실어 노래를 부른다면, 역시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이 집에서 시 세 수를 지었다. 시집 가운데 있는 「서교초당시」가 바로 그것이다. 그 한 글귀는 이러하다.
상쾌하구나, 농가의 즐거움이여. 전원에 돌아가 사는 것은 이제 시작이라네. 이것이 참으로 나의 뜻이다. - 『동국이상국집』, 권23
집 고치기 집에 오래 지탱할 수 없이 퇴락한 행랑채 세 칸이 있어서 나는 부득이 그것을 모두 수리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그 중 두 칸은 비가 샌 지 오래 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고도 어물어물하다가 미처 수리하지 못하였고, 다른 한 칸은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급히 기와를 갈게 하였다. 그런데 수리하고 보니, 비가 샌 지 오래된 것은 서까래·추녀·기둥·들보가 모두 썩어서 못 쓰게 되었으므로 경비가 많이 들었고,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은 것은 재목들이 모두 완전하여 다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경비가 적게 들었다. 나는 여기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의 몸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잘못을 알고서도 곧 고치지 않으면 몸의 패망하는 것이 나무가 썩어서 못 쓰게 되는 이상으로 될 것이고, 잘못이 있더라도 고치기를 꺼려하지 않으면 다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집 재목이 다시 쓰일 수 있는 이상으로 될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사도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일에 있어서, 백성에게 심한 해가 될 것을 머뭇거리고 개혁하지 않다가, 백성이 못 살게 되고 나라가 위태하게 된 뒤에 갑자기 변경하려면, 곧 붙잡아 일으키기가 어렵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동국이상국집』, 권21
작품 해설 「사가재기」에서는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초월하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는 작자의 마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작자가 발견한 네 가지의 즐거움이란 시골에서 사는 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즐거움을 누리게 된 작자는 이를 통하여 한없이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게 된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정신적인 만족을 누리는 이규보의 생활태도를 엿볼 수 있다. 「집 고치기」는 짧은 글이면서도 생활의 지혜가 잘 나타나 있다. 헌 집을 고치는 일을 망설이다가 더 큰 비용을 들여 고치는 우를 범하였다는 실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 삶의 이치와 나라를 다스리는 바른 도리를 깨우치고 있다. 작은 잘못이라도 그것을 알고 미리 고치지 않으면, 더 큰 문제를 만들게 되고, 그로 인하여 더 큰 문제를 안게 된다는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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