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7. 중니제자열전 仲尼弟子列傳
공자가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그의 제자들이 그것을 번창시켜 모두 세상의 사표(師表)가 되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인의(仁義)의 도(道)를 드높이며 이를 엄격히 실천했다. 그래서 중니 즉 공자(孔子)의 제자 열전을 제7에 두었다. <太史公自序>
공자가 말했다. "나의 문하에서 학업을 받고 6예(詩.書.易.禮.樂.春秋)에 통한 자가 77명인데 모두가 재능이 특출한 선비들이다.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염伯牛).중궁(仲弓)을 든다. 정사(政事)에는 염유(염有).계로(季路)가 있고, 변론(辯論)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이 있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가 있다. 사(師: 顫孫子.字는 子張)는 편벽되고 삼(參: 曾參, 字는 子興)은 둔하고 시(柴: 高柴, 字는 子羔)는 우직하고 유(由: 字는 子路)는 거칠고 회(回: 顔回, 字는 子淵)는 쌀뒤주가 자주 비었다. 사(賜: 端木賜, 字는 子貢)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산을 축적했으나 그의 판단은 자주 도리(道理)에 적중했다."
공자가 존경한 인물로는 주(周)의 노자(老子), 위(衛)의 거백옥, 제(齊)의 안평중(晏平仲), 초(楚)의 노래자(老萊子), 정(鄭)의 자산(子産), 노(魯)의 맹공작(孟公綽)이다. 또한 장문중(臧文仲).유하혜(柳下惠).동제(銅제)의 백화(伯華), 개산(介山)의 자연(子然)을 자주 칭찬했다. 공자는 이들보다 뒤에 태어났으므로 세대를 같이하지는 않았다.
안회는 노(魯)나라 사람이다. 공자보다 30세 연하인데, 인(仁)에 대하여 질문한 적이 있다.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의 사욕을 이기고 바른 예의의 길로 돌아가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 인덕(人德)을 따를 것이다." 그 때 공자는 안회를 이렇게 비평했다. "훌륭하다, 회는. 한 그릇의 밥과 한 쪽박의 물로 주림을 참으면서 누추한 뒷골목에 살고 있으면, 그는 그 근심을 이겨 낸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참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공자는 회를 이렇게 평했다. "회는 내 말을 바보처럼 듣기만 한다. 그러나 물러가 친구들과 얘기하는 것을 들어 보면 중요한 도리를 제대로 밝히고 있더라. 그래서 그는 어리석지 않다." 공자는 다시 회를 두고 말했다. "회는 등용되면 소신껏 도(道)를 실천할 것이고 등용되지 않는다면 숨어서 홀로 도를 즐길 것이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회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회는 29세에 머리털이 하얗게 희어지더니 곧 죽었다. 공자는 제자의 죽음을 통곡하면서 말했다. "안희가 나타나면서부터 다른 제자들도 나와 더욱 친근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노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들 중에서 누가 가장 학문을 좋아합니까?" "안회라는 자가 있습니다. 학문을 매우 좋아하며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를 데려오시지요." "그렇지만 불행히도 젊어서 죽었습니다."
민손(閔損)은 자를 자건(子騫)이라고 했다. 공자보다 15세 아래다. 공자가 그를 두고 말했다. "효성이 지극한 자건이여. 너의 효성을 아무리 칭찬하여도 아무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권력 있는 대부를 섬기지 않았다. 노나라의 세도가인 계씨(季氏)가 그를 비읍의 장관으로 삼으려 했을 때 그는 이렇게 사양했다. "또다시 나를 벼슬자리로 부른다면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의 문수(汶水)가로 가서 살겠소이다."
염경의 자는 백우(伯牛)이다. 공자가 항상 그의 덕행을 칭찬했던 사람이다. 불행히도 백우가 문둥병에 걸렸다. 공자는 그를 문병 가서 창문을 통해 손을 잡고 통탄해 마지않았다. "이것이 그대의 천명(天命)인가! 이토록 아까운 인물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염옹의 자는 중궁(仲弓)이다. 중궁이 정치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가르쳤다. "집을 나서서 남과 사귈 때에는 소중한 귀빈을 만난 것처럼 대하고, 백성을 부리는 위치에 서거든 마치 중요한 재사를 드릴 때처럼 신중하게 하라. 제후의 나라에서 벼슬을 하거나 대부의 집을 섬기거나 어쨌건 남에게 그로 인해 원한을 사지 말아라." 중궁의 부친은 미천한 인물이었는데 공자는 중궁의 덕행을 들어 이렇게 평했다. "중궁은 군왕의 위에 올라도 훌륭하게 어울리는 사람이다. 보잘것 없는 얼룩소의 새끼라도 붉은 색깔이 돌고 두 뿔이 잘생겼으면 사람들이 어찌 희생의 제물로 쓰지 않겠는가. 산천의 신령도 그를 버릴 리가 없다."
염구는 자를 자유(子有)라 했다. 공자보다 29세 연하다. 염구가 계씨(魯의 大夫) 집안의 재(宰: 執事)가 되었을 때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물었다. "염구는 어진 사람입니까?" "천호(千戶)의 식읍을 가지고 전차 백 대를 가진 경대부(卿大夫)의 집에서 그가 부세(賦稅)의 일을 맡더라도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 내겠지요. 그러나 어질다는 뜻하고는 다른 말이지요." "자로(子路)는 어떻습니까?" "염구와 같습니다." 염구가 공자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의(義)로운 말이라면 들은 대로 이것을 실행해야 합니까?" "물론 실행해야지." 자로가 비슷한 말을 공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의로운 말이라면 들은 대로 이것을 실행해야 합니까?" "부형(父兄)이 살아 계신데 어찌하여 제 마음대로 그것을 선택하겠는가." 자화(子華)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꼭 같은 질문인데 어찌 가르침은 다른지요?" "구는 성격이 우유부단해서 격려해 주었고, 자로는 용기가 지나치기 때문에 억제시킨 것이다."
중유(仲由)는 자가 자로(子路)인데, 변(卞) 땅 사람이다. 공자보다 아홉 살 연하다. 자로는 성격이 거칠고 용맹했으며 고집이 세었다. 수탉의 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수퇘지 가죽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다녔다. 그는 심지어 공자에게도 행패를 부릴 만큼 포악했다. 그러나 공자는 예의를 다해 그를 조금씩 조금씩 이끌었으므로 결국 그는 유자(儒者)의 옷으로 갈아 입고 예물을 바치며 제자되기를 청해 왔다. 자로는 우선 정치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는 그 요체(要諦)를 말했다. "한마디로, 솔선해 실행하고 노고를 다해야 한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계속 그렇게 하고 게으르지 말아야지." "군자에게도 용기란 것이 필요합니까?" "군자는 (義)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기만 좋아하고 의로움을 모르면 난신(亂臣)이 되고, 소인이 용기만을 좋아하고 의로움이 없다면 도둑이 되지." 자로는 하나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기 전에는 다른 말을 듣는 것을 꺼렸다. "자로는 단 한마디 말로써 송사(訟事)를 척결하기를 좋아한다. 자로는 나보다 용기를 더욱 좋아하지만 불행히도 그것을 적절하게 쓸 줄을 모르는구나. 그래서 그로 인해 제 명에 죽을지 모르겠다. 그는 다 떨어진 솜옷을 걸치고서도 앞에 여우털이나 담비털 같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마주 서서도 눈썹 하나 까딱 안할 사람이다. 유의 학문이 비록 당상(堂上)에서 올랐지만 안방 깊숙이 들어오지 못한 게 아쉽구나." 계강자가 공자에게 자로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다. "자로는 어진 사람입니까?" "천승 제후의 나라에서 그 부세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는 있겠지만 인자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겠습니다." 자로는 공자를 따라 천하를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그 때문에 장저(長沮).걸닉(桀溺).하조장인(荷조丈人: 삼태기를 짊어진 노인. 이 세 사람은 속세를 떠나 天命에 安住하는 孤高한 선비들) 등을 만났다. 자로는 그들의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로가 계씨의 가재(家宰)가 되었을 때 계손(季孫)이 공자에게 물었다. "자로는 대신이 될 만한 인물입니까?" "아직은 충분치가 못 하지요." 자로가 포(포: 衛의 一邑)의 대부가 되어 떠나면서 공자한테 하직 인사를 하러 왔다. "좋은 말씀 한 마디만 주십시오." "포에는 힘센 자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말해 두거니와 그 자들에게 공손하고 너그럽게 올바로 대하거라. 그래야만 그 자들을 제어할 수 있다. 겸손하고 올바르게 다스림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위(衛)의 영공(靈公)에게는 남자(南子)라는 총애하는 부인이 있었다. 영공의 태자 괴외가 남자(南子)에게 죄를 짓고 주살될 것이 두려워 국외로 도망쳤다. 영공이 죽자 부인은 왕자 영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영은 거절했다. "저는 싫습니다. 망명한 태자의 아들 첩(輒)을 세우십시오." 그래서 위나라에서는 할 수 없이 첩을 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출공(出公)이다. 출공이 위에 오른 지 12년이 지났어도 부친 괴외를 망명지에서 부르지 않았다. 자로는 그 때 위의 대부 공회(孔회)의 읍재(邑宰)로 있었다. 괴외가 공회에게 반란을 일으키자며 모의해 왔다. 결국 괴외와 공회는 출공을 습격했다. 출공은 노(魯)나라로 달아나고 괴외가 들어와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장공(莊公)이다. 위나라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자로는 바깥에 있었다. 거기서 소문을 듣고 출공을 구하기 위해 자로는 국도(國都)인 조가(朝歌)로 달려갔다. 때마친 자고(子羔: 孔門의 弟子인 高柴, 衛의 大夫)가 위의 성문으로부터 황급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자네 지금 어딜 가나?" "출공을 구해야 하지 않겠나." "이미 늦었네. 출공은 달아나고 성문은 이미 닫혔어. 자네 어서 돌아가는 게 좋아. 여기서 얼쩡거리다간 공연한 화를 당하네." 자고는 달아나고 자로는 억지로 성문을 열고 들어갔다. 괴외는 공회와 함께 대(臺) 위로 올라가 있었다. 자로가 괴외에게 소리질렀다. "왕이시여, 어찌 공회 따위를 등용하시렵니까.역적인 그 자를 내게 돌려주십시오." "무어라고?" "공회를 죽이겠습니다." "무엄하다!" "그렇다면 제 생각대로 해 보겠습니다." 공회는 괴외의 등 뒤에 붙어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공회가 내려올 기색이 없자 자로는 대에다 불을 지르려 했다. "무엇들 하고 있느냐. 어서 저 자를 제지하라!" 괴외가 소리치자 석걸(石乞)과 호염(壺염) 등이 대에서 뛰어 내려와 칼을 빼들고 자로에게 대들었다. 한바탕 칼바람이 일었다. 중과부적이었다. 상대가 친 칼로 자로의 갓끈이 끊어졌다. "잠깐 기다리게. 군자는 죽을 때도 갓을 벗지 않는다네." 공자는 위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 자로가 죽겠구나!"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문하의 하나가 물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든." 끝내 자로는 갓끈을 매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내가 자로를 제자로 삼은 후부터는 나를 비방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 오지 않았는데......."
재여(宰予)는 자를 자아(子我)라 했다. 입심이 좋고 말솜씨가 빼어났다. 공자에게서 가르침을 받다가 이렇게 물었다. "부모의 상을 삼 년 씩이나 입는 것은 너무 길지 않습니까?" "너무 길다고?" "군자는 하루도 예약(禮樂)을 빠뜨릴 수 없는데 삼 년씩이나 예를 닦지 않으면 반드시 예가 무너질 것입니다." "넌 얼마간이면 좋겠느냐?" "무릇 곡식도 일 년이 지나면 묵은 곡식은 없어지고 햇곡식이 나며, 나무를 비벼서 얻던 불씨도 일 년이면 갈아치웁니다. 부모의 상도 일 년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네 마음이 편할 것 같은가?" "편할 것 같습니다." "편안하다면 그렇게 하라. 군자는 부모의 상을 입는 동안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가 않지. 삼년이 지루하다면 일 년으로 해야지." 재여가 나간 뒤에 공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다. "재여는 어질지가 못해." "그것은 어째서입니까?" "아이도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에서 떠나지 않더냐. 그래서 3년상은 천하 사람의 공통된 도리이겠거늘." 재여가 공부를 게을리하고 낮잠을 잤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가 없지. 울퉁불퉁한 담장에 흙손으로 곱게 바를 수가 없듯이." 재여가 오제(五帝: 皇帝.顫頊.帝곡.帝堯.帝舜)의 덕(德)에 대해서 공자에게 물었다. "너는 그것을 알아들을 만한 인간이 못 된다." 재여가 임치(臨치: 齊의 국도)의 대부가 되어 있을 때 전상(田常)과 공모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이 잘못돼 자신은 물론 일족이 몰살을 당했다. 공자는 그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단목사(端木賜)는 위(衛)나라 사람인데 자는 자공(子貢)이다. 공자보다 31세 연하다. 자공은 변설이 교묘했다. 그래서 공자는 항상 그의 말재주를 꾸짖었다. 어느 날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너와 안회(顔回)는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 "저 같은 게 어찌 안회와 견주겠습니까." "어떻게?"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야 둘밖에 모르는데요." "말은 겸손하다만......." 자공이 가르침을 받은 한참 뒤에 공자에게 문의했다. "선생님, 저는 어떤 인간이겠습니까?" "쓸 만한 그릇이지." "어떤 그릇일까요?" "호련(瑚璉: 宗廟의 祭祀에 사용하는 上等의 祭器)이다." 진자금(陳子禽)이 자공에게 공자에 대하여 물으러 왔다. "그토록 세상의 도(道)를 다 알고 계시는 중니(仲尼)는 도대체 누구한데서 배웠습니까?" "이런 대답이 온당하겠지요.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도는 아직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살아 있소. 현명한 자는 그 도의 큰 바를 배우고 현명치 못한 자도 그 도의 작은 바는 아오. 그러면서도 세상에는 어디서나 문왕.무왕의 도가 아닌 것이 없으니, 스승께서도 어디서든지 그것을 배우지 않으셨겠소. 그리하니 어떤 일정한 스승은 없었던 것으로 아오." "또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공작께서는 어느 나라로 가시든지 반드시 그 나라의 정치를 간섭하셨습니다. 이는 공자께서 그것을 구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나라의 군주가 원했기 때문입니까?" "스승께서는 자신이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사양하는 미덕을 지니셨기 때문에 자연히 임금 쪽에서 요구하게 되오. 설사 스승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내용이 사뭇 다르오."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부유해도 거만하지 않고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는 일은 좋은 건가요?" "괜찮다. 그러나 가난해도 도를 즐기고 부유해도 예의를 지키는 것만큼은 못하다."
전상(田常: 齊의 大夫)이 제에서 난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제의 대부들인 4성(四姓: 高.國.鮑.晏)의 사람들이 이를 꺼려했다. 강력한 군사를 놀릴 수가 없어 전상은 외국 침공 쪽으로 눈을 돌렸다. 더구나 노(魯)나라를 치려 했다.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노나라는 우리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나라가 이토록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누구 나설 사람이 없는가." 자로가 나섰다. "제가 제나라로 가서 전상을 설득시키겠습니다." "너는 그를 설득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자장(子張)과 자석(子石)이 동시에 나섰다. "저희들은 어떻습니까?" "저희들 재주로는 힘들다." 한참 후에 자공이 나섰다. "선생님, 제가 가겠습니다." 공자는 잠깐 생각한 뒤에 말했다. "자공이라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되어서 자공은 제나라로 건너갔다. 전산을 만난 자공은 우선 이렇게 설득했다. "그대가 노나라를 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째서 그렇소?" "노나라는 치기가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 성벽은 엷고 낮으며, 주변의 연못은 좁고 얕으며, 임금은 우매하고 대신들은 무능하며, 병사와 백성은 전쟁을 무서워합니다. 이런 나라와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차라리 싸우려면 오나라와 하십시오. 오나라는 성이 높고 두터우며, 못은 넓고 깊으며, 갑옷은 견고하고 무기는 예리하며, 정예병들이 성곽을 철통같이 지키며, 대부들이 현명하니 얼마나 치기가 쉬운 나라입니까." 전상은 크게 화를 냈다. "듣자하니 그대가 어렵다는 것은 남들이 쉽다는 것이고 그대가 쉽다는 것은 남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오? 나한테 거꾸로 말해 주고 있으니 지금 그대는 제정신인가." "저는 이렇게 듣고 있습니다. 근심이 국내에 있을 때에는 강한 나라를 치고 근심이 국외에 있을 때에는 약한 나라를 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상공의 근심은 국내에 있지 않던가요?"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가 없소." "상공께서는 주군한테서 세 번이나 봉을 받으려 했지만 세 번 모두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대부들이 상공의 세력을 꺼렸기 때문입니다." "그건 사실이오." "지금 상공께서 만일 노나라를 친다면 노나라는 간단하게 무너질 것이며 적으나마 땅은 넓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요?" "싸움에 이긴 것으로 주군의 마음은 교만해지며 노나라를 깨친 것으로 다른 대신들의 위신만 높여 줄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상공의 공적은 인정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군주와의 사이가 날로 벌어집니다. 이리하여 상공께서는 주군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주군과 틈이 생기고 대신들과는 다투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상공이 제나라에서 입신하려 해도 위태롭게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오나라를 치는 일만 못하다는 것을 말씀드린 겁니다." "오나라와 싸운다면 어떤 이익이 있겠소?" "오와 맞붙어 패배하는 경우를 말씀드리지요. 병사들은 나라 밖에서 싸우다 죽고 군사(軍事)에 관계된 대신들은 국내에서 그 지위를 잃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상공은 강적인 대부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백성의 원한을 한몸에 받지 않아도 됩니다. 주군은 또한 고립될 것이므로 제나라를 제어할 사람은 오직 상공밖에 남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럴 듯한 계략이오. 헌데, 우리 군사들은 벌써 노나라로 향해 떠났소." "서둘러 전령을 보내어 멈추게 하십시오." "그렇더라도 내가 노나라를 적대하지 않고 오나라를 친다면 대부들이 나를 의심하지 않겠소?" "한동안만 미적거리시면 됩니다. 그 동안 저는 오나라로 가서 왕을 설득시켜 제나라를 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 때 상공께선 자연스럽게 오나라를 맞아 싸우면 됩니다." "그렇게 해 보겠소." 자공은 서둘러 남쪽 오나라로 향해 떠났다. 오왕을 만나자마자 자공은 이렇게 설득했다. "왕자(王者)는 다른 나라의 대를 끊어지게 하지 않으며 패자(覇者)는 적국을 강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천균(千鈞: 一鈞은 30斤)의 무게라도 1수(銖)나 1냥(兩)의 무게만 더 보태어도 저울은 움직입니다.지금 전차 1만 대의 대국인 제나라가 전차 1천 대의 소국인 노나라를 차지하려고 오나라와 그 강약을 다투려 하고 있습니다. 왕께선 이것이 걱정스러운 일이라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딴은 신경 쓰이게 하는 일이구려." "게다가 노나라를 구원하는 바는 누가 생각해도 명예로운 일이며 제나라를 쳐서 이기게 되면 큰 이익을 얻게 되는 일입니다. 고로 사수(泗水) 주변의 제후들을 구슬러 사나운 제를 주벌하고 강력한 진(晋)까지 복종시킨다면 아마 이보다 더 큰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그대의 설명은 멸망하는 노나라를 구원한다는 명분을 세우되 실속은 강대한 제나라를 궁지에 몰아 넣자는 것이겠구먼." "밝은 지혜를 가지신 군주라면 의심도 머뭇거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이오. 내가 일찍이 월나라와 싸워 회계산(會稽山)으로 왕을 몰아 넣은 적이 있소. 월왕은 이를 부끄러이 여겨 자신을 괴롭혀 가면서까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단 말이오. 그러니 내가 월을 쳐서 없앨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오." "그렇지가 않습니다. 월나라의 강함은 노나라만도 못하며 오나라의 강함도 제나라만은 못합니다. 만일 왕께서 제나라를 버려 두고 월나라를 칠 동안 제나라가 노나라를 평정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왕께서는 멸망하려는 나라를 존속케 하고 끊어지려는 나라를 이어주었다는 패자로서의 명성을 떨치려 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런데도 작은 월나라를 치고 강한 제나라를 두려워하신다면 용맹스러운 분이 하실 일이 아닙니다. 무릇 용자(勇者)는 곤란을 피하지 않으며, 인자(仁者)는 곤궁한 나라를 궁지에 몰아넣지 않으며, 지자(智者)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왕자(王者)는 타국의 세사(世嗣: 후계자)를 끊기지 않게 함으로써 대의(大義)를 세운다고 합니다." 오왕이 여전히 결심을 못 하고 있자 자공은 다시 설득했다. "지금 왕께서는 월나라를 존속시킴으로써 제후들께 인덕(仁德)함을 보여 주며 노나라를 구원하고 제나라를 쳐서 위세가 진(晋)나라에 미치면 천하의 제후들이 서로 앞다투어 오나라의 조정으로 머리숙여 들어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패업의 달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왕께서 혹시 월군이 여전히 걱정되신다면 제가 동쪽으로 가서 월왕을 달래겠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월왕을 만나 군대를 출동시켜 제나를 치는 오군을 도와주라고 설득시키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실속으로는 월나라 안의 군비(軍備)를 비게 하는 것이 되며 명목상으로는 제후를 이끌고 제나라를 치게 되는 것이 됩니다." "좋소, 월나라로 가시오!" 오왕은 크게 기뻐하며 자공을 전송했다. 자공이 월에 도착하자 월왕은 도로를 청소하고 교외로까지 나와서 몸소 모는 제 마차에 태워 궁으로 안내했다. "대부께서는 이토록 미개한 오랑캐 나라에 무슨 일로 왕림하셨습니까?" 자공이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들어 보십시오. 저는 최근 오왕께서 노나라를 구원하고 제나라를 치도록 권고했습니다. 오왕은 그럴 뜻이 있으면서도 월나라가 근심스러워 '내가 월나라를 패망시킨 다음에 그렇게 하자'고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오왕이 월을 공격할 게 틀림없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대체로 상대에게 보복할 뜻이 없는데도 그런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까요. 또 뜻이 있다해도 대사를 거행하기 진에 이쪽 계략이 새어 나간다는 일 역시 서투른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월왕 구천은 두 번 머리 숙여 절한 뒤에 말했다. "고(孤: 諸侯의 一人稱)는 실상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난 해에 오나라에 도전했다가 회계에서 큰 곤욕을 당했습니다. 그 통분함은 골수에 사무치고 입술은 타고 혀가 마르도록 괴로웠습니다." "오왕을 죽이고 싶도록 원한이 사무쳤겠구려." "무슨 좋은 계략이 없겠습니까?" "오왕은 사람됨이 사납고 모집니다. 신하들은 견디기 힘들어하며 거듭되는 전쟁으로 나라는 피폐해졌고 사졸들의 사기도 말씀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임금을 원망하고 대신들은 충성심을 잃었습니다. 충신 오자서는 간언 때문에 죽고 태재(太宰) 백비(佰비)는 오왕의 과오를 틈타서 사복을 채우기에만 바쁩니다." "대부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오를 치는 기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래도 아직 오나라는 강합니다. 더구나 일에는 반드시 순서와 기회가 있게 마련입니다. 차라리 월왕께서는 병졸을 데리고 가서 오왕을 돕겠다고 말하되 보물을 싸 가지고 가서 그를 기쁘게 해 주십시오." "아아니, 원수를 은혜를 갚으라는 말씀입니까!" "오왕은 월왕을 굳게 신임하게 되며 그는 안심하고 제나라를 치게 된다는 얘깁니다." "나를 신임하고 제를 친다......." "그가 제와 싸워서 승리하지 못하면 월왕을 위해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며 혹시 이기게 되면 그는 여세를 몰아 진(晋)으로 쳐들어갈 게 분명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저는 진나라로 가서 오군을 치도록 설득하겠습니다.진나라가 성공한다면 오나라는 더욱 피폐될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정예로운 오군은 제군과의 전투에서 전투력이 탕진되고 기진맥진한 오군을 진나라쯤에 가서는 재기불능의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왕께서 오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좋은 계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왕은 자공의 계략을 수긍한 후 황금 백일(百鎰: 一鎰은 24냥)과 명검 한 자루와 좋은 창(槍) 하나를 보내 왔다. 그러나 자공은 이를 받지 않았다. 자공은 다시 오왕에게로 가서 이렇게 보고했다. "제가 삼가 대왕의 말씀을 월왕에게 고했더니 월왕이 크게 황공해 하면서 용서를 비는 서신을 대왕께 올렸습니다."
서신의 내용은 이러했다. -저는 불행히도 일찍 부친을 여의고, 자신의 분수도 헤아리지 못한 채 오나라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 싸움에서는 패전학 회계산에서는 창피를 당하고 국토는 쑥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왕의 은덕으로 제기(祭器)를 잦추어 조상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감히 이 은혜는 백골난망이옵니다. 하물며 모반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옵니다.
"이따위 맹세를 믿어도 되겠소?" "두고 보십시오. 그 맹세는 반드시 실천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닷새 후 과연 월의 대부 종(種)이 사자로 찾아왔다. "동해(東海)의 역신(役臣) 구천의 신하인 소신 종은 감히 대왕의 측근 인사를 통해 인사를 올립니다. 가만히 들은 바로는 지금 대왕께서 대의(大義)의 군사를 일으켜 강국을 누르고 약국을 구원하며 포악한 제나라를 억눌러 주(周)왕실을 편안케 해 드린다 하시니 월왕은 자청하여 사졸 3천 명을 동원하고 월왕 자신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어 선두에 서서 적군의 화살과 돌을 받겠다 하옵니다. 우선 월의 천한 신하 종이 선대로부터 소장되어 온 갑옷 20령(領)과 굴로(屈蘆)라는 이름의 창(槍), 보광(步光)이란 명검을 헌상하여 의로운 출정을 경하드리고자 합니다." 오왕은 매우 감격했다. "어떻겠소, 월왕의 소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 때 자공이 서둘러 나섰다. "옳지 않습니다. 무릇 남의 나라를 미우게 하고 남의 병사를 일으키게 하며 하물며 그 나라의 군주까지 종군케 한다는 것은 의(義)가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월의 패물과 원군만은 받아들이시되 월왕의 종군만은 사양하십시오." 오왕은 자공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9군(郡)의 병사를 동원한 오왕은 드디어 제를 치러 나섰다. 자공은 계획대로 서둘러 진(晋)나라로 달려갔다. 진왕에게 말했다. "계략을 깊이 생각해 두지 않으면 돌발 사태에 대처할 수가 없으며,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않고, 군비(軍備)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적에게 이길 수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제와 오가 서로 싸우려 합니다. 이 싸움에서 만일 오나라가 패하면 월나라가 반드시 오를 칠 것이나 오가 이기면 그 여세를 몰아 진나라로 쳐들어올 게 틀림없습니다." 진왕은 크게 두려워했다.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소?" "우선 병력을 정비하고 병사를 충분히 휴양시키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자공은 일단 진왕에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시킨 뒤 노나라로 돌아갔다. "선생님, 이제사 돌아왔습니다." 자공은 공자에게 기나긴 순방의 내용을 보고했다. "수고하였다." 오왕은 애릉(艾陵)에서 싸워 제나라 군대를 크게 깨뜨렸다. 오왕은 과연 일곱 장군의 군사를 사로잡고도 회군하지 않았다. 승승상구의 여세를 몰아나가 드디어 황지(黃池)에서 진나라 군사와 부딛쳤다. 진왕은 자공의 계략을 받아들여 완벽한 방비태세를 취하고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오나라 군사를 대패시켜 버렸다. 이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 월왕은 양자강을 건너 오를 덮쳐서 도성 70리 밖에까지 쳐들어갔다. "무어? 그 자가 오의 도성을 습격했다고!" 오왕은 대경실색했다. "돌아가 역신 구천(句踐)부터 친다!" 그러나 오군은 오호(五湖: 太湖) 가에서 만나 세 번씩이나 도전했지만 월군에게 세 번 다 패했다. 오왕 부차는 도성 안으로 도망쳐 와 성문을 굳게 잠갔다. 그러나 그 성문도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성은 무너지고 월군이 노도처럼 몰려들었다. 월왕은 오왕 부차를 잡아 죽이고 재상 백비를 찾아 내어 동시에 목 베었다. 월은 오를 무너뜨린 지 3년 만에 동방의 패자가 된다. 그러고 보니 자공은 한번 국외로 나감으로써 노나라를 보존하고 제를 교란했으며 오를 쳐부수고 신을 강성하게 했고 월나라를 패자(覇者)가 되게 만들었다. 한 번 사신으로 나가서 천하 대세의 균형을 깨뜨려 10년 동안에 5국(五國: 魯.齊.晋.吳.越)에게 엄청난 변화를 일으켜 놓았다. 자공은 폐거(廢擧: 물가가 하락하면 사들이고 등귀하면 내다파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상재(商才)가 매우 뛰어나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는 남의 장점을 칭찬해 주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으나 결점을 보면 단호하게 지적하는 성격이었다. 한때 노(魯)와 위(衛)에서 재상으로 있었으며 집안에는 천금의 재산을 쌓아 두었다. 그는 제(齊)나라에서 생애를 마쳤다.
언언(言偃)은 오나라 사람이며 자는 자유(子遊)이다. 공자보다 45세 손아래다. 자유가 이미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후 무성(武城: 魯邑)의 읍제(邑帝)가 되었다. 공자가 무성을 지나다가 거문고 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었다. "예약(禮藥)이 성행하는구나. 언을 만나 보고 가자." 공자는 언을 만나자 웃으면서 말했다. "어찌 닭을 잡는 데 소잡는 칼을 쓸까?" 그것은 비유였다. 공자는 무성을 닭으로 치고 자유를 소잡는 칼에 비유했던 것이다. 일테면 자유 같은 대재(大才)에게 어찌 무성 같은 소읍이나 맡기고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러나 자유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잡는 칼을 예악으로 치고 무성을 예약으로 다스림을 스스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전날 선생님게서는 '군자가 예악의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도 그것을 배우면 인화(人和)를 얻어 사람부리기가 쉽게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공자는 자유가 자기 말을 오해하고 있음을 따지지 않고 수행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얘들아, 언의 말이 옳다. 아까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 공자는 자유의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생각했다.
복상(卜商)의 자는 자하(子夏)이며 공자보다 44세 손아래이다. 자하가 공자에게 물었다. "'방긋 웃는 고운 입, 예쁘게 동그란 눈동자, 분단장하니 더욱 아름답다(시경)'라는 시구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림을 그릴 때 먼저 소지(素地)가 있은 다음에 색을 칠해 다듬는다는 뜻이지." "도덕이 있은 다음에 예의로 다듬는다는 뜻이지요?" "너만 하면 이제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자공이 공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사(師: 子張)와 상(商: 子夏) 둘 중 누가 낫습니까?"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하지." "그럼 사가 더 낫다는 뜻입니까?" "똑같다. 지나친 것도 모자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공자가 자하에게 충고했다. "너는 군자의 선비(道에 힘쓰는 학자)가 되는 게 좋겠다. 부디 소인의 선비(名聲을 쫓는 학자)는 되지 말라."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자하는 서하(西河: 山西省)에 살면서 유생들을 가르치다가 (魏) 문후(文侯)의 스승이 되었다. 감정이 여려 그의 아들이 먼저 죽자 몹시 슬피 울다가 드디어 눈이 멀었다.
전손사(顫孫師)는 진(陳)나라 사람으로 자를 자장(子張)이라 했다. 공자보다 48세나 아래다. 자장이 벼슬자리를 얻는 방법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많이 들어라. 그 중에서 의심스러운 것은 빼버리고 나머지 확실한 것만을 신중하게 발언하면 네 말에 허물이 적을 것이다. 많이 보아라. 그 중에서 위태로운 것은 빼고 나머지 확실한 것만을 조심해서 행하면 후회함이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다면 그까짓 벼슬자리는 저절로 굴러들 게 아닌가."
훗날 공자를 따라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곤욕을 겪고 있을 때 행세하는 도리에 대하여 공자에게 물었다. "말에 성의가 있고 행동에 경의가 있으면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도 행세할 수 있다. 말에 성의가 없고 행동에 경의가 없으면 제 고을에서도 행세할 수 없을 것이다. 일어서면 성의와 경의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수레를 타면 그것이 멍에(衡)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비로소 도를 행세할 수가 있지." 자장은 그 말을 자신의 큰 띠(紳)에 써서 잊지 않도록 했다. "선생님, 선비는 어느만큼 되어 있어야 통달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네가 말하는 통달의 뜻이 무언데?" "공직생활에서는 반드시 명성이 들리고 사생활에서는 반드시 좋은 평판이 들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문(聞)이지 달(達)이 아니다. 달이란 정직하며 의(義)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알아들으며 얼굴색을 알아보며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공.사(公.私)생활 모두에 있어 덕(德)에 통달하게 된다." "문(聞)은 어떻게 보입니까?" "겉으로는 인(仁)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의 행동은 인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 안심하고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속아서 공사간에 호평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문이다."
증삼(曾參)은 남무성(南武城: 山東省) 사람이며, 자는 자여(子與)이다. 공자보다 46세 아래이다. 공자는 그가 효도에 통달할 수 있는 제자라 생각하고 그를 더욱 지도하여 효경(孝經) 을 저술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후에 노나라에서 죽었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은 무성(武城: 山東省) 사람인데 자를 자우(子羽)라 했다. 공자보다 39세 손아래다. 용모가 몹시 추악하여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찾아왔을 때 공자는 그를 모자라는 인간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성실히 공부하여 학업을 마친 후에도 물러나 수양을 쌓았다. 지름길이 있어도 큰 길로 가고 공용(公用)이 아니면 경대부(卿大夫)를 만나지 않았다. 자우는 양자강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제자가 3백 명이 되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물건을 주고받는 도리와 벼슬자리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도리를 가르쳤다. 그의 명성은 제후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공자는 그에 대한 평판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변설에 능한 것만 보고 재여(宰予: 실행이 따르지 못했음)에게 실수했고 얼굴이 추악한 것만 보고 자우에게 실수했다." 복부제(宓不齊)는 자를 자천(子賤)이라 했으며 공자보다 30세 손아래였다. 자천이 단보(單父: 山東省)의 재(宰: 長官)로 있을 때 공자한테 문안드리러 왔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는 저보다 현명한 분이 다섯 분이나 됩니다. 그분들이 치국(治國)의 도(道)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는 군자다. 모범이 될 만한 노나라의 군자를 너는 알아 보았으니까. 그렇지만 아깝다. 부제가 다스리기에는 땅이 너무 좁다. 좀더 넓은 땅을 다스리게 했더라면 이상적인 정치를 했을 것을."
원헌(原憲)의 자는 자사(子思)이다. 자사가 부끄러움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라에 제대로 도(道)가 행해질 때 벼슬하여 하는 일 없이 녹(祿)만 먹거나,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데도 그저 녹만 먹고 있는 것이나 모두 부끄러운 일이다." 또 자사가 공자에게 물었다. "남을 억누르고 자기 공로를 자랑하고 남을 원망하고 탐욕하든가 이 네 가지를 하지 않으면 어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바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어진 일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공자가 죽은 후 원헌은 세상을 등지고 잡초 우거진 늪가에 숨어 살았다. 위(衛)나라 재상이 된 자공이 사두마차(四頭馬車)를 타고 수풀을 헤치고 들어와 자사를 만났다. 자사는 가난한 마을에서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자공이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였다. "병색(病色)이 완연한데 어쩌다 이리 되었소?" 자사가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는 '재산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 하고, 도를 배우고도 행하자 못하는 자를 병들었다 한다'고 했소. 나 같은 경우란 가난한 것이지 병이 든 게 아니오." 자공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자공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실언(失言)을 부끄럽게 여겼다.
공야장(公冶長)은 제(齊)나라 사람으로서 자를 자장(子長)이라고 했다. 공자가 말했다. "공야장이라면 사위 삼을 만하다. 그가 감옥에 갇힌 적은 있지만 그의 죄는 아니었다." 그리고는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 보냈다.
남궁괄(南宮括)의 자는 자용(子容)이다. 자용은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예(예)는 활의 명수이며 오(오)는 땅에서도 배를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장사였지만 모두 제 수명대로는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夏)의 우왕(禹王)이나 주(周)의 후직(后稷)은 몸소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천하를 차지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지요?" 공자는 묵묵히 있었다. 자용이 물러간 뒤에사 제자들에게 대답했다. "자용은 군자다. 보아하니 자용은 덕(德)을 소중히 여기는구나. 저런 인물은 나라에 도(道)가 있다면 높이 등용될 것이고 설사 도가 없더라도 최소한 형륙(刑戮)은 면할 것이다." 자용은 <시경(詩經)>을 읽다 말고 어떤 구절에 와서 세 번씩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백규(白珪: 흰 瑞玉)의 흠이야 갈(磨) 수 있어도 실언(失言)은 갈 수가 없네......." 그는 이 구절에 와서는 되풀이해 읽으면서 항상 말을 삼가했다. 공자는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 보냈다.
공석애(公晳哀)는 자가 계차(季次)이다. 공자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천하에는 도를 실행하는 자는 적고 대부분 대부의 가신(家臣)이나 되어 벼슬했건만 계차만은 절개를 지켜 남에게 벼슬한 적이 없다.
증점(曾점: 曾參의 아버지)의 자는 석(晳)이다. 열성을 다하여 스승만 섬기고 있는 점에게 어느 날 공자가 물었다. "앞으로 너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새로 지은 봄옷을 입고 젊은이들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쯤 데리고 기수(沂水: 魯의 城南에 있는 溫泉池) 가에서 목욕이나 하고 봄바람을 쐬고 시(詩)나 읊었으면 합니다." 공자는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와 동감이다."
안무요(顔無繇)의 자는 노(路)다.,로는 안회(顔回)의 아버지인데 부자가 때를 달리하여 공자에게 사사(師事)했다. 안회가 죽었을 때에 안로는 가난했다. 그래서 공자의 수레를 팔아 장사지내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공자는 이렇게 거절했다. "잘났건 못났건 간에 자식은 자식이다. 내 자식 이가 죽었을 때에도 관(棺)은 썼지만 곽(槨: 덧관(형))은 쓰지 못했다. 수레를 팔아서까지 덧관을 만들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내가 대부의 끝자리나마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수레 없이 걸어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구(商瞿)는 노나라 사람인데 자는 자목(子木)이다. 공자보다 29세 손아래다. 공자는 <역(易: 六經의 하나)>의 학문을 구에게 전수했다. 구는 초나라 사람 한비자홍(한臂子弘)에게 전하고 홍은 강동(江東) 사람 교자용서(교子庸서)에게 전했다. 자는 연(燕)나라 사람 주자가수(周子家수)에게 전하고 수는 순우(淳于) 사람 광자승우(光子乘羽)에게 전했다. 우는 제(齊)나라 사람 전자장하(田子莊何)에게 전하고 하는 동무(東武) 사람 왕자중동(王子中同)에게 전했다. 동은 치천(치川) 사람 양하(楊何)에게 전했다. 하는 무제(武帝) 원삭년간(元朔年間)에 역(易)에 정통하다 하여 한(漢)의 중대부(中大夫)에 임명되었다.
고시(高柴)의 자는 자고(子羔)이다. 공자보다 30세 아래다. 자고의 키는 다섯 자도 못 되었다. 공자는 자고를 우둔하다고 생각하고 잇는데 자공(子貢)이 자고를 비후(費후: 山東省)의 읍재(邑宰)로 추천했다. 공자는 자공에게 말했다. "네가 남의 아들을 해치려 드는구나." "백성이 있으니 다스리는 방법을 익힐 것이고 사직(社稷)의 신이 있으니 신을 섬기는 일은 항차 배우면 됩니다. 어찌 책만 읽는 것이 학문이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말만 잘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다."
칠조개(漆彫開)의 자는 자개(子開)이다. 공자는 자개에게 벼슬하라고 권하자 자개가 사양했다. "아직 저는 사람을 다스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공자는 그의 겸손을 기뻐했다.
공백료(公佰僚)의 자는 자주(子周)이다. 자주가 자로(子路)를 계손(季孫)에게 자주 중상모략하자 노의 대부 자복경백(子服景伯)이 분개하여 그 사실을 공자에게 일러 바쳤다. "계손 씨는 공백료의 말에 미혹되어 자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저토록 인간성이 좋지 않은 자주쯤이야 제 권력으로도 충분히 주살해서 시체를 저자 거리에 내걸 수도 있습니다. 해치워 버릴까요?" "장차 도(道)가 실현되는 것도 천명(天命)이고 도가 황폐화되는 것도 천명이다. 일개 자주 같은 인물이 어떻게 천명을 좌지우지 하겠는가. 내버려 두어라."
사마경(司馬耕)의 자는 자우(子牛)이다. 자우는 말이 많고 떠들썩한 성미였다. 그런 그가 인(仁)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진 사람은 말이 늦고 둔하지." "말이 늦고 둔한 것만 가지고 인자(仁者)라 할 수 있겠습니까?" "행하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데 어찌 그 말이 느리고 둔하지 않겠는가." 자우가 군자에 대해서 물었을 때에도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군자는 근심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지." "근심도 두려움도 없다 하여 군자라 말할 수 있습니까?" "군자란 마음 속 깊이 반성해서 꺼리는 것이 없는데 도대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번수(樊須)의 자는 자지(子지)다. 공자보다 36세 아래다. 번수도 공자에게 인(仁)에 대하여 물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슬기란 또 무엇입니까?" "사람을 아는 일이다." 번수는 또 곡식 가꾸는 일을 배우겠다고 공자에게 청했다.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채소가꾸기는 어떻습니까." "나보다는 늙은 채원지기가 낫지." 번수가 물러간 후에 말했다. "번수는 남의 밑에서 사역되는 인물로 딱 알맞겠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하면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며 윗사람이 의(義)를 좋아하면 이를 따르지 않을 백성들이 없을 것이다. 윗사람이 신(信)을 좋아하면 그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을 백성이 없다. 그렇게만 한다면 사방의 모든 백성들이 어린 것들을 들쳐업고 몰려들 것인데, 때 아니게 농사일은 또 무슨 농사일이냐."
유약(有若)은 공자보다 13세(가어(家語)에는 33세) 손아래다. 공자가 죽은 뒤 제자들이 몹시 공자를 사모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의논해 공자의 모습과 많이 닮은 유약을 내세워 스승으로 섬겼다. 유약은 말했다. "예(禮)를 운용하는 데는 조화(調和)가 가장 중요하다. 옛날 선왕들의 도도 화(和)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었다. 그러나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화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조화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조화에만 지우쳐 그것을 예로써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행되지 못한 것이다." 유약은 또 말했다. "신(信)이란 말한 바를 반드시 실행한다는 뜻이지만 다만 의(義)에 어긋나지 않을 경우에만 실행의 의미가 있다. 공손함이란 것도 역시 좋을 것이지만 예에 어긋나지 않아야 치욕을 면할 수가 잇지. 남과의 교제도 중요하지만 친할 만한 사람과 친교를 맺어야만 존경받을 수가 있다." 제자들은 유약이 스승 공자만 훨씬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유약한테 나아가 물었다. "예전 선생님께서는 외출하실 때에 저를 시켜 우산을 준비시켰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반드시 비가 내렸습니다. 하도 신통하여 제가 물었지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비가 내릴 것을 아셨습니까' '<시(詩: 詩經)>에도 "달이 필성(畢星)에 걸려 비를 쏟아지게 하네"라고 말하지 않았더냐'라고 말씀하십디다. 뒷날에는 달이 필성에 걸렸는데도 우산 준비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도 신통하여 그 연유를 묻자 선생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우산을 준비시키지 않았잖느냐'." "그런 일이 있었더냐."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상구(商瞿)가 나이 들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그의 모친이 새 아내를 얻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 때 선생님은 상구를 제(齊)나라로 사신 보내려 하자 상구 모친이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그 때 선생님이 말씀하십디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상구는 마흔이 지나면 아들 다섯을 둘 것입니다.' 그 후에 과연 그렇게 됐거든요. 그래서 지금 선생님께 묻겠습니다만, 옛적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그런 예언들을 할 수 있었을까요?" 유약은 대답할 말이 없어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유자(有子)여, 어서 물러나시오. 그곳은 당신이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니오!"
공서적(公西赤)의 자는 자화(子華)다. 공자보다 42세 손아래다. 자화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염유가 자화의 모친을 위해 쌀을 좀 드렸으면 좋겠다고 공자에게 청했다. "한 부(一釜: 6말 4되)를 드려라." "조금 더 드렸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한 유(庾: 16두)를 드려라." "다섯 병(秉: 1秉은 16각, 1庾의 10倍)쯤 드리는 게 어떻습니까?" 그 때 공자는 염유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적(赤)이 제나라로 갈 때 그는 기름기 흐르는 말을 타고 값비싼 가죽옷을 입고 잇었다. '군자는 곤궁한 자를 돕고 부유한 자를 살지게 하지는 않는다'던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무마시(巫馬施)의 자는 자기(子旗)이다. 공자보다 30세 손아래다. 진(陳)의 사패(司敗: 法務長官)가 공자에게 물었다. "그대 노나라의 소공(昭公)께서는 도대체 예를 알고 있는 분입니까?" "물론 예를 알고 있는 분이지요." 사패가 물러나와 무마시에게 읍하고는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군자는 누구 편도 들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대 스승은 역시 한편만을 들더군요." "무슨 얘기시오?" "노의 소공께선 오(吳)의 왕녀를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아 맹자(孟子)라고 불렀지요." "그게 무어 잘못된 겁니까?" "맹자는 노군(魯君)과 같은 희씨(姬氏)였습니다. 동성(同姓)임을 꺼려 맹자라 바꿔 부르지 않았습니까. 노군께선 동성불혼(同姓不婚)이 예가 아닌 것을 안다고 한다면 이 세상 누가 예를 말하겠습니까." 무사시가 놀라 이 말을 공자에게 전했다. "나 구(丘: 孔子의 이름)는 행복하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알려 주는구나. 그렇지만 신하는 임금의 죄악을 말해선 안 된다.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거든."
이름과 나이만 알려진 제자들 양전의 자는 숙어(叔漁)이며, 공자보다 29세 손아래다. 안행(顔幸)의 자는 자류(子柳)이며, 공자보다 46세 손아래다. 염유의 자는 자로(子魯)이며, 공자보다 50세 손아래다. 조휼(曺휼)의 자는 자순(子循)이며, 공자보다 50세 손아래다 백건(伯虔)의 자는 자석(子析)이며, 공자보다 50세 손아래다. 공손룡(公孫龍)의 자는 자석(子石)이며, 공자보다 53세 손아래다.
이상의 자석까지 35명은 연령과 성명이 분명하며 공자의 가르침을 받았거나 문답을 한 것이 기록에 보인다. 그러나 나머지 42인은 나이도 분명치 않고 기록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그 이름만 기록해 둔다.
이름만 알려진 제자들
염계(염季)의 자는 자산(子産) 공조구자(公祖句玆)의 자는 자지(子之) 진조(秦租)의 자는 자남(子南) 칠조치의 자는 자렴(子斂) 안고(顔高)의 자는 자교(子驕) 칠조도보(漆雕徒父) 양사적(壤駟赤)의 자는 자도(子徒) 상택(商澤) 석작촉(石作蜀)의 자는 자명(子明) 임부제(任不齊)의 자는 선(選) 공양유(公良孺)의 자는 자정(子正) 후처(后處)의 자는 자리(子里) 진염의 자는 개(開) 공하수(公夏首)의 자는 승(乘) 해용점의 자는 자석(子晳) 공견정(公堅定)의 자는 자중(子中) 안조(顔祖)의 자는 양(襄) 교선의 자는 자가(子家) 구정강(句井疆) 한보흑(罕父黑)의 자는 자색(子索) 진상(秦商)의 자는 자비(子丕) 신당(申當)의 자는 주(周) 안지복(顔之僕)의 자는 숙(叔) 영기(榮기)의 자는 자기(子祺) 현성(懸成)의 자는 자기(子祺) 좌인영의 자는 행(行) 연급(燕伋)의 자는 사(思) 정국(鄭國)의 자는 자도(子徒) 진비(秦非)의 자는 자지(子之) 시지상(施之常)의 자는 자긍(子긍) 안쾌의 자는 자성(子聲) 보숙승(步叔乘)의 자는 자거(子車) 원항적(原亢籍) 악해의 자는 자성(子聲) 염결의 자는 용(庸) 숙중회(叔仲會)의 자는 자기(子期) 안하(顔何)의 자는 염(염) 적흑(狄黑)의 자는 석(晳) 방손(邦巽)의 자는 자렴(子斂) 공충(孔忠: 孔子의 조카) 공서여여(公西輿如)의 자는 자상(子上) 공서점의 자는 자상(子上)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의 학자들이 흔히 공문(孔門)의 70인 제자들을 저울질하여 칭찬하는 가운데에는 실제 이상으로 기리는 쪽도 있고 역시 실제 이하로 비방하기도 한다. 두 쪽 모두 그들의 참모습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제자들의 명부는 공씨(孔氏)의 벽 가운데서 나온 고문(古文: 古體의 문자)에 의한 것이나 거의 정확할 것이다. 나는 공자 제자들의 이름과 대화를 모두 <논어(論語)>에 실린 제자와의 문답에서 뽑아 차례대로 엮었으며, 의심나는 것은 여기에 싣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