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기학 - 최한기(1803~1877)
전통철학의 개념인 기를 중심개념으로 하여 유학,불교,도교는 물론 새로 수용된 서양의 과학, 천주교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철학체계를 구상했던 최한기는 이 책에서 동양의 유교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수용하여 이 둘을 창조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동서학문의 가교자 역할을 했다. 동도서기론의 사상적 기초로 평가되는 최한기의 기학은 서경덕에 이어 독창적인 패러다임으로 한국철학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평탄한 삶 속에서 완성한 기철학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 최한기. 그의 호는 혜강 명남루. 그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혜강의 15대 조상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항으로, 사육신을 배반하고 세조를 받들었던 사람이다. 그의 아들이 이조판서를 지냈을 뿐, 그후 가문이 거의 몰락하여 혜강의 아버지는 일찍 죽은 백면 서생이었다. 혜강은 군수를 지낸 큰집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고, 후에 양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어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천하의 서적을 수집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중국에서 새로 나온 진기한 서적은 거의 다 구입하여 놀라운 속도로 독파했다. 그는 곧잘 중인 출신들과 어울려 다녔는데, 평민출신으로 저 유명한 대동여지도를 작성한 김정호와 친분을 가졌다. 32세 때에 그는 김정호와 함께 세계의 지구도를 만들어 이를 판각했고, 또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에 그 내력을 알리는 글을 썼다. 그가 남의 저술이나 문집에 덧붙이는 글을 쓴 것은 청구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이를 보면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30대 중반에 그의 경험철학을 토대로 한 명저(기측체의)를 완성했다. 이것은 경험을 토대로 철학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종래의 관념론에서 탈피한 것이다. 어쨌던 이 책은 중국에서 출판되어 중국 인사들에게 널리 읽혀, 서경덕의 (화담집)이 중국의 (사고전서)에 들어간 것과 비유될 수 있다. 그는 서양의 과학책도 널리 읽어 과학기구나 생활기구의 개량에도 힘을 기울였다. 과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심기도설) 등의 저술을 내면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기에 옛것에만 집착하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말을 하는데 당시로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종래의 실학이 유교이론에 근거를 둔 경학의 실학 이라고 한다면 그의 실학은 과학에 토대를 둔 과학 실학 이라 할 수 있다. 1860년에는 인사문제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다룬 (인정)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을 옳게 써야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용모, 행동, 말씨 등 인물평가의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가 60세 때 그의 아들 병대가 문과에 합격하여 가문의 영광을 드러냈다. 63세부터는 그의 서재를 명남루라 일컫고, 그 자신의 문집을 (명남루집)이라 하여 손수 편집하기 시작했다. 평생 쓴 글을 후세에 온전하고 체계 있게 전할 의도였다.
그는 평생 스승을 찾아 다닌 적이 없고, 자기의 저술을 자랑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현실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동서양의 정신을 융합하여 새로운 이론을 세우려 했다. 그는 실학을 계승했지만 맹종하지는 않았고, 과학에 심취했지만 인문정신도 중시했다. 그래서 그의 저술 속에는 실학과 과학과 인문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는 경험을 통한 실천을 강조했고, 옛 경서를 끌어대는 관념론자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유학의 이기철학을 독창적으로 정립한 서경덕이 조선전기에 있었다면, 개혁사상인 실학을 새시대에 맞게 정리한 혜강이 조선후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과 저술 배경
현실적 한계상황
항상 어떤 사상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혜강이 살았던 19세기는 오랫동안 누적된 구질서의 모순과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해 전국 도처에서 민란이 반발하고 대외적으로 서구열강은 천주교와 과학기술을 앞세워 밀고들어오는 혼란상태였다. 이런 불안한 시대를 사는 지식인인 혜강은 나름대로 이 위기를 수습할 방안을 모색했다. 특히 그가 당시에 서구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가장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로서, 이것의 우수성과 필요성을 강하게 인정하고 있었기에 이것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철학적인 바탕의 마련이 절실했다.
새로운 사유체계 필요
당시에 한계상황에 이른 구질서를 새로운 질서로 바꾸기 위해 여러 대안이 제시되었지만, 혜강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학문의 정립이 요청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구질서의 이념적 토대인 주자학적 성리학 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체계의 제시를 의미한다. 이렇게 혜강은 동양정신의 정수인 유교를 토대로 서양과학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러한 학문체계를 마련해야 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고 오랜 시간에 걸친 탐색과 숙고 끝에 드디어 기학을 저술함으로써 그의 의지를 구체화시킨다. 기학은 19세기의 조선조 사회가 봉착한 한계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구질서를 점진적으로 대체함으로써 급속한 변화에 따른 혼란을 막고 세계의 개방화과학화 추세에 맞추어 조선 사회를 개혁 해보려는 혜강의 깊은 고뇌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학문으로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한 혜강은 유교정신에 바탕을 두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기철학 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그 시대에만 유용한 것은 아니고,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철학서로서 우리에게도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는 데 이 책을 읽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실용성과 과학성 추구한 혜강철학
혜강에 있어 학문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용성과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과학성을 지닌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혜강은 감각경험에 의한 검증을 중시하는데, 경험의 보편성은 세계의 근원존재인 기에 의해서 특히 인식의 보편성을 가능케 하는 신기의 추측능력에 의해서 확보된다.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고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의 성질은 관념적이고 형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감각적인 것이므로 경험에 의해 객관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유교의 현실중시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기존의 공허한 학문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유체계를 제시했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동원되는 방법이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에 대한 새롭고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는 것이다. 윤휴, 박세당, 정약용 같은 분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혜강은 이와는 달리 직접 이들 학문의 한계를 비판했다. 특히 그가 이러한 입장에서 성리학을 비판한 점은 두드러진다. 이것은 그가 유교의 학문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어, 유교경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유의 공간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동양과는 다른 서양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그 밑바탕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혜강은 이 책의 도처에서 그동안 서양과학이 밝혀낸 새로운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지식들을 그의 새로운 경학관을 정립하는 데 수용반영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그의 기학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과 의미를 가지는 운화라는 용어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대한 그의 지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운화란 일반적으로 운동변화의 의미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혜강은 서양과학에 의거하여 규명된 지식을 독창적인 경학관 정립에까지 적극적으로 반영시킨, 다시 말하면 동양의 유학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수용하여 이 둘을 창조적으로 결합시킨 동서양 학문의 가교자 역할을 담당했으며, 바로 이 기학은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동양지식과 서양지식의 결합
내용 구성
기학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은 기학 서문과 모두 100개의 문단으로 되어 있고, 제2권은 125문단과 그의 장남인 병대가 쓴 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기학 서문과 기학 발문은 기학 전체를 관통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제1권에서는 기학이라는 학문이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 동기, 그리고 그것의 효과를 강조하면서 기존의 여러 형태의 학문을 중고지학으로 단정짓고 이들을 비판한다. 나아가 기학이 이들 학문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혜강의 학문관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제2권에서는 제1권에서 거론된 견해들을 더욱 압축하여 기학의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제1권에서 기학의 전체 구조를 해명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핵심적이도 중요한 용어들이 소개되고 아울러 이들의 개념이 설명되고 있다면, 제2권에서는 이러한 제1권의 내용을 기반으로 더욱 구체적이고 심오한 논의가 전개됨으로써 기학이라는 새로운 사유체계가 그 골격을 드러낸다. 제1권과 제2권에서 다 같이 비중 있게 거론되고 있는 중요한 용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운화, 기화, 대기운화, 인기운화, 신기운화, 천인운화, 활동운화, 통민운화, 방령운화, 인도, 천도 등이다. 사실 이들 용어 중 대부분은 기존이 개념과 다른 새로운 개념을 지니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혜강 철학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용어들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들의 상관관계를 제대로 규명하기만 한다면 그의 철학체계가 분명하게 해명될 것이다.
신기의 역동성
그는 기를 우주의 근본존재로 파악하고 우주의 모든 존재는 기의 산물로 보았다. 이는 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기가 있으면 반드시 이가 있고, 기가 없으면 이가 없다 고 하여 주자학에서 주장하는 이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기일원론을 주장했다. 그는 기를 신기 라고 표현했는데, 이 신기는 단순한 물질적 존재의 근본형태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현실적 역동성의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운화지기, 또는 천지지기 라고 했다. 기는 우주 속에서 계속적으로 운화(운동, 변화)하면서 모든 사물을 형성하기도 하고 소멸시키기도 하는데, 이런 뜻에서 기를 형질지기 라고도 한다. 그런데 기의 운화는 막연하고 맹목적인 것이 아닌 일정한 법칙과 조리에 따라 운행한다. 이러한 기의 운동변화의 법칙을 운화지리 또는 유행지리라 한다. 유행지리 가운데서도 그 객관적 자연법칙이 인간의 주관적 의식에 반영되는 사유의 법칙을 추측지리라 불렀는데 이 양자가 일치를 이루어 인간과 우주의 조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운화지기와 형질지기, 유행지리와 추측지리는 서로 짝을 이루어 혜강의 기철학을 형성하고 있다.
한편 그는 인간의 사유기관과 감각기관을 갖추고 있어, 세계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선천적인 지식이란 없으며, 외부의 물질대상에 대한 신기의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이 이루어진다. 이때 주체의 신기와 사물의 신기를 통하게 해주는 것은 인간의 감각적 지각과 견문을 통한 경험이다. 즉,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된 지각은 경험의 축적으로 생긴 기억과 변통을 통해서 양적 확충을 할 수 있으며, 추측을 통해 경험하지 않은 것에까지 인식의 영역을 넓힐 수있다고 했다. 그는 모든 사물이 운동변화하며 그 법칙도 변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나 인간은 끊임없이 운동변화해야 자연법칙을 어기지 않게 되며, 이를 어기면 폐해가 생긴다. 따라서 사회와 인간의 자연법칙을 위반하고 전진을 방해하는 것이 있을 때는 그 장애를 인간의 힘으로 제거하고, 자연법칙에 맞추는 변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변통의 사상은 그의 정치사회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학의 학문적 특성
기학의 학문적 성격에 대해서 혜강은 이 기학은 무형지신에 견주어 살피면 유형지신이며 또 이것은 무형지리에 비교하면 곧 유형지리다라고 하여 기존의 기에 관한 학설은 무형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그의 기학은 유형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기에 그의 학문은 기일원론과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학문체계이다. 혜강이 기화를 밝히고자 한 이유는 살아가는 도리와 학술의 무궁한 실효가 모두 이 기화에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를 실용실사의 추구와 민생의 안정에 두고 있는 혜강으로서는, 그것의 기반이 되는 기화의 규명이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기화를 규명하는 효과는 남과 나 사이의 간격을 없애는 것 과 모든 사람을 동일한 인기운화 가운데로 귀일케 하여, 대동을 이룩하는 것도 있다. 어쨌든 기화규명의 노력은 종국적으로는 천인운화의 대략을 통달하는 데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국철학의 독창적인 패러다임
기학 이라는 새로운 학문체계는 유교의 현실중시와 실용실사정신의 바탕 위에 혜강 자신이 섭취한 서구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지식이 합쳐져서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양 과학문명이 유입되는 시기에 살면서 이것의 우월성에 충격을 받고 앞으로 이러한 과학기술문명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유교적인 도덕규범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사회구성과 생산력 증대를 위한 기술은 서구의 것을 도입해야 한다는 동도서기론의 입장을 제시했던 것이다.
유학의 과학화
먼저 기학에 담긴 그의 기학은 인문사회자연과학을 포괄하는 학문체계이다. 기학은 유학에 근거함이 분명하지만, 그는 이 유학의 요체를 성리학의 수기 중심의 인문과학이 아닌 치인 중심의 사회과학으로 보고자 한다. 따라서 수신의 원리보다 치국의 원리가 강조된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원리가 천지자연의 원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사회과학으로서의 유학을 과학화시킨 학문이 기학이라 볼 수 있다.
전통적 기철학 계승
혜강은 전통적인 기철학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자연과학적으로 해석하여 경학적 실학이 아닌 과학적 실학을 이루었다. 그는 기의 운동을 자연에서의 기의 운동과 인간의 역사로 나누고, 이 둘의 조화 내지 일치를 통하여 이상사회를 추구했다. 이러한 기의 운동은 기수로 표현되는데, 자연의 법칙은 변함이 없지만, 역사사회의 운동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함이 있다 하였다. 이러한 기수의 학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점 발전한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관은 진보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되고, 앞선 실학자들이 지니고 있던 상고주의를 청산하여 새로운 학문과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바탕에서 혜강은 무역과 통상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산업진흥의 방도를 역설했다.
대동 사회 건설
다음으로 기학에서 제시된 세계관은 대동사회의 실현을 궁극적으로 겨냥하되, 이를 위해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개화사상가들의 부국강병적인 국가관과 성리학자들의 평천하적인 세계관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이 둘을 잘 조화시키는 데서 발견한다. 혜강은 국가 지상주의적인 쇼비니즘과 추상적인 사해동포주의가 갖는 위험성과 한계를 잘 자각하고 있었다.
물리개념 규명이 과제
그러나 기학이 갖는 한계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진리발견에 있어 추측과 경험을 강조하는 혜강이 기학에서 아직 검증과 확인이 안된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영혼불멸성을 부정하면서, 육신이 흩어져 소멸되면 영혼도 흩어져서 천지운화 가운데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어떻게 증명되고 확인될 수 있는가? 하는 점 등이다. 이러한 의문점은 혜강이 무엇보다도 먼저 천인운화지리 또는 운화지리로 표현되는 물리는 사실로서 검증되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므로,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기학의 최대과제는 물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물리는 기학의 성립근거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북한 학자들의 주장처럼 혜강이 유물론자이며 무신론자인가, 이것이 아니라면 그의 철학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지어야 할 것인가도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게 된다. 결국 혜강은 유교철학의 근본문제를 계승하고 재해석하면서 하나의 창조적인 사유체계를 제시하여 화담 서경덕에 이어 한국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정립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체계의 보편적 가치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