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7. 아름다움은 어디에
아프로디테
<밀로의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1820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에게해에 점점이 뿌려져 있는 여러섬들, 일컬어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하는 한 섬인 밀로 섬에서 어떤 농부가 아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었다. 밭에는 관목이 무성했다. 농부는 손길이 닿는 대로 관목을 뿌리를 뽑아내던 농부는 한순간 멈칫했다. 방금 관목을 걷어낸 자리에 땅 밑으로 통하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농부는 엎드려 구멍 속을 들여다 보았다. 구멍은 제법 긴 동굴과 이어져 있었고 그 속에는 조각상이 하나 서 있었다. 높이가 2미터에 이르는 그 조각상은 배꼽 아랫부분만을 주름진 옷으로 가린 반라의 여인상이었다. 왼팔은 어깨에서부터 잘려나가고 없었으며 오른 팔은 겨드랑이 아래 젖가슴 높이에서 부러져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농부의 눈에도 범상찮아 보이는 조각상이었다. 게다가 농부의 밭 가까이에는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농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예사롭지 않은 여인상을 내보였고 이 소식은 곧 현지의 프랑스 대리 영사 루이 브레스트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일찍이 보국으로부터 고대 미술품이 발견되었을 때는 지체 없이 사 들이라는 비밀 훈령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술에 관한 한 워낙 문외한이어서 선뜻 단안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조각상을 발견한 농부 이오르고스는 조각상의 값으로 무려 2만 5000프랑을 요구하고 있었다. 브레스트는 일단 총영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 마침 밀로 섬에 정박중이던 프랑스 군함에다 승선하고 있는 장교 중에 혹시 미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없는지를 알아 보았다. 다행히 그 배에는 그리스 통으로 알려진 소위가 한 사람 타고 있었다. 브레스트의 명령을 받아 발견된 조각상을 직접 살펴 보고 온 그 해군 소위는 이것은 틀림없는 비너스 상 이라고 장담하였다. 브레스트는 즉각 이 소위의 견해를 총영사에게 보고했고 총영사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프랑스 공사 리비에르 후작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렸다. 리비에르는 해군 소위를 직접 만나 상세한 설명을 들은 다음, 당장 자기 돈으로 조각상을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뜻밖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는 터키의 식민지였고, 그 중 키클라데스 제도는 전제주의적인 대관 니콜라이 모르네가 통치하고 있었다. 오리코노모스라는 수도사가 조각상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문제는 그가 니콜라이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데 있었다. 그는 니콜라이와 짜고 농부 이오르고스를 불러, 만일 터키 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조각상을 압수할 것 이라고 겁을 준 다음, 헐값으로 조각상을 넘겨받았다. 그리고는 조각상을 터키로 실어가려고 배를 항구에 대기시켰다. 조각상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 군함과 터키 배가 맞붙은 형국이엇다. 양측 사이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와중에 드디어 오이코노모스가 조각상 운반을 시도했다. 이에 질세라 브레스트는 프랑스 해군을 해안으로 상륙시켰다. 드디어 프랑스 군인들과 오이코노모스가 이끄는 그리스 인들 사이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다. 불문가지, 싸움은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고 조각상은 프랑스군함에 실려 남프랑스의 툴롱 항으로 운반되었다. 이어 조각상은 리비에르 후작에게 건네졌고 후작은 다시 그것을 루이 18세에게 바쳤다. 마침내 왕명에 의해 루브르 궁정에 소장된 이 여인상이 바로저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 또는 <멜로스의 아프로디테>였다. 발견된 당시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 미술사가들은 이것이 그리스 고전시기의 거장 브라크시테레스의 작품임에 틀림없다고 흥분하였다. 하지만 머리 부분이라든가 아랫도리를 감싼 주름진 옷의 표현 양식에 헬레니즈 시대의 흔적이 너무 뚜렷하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제작 시기와 작가를 둘러싸고 의논이 분분하였다. 갑론을박 끝에 제작년대는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1세기 초이며, 얼핏 그리스 고전기인 기원전 4세기의 작품 같은 인상을 풍기는 우아한 자태는 아마도 극단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한 헬레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고전 양식이 부활되었던 당시의 풍조 속에서 나온 것이리라 추정되었다. 없어진 팔이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인가를 두고도 제작년대에 대해서만큼이나 의논이 분분했는데 아프로디테를 주제로 한 여러 그림이나 조각상들의 일반적인 관행을 두루 살피건대 오른 손은 왼쪽 다리께로 내려져 있었을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 했다. 또 왼팔은 앞으로 내밀어져 있었으며, 손바닥을 제쳐 그 위에 사과를 들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아프로디테에겐 비둘기, 백조, 장미 등 여러 상징물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황금빛 사과-트로이전쟁을 불러일으킨-여서 다른 그림이나 조각에도 자주 등장하였던 터였다.
<밀로의 비너스>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예술사에서는 그 못지 않게 중요한 대접을 받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는 여인상이 있다. 유럽의 산악지방인 빌렌도르프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의 여인상으로서 돌을 깎아 만든 것이다. 이 여인상은 비너스를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으로 여겨온 이들에게 적잖은 배반감을 안겨 준다. 사진에서 보여지듯 이 비너스의 가슴은 풍만하다 못해 혐오스러울 정도로 크고, 배는 아이를 몇 낳은 중년 부인의 그것처럼 불룩하며, 두툼한 허벅지 사이의 음부 역시 가슴 못지 않게 큼지막하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뿐만 아니라, 흔히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 ......의 비너스로 명명되며 미술사에서는 통칭해 돌의 비너스 라 일컬어지는 구석기 시대의 여인상들은 하나같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비너스-고전미를 자랑하는 <밀로의 비너스>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그려진 눈부신 나신의 비너스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는, 여성으로서의 성징만 불균형스럽게 과장되어 있는 이 구석기의 풍만한 여인들에게 붙은 비너스라는 이름이 도무지 가당찮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비너스는 올림포스 12주신 가운데 하나인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로마 이름이다.(더 정확히 말하면 로마식 이름은 베누스인데 그것의 영어식 발음이 비너스이다.) 그런데 회화나 조각 작품의 제목으로 흔히 등장하는 비너스, 즉 발견된 장소를 앞세우는 어디의 비너스 또는 화가나 조각가의 이름을 앞세우는 누구의 비너스, 그림 속 여인이 취하고 있는 자세를 앞세운 ...하고 있는 비너스 할 때의 비너스는 아프로디테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여인상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에 가깝다. 그 중에는 물론실제로 신화 속의 아프로디테를 그리거나 조각한 작품들도 있지만 대개는 여신의 이름을 빌려 여성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아름다움, 그 중에서도 여성의 아름다움은 예로부터 예술의 중요한 모티브였다.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인체가 그 대상이 된 것은 원래 여성미가 남성미보다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예술 창작을 담당한 사람이 주로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쨌거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여인상은 3만년 전의 저 먼 구석기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화나 조각의 빼놓을 수 없는 주제로서 미술사의 한 공유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시대를 달리하며 탄생한 다양한 여인상을 살펴보면 아름다움의 기준이 끊임없이 변해왔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각 시대의 여인상은 그 시대의 미적 기준을 모자람없이 표상하고 있다. 따라서 여인상의 역사 는 바로 인류의 미적 이상의 변천사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동물적이고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도 구석기 시대를 살았던 옛사람들에게는 보티첼리의 비너스만큼 아름다움 여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밀로의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너무나 다르다. 두 비너스를 나란히 놓고 보노라면 절로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천상의 아프로디테, 지상의 아프로디테
가장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둘러싸고는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 온다. 호머는 아프로디테가 제우스와 바다의 정령인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이야기는 그와는 다르다. 앞서 이야기 한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이야기를 잠깐 되새겨 보자. 우라노스가 괴물 자식들을 가이아의 뱃속에 있는 타르타로스에 가둠으로써 고통을 받게 된 가이아는 아들 크로노스를 시켜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르게 했다. 크로노스는 낫으로 자른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바다에 던져버렸는데 그 우라노스의 사랑의 뿌리가 바다를 떠돌며 거품을 일으키다 마침내 아름다움의 화신인 아프로디테를 빚어냈다는 것이다. 거품 속에서 완전히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탄생한 아프로디테는 조개껍질에 몸을 실은 채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미는 대로 흐르다 마침내 키프로스 섬에 도착했다. 그윽한 향기와 함께 장미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여신이 도착하자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 세 자매가 여신을 맞이했다. 그들은 아테나 여신이 짠 옷으로 아프로디테의 발가벗은 몸을 가리고 머리에는 관을 씌워 올림포스의 신들 앞으로 안내했다. 제우스는 그 자리에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거두어 다스림으로써 인간과 뭇짐승들이 널리 번성하도록 하라는 직분을 주면서 아프로디테를 주신의 대열에 넣어 주었다. 포세이돈과 아폴론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모여있던 남신들은 모두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짝이 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기아하게도 아프로디테는 그 많은 남신들을 놔 두고 하필 신들 가운데서 가장 못생겼을 뿐만 아리나 절름발리이기도 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남편으로 선택했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와 가장 못생긴 남신 헤파이스토스의 결합을 두고 후세의 식자들은 그 상징하는 바를 아름다움과 숙련된 기능이 결합함으로써 예술이 탄생한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풀이하였지만 정작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아름답기는 하였으되 아프로디테는 참으로 정숙치 못한 아내였다. 헤파이스토스를 놔두고 다른 남신들과 수시로 밀애를 즐겼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했던 스캔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와의 불륜이었다.
누군가의 귀띔으로 둘 사이의 관계를 눈치 챈 헤파이스토스는 어느 날 짐짓 나들이를 가는 척 집을 나섰다. 아프로디테는 얼른 정부인 아레스를 집으로 불러들었다. 둘이서 한창 사랑을 나누는 중에 헤파이스토스가 들이닥쳤다. 놀란 두 신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어찌된 일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헤파이스토스가 청동을 거미줄 보다 더 가늘게 늘여 짠 그물을 침대 위에 던져 놓고 갔던 것이다. 헤파이스토스의 그물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것이었다. 아프로디테와 아레스가 그물에 묶이어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에 헤파이스토스의 전갈을 받은 여러 신들이 그 불륜의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제우스, 아폴론, 헤프메스, 포세이돈은 물론이고 몇몇 여신들까지 민망한 얼굴로 낯뜨거운 모습을 지켜보았다. 톡톡히 망신을 당한 두 신은 포세이돈이 헤파이스토스를 달랜 덕분에 겨우 그물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와의 사이에서 딸 하르모니아(조화)와 두 아들 데이모스(공포)와 포보스(두려움)를 낳았다. 두 신의 결합은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두 종류의 열정, 즉 사랑과 전쟁의 결합을 상징하는데 그 둘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룰 때 탄생하는 것이 조화라고 한다. 하지만 헤파이스토스의 그런 창피 주기는 아무 소용이 엇었다.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에 이어 헤르메스와도 관계를 가져 그 사이에서도 자식을 둘 낳았다. 하나는 헤르마프로디토스였고 다른 하나는 에로스였는데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아들도 아니고 딸도 아닌 어지자지, 즉 자웅동체로 전해진다. 아프로디테는 지체가 다른 인간과 사랑을 나누는 일도 그리 주저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아프로디테의 연인이 되었던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도니스였다. 아도니스는 잘생긴 젊은 사냥꾼이었다. 얼마나 이 청년을 끔찍이 사랑했던지, 여느 때 같으면 나무 그늘에 누워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던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와 같이 숲을 헤메고 산을 넘느라 세월가는 줄을 몰랐다. 아프로디테는 어린 연인과 함께 사슴이나 토끼를 쫓아다니면서 늘 당부를 하곤 했다.
위험한 짐승은 감히 쫓으려고 하지 말아라. 나를 매혹시킨 그대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사자나 멧돼지에게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저 무서운 발톱과 엄청난 힘을 항상 경계하라. 그대의 몸을 위험하게 하는 일은 곧 나의 행복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니......
그런 어느 날, 아프로디테는 키프로스 섬에 볼일이 있어 예의 그 당부를 남기고 연인의 곁을 떠났다. 혼자 사냥감을 찾아 숲속을 헤메던 아도니스의 눈에 마침 멧돼지 한 마리가 스쳐지나갔다. 아프로디테의 당부를 유념하기엔 너무 젊었던 탓에 아도니스는 멧돼지를 향해 창을 던지고 말았다. 어찌된 일인지 창은 빗나갔고 성난 멧돼지는 무서운 기세로 아도니스를 덥쳤다. 멧돼지는 사실은 변신한 아레스였다.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를 지나치게 총애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심술을 부린 것이었다. 키프로스 섬으로 가던 도중에 연인의 신음소리를 들은 아프로디테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아프로디테가 피투성이가 된 아도니스의 몸을 안았을땐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아프로디테는 연인의 싸늘한 몸을 부둥켜 안고 슬피 울며 부르짖었다.
그래, 운명의 여신들이여! 그대들이 승리했다. 그러나 나는 완전한 승리는 주지 않으련다. 내가 이렇게 슬퍼한 표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리라. 나의 아도니스여, 그대의 죽음과 내 탄식을 해마다 새로워지게 하리라. 그대가 흘린 피를 꽃으로 피어나게 하리라. 이로써 내 마음이 위안을 얻는대서 누가 나를 시기할 수 있을 것인가!
아프로디테는 말을 끝마치면서 아도니스가 흘린 피 위에다 신주를 뿌렸다. 피와 신주가 섞인 자리에서는 거품이 일더니 마치매 붉은 꽃이 피어났다. 하지만 또 누가 시기를 한 것인지 그 꽃은 수명이 길지 못했다. 바람이 스쳐지나가며 꽃잎을 열어주었는가 하면 다시 또 바람이 불면서 꽃잎을 흩날려 꽃의 이름은 그래서 바람꽃, 아네모네였다. 아도니스만큼 비극적이지는 않았으나 목동 안키세스 또한 아프로디테와 사랑을 나누었다가 불행한 일을 당한 인간이었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안키세스는 신과 같은 몸매를 가진 인간이었다. 이다 산 비탈에서 황소를 몰고 있던 안키세스를 본 순간 아프로디테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프리기아의 공주로 변장해 안키세스를 유록하여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안키세스가 열락을 누린 뒤의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자 아프로디테는 본 모습을 드러내고는 일렀다.
나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입밖에 내서는 안 된다. 그리하면 제우스 대신의 진노를 피할 수 없으리라.
안키세스는 한동안은 그 엄청난 비밀을 혼자서 잘 삭였으나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기어이 입을 열고 말았다. 안키세스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 위로 제우스의 벼락이 떨어졌다. 여신의 행실이 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제우스로선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아프로디테가 보호를 해 주어서 목숨은 건졌으나 안키세스는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다. 아프로디테는 그 뒤 안키세스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로마의 전설적인 건국 시조인 아이네이아스라고 한다. 아프로디테의 사랑의 이력은 여신의 몸가짐으로서는 지나치게 문란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주재하는 신이었고 그것은 즉 성욕, 관능, 생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므로 그리 타매할 일은 아니었다. 아프로디테의 이력은 사랑이 반드시 의롭지만은 않다는 것, 때때로 도덕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인간사의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드러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프로디테가 늘 쾌학을 즐기는 데만 빠져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랑을 통한 새로운 창조의 전범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일도 많이 하였다. 지순한 피그말리온을 위해 상아 처녀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 일, 남자들에게 도무지 관심이 없는 처녀 아탈란테를 사랑한 히포메네스를 도와 두 사람을 맺어 준 일 따위가 그러하다.
플라톤은 대화편 가운데 하나인 <향연>에서 파우사니아스의 입을 빌려 아프로디테가 지닌 상반되는 두 가지 속성을 지적하였다. 우라노스의 뿌리로부터 어머니 없이 태어난 신화에 근거한 아프로디테 우라니아, 즉 천상의 아프로디테와 제우스와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에 근거한 아프로디테 판데모스, 즉 지상의 아프로디테가 그것이다. 지상의 아프로디테는 생식과 종족보존을 관장하며 쾌락과 열락을 추구하는 관능적인 속성을 말하며 천상의 아프로디테는 정신을 높은 경지로 고양시키고 창조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고매한 사랑의 속성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아프로디테는 12주신 가운데서도 아폴론이나 아테나와 함께 사람들에게 특별히 섬김을 받은 신들 축에 들었다. 크니도스, 파포스, 아마토스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신전이 있었고 신전이 있는 도시에선 여신을 기리는 성대한 축제가 벌어지곤 했다. 제우스의 벼락처럼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을 기꺼이 머리숙이게 한 아프로디테의 권능, 그것은 다름아닌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눈으로 덮힌 새벽 들판, 그 위에 찍힌 작은 발자욱, 하늘을 나는 작은 새 한 마리, 맹수의 포효, 아기의 웃음, 마하트마 간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춤추는 최승희......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 우리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얼어붙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우리들의 마음이 어딘가에서 어디로 움직이는 걸 느끼며. 낮은 데서 높은 데로, 또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좁은 데서 넓은 데로, 누추한 데서 정결한 데로, 시끄러운 데서 조용한 데로, 약한 데서 강한 데로, 날카로운 데서 부드러운 데로, 나에게서 남에게로, 지상에서 천상으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어디서 오는 걸까? 아프로디테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이래 수많은 현신들을 통해 그 물음에 대답해 주고 있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살아남는 일이 지상의 과제였다. 아다시피 그들은 짐승을 사냥하거나 나무 열매, 풀, 우련히 발견하 곡식 들을 채집해 먹고 살았다. 그러나 큰 짐승을 잡거나 열매가 잔뜩 달린 나무를 발견한 운 좋은 날을 빼고는 늘 먹을 것이 모자랐다. 더 많은 먹을 것! 그것이 그들의 가장 절실한 소망이었다. 아직 짐승을 길들여 키우거나 곡식을 재배하는 법을 알기 전이었으므로 그들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짐승들이 새끼를 많이 치기를,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기를 염원했다. 그때는 또한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태풍이나 폭우, 겨울의 추위로부터 어린 자식을 보호하기도 힘들었을 분더러 맹수의 습격, 질병에도 별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때문에 많이 낳아야만 확률의 법칙에 따라 그나마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의 젖가슴, 배 , 성기가 그토록 커진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자식을 낳고 기르는 데 쓰였으며, 크고 풍만할수록 자식을 많이 낳아 잘 기를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석기 시대 여인들의 몸매가 모두 못나서 그리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조각가들의 솜씨가 서툴러서 그리 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무릇 많은 것이 좋은 것, 좋은 것이 아름다운 것 이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미술사가들은 그러한 구석기 시대의 미적 이상을 압축하고 있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비롯한 구석기 시대의 여인상들을 따로이 풍요 다산상 이라 부른다.
한편 <밀로의 비너스>는 그와는 다른 미적 이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 조각상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는 달리 그 어떤 과장이나 왜곡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여성의 인체를 더없이 섬세하게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사람의 몸을 그토록 차분한 눈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일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일이다. 고대 세계가 이룩한 그 어떤 문명에도 이처럼 사람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조각상은 없다. 더구나 그것이 여신의 모습임에랴. 오직 그리스인들만이 그렇게 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간 이외의 것에는 어떤 것에도, 사제나 전제군주, 심지어 그들이 믿는 신 앞에서도 무릎을 끓지 않았다. 그들은 내세의 행복보다는 현재의 삶에 충실했고, 낙관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영원하고 장엄한 것보다는 유한하고 자연적인 것을 추구했다. 수많은 고통이 따를지라도 그들에겐 인생이란 그 자체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밀로의 비너스>에는 바로 그런 그리스인들의 사상과 인생관이 녹아들어 있다. 신의 뜻대로 살았던 죄많은 인간의 시대였던 중세와 비교해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해진다. 그들에겐 현재의 삶보다는 내세가 중요했고, 육체는 죄악과 타락의 근원이었으며, 개인의 바램보다는 교회나 사제의 명령이 우선이었고,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덧없었다. 그러니 대체 무엇을 그리거나 조각할 것인가. 그래서 그들은 성서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경우를 빼고는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 경우에도 가급적 자세한 묘사를 피했다. 무언가를, 더구나 사람의 몸 같은 위험한 걸 자세히 묘사한다는 건 죄악에 물들었다는 걸 고백하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중세엔 물론 한 명의 비너스도 탄생하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수많은 비너스들을 만날 수 있다. 사실주의, 감각주의를 예술적 특징으로 하는 헬레니즘 시대엔 <웅크린 비너스>, <아름다운 엉덩이의 비너스>처럼 한층 더 관능적으로 자유분방한 모습의 비너스가 태어났으며 르세상스 때는 보티첼리의 <조개 위의 비너스(비너스의 탄생)>, 지오르네의 <잠자는 비너스>, 티지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태어났다. 발가벗었거나 옷을 입었거나, 뚱뚱하거나 날씬하거나, 단정하거나 요염하거나,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거나 잠을 자거나 간에 이 모든 비너스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서로 다른 그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삶의 조건도, 사상도, 가치관도 다를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도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아름다움은 지상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너스의 역사는아름다움의 역사이며 아름다움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난해한 예술 작품 앞에서 주눅들지 않기 위해
그렇게 보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곧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20세기의 비너스는 종잡을 수가 없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은 둘째치고 일반인들로선 우선 뭐 저렇게 생긴 여자들이 다 있어 라는 생각이 든다. 또 광고에, 드라마에, 영화에, 연극에 종횡무진 등장하는 육감적인 여성들을 보면 우리 시대엔 아름다움이 섹시함과 동의어가 아닐까 싶다. 20세기의 삶이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하고 종잡을 수없다는 말일 게다. 언뜻 봐서는 이해되지 않는 예술 작품 앞에서 공연히 기가 죽는 분들을 위해서, 그래도 에이, 뭐 이런 게 있어 하며 돌아서지 않고 그 속에 담긴 20세기의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분들(물론 나도 여기에 속한다.)을 위해 동굴 벽화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알타미라나 라스코의 동굴 벽화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다. 들소나 사슴, 말 같은 들짐승들이, 그렇게 오래전에 그려졌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이상하게도 동굴 안쪽 어두운 곳에 그려져 있으며 한 번 글니 그림 위에 또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또 그림 위에는 돌이나 창, 화살 같은 것으로 찌른 자국이 무수히 남아 있다. 이런 몇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그 그림들은 오늘날의 그림들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그림들은 어떤 면에서 오늘날 오빠 부대 들의 방에 걸려 있는 대형 브로마이드와 비슷한 것이었다. 사진을 걸어놓음으로써 마치 오빠와 가까이 있는 듯 느끼는 여학생들처럼 구석기인들은 들짐승을 그려 그것을 칼이나 창으로 무수히 찔러댐으로써 사냥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짐승들을 잘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지금 남아 있는 그림처럼 잘 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수천 년 동안 같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엔 아무나 그리다가 나중엔 분명히 그림을 특별히 잘 그리는 사람에게 그 일을 전담시켰을 것이다. 그러다 한 재능 있는 구석기인의 손끝에서 탄생한 어떤 그림이 마침내 주술적 도구로서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실용에서 심미로의 건너뜀, 거기서 드디어 예술이 탄생한 것이리라. 물론 그런 건너뜀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생활에서의 건너뜀, 예컨대 들짐승을 길들일 줄 알게 되면서 생긴 여유 같은 게 전제되었을 것이다. 예술의 시초는 그와 같았다. 아무리 난해해 보이는 예술작품도 그 태생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그 뒤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예술은 고유한 법칙과 문법을 가지게 되었다. 사상이나 도덕의 이름으로 예술을 재단할 수 없는 이유로 그 때문이다.
그린 이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는 그림 앞에 서면 동굴 벽화를 한 번 떠올려 보기 바란다. 어떤 것이 탄생한 경위를 알면 그것의 본질적 속성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굴 벽화는 예술의 뿌리는 지상의 삶에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그런 총론이 구체적인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주는 건 분명하다. 인간을, 그 도무지종잡을 수 없는 존재를, 인간의 역사를,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그 유구한 세월을 이해하는 일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인간과 인간의 역사가 그렇거늘 그것을 담고 있는 예술이 어찌 한눈에 담뿍 잡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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