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원돈성불론 - 지눌 (1158~1210)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라는 말로 당시 대립하던 선과 교가 둘이 아닌 하나(선교일치)라고 주장하여,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차원 높게 극복한 지눌의 핵심사상은 돈오점수이며 그 실천방법은 정혜쌍수다. 돈오점수란 먼저 중생의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후에도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뜻을 담은 책이 (원돈성불론)이다. 정혜쌍수란 정(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함)과 혜(진리를 바로 봄)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의 (권수정혜결사문)에 잘 나타나 있다.
세 번에 걸친 깨달음의 과정
원효 - 지눌 - 휴정
대승불교의 2대 조류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첨예한 대립이었던 공, 유의 대립을 불교의 원산지인 인도에서도 해결하지 못하자, 이를 원효가 그의 독특한 화쟁사상으로 해결했음은 본서의 제1권 (대승기신론소)에서 살펴보았다. 공유의 대립이란 세계의 모든 것은 공 이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중관학파와, 세상의 모든 현상은 식 이라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 유식학파의 대립을 말한다. 원효는 이를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두 학파 모두가 한측면만을 보고 전체를 보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화쟁의 논리란 서로 다른 의견을 살리면서도 이를 잘 화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논리 를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대립을 서로 세워주면서도 동시에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방법으로 원효는 두 학파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여 하나로 통합했던 것이다. 이러한 원효의 사상은 고려의 지눌에게 연결되어, 당시 극심하게 대립하던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차원 높여 해결하게 했고, 조선시대의 휴정(서산대사)에게도 영향을 주어 통불교적인 성격의 한국불교의 특징을 이룬다. 즉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의 불교가 원론적 이었다면, 중국불교는 각론적 이었고 한국불교는 통합적 성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세에 출가
원효, 서산대사와 함께 한국적 통불교 건설의 주역자이자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 지눌은 그의 법명이고 호는 목우자(소를 키우는 사람. 불교에서는 소를 진리로 안내하는 동물로 간주)인데, 황해도 서홍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당시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학의 교수로 있었다. 어려서 병이 많았으므로 부모들은 부처님 앞에 발원하고 그를 8세에 종휘선사에게 출가시켰다. 그 뒤로 25세에 개경에서 개최한 승과(선종승려의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장차 왕사나 국사가 될 수 있는 등용문을 일단 통과한 셈이었다. 그 당시 임금의 정치 자문역할을 하는 왕사에게는 임금도 절을 할 정도로, 국사가 되면 온나라의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불교의 본연의 길이 아니라, 명예와 출세를 위한 길임을 간파하고 합격한 친구들과 다음과 같이 맹약했다. "이것은 명리의 길이니 우리는 참된 수도자가 되기 위해 이 길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며, 뒷날에 새로운 수도의 결사를 하고 정혜 쌍수하자." 그리고 그들은 흩어져 각자 수도의 길을 떠났다.
'육조단경'과의 만남
지눌은 남쪽으로 내려가 창평 청원사서 중국 선종의 6대 조사인 조계 혜능대사가 지은 '육조단경'을 읽고, 진여자성(본래의 참된 성질)에서 생각이 일어나면 보고 듣고 분별해 알며 만경에 물들지 않고 진성(만물의 본체)이 언제나 나에게 있다 는 대목에 이르러 자득했다 한다. 이것이 첫번째 깨달음이었다. 그후 그는 평생 동안 조계 혜능대사를 흠모했고, 후에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개칭할 정도였다. 28세에는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참선을 주로 하는 선종 승려인 그가 교종에서 중시하는 경전을 열람하게 된 것은 참선을 통해 깨닫고자 하는 선종과, 독경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교종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눌은 과연 교와 선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수많은 경론들은 마음을 밝히라, 마음을 닦으라, 본성을 찾아라 고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것은 선종에서 주장하는 바와 일치했다.
이통현의 '화엄론' 만남
그리고 당나라 이통현 거사가 지은 화엄론을 읽고 두번째 깨달음을 얻은 후, 드디어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므로 둘이 아니고 하나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뒤 선교일치와 정혜쌍수의 새로운 지도체계를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선종이 독립하면서 생긴 상호간의 장벽을 일시에 거두었다. 이것은 인도적인 교와 중국적인 선을 한데 묶어 한국적 회통불교를 건립한 불교사상 일대 혁명이었다. 일찍이 당나라의 정혜선사 종밀이 선과 교가 본디 둘이 아니었는데 후세에 학도들이 아집과 편견에 의해 분파되었다고 지적은 하였으나, 그에 따른 실천운동은 없었다. 그런데 지눌은 지행일치 정혜쌍수의 실천수행을 함으로써 중국에서 볼 수 없었던 통불교가 실현되었다. 선교불이의 이념 아래 33세의 지눌은 팔공산 거조사에서 4, 5명의 도반들을 모아 정혜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했다.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모임을 결성하고 항상 선정과 지혜를 함께 익히며, 예불과 독송으로부터 노동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일을 잘구하면서 마음을 수양하며, 한 평생 자유롭고 호쾌하게 지낼 것을 기약했다. 이 결사에는 왕족관리등과 수백 명의 승려가 참석하기도 했다.
'대혜어록'과의 만남
그후 40세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참선에 몰두하다가 중국의 대혜선사가 지은 (대혜어록)을 열람하던 중 선이란 일체경계에 구애됨이 없이 마음 자체가 독립하여 자유자재해야 한다 는 구절에 이르러 세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그로서는 고의 종교적 체험이었다 한다. 42세 때 정혜사를 거조암에서 순천의 송광산(지금의 조계산)의 길상사로 옮기고 그 깨우침의 본격적인 실행에 옮긴다. 왕명에 의해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고치고, 신앙결사 단체인 정혜사도 수선사로 개명했다. 이 수선사가 현대 조계산 송광사다. 수선사는 선종과 교종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고, 이들의 수행방식은 그후 한국불교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지눌은 53세에 법상에 올라 설법하고 대중과 문답을 마친 뒤 조용히 앉아서 육신을 벗었다.
선교의 대립과 지눌의 혁신운동
교종과 선종
불교의 인생관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괴로운 삶이다. 이 고통을 없애는 길은 욕심을 버리고 이 세상의 참모습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데,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를 열반(nirvana)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열반에 이르는 방법으로 명상과 깨달음을 말했다. 붓다(Budda)라는 말도 깨달은 사람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전을 연구하는 교종이고, 다른 하나는 참선을 위주로 하는 선종이다. 선종은 9년 동안 면벽수도한 인도의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시작한 것으로 인간 마음의 본성을 제대로 찾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선종이 우리 나라의 통일신라에 전수되어 9산을 형성하면서 교종과 대등하게 발전하였다. 불교를 국시로 내세운 고려시대 들어와 이들의 대립은 표면화된다. 고려불교의 특징을 교종과 선종의 갈등 이라 할 만큼 그 대립은 심각했다. 그런데 왕권강화와 국론통일을 위해서도 교종(이론체계)과 선종(실천방법)의 화합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었다. 고려 초기의 불교는 대각국사 의천의 활약으로 교종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에는 불교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선종의 부흥과 신앙결사운동의 전개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까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던 교종 중심의 불교계는 종래의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무신정권에 대해 반발하게 되고, 이로 인해 최씨정권이 수립되면서부터는 그들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어 교종은 급격히 쇠퇴했다. 그대신 의천 이후 침체해 있던 선종 세력이 최씨 정권과 제휴함으로써 급격하게 부상하였다.
최씨정권과 선종의 결합
무신정권과 선종의 결합은 신라 하대에 선종이 호족들에게 환영받았던 사실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선종은 경전을 통한 복잡한 이론적 접근을 취하는 교종과는 달리, 참선에 의한 불교신앙을 그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박한 무인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선종의 혁신성은 종래의 문신귀족에 의한 기성질서를 무너뜨리고 성립한 무신정권의 성향에 맞는 것이었다. 이처럼 지눌이 살았던 시대는 불교외적으로도 혼란한 상황이었다. 무신란과 최씨 무단정권의 집권 등으로 사회 기강이 문란해지고, 정치는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눌은 시대족 혼란과 불교계의 갈등을 통합하기 위해 일생 동안 노력하게 된다.
완전하고 단번에 부처가 되는 논서
선교의 대립을 먼저 인식한 사람은 고려 초기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그는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주장했으나, 어디까지나 교종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다. 즉 천태종 교단에 선종 9산의 승려를 많이 흡수하고 그의 저서(신편 제종교장총록)에는 선종에 관한 서적을 하나도 넣지 않았다. 이러한 의천의 정치적인 선교의 통합보다 지눌은 좀더 근원적인 화합을 모색했다. 또 중국에서도 종밀에 의해 선교일치 사상이 대두되었으나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한 것에 비교한다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9산선문을 조계종으로 통일하고, 선종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선과 교 모두를 포함하는 독창적인 돈오점수 사상을 제시했다. 그리고 정혜쌍수 라는 실천운동을 전개했다. 원돈성불론은 지눌이 선교 양종이 대립하게 되자, 이를 개탄하고 선종의 처치를 밝혀 교종의 이해를 돕고자 쓴 책이다. 내용은 주로 화엄경에 입각하여 성불의 도리를 밝힌 것이다. 특히 이통현의 화엄신론이 많이 반영되어 있어 그의 독창적인 저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글은 지눌이 입적한 뒤에 글상자에서 발견된 것을 그의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이 간행한 것이다. 여기서 '원' 은 완전하다의 뜻이고 '돈'은 단번에 뛰어오른다 는 뜻으로 결국 원돈성불론은 완전하면서도 단번에 부처가 되는 논서 라고 생각된다. 내용은 문답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돈오점수
지눌의 주요 저서인 원돈성불론, 권수정혜결사문 그리고 인간의 참다운 모습을 밝힘으로써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밝혀놓은 수심결 등 전체를 일관하는 사상은 돈오점수이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고(선 돈오)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후 점수)는 뜻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인간의 본성을 떠나서 따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도를 닦아도 절대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마음(자심)이 참부처(진불)이며, 나의 본성(자성)이 참진리(진법)라는 생각이 그의 일관된 사상이다. 마음이 어두워 어쩔줄 모르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깨쳐야 한다. 마음을 깨친 사람이 다름아닌 부처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으려는 자는 눈을 밖으로 향하지 말고 안으로 돌려 자기의 마음을 밝혀야 한다.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성자들은 누구나 마음이 밝아진 분들이었다고 역설한다. 그럼 내 마음이 참부처이며 내 본성이 참진리라면 어찌하여 지금의 나는 이와 같이 어리석은가? 이런 물음에 지눌은 나는 어리석다 고 보는 그 생각에 억눌려 자기의 불성을 확인하지 못할 뿐이므로, 먼저 그 생각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밤낮 스스로 부처노릇을 하면서도 부처인 줄 모르고 부처를 따로 찾고 있기 때문에 미했다 하고, 이런 사람들을 중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중생이 바로 부처이지 중생을 떠나 따로 부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바로 부처임을 깨달으면 부처로서의 영원한 면과 무한한 능력이 나타나야 할 텐데 왜 오늘날 깨달았다는 사람에겐 이러한 면이 나타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지눌의 답변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우매한 중생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부처로서의 영원하고 무한한 면을 나타내려면 그것은 신통을 부리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부처의 세계에서는 신통을 부린다는 것이 지극히 지엽적일 뿐만 아니라, 요망스러운 짓에 속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에 가서 나무하고 우물에서 물 긷는 것이 모두 신통 아닌 것이 없는데, 이것 밖에서 신통을 찾으니 중생을 떠나 따로 부처를 찾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답변은 이치를 깨닫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지눌의 사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면서, 동시에 많은 논쟁을 야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부처는 분명히 모든 관념적인 제약을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오래도록 나쁜 습관에 젖어 있어 일시에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제까지 몸에 밴 습관마저 완전히 제거하려면 깨달은 다음에도 꾸준히 닦아나가야 한다(점수)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 체계를 돈오점수라 한다.
정혜쌍수
이 수행에 있어서는 정과 혜를 함께 닦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혜쌍수란 점수의 실천적 방법을 말하는데, 여기서 정이란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이며, 혜란 진리를 바로 보는 것이다. 대중의 마음은 한 시도 쉬지 않고 출렁거리는 물과 같이 번뇌와 망상이 일고 있으므로, 이를 다스리는 수행이 정이며, 만일 정만 있고 혜가 없다면 마치 바위처럼 침묵만 지킬 뿐 아무런 작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진실과 인생의 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범부는 일상 속에서 지혜가 아닌 분별심으로 생활하므로 대립과 분열을 맛보게 되며 통합과 조화를 잃게 되는 것이다. 지혜는 분별심으로 식별하는 지식이 아닌 전체를 직시하는 영지작용이다. 지눌은 정혜를 쌍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자성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서 박학다식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달을 가리키면서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는 것과 같은 꼴이다. 둘째로 마음을 통일하는 것은 극락정토를 바라는 바이지만, 밖의 극락세계만을 염원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다. 왜냐하면 이는 마음의 바람만 있기 때문에 비록 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나 성불은 멀어진다는 것이다.
한국 불교의 중흥조
선교일치
지눌의 선사상은 이러한 돈오점수설에 입각한 정혜쌍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교종의 큰 흐름인 화엄학의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교종과 선종의 화합의 길을 모색한다. 결국 중국 화엄종의 이통현의 화엄론의 구절에서 화합의 길을 찾고 여러 대장경을 열람한 후 선교는 하나 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마음과 말이 분리될 수 없듯이 선과 교는 둘일 수가 없다. 이처럼 지눌은 선교일치의 철학체계를 완성했다. 따라서 지눌사상의 역사적 의의는 침체했던 선을 부흥시켜 교종을 포함해서, 결국 양측의 대립을 넘어 선교일치의 사상을 이끌어낸 데 있다.
불교혁신운동
선종의 부흥과 수선사백련사 등의 결사로 특징 지어지는 무신집권기의 불교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었다. 종래의 교종 중심의 불교를 선종 중심으로 옮기고 선종 자체에도 새로운 혁신의 기풍을 갖게 되었으니, 종래의 교종과는 달리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을 벗어나, 왕실귀족에 대신하여 민중을 저변으로 한 종교는 그 기반을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심성론은 수선사가 주로 지방의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 후기에 지방 향리 출신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통불교 법맥 계승
지눌이 만년을 보낸 전남 순천 송광사에는 지금도 지눌을 계승한 제자들의 찬란한 업적들이 문헌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나라의 스승 역할을 한 고승들이 16명이나 있었다 한다. 조선에 들어와 배불정책으로 선종의 법맥이 한때 중단되었다가,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에 의해 부흥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엽에 경허라는 스님이 홀로 참선을 하다가 크게 깨쳐 그 문하에서 만공해월한암 등 쟁쟁한 선사들이 배출되었고, 최근에는 청담성철 스님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선종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지눌의 사상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 내려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우리는 앞에서 지눌이 주장한 돈오점수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중 점수 부분에 대해서는 기나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논쟁은 유교의 주리설과 주기설의 뿌리깊은 논쟁을 연상케 한다. 지눌은 내 마음의 본성이나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았어도(돈오) 이전의 나쁜 버릇들이 남아 있으므로,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점차적으로 닦아나가야 한다(점수)고 주장한다. 마치 돈오가 생명의 탄생이라면, 점수는 탄생된 생명이 어른이 되기까지의 성숙과정이라고 비유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에 반대하고 단번에 깨우쳐 단번에 닦아 마친다는 돈오돈수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 돈오돈수는 중국 선종의 6대 조사인 혜능이 주장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쟁은 석가모니 이래 논의되어온 문제이고, 중국에서는 이미 8세기에 혜능이 이끄는 남종선의 돈오돈수와 신수가 이끄는 북종선의 점수점오의 치열한 돈점논쟁이 있었다. 한국에서 지난 20년간 벌어진 돈점논쟁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 즉 방법론의 시비였다. 현재 두 개념 사이의 관계는 깨달음(서울)에 가는 길은 비행기로도, 걸어서도 갈 수 있다는, 즉 사람에 따라서는 빨리 깨우칠 수도 있고 늦게 깨우칠 수도 있다 는 이해로써 좁혀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사람으로는 얼마 전에 입적하신 성철 스님 등이 있는데, 이들은 돈오하고 나서 점차 닦아야 한다면 그 돈오는 진정한 돈오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돈오는 수행의 완성까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자성을 아는 것이며,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하고 원만한 것을 깨닫는 것인데, 다시 더 깨달을 것이 있다거나, 닦을 것이 있는 깨달음이란 단지 이해가 더해가는 과정상의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의 논쟁은 깨달음에 대한 견해 차이지 깨달음 자체에 상하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의 최근의 돈점논쟁은 81년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 스님(해인사)이 자신이 저서 (선문정로)에서 돈오점수 사상을 강력히 비판하여 조계종의 종조인 지눌이 만년을 보냈던 송광사측을 자극하여 불이 붙기 시작했다. 송광사측과 해인사 양측은 몇 년 전 각기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참선 지도노선이 대결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눌은 중국과 인도의 돈점논쟁을 통합해 새로운 선을 창출한 토착불교적 선각자였다. 돈점론을 두고 섣부르게 상호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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