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5.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작가이다. 주제와 인물 설정, 사건 전개와 심리 묘사등이 독특한 질서 아래 단단히 통일되어 있는 그의 작품 세계는 세계 문학사를 놓고 보더라도 단연 우뚝한 데가 있다. 평론가들이 흔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고 일컫는 그 독특한 작품 세계는 원색의 유화 물감이 마구 뿌려져 마르지도 않은 채 끈적끈적 흘러내리고 있는 커다란 회색 캔버스를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 세계를 요약해 표현할 때면 19세기 러시아의 현실 속에서 건져 올린 생동감 넘치는 인간 군상들,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 치밀하고 집요한 심리 묘사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관된 주제 의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 죄의식, 심판, 처벌, 참회, 구원을 둘러싼 문제에 상당히 집착하였다. 만년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의 이런 모든 특성들이 집대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탐욕스런 호색한 표트르 카라마조프가 어느 날 밤 손도끼에 찍혀 살해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러 정황 증거에의해 한 여자를 사이에 놓고 아버지와 싸움을 벌이고 있던 큰아들 드미트리가 살해 용의자로 체포된다. 그러나 재판 도중에 논리 정연한 인텔리겐치아이자 둘째 아들인 이반이 자신이 진짜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카라마조프가에는 간질병을 앓는 비천하고 사악한 하인 스메르자코프가 있었는데, 그는 사실은 카라마조프의 사생아였다. 이반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증오를 부추겨 교묘하게 살해를 교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뇌와 번민 끝에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는 이반의 말을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게다가 스메르자코르까지 자살해 버려 드미트리는 누명을 벗을 수 없게 된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만큼 범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시베리아 유형을 달게 받아들인다. 소설 전편을 통해 셋째 아들 알료사와 그의 스승 조시마 장로가 선의 상징으로서 악의 상징인 표트르, 스메르자코프와 대립 구도를 이루며 신과 인간, 인간 구원을 둘러싼 주제를 시종일관 이끄러 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부친 살해 심리
그런데 1928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작자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내명 심리를 그대로 투영한 것이라는 충격적인 논문이 발표되었다. 논문의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 살해범>이었고 발표자는 인간의 정신 활동은 의식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고 주장하며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저 유명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모든 예술 작품은 꿈과 비슷하다 고 생각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꿈이 의식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무의식적인 사고나 욕망을 가장 선명하고 다양하게 비추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서는 꿈의 분석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무의식 속에 있는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소망은 대부분 성적인 것이고 의식의 눈으로 보면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꿈은 그러한 무의식적 충동을 의식이 받아들일 만한 정도로 적당하게 위장하고 왜곡 시켜 드러낸다. 예를 들면 사촌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무의식적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것은 근친 상간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소망이 그대로 꿈에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놀라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꿈에는 사촌이 아니라 웬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난다. 꿈이 위장 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있고 또한 환상적으로나마 사촌과 사랑을 나는고 싶다는 무의식적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소망이 그대로 꿈에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놀라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꿈에는 사촌이 아니라 웬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난다. 꿈이 위장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있고 또한 충족시키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예술 작품도 이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무의식적 소망이 위장된 채 드러난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면서 작가 자신에게 부친 살해 심리가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이라든지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머니 나이뻘인 전당포 노파를 지구인 것 등이 모두 그런 심리의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는 자기 영지에 속한 한 농노에 의해 도끼로 살해되었다. 그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열여덟 살이었다. 일생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를 괴롭힌 간질 발작이 시작된 것도 바로 열여덟 살 때부터였다. 프로이트는 이런 사실을 근거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발작이 진짜 간질이 아니라 히스테리성 발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프로이트의 해석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찍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부친 살해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욕구를 자각했기 때문에 진작부터 아버지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가 살해되자 원래의 죄책감에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새로운 죄책감이 덧쌓였고 그 결과 히스테리성 발작을 일으키게 되엇다. 즉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발작은 도둑이 제 발 저려서 생긴 신경성 질병이라는 설명이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서 드미트리가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작가 자신의 도덕적인 자기 학대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스스로를 벌줌이로써 죄책감을 덜려는 행위라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말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 는 끔찍한 소망을 품었던 걸까? 그런데 정신분석학에서 보자면 그런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이른바 오이디푸스콤플렉스 는 결코 끔찍한 것도 비정상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거치게 되어 있는 일종의 통과 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3, 6세 사이의 남자 아이가 이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동성의 아버지를 경쟁자로 적대시하는 심리 현상을 가리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 발달하는가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본성적 욕구에서 파생하는 어떤 정신적 에너지에 의해 움직이는 하나의 기계처럼 생각했다. 그 동력의 이름은 리비도 이다. 본능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라고 인간을 내모는 불가항력적인 힘, 그것이 리비도이다. 리비도는 흔히 성적인 충동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데, 그것은 프로이트가 인간이 지닌 여러 본능적 욕구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것이 성적인 욕구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양은 어느 시기에나 동일하지만 사람이 성장해 감에 따라 표현 형태를 달리한다고 보았다. 리비도는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재기를 거쳐 성기기로 발달해 가는데 각각의 단계를 어떻게 거치느냐에 따라 개인의 성격이 달라진다. 즉 각각의 시기에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었는지 그렇게 않은지에 따라 성격상의 특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예컨대 리비도가 입과 입술, 혀 그밖의 입 근처에 지중되는 시기가 태어나서 1년 반까지의 구강기인데, 이 시기엔 아이들이 입으로 할 수 있는 활동, 즉 엄마의 젖을 빨거나 손가락을 빨거나, 무언가를 깨무는 일에서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만약 이 시기에 아이의 욕구가 과잉 충족되거나, 지나치게 좌절된다면 그 아이는 장차 지나친 낙관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지기 쉽다. 또한 남에게 의존하려는 성향이 강하며, 술, 담배를 지나치게 즐기거나 껌씹기를 좋아하는 등 입을 많이 놀리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어떤 시기에나 욕구가 알맞게 충족되어야지 지나치게 많거나 적게 충족되면 성격상의 결함이 생겨난다는 게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구강기, 항문기(1.5-3세)에 이어 남근기가 오는데 이 시기를 오이디푸스기라고도 한다. 보통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과 어머니들 동일시한다. 그래서 남자아이의 경우, 처음엔 나도 어머니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기에 이르러 어머니에게 음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서히 아버지와의 동일화를 시작한다. 말하자면 어머니를 이성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질투심, 경쟁심을 느끼고 어머니를 혼자 독점하고 싶은 소망을 품게 된다. 그래서 때로 난 아버지가 죽으면 엄마랑 결혼 할꺼야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아이의 이런 말을 버리지만 프로이트는 그 말의 뒤에 숨은 무의식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적의를 품은 아이는 한편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아버지에게 들켜 거세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고 아버지와 더욱 깊은 동일화를 꾀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아이는 어머니를 포기하고 남자의 길을 택하게 되고 그러므로써 마침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 청산하게 된다.
오이디푸스기를 무사히 통과하면 이어 잠재기(7-12세), 성기기(13세 이후의 청소년기)를 거치게 된다. 성적 충동이 왕성해지는 성기기에는 다시 오이디푸스적인 욕망이 부활하는데 그 욕망이 어머니가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완전히 청산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그 극복 과정은 아이의 주체성 확립과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프로이트는 모든 신경증의 밑바닥에는 극복되지 못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것을 제대로 극복하거나 청산하지 못하면 자라서도 올바른 이성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거나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홀어머니와 외아들의 관계도 오이디푸스기의 정상적 통과 여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비극적 영웅,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였다는 모티브에 착안하여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에 그 주인공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에겐 자식이 없었다. 텔포이 신전에서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비는 그들에게 신탁이 내리기를 아들이 생기긴 하겠지만, 그 아들은 장차 아비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 는 것이었다. 라이오스는 왕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음으로써 신탁이 내린 운명을 피해 가려 했다. 그러나 술이 몹시 취한 어느 날, 왕비와 몸을 섞고 말았고 마침내 그토록 두려워하던 아들이 태어났다. 신탁의 실현을 두려워 한 왕은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하고는 은밀히 부하 한 사람을 불렀다. 그는 양치기였다. 라이오스 왕은 아이의 발목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두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강보에 싸 내밀며 일렀다.
"키다이론 산 깊숙히 들어가 아이의 발목을 묶은 이 가죽끈을 튼튼한 나뭇가지에다 걸어놓고 오너라."
하지만 양치기는 차마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산에서 만난 코린토스의 어떤 양치기에게 아이를 넘겨주었고, 왕에게는 시킨대로 했노라 보고했다. 그런데 당시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왕에게 혈육이 없음을 늘 안타까이 여겨왔던 충직한 양치기는 자기가 얻은 아이를 왕에게 갖다 보였고, 왕과 왕비는 아이를 양자로 입적했다. 발견된 당시에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해서 아이에겐 오이디푸스(발이 부은 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헌헌장부로 자라난 뒤, 어느 날이었다. 오이디푸스를 데려왔던 양치기가 술자리에서 오이디푸스가 왕의 친아들이 아님을 발설하고 말았다. 왕은 쉬쉬 했짐나 이상하게 생각한 오이디푸스는 델포이 신전으로 찾아가 사실 여부를 물었다. 물음에 대한 답 대신 너는 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 이라는 신탁이 내렸다. 오이디푸스는 저주받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고 그 길로 방랑길에 올랐다. 아버지를 떠나 있으면 아버지를 죽이게 되는 일도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보이오티아로 양하던 도중에 오이디푸스는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 좁은 길에서 마차를 탄 웬 노인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노인은 오이디푸스더러 길을 비키라고 채찍을 휘둘렀고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오이디푸스는 노인과 그 부하를 모두 죽이고 말았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닌 테베의 왕 라이오스였다. 라이오스는 테베에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을 수없이 죽이기에 델포이 신전에 그 연유를 물으러 가던 중이었다. 자기를 죽인 청년이 자신의 아들임을 라이오스가 몰랐듯이 오이디푸스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오이디푸스는 방랑을 계속하여 몇 달 뒤에 테베에 이르렀다. 오이디푸스가 테베에 당도한즉 사람들이 반가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상히 여긴 오이티푸스가 까닭을 물으니 혹시 스핑크스를 물리칠 수 있는 영웅이 아닌가 싶어 그런다고 대답했다. 스핑크스는 머리는 여자, 몸은 사자인 데다 양 어깨엔 날개까지 단 괴물이었다. 테베 도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신전의 기둥 위에 올라 앉아 수수께끼를 내고는 그걸 알아맞추지 못하면 목을 졸라 죽여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꼭 남자만 죽이니 자칫하다간 테베 남자들은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사람들은 말 끝에 선왕도 스핑크스를 물리칠 방도를 묻기 위해 델포이 신전으로 가다, 불행히도 강도를 만나 죽고 말았다. 고 덧붙었다. 그래서 테베 왕가에서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에게 왕위를 주며, 홀로 된 왕비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이 모험을 받아들였다.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개의 다리, 오후에는 두 개의 다리, 저녁에는 세 개의 다리로 걷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다. 해답은 인간 이었다. 인간은 갓난아기 때는 두 발과 두 팔, 즉 네 다리로 걷다가 어른이 되면 두다리로, 그리고 늙으면 지팡이에 의지해 세 다리로 걷는다. 오이디푸스가 해답을 말하자마자 스핑크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약속대로 왕위에 오른 오이디푸스는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두 딸과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태평성대가 계속되는가 싶더니 어느 날 난데없이 테베에 전염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오이디푸스는 다시 텔포이 신전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부친 살해와 근친 상간에 대한 징벌 이라는 신탁이 내렸다. 그때까지도 코린토스 왕을 친아버지로 알고 있던 오이디푸스는 영문을 몰랐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왕비 이오카스테는 자살하였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뽑아 장님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미치광이가 되어 떠돌아 다녔다.
에리히 프롬의 또다른 해석
지금 까지 우리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그에서 유래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웬지 마음이 무겁다. 무언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프로이트의 학설을 향한 약간의 반감-과연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힘, 리비도에 의해 조종당하는 존재인가 하는-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악행 때문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때문이건만, 더욱이 그 운명을 피해 보려고 애를 썼건만, 기어이 오이디푸스는 그런 비극적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던 걸까? 하는 연민의 감정이다. 첫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마음을 다소 달랠 수 있는 길이 있다. 신프로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서 프로이트와는 다른 견해를 내 놓았기 때문이다. 프롬은 아이들이 유달리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았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이에겐 세계의 전부이다. 아이는 어머니 속에서 어머니의 일부로 자라나, 출생한 뒤에도 역시 어머니의 보호와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한다. 어머니야말로 아이에겐 생명을 주고, 생명을 좌우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의존심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물에 대한 집착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낙원, 즉 절대적인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었던 행복한 상황에 대한 동경심이다. 어른이 된 뒤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행복한 낙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데 그것은 곧 신경증으로 이어진다. 그 집착을 끊고 홀로 설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단순히 성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설명했다는 것이다. 부친에 대한 적대감 역시 프롬은 프로이트와 다르게 해석했다.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구와 관련된 게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부자 관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이며 그의 운명은 아버지에 의해 결정된다.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굴복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한 억압은 자연스레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낳고, 억압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만들며 극단적으로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이러한 갈등 역시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성의 대결로 왜곡시켜 버렸다고 프롬은 비판하였다.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유달리 집착하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본질적인 갈등 구조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현상에 주목한 것은 프로이트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인간을 성적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처럼 생각한 그의 인간관의 한계 때문에 그 발견의 진정한 의미가 왜곡,축소되어 버렸다는 게 프롬의 주장이다.
연민과 공포의 카타르시스
오이디푸스에 대한 연민은 어찌해야 할까.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 길이 없었는데도, 라이오스가 어린 아들을 죽이려 했고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고 할 수 있는데도, 길을 가는 오이디푸스의 화를 돋군 장본인은 라이오스임에도,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를 구해준 선행 때문이었음에도, 어머니 이오카스테가 부은 발을 보고도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는데도 왜 모든 책임을 오이디푸스가 뒤집어써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이 연민이야말로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고자 목적했던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즉 우리는 정해진 각본대로의 반응을 보인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능을 연민과 공포의 카타프시스 라고 갈파했다. 비극을 봄으로써 우리는 가련한 주인공에게는 연민을,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앞에서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현실이 아니라 극장의 무대 위에서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훨씬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극장문을 나설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카타르시스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운명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오이디푸스가 파멸했다면 그에게 연민을 느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반문으로 그만 오이디푸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다스리기로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푸스 대왕>의 한 장면을 음미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카타프시스 하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로 하자.
오이디푸스 : (절규하며)오오, 빛이여,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하게 해다오! 이 몸은 죄 많게 태어나 죄 많은 혼인을 하고 죄 많은 피를 흘렸구나! (눈을 찌른다) 합창단 : 조국 테베의 사람들이여 이이가 오이디푸스이다. 저 유명한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 이를 데 없던 사람 온 장안의 누구나 그 행운을 부러워 했으나 아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풍파에 묻히고 말았도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날 보기를 기다려라.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않고 세상 저편에 이르기 전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 부르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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