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2. 판도라에게 찬사를
악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독일의 극작가 프란크 베테킨트의 희곡 가운데 <판도라의 상자>라는 작품이 있다. 이 3막짜리 비극의 주인공은 루르라는 여자인데 그녀는 남편을 두고도 연인과 밀애를 즐기는가 하면 동성애도 마다지 않는 육욕의 화신이다. 남편과 애인의 아들과 결혼한다. 남편과 애인이 죽은 뒤 그녀는 급기야 새로 얻은 남편을 살해하고 죽은 애인의 아들과 결혼한다. 한 마디로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악을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여자이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을 불행의 늪에 빠뜨리는 존재로 여성를 묘사해 놓은 작품들은 이외에도 무궁무진하게 열거할 수 있다. 유태교의 경전 <탈무드>는 "여자의 충고에 따르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고 충고하고 있고, 그리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여자는 항상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 불행한 쪽으로 인도한다." 는 금언을 남겼다. 여자가 없었더라면 남자는 시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한탄한 이도 있고, 여자를 지옥으로 가는 문이라고 정의한 사람도 있다. 또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는 "난리는 하늘에서 내리지 않고 부인네로 인하여 생겨나느니라. 아무리 가르쳐도 효험없는 것, 그건 바로 부인네와 내시이니라."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여성을 타락과 불행의 근원으로 보는 습성에는 동서양의 차이도 없다. 그래서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처럼 "여자는 팬티와 바지를 구별할 정도의 머리만 있으면 된다." 는 극언을 하는 사람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심찮게 나오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과 불행의 책임을 송두리째 여자에게 전가하는, 이런 가당찮은 모함을 즐기는 사람들-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남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흔히 갖다대는 것이 바로 판도라의 이야기이다. 앞서 예로 든 베테킨트의 작품 제목이 <판도라의 상자>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판도라의 원죄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여성이다. 판도라가 후세의 모든 여성에게 원죄를 짐지우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불을 훔쳐 인류에게 선사한 프로메테우스를 벌한 제우스는 이번에는 인간을 벌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우스가 보기에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무리 불을 훔쳐다 주었기로소니 한 번 사양도 하지 않고 환호작약, 받아들인 인간도 괘씸죄의 공범이었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해파이스토스를 시켜 진흙을 이겨 여신의 형상대로 만들고 거기다 인간의 목소리와 힘을 불어넣게 하였다. 여신의 모습의 모습을 본뜬 데다가 명장 해파이스토스의, 문자 그대로 귀신 같은 솜씨가 발휘된지라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이 여자에게 은으로 만든 옷을 입히고 허리엔 금띠를, 머리엔 눈부신 면사포를 드리워 주었다. 사랑과 미의여신 아프로디테는 꿀물 같은 교태와 애잔한 그리움, 남자의 속을 태우는 가련한 한숨을 주었다. 헤르메스는 상업, 외교, 도둑질의 신답게 꾀와 염치없는 마음씨, 필요하면 거짓말도 마다지 않는 간사함을 주었으며 음악의 신 아폴론은 고운 노래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재능을 주었다. 물론 모두 제우스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제우스는 이 여성에게 판도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으니 모든 선물을 다 받은 여자 라는 뜻이었다. 그런 다음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예쁜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 상자는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인즉, 수명이 다할 때까지 절대로 열어서는 안된다."
짐짓 다짐을 받은 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데려다 주었다. 일찍이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 산으로 끌려가기 전 제우스라는 작자와 그가 주는 선물에 조심해라. 필경 음모가 숨어있으리라 고 일러놓았건만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의 아름다운 자태에 빠져 앞뒤를 재지 못하고 덥석 그 아름다운 선물을 받고 말았다. 그리하여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되어 지상에서 살게 되었다. 먹지 말라는 건 더 먹고 싶고 보아선 안 된다는 물건은 더 보고 싶은 법이다.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거듭거듭 다짐을 받은 것도 그 점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때문이었다. 상자를 볼 때마다 불같이 일어나는 호기심을 애써 누르던 판도라는 어느 날 궁금증을 삭히지 못하고 기어이 상자의 뚜껑을 열고 말았다. 판도라가 뚜껑을 여는 순간, 그때까지는 없었던 온갖 재앙과 질병이 쏟아져 나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육체적인 것으로는 신경통, 통풍, 역병 같은 것들, 정신적인 것으로는 질투, 원한, 복수심, 분노 같은 것들이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다. 판도라가 애초에 상자를 들고 내려온 게 아니라 문제의 상자는 에피메테우스의 것이었다는 설이다. 인간에게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을 맡았던 에피메테우스가 당시로선 필요가 없었던 몹쓸 것들만 따로 상자 안에 모아 두었는데 판도라가 그걸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자의 소유자가 누구인가는 본질과 별로 상관이 없다. 제우스가 악의를 품고 판도라를 보냈고, 판도라가 문제의 상자를 열었다는 사건의 핵심 줄거리에는 변함이 없다. 이로써 판도라는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살던 인류에게 대재앙을 내리게 되었으며, 그 뒤로 인류의 절반인 여성은 판도라의 원죄로 말미암아 남성들로부터 갖가지 조롱과 경멸, 비난 때로는 저주까지 받으며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아온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하늘을 이고 살면서 불행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미룬다는 건 어째 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최소한의 공명정대함이라고 갖춘 남성이라면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한번 의심해 보았을 것이다. 판도라는 인간을 벌하려는 제우스의 각본 때문에 자기도 알지 못하고 사이에 악역을 맡게 된 희생자가 아닌가말이다.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역사학, 인류학, 고고학, 신화학, 여성학이 그간 밝혀놓은 바에 따르면 판도라의 이야기 뒤에는 오히려 신화를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조작한 남성들, 또는 가부장제 사회의 횡포가 아로새겨겨 있다. 잘못된 것은 죄다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식의 역사 왜곡이 시작된 것은 원시공동체 시대의 모계 사회가 무너지면서부터였다. 수렵과 채취에 의존하고 일반적으로 군혼과 난혼이 이루이지던 원시공동체 시대엔 지금과는 반대로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높았다. 하루 종일 들판을 헤매며 짐승을 쫓아다니고도 빈손으로 돌아오기 일쑤었던 남성들에 비해 열매나 곡식의 채취를 담당한 여성들이 가져오는 게 늘 더 많았다. 그때만 해도 사냥 도구란 게 기껏 돌멩이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군혼이나 난혼 아래에선 아버지가 누구인지 가려내기가 어려워서 자연히 어머니를 중심으로 혈족이 꾸려졌다. 혈족의 중심이며 경제적으로도 더 가치있는 활동을 담담한 여성의 지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 사태는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힘이 센 남성이 경제 생활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고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사유재산이 생겨났다.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 혈족이 확립되었으며, 점차 일부다처제가 자리잡았다. 여성은 남성에게 완전히 예속되었으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사회,경제,문화 전반을 장악했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이런 전환을 여성학에서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라고 표현한다. 그리스 신화는 바로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이후에, 즉 가부장제가 확립된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의 역사로 범위를 좁혀서 보면 남신 중심인 그리스신화의 배경이 더욱 구체적이고 뚜렷하게 드러난다. 발굴한 유적과 유물을 근거로 고고학에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가부장적인 종교가 등장하기 5000년 전쯤의 고대 유럽엔 모계 중심의 평화로운 농경 문화, 또는 해양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문화를 이뤄낸 초기 정착민들은 위대한 여신을 숭배했다. 위대한 여신은 아스타르테, 너트, 이스스, 니나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바로 원초적 생명력 이었다. 우리가 흔히 만물의 근원으로 칭송하는 어머니 대지 와 통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기워전 4500년쯤, 북쪽과 동쪽에서 인도,유럽어 족이 침입해와 정착민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침입자들은 기마민족 또는 유목민족으로서 부계 중심의 호전적인 종족이었다. 인도,유럽어족들이 정착민들을 정복해 감에따라 여신 숭배의 사상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침략자들은 그들의 가부장 문화와 호전적인 종교를 정착민들에게 강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위대한 여신은 침략자가 숭배하는 남신의 비굴한 배우자로 격하당하고, 원래 여신의 속성이었던 덕목들을 남신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 결과 그리스 신화에서 보이듯이 남신이 여신이나 인간 여성을 강간하는 이야기, 위대한 여신의 상징이었던 뱀이 영웅들에게 살해당하는 이야기가 신화에 등장하게 되었다. 여성이 남성에게 패배함에 따라 여신도 남신에게 정복당한 것이다. <신이 여자였을 때>라는 책을 쓴 메를린 스톤은 이 위대한 여신의 몰락이 인도, 유럽어족의 침입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판도라가 죄를 뒤집어쓰게 된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거꾸로 읽는 판도라 이야기
더욱 확실하게 판도라를 복권시킨 것은 심리학이다. 심층심리학에서는 판도라의 상자를 인간의 내면 으로 해석한다. 즉 인간의 내면에는 판도라의 상자에 들었던 몹쓸 것들처럼 어두운 부분이 있다. 시기, 질투, 증오, 원망, 분노, 복수심, 공격성 - 우리가 늘 벗어나고 싶어하는 그 어두운 심연 말이다. 따라서 상자를 연 판도라의 해위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어둠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걸 상징하는 원형이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자각하지 않고는 그것을 다스릴 수도 없다. 판도라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밝은 면만이 아니라 어두운 면까지도 두려움 없이 통찰하게 함으로써 이성의 힘으로 그것을 통제하는 길을 열러 준 은인인 셈이다.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므로. 미국의 저명한 비교 신화 학자 조셉 캠벨은 판도라 이야기와 아주 흡사한 구조를 가진 성서의 실락원 이야기를 독특한 관점으로 분석하였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를 두루 섭렵한 캠벨의 연구에 따르면 뱀을 원래 위대한 여신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어떤 신화에서는 뱀이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꼬리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이미지 이다. 한 세대가 이울면 다음 세대가 태어난다.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의식, 뱀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성서에서 뱀이 사악한 유혹자로 등장하는 것은 히브리 민족이 남신 지향적인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즉 가나안 백성들은 원래 여신을 숭배했는데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면서 여신을 거부하고 격하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그와 마찬가지 이유에서 여성인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는 악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부장적 꺼풀을 벗기고 나면 실락원의 참다운 의미가 드러난다. 여성은 삶을 상징한다. 남성은 여성을 통해서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삶은 고통과 모순으로 가득한 지상이라는 사실, 이 엄연한 존재 조건을 자각케 한 것이 바로 이브이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아담과 이브는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신과 인간을 분별하게 되었으며, 바로 그것을 인식했다는 죄로 신화적인 꿈의 세계,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것이다. 신이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자각과 내쫓김 이야말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내쫓김 당한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의 조건을 통찰하고 그것을 기꺼이 수락 한 것이다. 조셉 캠벨은 실락원의 인간적 의의를 이렇게 표현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왜 아담과 이브에게 금지되어야 했던가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인류는 삶의 조건에 동참하지 못한 채로 아직도 에덴 동산에서 멍청한 아이처럼 살고 있을 테지요. 결국 여자가 이 세상의 삶을 일군 것입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꿈같은 낙원 에덴 동산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캠벨의 이 찬사는 마땅히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통찰의 눈을 갖다댄 판도라에게 돌아가야 한다.
희망이 인류를 구원하리라
수천 년 동안 부당한 모함을 받아온 판도라를 복권시키고 찬양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남아 있다. 다시 신화 속으로 돌아가면, 상자 속에서 온갖 재앙이 빠져나가는 걸 본 판도라는 놀라서 후다닥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하여 상자 속엔 오직 하나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았다. 그것은 에르피스, 즉 희망이었다. 그 덕분에 인간은 어떤 횡액을 당해도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사는 경건한 자세를 갖출 수있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그 어떤 고난과 불행, 시련도 우리 존재의 뿌리를 흔들 수 없다. 희망은 상자를 빠져나간 그 모든 악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엔 얼마나 많은 사악한 것들이 숨어 있는가. 그러나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들을 이길 수 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리라. 이것이 판도라가 인류에게 준 위대한 메시지이다. 희망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무언가 간절한 염원을 품는 것이리라. 희망을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과 나날>이라는 책을 통해 판도라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준 헤시오도스(기원전 7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작가)도 희망 앞에다 헛된 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놓았다. 언제나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나 괴로운 고통과 불행, 시련을 겪은 나머지 불완전한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들어가는 이 모순 투성이 세상엔 희망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노신의 말을 전하고 싶다.
"희망이란 원래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또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은 것이다. 땅위에 원래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걸어가면 그것이 길이 된다."
많은 사람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세상 을 염원하면 그 세상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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