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예종에의 길(The Road to Serfdom) - 하이에크(Friedvicw August von Hayek,1899~1992)
이책은 독일과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전체주의와 계획경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정부의 시장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식 계획경제는 전체주의로 통하게 되며 결국 개인의 자유까지도 억압하게 되어 국민 등을 노예에의 길로 이끌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모든 것을 시장기능에 맡기자는 하이에크의 생각이 담긴 이 책은 오늘날 경제에 대한 국가적 통제 및 복지국가관에 반대하는 신자유주의자 내지 신보수주의자 들의 고전이자 케인스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서다.
케인스의 영원한 라이벌
이미 50년 전에 사회주의가 인류를 노예의 길로 인도하고 결국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끝내 종언을 고하리라고 예언한 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하이에크다. 케인스의 숙명적 라이벌 하이에크. 그의 생애는 전기의 경제학자적 생애와 후기의 사상가적 생애로 구분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귀족적 전통 속에서 자랐다. 빈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21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여기서 그의 스승이자 동료로서 그를 이끌어준 미제스를 만난다.1923년 경제학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경제학이 법학부에 부속되어 있었던 당시의 제도 때문이다. 그의 학문적 기초와 세계관의 형성은 그의 젊음을 불태웠던 빈 대학인데,그는 여기서 자본주의적 세속에서 벗어나 학문적 도원경에 젖으면서 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 그뒤 미국을 방문하여 본격적으로 경제학 수업을 쌓으면서 당시 신대륙에서 성행한 경기변동의 실증적 연구에 주목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19년 (화폐이론과 경기변동이론)이라는 저서를 내고, 모교인 빈 대학의 강사가 된다. 그의 평생의 연구분야는 전반기의 경기이론과 후반기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후 그는 영국의 로빈스의 초청으로 1931년 런던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케인스와 숙명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로빈스가 그를 영국으로 초빙한 데는 케인스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로빈스의 부탁으로 하이에크가 케인스의 저서(화폐론)에 대한 비판을 가하자 케인스도 다른 학자를 시켜 하이에크의 저서(가격과 생산)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이후 두 당사자는 물론이고 아서 피구를 비롯한 당대의 기라성 같은 경제학자들이 대거 토론에 참여하여 반론과 재반론의 치열한 공방을 전개했다. 존 힉스가 일대 드라마로 표현한 논쟁에서 그는 무려 10편의 논문을 쓰며 분전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당분간 케인스 쪽으로 미소를 보내는 듯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가격수준에 관한 케인스의 거시적 분석은 상대가격의 변화가 투자와 생산의 각 분야에 끼치는 미시적 영향을 무시하고 있고, 소비수요의 증대 역시 케인스의 관찰과는 달리 투자를 위축시켜 불황을 야기 한다는 것이다. 케인스의 한 제자가 그에게 당시의 견해로는 내가 새로 양복을 구입하면 사회의 실업이 증가하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 고 대답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부호와 수식을 잔뜩 늘어놓았다 한다. 그러나 케인스의 승리는 새 양복이 실업을 줄인다는 이론 때문이 아니라 1930년의 대공황에 직면한 각국 정부가 케인스의 (일반이론)에 제시된 그의 처방을 하이에크의 무위도식 적인 권고보다 한층 더 절실하게 받아들인 현실에 기인한다. 케인스가 주도한 케임브리지 경제학과 그에 대항하는 런던 경제학의 일대 자존심이 걸린 전투에 하이에크는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 예로 그는 전력을 다해 케인스의 (화폐론)에 대한 논평을 끝내고 나니, 케인스가 그 책에 담긴 생각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바람에 완전히 김이 샜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반론이 나오면 케인스가 또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고 말할지 몰라서 (일반이론)에 대한 서평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1년 런던 대학에서 그는 세번째 학위를 얻는데, 이번에는 정식으로 경제학 박사학위였다. 그러나 경제학 박사와 함께 그 뒤의 하이에크는 오히려 철학자와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 변모에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영국에 체류하던 칼 포퍼((열린 사회와 그적들)의 저자)의 역사주의 비판이 큰 영향을 주었다. 하이에크 역시 개인의 행위를 역사보다 중시하면서 흄의 개인주의는 우연적이므로 옳으나, 루소의 개인주의는 계획적 이기에 싫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 자신이 정치적 저작 이라고 선언한 1944년의 (예종에의 길)은 자유주의 전도사로서 그의 명성을 세계에 전파한 책이 되었다. 모든 당파의 사회주의자 에게 헌정한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계획은 반드시 전체주의로 통한다는 소신에 입각하여 파시즘과 사회주의를 맹렬히 규탄한다. 나아가 그는 사회주의를 유태인 다음으로 박해한 나치즘에서 사회주의적 연원을 추적할 만큼 참으로 정치적 저작다운 모험을 강행했다. 매카시의 반공 히스테리가 기승을 부리던 1950년 하이에크는 극우 경제학의 본산인 미국의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윤리학 교수로 취임한 그는 주로 지성사를 강의했으며, 밀턴 프리드먼은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다. 미국에서 출간한 최초의 저서는 (존 스튜어트 밀과 헤리에트 테일러 : 그들의 우정과 결혼)이었는데, 아마도 자신의 이혼과 소꿉친구와의 재혼이 마음에 걸렸던 듯하다. 밀은 친구의 부인 해리어트를 20년 동안 사모하다가 친구가 죽자 그녀와 결혼한 세기의 불출을 실연한 장본인이다. (자유의 헌법)은 이 시기에 나온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데 그는 자유의 근본원리를 강제의 부제 로 간단히 규정했다.
12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그는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돌아왔다가,1968년 오스트리아의 찰스부르크 대학으로 초빙된다.경제학의 학위과정조차 개설되지 않은 이 대학에서 그는 아주 무료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1974년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한다. 화폐이론과 경기변동이론에 대한 무려 50년 전의 기여가 시상 이유였지만 정작 그의 수상연설 제목은 지식의 가면 이었다. 1938년 영국에 귀화했으므로 그의 공헌은 영국경제학의 업적으로 기록되었다.1977년 다시 프라이부르크로 돌아와서 (법입법자유)의 3부작으로 완성한다.그후 연구와 여행에 몰두했으며, 1978년에는 한국을 방문했다. 1988년에 저술한 (치명적 망상 : 사회주의의 오류)는 그가 남긴 마지막 반공 메시지다. 예를 들어 그는 사회적 이란 말이 은연중에 옳은 이란 냄새를 풍기는 족제비처럼 교활한 언어라면서 사회정의 조차 흔히 시장원리를 거스르는 분배정의를 가리키기 때문에 반사회적이라고 단죄한다. 민주주의마저도 다수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전집은 22권으로 예정되어 있는데, 그 방대한 저술과 관련하여 언젠가 그는 '물리학자는 물리학자이기만 하면 일급이지만 경제학자는 경제학자이기만 하면 폐를 끼친다' 고 토론한 적이 있다.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수상인 대처의 극우 보수주의가 발호하고 고르바초프의 현실주의가 무너지는 가운데 그는 평생의 지론이 승리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1992년 9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계획경제와 케인스의 복지국가관 비판
제2차 대전 중 자신이 머물고 있던 영국에서도 계획경제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그의 우려는 점점 깊어져, 그의 관심이 점차 자유의 문제로 옮겨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나온 책이 본서이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열띤 논쟁을 야기시켜 미국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그 요약판을 게재할 정도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우리가 그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지나간 역사와는 다르다. 우리들은 과거를 돌이켜봄으로써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를 평가할 수 있게 되고 또 그 사건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고 기술 하면서 독일과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전체주의와 계획경제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그 배경과 사회학적 원인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파시즘 혹은 나치즘의 발생을 그 이전 시대의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그러나 많은 나치 지도자들이 걸어온 지적 발전의 경로를 거슬러가다보면 파시즘은 공산주의가 환상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뒤에 도달한 당연한 결과임을 알게된다다. 사회주의는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집산주의의 일종이다. 만약 자유의 길이라고 믿어왔던 장밋빛 미래가 사실을 알고 보니 노예의 길 이었다면 얼마나 큰 비극일까? 어쩌면 사회주의는 집산주의가 가장 정체된 형태로 발현된 사상일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겐 그들이 이미 포기했던 경제생활에 대한 통제에 한번 더 복종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모든 계획의 출발점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파시스트들은 어떻게 하면 여러 자원을 확고한 방법으로 특수한 목적에 봉사하도록 운영하는가,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모든 경제활동을 중앙집중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고 있다.중앙집중적 계획에 따르면 경제문제는 개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여러 가지 욕망의 상대적 중요성을 결정하는 주체는 사회 내지 그 대표기관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계획에 따른 지도는 어쩔 수 없이 단일한 전문가 진용에 의한 것이 되고, 결국 책임과 권력이 총지휘자의 수중에 집중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일단 경쟁 대신 중앙계획을 채택하게 되면 이전에 계획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생활부분에 중앙적 지도가 필요해진다. 왜냐하면 생산부문에서 중앙적 지도가 실시된 후엔 소비부문에서도 중앙의 지도가 필요해지고, 경제영역에서의 계획은 정치,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의 중앙적 지도를 유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권리를 심하게 제약하는 계획사회는 자연스럽게 전체주의 사회로 넘어가게 된다.
집산주의는 사회의 모든 영역과 자원을 단일한 목적을 위해 조직하려는 점에서나 개인의 목적이 최고의 자주적 영역임을 무시하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집산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복리와 행복은 경중만을 표시하는 단일한 목적으로 적당하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활동을 단일한 계획에 따라 지도하려면 우리들의 욕망에 가치서열을 매겨 적당한 자리에 끼워맞출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또 계획이 성공하려면 이들 가치서열을 계획자가 충분히 조정,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절무결하게 정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계획이 성공하려면 서로 다른 인간의 가치가 적재적소에 배치 될 수 있는 도덕률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 역시 인간사회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도 모든 인간의 동기를 의식적으로 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분산주의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산업제도를 의식적인 중앙계획 아래 두었더라면 지금까지 이룩해낸 분화복잡성, 탄력성의 수준에 결코 도달할수 없었을 것이다. 분산주의와 그에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시장의 자동조절수단에 의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비하면 중앙의 지도는 말할 수 없이 열등하고 원시적이며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중앙계획방식을 사용할 수 없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의식적인 통제를 시도할 가능성은 점점 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쟁은 우리가 지금껏 경험한 방법 가운데 가장 유효한 방법일뿐 아니라, 정부당국의 강제적자의적 간섭이 없이 우리의 활동을 상호간에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우리는 그 우월성을 인정한다. 자의적인 사회통제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개인에게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도 경쟁은 가치가 높다. 인간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보다 인간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회주의 혹은 다른 형태의 집산주의와 대비해 말하는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자기 중심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개인주의는 개인이 해야 할 일의 영역이 아무리 협소하다 할지라도 각자의 견해와 취미가 최고의 표준이 되어야 하고, 개인의 능력과 재주를, 개발하는 길이 최고의 목표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사건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가급적이면 사회의 자발적인 힘을 이용해야 하며 강제수단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본원리를 실제에 적용할 때면 무한히 많은 변수가 있음도 사실이다.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태도는 식물을 기르는 정원사의 태도와 같은 것이며, 사회발전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조가 움직여나가는 방향을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무조건 자유방임주의와 일치시키는 것은 오류다.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법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경제학자에서 사상가로
이상에서 살펴본 하이에크 사상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수 있다. 하나는 자유와 자유경제가 무엇이며, 다른 하나는 스태그플레이션(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공존하는 현상)을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처음 순수경제학에서 출발하여 곧 정치학법학사회학철학 등 인접 사회과학으로 그의 관심을 확대심화시켰으며, 현대의 영지??를 대표하는 철인적 지도자 로 평가되고 있다.
독자적 세계 구축
이제 우리는 모두 하이에크 학파 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미국의 신경제 법학이나 신경제 학자들도 공급 경제학 이나 작은 정부론을 내세우면서 모두 하이에크에게서 자유와 스태그플레이션을 배웠다. 그의 자유는 신 자유주의에서 우러나오며 스테그플레이션 대책은 케인스 비판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이 모두 하나가 커다란 하이에크 세계에 바탕을 두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의 사상을 간혹 자유주의자의 진부한 생각 정도로,또는 자유주의적 반동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의 비판의 대상이었던 사회주의자 케인스조차도 하이에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실토할 정도로 깊은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알면 알수록 외경의 마음을 갖게한다고 한다.
자유주의 경제
그의 자유는 법의 지배하에서만 존재하는 하나의 사회질서이며, 사회 내부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자발적 질서로서의 자유를 말하기 때문에, 각자가 처한 역사적, 사회적 전제조건을 깊이 음미하고 자기 환경에 맞는 자유주의 사회와 자유주의 경제를 구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자유주의 경제는 교과서적인 추상적 자유경제의 사회 경제가 아니라, 그 사회 특유의 자발적 시장경제가 개개인의 지식을 가장 잘 종합할 때 생기는 역사적 특징을 지닌 경제를 말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경제를 통해서만 노예에의 길에서 벗어날수 있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경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믿고 있다. 이 책의 중심적인 명제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라는 정치체제를 낳게 한 것이 계획경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이들은 모두 국가 사회주의라는 특수한 형태를 띠었지만, 어디까지나 사회주의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경제에 있어 중앙집권적 계획화가 확대될수록 그 국가의 정치체제가 틀림없이 전체주의화되어간다고 보고, 복지국가도 이러한 맥락으로 비판하고 있다.
현대 경제학에 경종
그는 (예종에의 길) 이후 여러 저서를 통해 칼 포퍼의 (단편적 사회공학)을 발전시키고, (전체와 개체)(사회적 다위니즘)(사회의 의인화)등을 논하면서 신자유주의 사상을 전재해가고 있다. 특히 근래에 발표된 (법,입법 및 자유)는 문자 그대로 하이에크의 걸작으로,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니고 야경국가주의도 아니며, 과학혁명과 시민혁명이 밑바탕이 된 질서 자유주의 라고 말하면서 자유를 하나의 사회적 질서, 또 자유는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없거나 그것을 육성, 추진하는 정책적 틀을 확립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하이에크의 지적 발단단계에서 볼 때 이 책은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그 이후 그는 화폐적 경기 변동론보다는 자유의 조건을 규정하고 인간사에서 작용할 수 있는 강제력을 최소화시키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요인이 감소된 제도를 연구하는 데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케인스 경제학 비판뿐만 아니라 수학과 증명만을 중시하는 현대 경제학자에게도 충격적인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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