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옥중수고 (Quaderni del carcere) -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그람시가 옥중에서 1929년부터 1935년 사이에 쓴 글들을 모은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가장 창의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저작의 하나다. 외부로부터의 차단, 가혹한 감시, 자신의 건강상태 악화라는 극한상황 속에서 그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실천활동인 지적 탐구를 계속해간 그람시의 글들은 그후 출간되어 현재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단했던 혁명가의 삶
잠시 타오르는 불꽃처럼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당주역, 또 훗날 유로코뮤니즘이라는 새로운 마르크시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창조적 사상가로서, 이른바 전쟁중에 활동한 유럽 공산주의 이론가 중 가장 두드러진 봉우리를 이룬다. 생애를 통하여 그를 지배했던 일관된 관념인 혁명운동은 노동자의 일상생활과 함께 시작해야 된다는 생각이었으며, 이 점에서 전체성의 개념을 강조한 루카치와 맥이 통한다. 그람시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하여 실로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으나,무엇보다 가장 치열한 초점은 선진 자본주의 내의 혁명과정에 맞춰졌으며 여기서 특히 이념적 투쟁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된다. 그람시의 생애는 대체로 4기로 나뉜다. 제1기인 1918년까지의 그의 생애는 이탈리아 사회원(PSI)의 당원으로서 전통적 마르크시즘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사고를 성숙시키는 시기였다. 제2기는 1919~1920년간에 걸친 이른바 붉은 해 (red year)의 시기로서 튜린 시 공장위원회운동을 주도하며 (신질서) 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다음 1921년 말부터 26년에이르는 제3기는 그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건한 후 그 주역의 한 사람으로서 당의 정책노선을 설정하고 코민테른과의 교섭에 바빴던 시기다. 다음 제4기는 1926년부터 37년 그의 죽음에 이르는 시기로서 옥중에서 어려움을 맛보며 그의 사상을 (옥중수고)에 옮겨 적는다. 그의 주저이자 네오 마르크시즘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이 책은 이렇듯 그의 생활체험과 사상적 편력을 집약한 노작이다.
(옥중수고)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논의에 앞서 튜린에서의 공장위원회 운동에 투신하던 그 당시까지의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1891년 이탈리아에서도 매우 낙후된 지역의 하나인 사르드니아에서 유복한 집안 출신의 어머니와 말단 공무원으로 있던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가 3살 되던 해 우연한 사고로 꼽추가 되었고, 키도 작아 152cm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공금횡령죄로 감옥에 잡혀가는 불행이 겹쳐 외롭고 불우한 소년기를 보낸다. 허약한 몸, 가난한 집안형편 등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그는 놀라운 정열로 독서에 열중했고, 튜린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다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가입한다. 이어 1916년 당기관지인 <전진>의 편집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정치세계에 투신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그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서서히 대두되는 공장운영회 운동에 모든 정열을 불사른다. 당시 전후 이탈리아의 경제적 상황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특히 노동자을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으므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기존의 노동조합에 불신을 표명했다. 그의 눈에 비친 노동조합은 관료적이며 엘리트 중심적일 뿐만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틀 속에서 움직이는 비혁명적 조직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혁명적 전환을 꾀하려는 그로서는 그 대신에 공장위원회를 중심개념으로 잡았다.
위원회의 주된 과제는 노동자 대중의 의존적 태도를 보다 주체적 입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이 교육을 통해 행정적, 기술적 기능을 비축하고 진정으로 생산과정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새로운 노동자 국가의 토대가 마련된다고 그는 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람시는 공장위원회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축소판으로 인식한 것이었다. 그가 공장위원회 개념에 심취한 것은 실제로 이 조직 속에서 러시아 소비에트의 이상화된 모습을 찾고자 한 것이었으나, 러시아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소비에트의 권력이 약화되는 것을 뒤늦게 알면서부터 점차 당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1920년 말 튜린의 위원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점차 파시즘의 위협이 높아지자 그는 오랫동안 몸 담았던 사회당을 떠나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 창건의 주역이 된다. 1922년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고 독재정치를 강화하면서 이탈리아 공산당은 탄압의 표적이 되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당은 그에게 망명을 권유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는 최악의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지도자는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회의원인 자신까지 체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소 안이한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어 20년의 형을 언도받았다. "우리는 이 녀석의 뇌가 작동하는 것을 20년 동안 중지시켜야 한다." 담당 검사의 말이었다. 1929년부터 그는 (옥중수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1935년 감옥에서 로마의 퀴시사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의 생명을 구하기엔 너무 늦어 1947년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극한상황에서 집필된 옥중서신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살면서도 나는 무언가 몰입할 수 있고, 자신의 내적인 삶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어떤 영원한 것을 쓰고자 한다."
그는 감옥에서 처형에세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주저인 (옥중수고)는 1929년부터 1936년에 이르는 동안 옥중에서 씌어진 것으로, 이 글에는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 집필된 원고여서 전체적인 완결성이 부족하고 생략된 부분이 적지 않으며, 내용 또한 모호한 부분이 많아 해석에 어려움이 따른다. 내용이 애매한 것은 검열의 어려음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풀이된다. 이 책의 주요한 주제는 지식인의 역할, 헤게모니의 개념, 동서의 상이한 혁명전략으로 집약된다.
지식인
그람시의 사상에 있어서 지식인의 역할은 항상 중핵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종종 상부구조의 이론가로 불린다. 마르크스가 지식인의 개념을 수공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에 준거하여 협의로 정의하는 전통적 입장을 취하는 데 반하여, 그람시는 이 개념을 보다 폭넓게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개개의 사회계급은 그 자체로서 유기적으로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지식계층을 창출하는데, 이에 의해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영역에서 계급의 동질성이 공고해지며 계급의식 또한 투철해진다." 고 설명한다. 좀더 부연하면 그는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을 구별한다. 전자는 스스로 사회계급과 무관하며 사회정치적 변동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역사적 계속성을 체화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부류로서, 문필가, 예술가, 철학자, 성직자 등을 일컫는다. 이들 전통적 지식인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산물인 데 반하여, 유기적 지식인은 보다 사회학적인 측면으로 이해된다. 어떤 지식인이 얼마나 유기적인가를 측정하는 척도는 그가 속한 조직이 그 조직이 대표하는 사회계급과 얼마나 가깝게 연계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유기적인 지식인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제영역에서 그들 계급의 집단적 의식을 표명하는 존재인 것이다. 다음 그람시의 관심은 노동계급이 그들 자신의 지식인을 생산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그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이른바 성공적인 혁명운동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유기적인 지식인과 그들의 계급과의 관계는 변증법적인 것으로, 전자는 노동계급의 체험으로부터 그 자산을 얻어내는 동시에 후자에게 이론적 의식을 심어준다. 프롤레타리아의 경우 유기적 지식인의 형성은 부르주아 계급에 비하여 매우 불리하다. 때문에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가 정말로 그 자신의 지식인을 생산해내는 시기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이후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에게 당은 계급과 가장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지식인의 조직이며, 따라서 집단적 지식인의 의미를 가진다. 당은 그 안에서 집단적 의지가 구체적 형태로 옮겨지는 유기체이자 사회의 복합적인 한 요소로 이해된다.
헤게모니 개념
그에 의하면 지식인의 주된 기능의 하나는 이념의 정당화 작업을 통하여 그들의 계급이 전체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 유지하도록 유도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는 헤게모니의 개념을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다른 모든 세력, 특히 농민세력에 대하여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어 이들을 내적 갈등이 없는 동질적인 정치경제적 역사적 블럭으로 결집시키는 과정으로 활용한다. 이에 따라 경제적, 사회적 내지 이념적 제세력들이 사회변혁을 위한 잠정적 통일체와 연결이 되는 이른바 역사적 블럭은 그람시에 있어 가장 의미있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그에 있어 역사적 블럭은 단순한 연합전선의 의미 이상의 것으로 이때 지배집단은 구체적으로 추종집단의 일반이익과 조정을 꾀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그람시는 헤게모니의 개념을 광의로 해석하여 지배계급이 그들의 군림을 위해 추종집단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을 그 안에 포함시킨다.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지배계급의 세계관이 지식인에 의하여 크게 확산되어 전체 사회에 상식화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는 헤게모니의 개념을 통하여 서방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속에서 자본주의가 계속 살아남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왔다. 그는 이들 세계에서 힘과 동의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헤게모니가 유지되는 현상에 유의하며, 부르주아 언론기관(신문이나 결사체)을 통하여 문화적 헤게모니를 계속 행사하는 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설파한다. 부르주아가 어떻게 강제력 대신에 동의를 바탕으로 그들의 지배를 영속화시킬 수 있는지 그는 분명 이 문제에 대하여 정밀한 분석을 꾀한 최초의 마르크시즘 이론가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전통적 마르크시즘에 내재하는 경제결정론에 대하여 회의를 표명하며, 노동계급의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의 반 헤게모니 구축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특히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경시하는 레닌주의적 전략은 서방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통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당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려고 꾀하기 전에 스스로의 주된 역할을 교육기관으로 규정하고, 교육을 통하여 시민사회의 여러 영역에 반문화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시민사회 내의 헤게모니를 손에 넣지 않고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실로 무모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람시가 강제력을 전혀 경시한 것은 아니나, 그는 어디까지나 그것이 시민사회 내의 헤게모니에 의한 투쟁과 변증법적으로 연계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동서의 혁명전략
그람시는 동서간의 상이한 혁명전략을 비교하며 기동전과 진지전을 그예로 삼는다.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에 적용할 수 있는 혁명전략은 진지전이며, 기동전은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에 한하여 사용될 수 있다고 설명된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 관한 팜플렛을 통하여 서방세계에서 이론적으로 기동전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 것은 잘못이라고 공박한다. 경제적 위기가 혁명으로 치닫는 일반적 위기를 창출할 것으로 판단한 그녀의 관점을그는 경제결론적이며 자연발생적 관점이라고 공박한다. 더욱이 그는 러시아에서 성공한 레닌의 기동전 전략을 서방세계까지 보편화시키려는 시도는 오류라고 설명한다. 그는 기동전과 진지전간의 차이와 연관하여 유기적 위기와 국면적 위기간의 개념분화를 시도한다. 예컨대 기존의 지배계급이 장기간 치유불가능한 구조적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경우, 즉 유기적 위기의 상황이 존재하는 경우에 한하여 기동전은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국면적 위기상황에 몰입되는 서방 선진 산업사회의 경우 기동전은 고려될 수 없으며, 참호 속에서 장기전을 펴는 진지전만이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노동자 계급의 헤게모니적 계급 상승
이 책에는 통일국가 형성까지의 이탈리아 역사에서 지식인이 한 역할을 고찰하고 부르주아 지배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여러 철학을 비판하며,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적 세계관, 피착취 계급의 의식 속에서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대항해서 그에 대치될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려는 그람시의 사상이 담겨 있다. 여기서 제시된 그람시의 지식인관, 헤게모니 개념 및 진지전의 전략은 이후 서구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의 지적 유산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공산당이 기독교 민주당과의 화해를 꾀한 1972년의 이른바 역사적 화해 의 이론적 바탕이기도 하다. 그의 영향은 특히 모든 유로코뮤니즘의 이론가들에세 결정적 영향을 미쳐 스페인 공산당 당수인 카릴리오에 의하여 1978년 출간된 (유로코뮤니즘과 국가)의 내용 또한 그 본질적 맥락에서는 그람시의 (옥중수고)의 재판에 불과한 것이다. 몇 년 전, 국가보안법이 젊은 자유와 이성을 구속하는 포승줄로 작용할 때만 해도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모택동의 (실천론) 등과 함께 금서의 목록에 끼어 있었다. 실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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