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자살론(Le Suicide) - 뒤르켐(1858~1917)
<사회적 사실>을 사회학의 연구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콩트가 창시한 사회학의 학문적 기초를 확립한 뒤르켐이 사회학을 하나의 완전한 학문으로 만들려는 생각에서 쓴 책. 그는 1897년 출판된 이 사회학의 고전에서 공식적 통계에 입각해 <자살>이라는 현상은 개인의 <심리적 요인>이 아닌 그가 속한 <사회적 현상>에 그 원인이 있다고 밝혀냈고, 이 과정에서 그가 구사했던 엄밀한 과학적 방법은 오늘날 사회과학자들에게는 하나의 모델로 간주되고 있다.
고난 속의 유태인 출신 사회학자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켐은 프랑스에서도 민족주의 감정이 가장 강한 로렌 지방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동부지방과 독일 사이의 적대감이 높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유태인 특유의 공동체의식을 키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랍인들에 의해 그들의 고향에서 밀려난 유태인들은 2천 년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깊은 신앙심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결속하여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그리고 아인슈타인, 카프카 등 많은 위대한 인물들을 배출해냈다. 엄격한 청년으로 자란 그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하고 1887년 보르도 대학의 사회학 교수가 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가 여행의 경험이 거의 없고 현지조사를 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세계 여러 곳을 조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확실한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사실이란 여러 유형과 법칙으로 종합되지 않는 한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의 본격적인 사회학적인 사상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사회 분업론>과 <자살론>에서 나타났다. 이어서 <사회학적 방법의 규준>을 통해 명성과 영향력을 얻었으나, 새로운 학문인 사회학의 출현에 대해 보수적인 철학자들은 이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는 이를 감수해야만 했다. 또한 반유태주의에 편승하여 그 당시에 일어났던 드레퓌스 사건(독일을 위해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유태인 장교 드레퓌스를 고발한 사건)과 이 사건에 관한 유태인에 대한 비방을 보고 그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나 드레퓌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구명운동에 적극 가담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프랑스 학술회원의 대열에 끼지 못했다.
1902년에는 소르본(파리) 대학으로 옮겨 <교육학과 사회학>을 강의했으며, 이후 17년간 재직했다. 그는 교육과 종교를 통해 인간성을 개조하고 새로운 사회제도를 만들고자 동분서주했는데, 그의 동료들은 그의 이러한 교육개혁에 대한 열정에 탄복했다 한다. 그 뒤 1차대전에 참전했던 외아들이 발칸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는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국수주의자들로부터 <외국학문을 가르치는 유태인교수>라는 모욕을 당하자 더이상 삶의 의욕을 잃고 실의 속에 삶을 마쳤다. 그는 훌륭한 제자들을 유산으로 남겼으나 결코 제자들에게 군림한 적이 없으며, 언제나 제자들에게 자기를 앞서가도록, 그리고 필요하면 반대의견을 가지도록 배려했다. 이로 인해 그의 조카인 마르스 모스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가 되었고, 같은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레비-스트로스는 그와 다른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자살의 원인에 대한 2가지 관점
우리는 지난 시절 반민주적인 체제에 대항하는 젊은 학생들의 고귀한 생명이 한송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쓰러지는 현실을 경험했다. 도저히 개선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어두운 현실에 그들은 분신자살, 투신자살, 할복자살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불의를 고발했다. 그리고 요즈음은 <공부 압박감>으로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사회문제화되고 있다. 우리도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자살의 충동을 느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 이래 자살의 문제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그 결과는 크게 두 견해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자살을 찬미하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비판하는 그룹이다. 전자의 대표자는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다. 그러나 대체로는 자살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자살을 하는 것일까? 이 분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하나는 마음에 비정상적이어서 자살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이 사람을 자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전자는 자살의 원인을 자살자 개인의 <심리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후자는 환경과 사회구조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사회학적> 측면에 중점을 둔 것이다.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살의 원인은 어느 한 가지만이 아닌, 심리적 요인과 사회학적 요인의 복합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제 자살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던 뒤르켐은 자살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자살의 사회적 원인 주장
일반적으로 사회학 분야의 고전을 2권을 들라면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뒤르켐의 <자살론>이 많이 거론된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저자인 쿤은 <자살론>을 <사회학에서의 패러다임적 저작>으로 평가했다. 자살론은 크게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자살의 원인을 비사회적인 것에서 찾는 <비사회적 요인>, 제2부는 자살의 원인을 사회적인 측면에서 찾아보는 <사회적 원인과 사회적 유형>, 제3부는 <사회적 현상으로서 자살의 일반적 성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사회적 요인
먼저 서문에서 저자는 자살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과 따라서 사회학의 중요한 연구대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론에서는 "자살이란 피해자 자신에 의해서 행해지는 지속적 또는 소극적 행위의 결과로서,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죽음"이라고 자살의 정의를 밝힌다. 그런 다음 제1부에서 자살에 대한 <비사회적 요인들>을 검토하고 있다. 자살은 개별적 현상인가? 자살의 원인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자살은 개인의 심리적경제적 고통 때문에 발생하는 개별적인 현상으로 이해되어왔다. 즉, 개인의 기질성격정신질환가정불화가난 등이 자살의 주요 원인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전체로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특성을 갖는다. 자살률을 국가별로 보면 그 결과가 일반인의 통념과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정신질환의 발생률이 가장 높은 곳에서 오히려 자살률이 낮고, 가난했던 지난 시절에 비해 풍요로운 현대에 올수록 자살률이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19세기 유럽 각국의 자세한 자살요인 통계(정신질환, 환경요인, 결혼, 직업, 종교)를 살펴보면 이 모든 요인을 포괄하는 독특한 실체로서 사회적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자살은 개인들로 구성되는 사회집단의 통합과 유대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자살의 현상은 개인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한 사회의 자살의 현상은 사회적 사실로서 사회통합이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해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사회적 요인
사회는 단순한 개인의 집합이상의 실체로 모든 사회현상은 사회적 사실로서 다루어져야 하며, 사회적 사실이란 개인의 단위를 초월한 행위양식 및 사고방식으로서 개인에 대한 일정한 규제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와 자살률의 관계는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우선 종교를 통해 개인이 집단생활에 긴밀히 통합되는 카톨릭 교도들 사이에는 자살률이 낮으며, 반대로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가운데는 자살률이 높다. 또한 가족간의 친밀도가 높은 경우 자살률이 낮으며 가족이 와해된 경우 자살률이 높다. 국가와 정치사회에 있어서도 사회통합이 강조되고 개인의 사회생활에의 참여가 활발해지는 사회에는 오히려 자살률이 감소되고 있음을 통계자료는 입증한다. 이에 따라 자살은 개별적인 이유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요인인 사회통합도와 자살률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고 그 관계는 밝혀져야 할 주요한 과제로 된다. 그러면 자살의 형태는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기본적 유형으로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등이 있고 이외에 숙명적 자살이 있다.
이기적 자살
이기적 자살은 개인의 사회에의 통합이 약화될 때 나타난다. 집합적인 힘이 개인을 규제하고 있을 때는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사회적 공동목표에 일차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집단에서의 통합도가 약해지면 개인은 집단 또는 사회에 무관심해지고 사회적 자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개인의 자아를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이 같은 지나친 개인주의로 인한자살이 이기적인 자살이다.
이타적 자살
반면 이타적 자살은 개인의 사회에의 통합정도가 지나치게 높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면 여자는 그의 남편이 죽으면 의례적인 자살을 행해야 한다는 인도의 전통종교의 규범적 요구나, 일본무사들의 할복자살의 경우처럼 개인이 사회의 요구에 너무나 강하게 밀착되어 있어서 규범이 요구할 경우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경우이다. 쉽게 표현하면 종교적정치적 집단처럼 보다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해서 개인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는 자살의 형태를 말한다.
아노미적 자살
아노미(Anomie)란 개인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붕괴되어 개인의 욕구가 공동의 규범에 의해 규제되지 못하고, 개개인이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도덕적인 지침을 갖지 못하게 된 일종의 무규범 상태를 말한다. 아노미적 자살은 개인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약화될 때 일어난다. 이러한 예는 사업이 망해 갑자기 가난해진 대부호나 갑자기 부자가 된 졸부가 자신의 기존 생활양식과 가치규범에 혼란이 발생하는 경우나, 이혼 등에 의한 결혼생활의 아노미로 발생하는 자살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아노미 상태는 급격하게 산업화되고 가치관이 전도되는 19세기 유럽의 일반적인 사회적 징후로서 당시 자살의 가장 주된 원인이기도 했다. 자살은 이와 같이 지나친 개인화로 인해 사회통합이 약화된 경우는 물론 사회통합이 너무 강력하여 개인의 영역이 축소되어버리는 경우에 모두 발생한다. 또한 사회적 변화로 인한 집합의식 및 규범의 상실도 자살의 주요 요소이다.
<직업집단>에 대한 희망
그러면 사회는 자살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자살은 비정상적인 상태이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와 유럽에서 자살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유럽 사회가 동류성에 기초한 기계적 유대를 상실한 채 새로운 유기적 연대에 의한 사회통합을 달성하지 못한 <과도기적 혼란상태>였기 때문이다. 자살의 방지를 위해서는 생의 본래 목적과 지향성의 회복, 특히 사회집단의 건전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같은 기능을 위해 개인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정치, 종교, 가족, 집단 등은 적절치 않다. 새로운 유대에 기초한 집단통합은 현대사회의 경우 <직업집단>을 통하여, 즉 이해관계에 기초한 자발적 결사를 통하여 달성되는 것이 현실적이며 올바른 도덕교육을 통한 도덕성의 회복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자살과 사회와의 관계를 규명한 고전
자살의 이유를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찾지 않고 <사회적 원인>에서 찾으려 한 그의 노력은 획기적인 업적으로, 그 이후의 연구들이 이 연구를 크게 앞서가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그가 사회통합이라는 사회적 요인으로 자살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개인적 요인을 경시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문명화될수록 도덕이 붕괴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그가 자살의 원인을 밝혀 병든 현대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증가하는 자살문제를 해결하고 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저자가 제시한 대안, 즉 토크빌의 <자발적 결사체>의 영향을 받은 배경과 문화와 직업이 유사한 <직업집단> 역시 당시로서는 신선한 것이었다. 이 저서를 통해 그가 평가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엄밀한 과학적 방법론이다. 그는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하여 오늘날에도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다.그리고 사회적 사실을 사회학의 연구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사회학이 심리학이나 형이상학으로부터 독립되어 독자적인 학문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물론 그가 사회적 사실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고 개인의 심리적 과정을 소흘히 한 경향은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파슨스를 비롯한 현대 구조기능주의(사회구성 부분들의 균형과 통합을 통해 안정된 체계로 파악하는 이론)사회학에 대해서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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