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스물한 가지 위변 - 천하
알에 털이 있다. 닭은 발이 세 개다. 영에 천하가 있다. 개를 양이라 할 수 있다. 말은 알을 낳는다. 개구리는 꼬리가 있다. 불은 열이 없다. 산은 입에서 나온다. 수레바퀴는 땅에 닿지 않는다. 눈은 보지 않는다. 손가락은 닿지 않고, 닿으면 안 떨어진다. 거북은 뱀보다 길다. 곡척으로 모를 그릴 수 없고, 그림쇠로 원을 그릴 수 없다. 구멍은 자루에 맞지 않는다. 나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화살에는 정지된 시간이 있다. 구는 견이 아니다. 누런 말과 검은 소는 셋이다. 흰 개는 검다. 어미 없는 망아지는 어미가 있은 적이 없다. 한 자짜리 지팡이를 하루에 반씩 자르면 만세가 지나도 다 잘라낼 수가 없다.
변자들은 이를 혜시와 서로 주고받으며 종신토록 그칠 줄을 몰랐다. 환단*이나 공손용도 변자의 무리로서, 사람의 마을을 꾸미고 사람의 뜻을 바꾸어놓았다. 사람의 입은 이길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는 없으니, 이것이 곧 변자의 한계이다. 혜시도 날마다 그 지혜로써 이들과 변론했으나, 특별히 천하의 변자들과 더불어 괴상한 짓을 한 데 불과했다. 이것이 그 개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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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시를 비롯한 여러 논리학자들의 궤변에 이런 것이 있다.
알에 털이 있다. 시간이란 본래 무한하다는 입장에서 볼 때 알에서 새가 되기까지의 시간은 무시된 것이다. 닭은 발이 셋 있다. 인식은 대상과 개념에 의해 성립되게 마련이다. '닭의 발'이라는 단독 개념 하나와 구체적 대상인 발 둘을 합해 닭의 발은 셋이 된다. 영(초나라의 서울)에 천하가 있다. 무한한 공간에서는 천하 역시 무와 같으니, 따라서 천하는 영에 있다. 개는 양이다. 개와 양은 모두 네 발 달린 짐승이기 때문이다. 말은 알을 낳는다. 태생 동물인 말이나 난생 동물인 새나 다 같이 동물이다. 개구리는 꼬리가 있다. 올챙이에 꼬리가 있기 때문이다. 불은 열이 없다. 불이 뜨겁다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것일 뿐, 불 자체의 성질은 아니다.
산은 입에서 나온다. 산은 거대하지만, 그 이름은 입으로 말할 수 있다. 수레바퀴는 땅에 닿지 않는다. 달리는 수레바퀴와 땅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눈은 보지 않는다. 대상이 있기에 볼 뿐, 단독으로 볼 수는 없다. 손가락은 닿지 않고 닿으면 안 떨어진다. 손가락이 어떤 물건에 완전히 닿았다면 그 순간 떨어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거북은 뱀보다 길다. 무한한 공간에서는 뱀도 짧은 것이다. 곡척으로 모를 그릴 수 없고, 그림쇠로 원을 그릴 수 없다. 절대적인 의미의 사각형이나 원은 있을 수 없다. 구멍은 자루에 맞지 않는다. 조금의 차이라도 있게 마련이다. 나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은 무한히 쪼갤 수 있으며, 새의 그림자 역시 그 쪼개진 시간시간마다 정지된 상태이다. 나의 화살에는 정지된 시간이 있다. 화살이 나는 거리는 쪼개지며, 또 그대로 볼 수도 있다. 구는 견이 아니다. 용어가 다르다. 누런 말과 검은 소는 셋이다. 누런 말과 검은 소는 같은 동물로서 한 개념을 이루므로 한데 합치면 셋이 된다. 흰 개는 검다. 흰 빛과 검은 빛은 다르지만 빛깔인 점에서는 같다. 어미 없는 망아지는 어미가 있은 적이 없다. 시간을 쪼개서 현재만 생각한 것이고, 또 '어미 잃은 망아지'와 '망아지'는 그 용어가 다르다. 한 자짜리 지팡이를 하루에 반씩 잘라내면 영구히 해도 다 잘라낼 수 없다. 무한소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학자들은 혜시와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끝낼 줄울 몰랐다. 환단과 공손용 같은 궤변론자들은 이런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꾸미고 경박하게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론으로 남을 제압할 수는 있었지만, 마음으로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혜시 또한 자기의 지혜를 다해 이들과 논쟁했으나 천하의 궤변론자들과 마찬가지로 괴상한 이론을 판해 성립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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