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제1부 서양 문학의 흐름과 고전
제1장 서양문학의 흐름과 고전
중세문학
암흑기의 중세문학은 라틴 어 문학과 각국어(속어) 문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라틴 어는 지식인의 공통어로서 교회의 기도설교대학강의 저술 등에 사용되었다. 각국어는 당시 라틴 어에 대해 속어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유럽 인구가 지역적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일반대중은 라틴 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호소하는 문학은 대중들이 사용하는 일상용어로 씌어져야만 했다.
라틴문학
라틴문학은 한마디로 성직자에 의해 씌어진 기독교 계통의 문학이다. 그래서 소설이나 설화와 같은 순수한 문예작품보다는 교회 역사서간 등에 관한 종교적이고 공식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독창적이지 못했다. 파리대학 교수였던 아벨라르와 그의 애인 엘로이즈 사이의 <왕복서신>,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그린 <작은 꽃>, 왕자들의 일화를 모은 <황금전설>등이 여기에 속한다.
속어문학
라틴문학에 비해서 속어문학은 그 주제의 다양성에 비추어 중세의 대중에게 크게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중세의 속어문학은 대체로 세 집단, 즉 기사문학, 도시민의 문학, 일반서민문학으로 구분되어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기사문학이 그 주제, 내용, 형식에 있어서 가장 풍부하여 중세문학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기사문학은 귀족들의 취향에 맞게 작품화되었는데, 그 형식은 <영웅서사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영웅서사시의 대표작으로는 영국의 <베어울프> <아서 왕의 이야기>, 독일의 <힐데브란트의 노래> <니벨룽겐의 노래>,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등이 있다. 이중 <아서 왕의 이야기>는 6세기 무렵 켈트 족의 전설적인 왕 아서 (Arthur)와 원탁기사단의 활약상에 관한 이야기다.
전설에 의하면 아서 왕은 브리튼 왕인 아버지가 마법사의 도움으로 귀부인과 동침해서 태어난 아이다. 젊어서 브리튼 왕이 된 아서는 보검 엑스탤리버를 얻어 이 칼로 여러 나라를 평정한다. 그는 귀족의 딸 기네비아를 왕비로 삼고 왕비를 조카인 모드레드에게 맡긴 채, 로마 원정을 떠났다. 그러자 조카는 그의 부재중 왕위와 왕비를 빼앗았다. 아서는 원정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모드레드를 처단했으나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 불가사의한 섬 애벌론으로 떠난다.
이것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여기에 원탁의 기사단 150명의 건국 이야기와 그들의 활약과 사랑,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하고 아리마태아 요셉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았다는 잔인 성배의 행방을 탐색하는 이야기 등 여러 전설을 총칭해서 아서 왕의 전설이라 하는데, 이 전설을 소재로 수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대표적 무훈시 <롤랑의 노래>는 스페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샤를마뉴 대제의 조카이며 지휘관인 롤랑이 피레네 산중에서 사라센 군에게 포위되어 장렬하게 전사하고 샤를마뉴 대제가 이를 복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일의 대표적인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주인공 지그프리트의 죽음, 후반부에서는 그의 부인인 크림힐트의 복수를 다루고 있다. 괴테는 이 작품을 <<이 시는 국민이 어느 정도의 교양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없어서는 안될 작품>>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리고 초서,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같은 몇몇 위대한 시인들과 작가들은 중세의 말기에 출현하여 중세사회를 탁월하게 해설함과 동시에 르네상스 문학의 주제와 형식을 암시했다.
르네상스 시대
1453년 터키가 그리스 문명의 마지막 보고인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필사본을 들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피신했는데, 이들에 의해 고대문화가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재생>이라는 의미의 르네상스 (Renaissance)는 그리스, 로마의 원전을 통해 고대정신, 즉 중세의 신학에 눌려 있던 인간성에 바탕을 둔 학문과 예술의 부흥을 의미한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사상적 측면은 <휴머니즘>으로, 이는 좁은 의미로는 그리스로마의 고전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는 운동이며, 넓은 의미로는 현세의 인간사 및 지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깨우치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인간성을 고양하면서 세속생활을 강조하고 개성을 표현하며 비판정신을 기르는 경향이었다. 이러한 고대정신을 이어받은 르네상스가 질서와 균형을 미학의 원리로 삼는 고전주의로의 길을 열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중세적 종교관과 우주관을 극복하고 학문 전분야에 <인간> 중심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이 르네상스는 그 본류를 이탈리아에서 찾고 있다.
이탈리아
그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고도로 발달한 그리스의 인적물적 유산이 로마로 흘러들어 오면서 문예중흥의 분위기가 성숙되고, 여기에 문예를 숭상하는 메디치 가의 집권, 사회적으로 자본을 축적한 상공인들의 득세, 문화적으로 높은 교양과 학식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의 정열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태동을 알리는 첫 작품이 단테의 <신곡>이다. 단테는 중세의 모든 학문을 총괄하고 그리스의 호메로스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가 쌓은 장편 서사시의 전통을 계승하여 불멸의 고전 <신곡>을 저술했다. 아직 중세적인 신앙의 굴레를 완전히 벗지 못한 <신곡>은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려는 인간적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연옥에서 죽은 자들과의 만남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인간의 세속적 희망을 보게 한다. 단테는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 곳이 천국임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의 마지막 보루는 여전히 종교적신앙이었기 때문에 단테를 완전한 인문주의자로 평가하는 데는 무리가 있어 그를 <최후의 중세인>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단테의 이러한 중세적 분위기를 벗어던진 사람이 <최초의 근대인>으로 평가되는 페트라르카이다. 그는 중세적인 문화를 철저히 배격하고 고대의 발견을 통한 인간중심 사상을 학문연구의 바탕으로 삼았다. 젊은 시절부터 베르길리우스나 키케로를 탐독하면서 이탈리아 어로 아름다운 서정시를 써서 사람과 자연을 노래했다. 그는 그의 애인인 라우라에게 보낸 많은 서정시들을 담은 <칸초니에레>를 남기고 있는데 인간적인 사랑과 고독, 삶과 죽음 등 국민 대중의 정서를 담은 노래로 천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카치오도 역시 고대문학 탐구에 열정을 보인 휴머니스트로 산문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당시 지식인의 덕목인 고전연구를 통해서 높은 교양을 쌓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탐구에 몰두했다. 그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삶을 사랑해야 하며 삶을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정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인간의 현세적인 삶을 중시한 태도로 인생에 대한 올바른 성찰과 이해, 나아가 몽테뉴적인 <삶의 지혜>에 대한 촉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은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지배했던 당시의 전통에 비추어볼 때 세속적이고 이단적이었다. 특히 <데카메론>은 전통적인 중세적 종교관을 외면하고 세속적 의미를 부여한 근대소설의 시조였다. 그런 의미에서 단테의 <신곡>을 <신적인 희곡>으로 부르고,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인간적인 희곡>, 즉 <인곡>으로 부른다.
프랑스
이렇게 찬란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프랑스다. 그리스의 문학예술이 로마를 거쳐 이탈리아에 전수되고 이어 프랑스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인들은 이탈리아에 활짝 핀 문학과 예술, 풍요로운 삶등 고대문화의 향기에 심취했다. 더욱이 프랑수아 1세가 세운 <왕립학사원>에는 신학문에 매료된 젊은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고전을 연구하기에 이르렀고, 이탈리아처럼 라틴어와 그리스 어를 배우는 것이 학자들의 덕목이자 교양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프랑스 휴머니즘의 기수 라블레는 의학을 공부한 수도 성직자로서 고전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전국을 누비며 다양한 경험과 교양을 쌓고 견문을 넓혔다. 그는 단순한 학자나 의사가 아니라 모든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휴머니스트로서 예리한 비판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의 개혁정신이 더욱 빛나는 것은 현학적인 공허한 논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낙천적인 미래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 및 동료들의 모험을 다룬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이야기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는 사회풍자 작품을 남겼다. 작품이 외설스럽고 반 종교적이라 하여 이 작품은 금서가 되기도 했고 작가는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햇다. 한편 인간 본래의 모습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은 기존의 전통과 마찰이 불가피했는데, 그 충돌이 정치적으로시민혁명과 농민전쟁이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는 종교전쟁이었다. 결국 승리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휴머니스트들에게 돌아갔지만 이에 따른 정신적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16세기의 정신적 위기상황에 인간의 양식을 믿은 지혜로운 철학자 몽테뉴의 출현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의 위대한 사상은 휴머니스트들의 지나친 독단과 편견, 그리고 중세적인 봉건적 사고방식 모두에 대한 현명한 판단과 처방이었다. 휴머니즘의 철학적 성찰의 원천을 고대에서 찾은 그는 정치와 종교에 예속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개체,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인간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
3권으로 된 그의 <수상록>은 인생과 철학윤리에 대한 깊은 명상과 삶에 대한 사색으로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그려나가고 있다. 개인적인 독서로 보편적인 진리를 더듬어나가는 그의 삶의 태도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자문 속에 함축되어 있다. 라블레로부터 시작된 프랑스 휴머니즘이 때로는 황당무계한 거인들이 철갑을 둘러친 봉건영주의 성곽과 교회를 신나게 두드려 부수는 일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으나, 이 같은 과격함에 자성과 자제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 몽테뉴다. 그는 이러한 무모한 행동보다는 삶의 진정한의미를 찾는 지혜를 인생의 덕목으로 삼았다.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지혜, 그 예지가 그가 말하는 <삶의 기술>이다. 이렇게 절제된 정신적 분위기는 16세기를 극복하고 고전주의로 향하게 하는 힘이 된다.
영국
영국의 르네상스는 프랑스와는 달리 이탈리아와의 간접적인 관계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와는 지리적으로 격리된 상태였고, 5세기경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에 따라 독일문학의 영향이 더 컸다. 영국 르네상스의 선구자 초서는 <데카메론>의 영향을 받아 <캔터베리 이야기>를 남겼다. 켄터베리 대성당 안의 성지를 참배하는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순례자 집단에는 왕과 거지를 제외한 중세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당시 사람들의 가치, 풍속, 습관 등을 자세히 보여주는 한편 그들에게 살아서 숨쉬는 성격을 부여했다. 세계문학사에 우뚝 선 셰익스피어의 출현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문학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그의 연극은 사실 근대적인 극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 고전주의 문학에서 다루는 것도 무방하다. 그는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 내면세계의 극한을 추구했고,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찬 최고의 운문을 보여주었다. 영국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내면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예리하게 그렸다. 특히 언어의 마술사인 작가의 절묘한 표현과 철학적 주제가 잘 어우러진 <4대 비극>은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대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인간의 장대하고 비극적인 세계>를 제시했다. 영국 문예부흥기의 최후의 대시인인 밀턴도 1667년에 천지창조와 낙원추방 신화를 대서사시로 형상화한 걸작 <실락원>을 남겼다. 번연은 청교도로서의 신앙체험의 문제를 우화형식으로 형상화한 일종의 종교소설 <천로역정>을 발표하여 영국 근대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독일
독일 지방의 학자들은 이탈리아 휴머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나름대로 독자적인 지적 발전을 이루어나갔다. 이탈리아 유학에서 고전학을 배운 로이힐린은 독일 휴머니즘 운동의 두드러진 지도자였으며 <독일의 불사조>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그는 구약성서 해석을 위한 히브리 어 연구에 그의 삶을 바쳤다. 1506년에 출판한 히브리 문법은 그 계통의 최초의 것으로서 북방의 학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히브리 어로 출판된 서적에 대한 탄압은 당시의 풍조여서 이를 공공연히 반대한 그는 이단으로 몰려 6년 동안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그의 문제를 둘러싸고 신학자들과 휴머니스트 사이에 오고간 오랜 논쟁은 자유탐구와 보수적 권위와의 싸움이었으며, 새로운 휴머니스트들의 학풍이 중세적 전통에 도전하는 과정을 상징했다. 한편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여신 모리아가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얼마나 가득한가를 헤아려보고 자신의 힘을 뽐낸다는 이야기를 통해 교회와 세상에 대한 풍자를 담아냈다. 스페인의 세르반테스는 동시대의 작가 셰익스피어가 <우유부단한 햄릿 형>의 인물을 창조한 반면, <저돌적인 돈 키호테 형>적 인간을 그려냄으로써, 이후 문학사에 전형적인 두 성격 유형을 각인시켰다. 그의 <돈 키호테>는 돈 키호테의 모험과 좌절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체험하는 인문주의적 인간의 자기발견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학은 중세라는 침체기를 거쳐 이탈리아에 전수되었고, 르네상스 기에 들어와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과 세계, 인간과 종교적 질서의 모순에 대해 눈을 돌렸다는 것은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 시민정신이 함양됨에 따라 개인적 욕구는 사회적 혼란을 불러와 국민의 불안을 초래했으며, 그 결과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중앙집권적인 절대군주 시대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로써 정치는 물론이고 문학에 있어서도 절도를 미덕으로 삼는 고전주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17~18세기 고전주의 문학
17세기를 <천재의 세기>, 18세기를 <이성의 세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시 대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면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은 인간의 개성과 감정을 자유로이 표출하는 자유분방한 문학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성으로 17~18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영국, 독일 등에서 이성과 절도를 존중하는 고전주의가 생겨났다. 고전주의란 한마디로 그리스로마의 고전작품을 영원불멸의 모범으로 삼아 합리주의적 이성, 자연의 모방, 규칙의 존중, 균형과 조화, 합리성과 형식미를 특징으로 하는 문학이다. 이후 고전주의는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낭만주의와 함께 2대 문예사조를 이룬다.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은 프랑스에서 가장 성행했는데, 그중에서도 1660년경부터 약 200년간에 걸쳐 활약한 3대 고전주의 작가, 즉 비극작가인 라신코르네유, 희극작가인 몰리에르가 대표적이다. 다행히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르네상스 기의 혼란을 가혹한 탄압으로 평정했으면서도 문예에 깊은 관심을 보인 문학 애호가여서 문인들의 후원자가 되었고, 지식인, 문인, 귀족계급들은 상류사회에 배타적인 사교계를 형성하여 세련된 언어로 그들의 관심사인 문학과 예술정치를 논했다. <살롱>을 중심으로한 이러한 지적 모임은 고전주의 문학의 바탕을 이루는 인간심리 탐구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프랑스 고전비극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코르네이유는 <르 시드>에서 가문의 명예때문에 서로 원수가 된 사랑하는 남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자유의지가 정념보다 명예를 선택하고 고매한 행동을 관철하도록 하는 과정을 인간 내면의 갈등을 통해 그려내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르 시드>는 전대미문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시기한 동료들로부터 <삼단일 법칙> 등 고전극의 규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유명한 <르 시드>논쟁이 벌어지자 그후 3년간 붓을 꺾기도 했다. 그리스 고전극이 요구했던 <삼단일 법칙>이란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단일한 사건을 한 장소에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외적 규제장치를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유래한다.
프랑스 고전규칙을 엄격히 지킨 순수비극은 라신에 와서 완성된다. 일찍이 코르네유의 연극을 제반 규칙에 어긋나는 부자연스러운 작품이라고 평한 그답게 단일한 사건에 시간과 장소라는 의적 규제를 통해 내적 필연에 이르게 하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그에게 있어서 고전비극의 엄격한 규칙은 전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아니라 그 자체를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틀이었다. 그의 비극은 대부분 소재를 그리스나 로마에서 빌어오고 극적논리를 고대모방에 둠으로써 고전극의 전형을 이루었다. 더구나 논리적 귀결이 만들어내는 내적 필연은 인간적 파멸로 치달아 고도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코르네유의 비극이 자기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위대한 영웅의 모습을 통해 인간정신과 의지의 승리를 그렸다면, 라신은 그 운명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파국에 이르는 비극적이고 장엄한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이 파멸이 곧 순수비극의 미학원리인 내적 갈등의 폭발이다. 그의 <페드르>는 한 인간의 정열이 그 자체의 논리적 필연에 의해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떻게 최후의 폭발점을 향해 치닫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밀도와 집중 그리고 엄밀한 구성이라는 프랑스 순수비극의 이상을 보여준다. 라신이 인간의 보편적인 내면의 진실을 비극을 통해 구현한 데 비해 몰리에르는 같은 주제를 희극을 통해서 실천했다. 웃음을 통해 인간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 그것은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탐색, 그리고 기지와 지혜, 표현방식이 문제가 되는데, 그의 연구 대상은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약점과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잘난 체하는 여자, 위선자, 현학자, 엉터리의사, 구두쇠 영감 등이 위선과 자기기만의 희생물들이다. 그의 대표작 <타르튀프>는 고전희극의 모범으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현대적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국
영국의 고전주의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싹트기 시작하여 18세기에 개화한다. 프랑스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아 정치, 종교뿐 아니라 문학에 엄격한 형식을 부과하는 합리적인 이성이 존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의 고전주의는 경직된 프랑스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셰익스피어는 <삼단일 법칙>을 무시하다시피했지만 벤 존슨은 고대작가들의 모범을 좇아 <삼단일 법칙>을 본격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내면적 진실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개인마다 현실에 달리 적응하는 심리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성격을 지배하는 기질이다. 그는 이러한 기질적 특성을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인물들의 충돌과 화해, 때로는 모순을 통해 구조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7세기의 대표적인 극작가 드라이든은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고대문학을 번역하는 한편, 그들의 문학규범을 대담하게 지킨 희극비극 등 27편의 작품을 썼다. 그는 영웅비극이라는 프랑스적 순수비극에 도전해 고전주의의 전통적 주제인 사랑과 명예를 조화롭게 다루었다. 19세기 대표적인 작가는 포프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을 모범으로 삼아 문학에 간결명표한 표현과 견고한 구성을 주려고 했던 그는 전형적인 이성존중의 <비평론>과 <인간론>을 썼다. 이 두 작품은 고전주의 문학정신이라고 할 이성존중과 귀족정신을 기리는 철학적 교훈시다. 이밖에도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사실적 묘사와 참신한 문학정신으로 근대소설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디포는 최악의 자연조건을 극복하는 인간의 위대한 모습을 통해 청교도의 낙관주의적 삶의 철학을 보여주었고,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환상적인 여행을 통해 당대의 부르주아 사회와 정치적 모순을 풍자하고 있다. 영국의 고전주의는 프랑스에서와 같이 형식적 논리에 전적으로 매달리지는 않았지만, 고대문학에 대한 동경과 관심, 그리고 지향이 꾸준히 계속되면서 포프에 이르어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새뮤얼 존슨 이후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 결국 낭만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독일
독일문학에서 말하는 고전주의 시대는 프랑스와 영국의 고전주의가 쇠퇴하는 시점인 18세기 말 계몽주의의 발흥과 함께 시작된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가져왔고, 이러한 의식의 전환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존중되는 합리주의 정신, 즉 개인의 자각을 불러왔는데, 이것이 계몽주의 사상의 출발이다. 1770년경 지나치게 이성만을 요구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을 바탕으로 무미건조한 형식적 규제를 타파하고 문학에 자율과 개성을 부여한 것이 <질풍노도 Strum und Drang>다. 합리와 규칙의 존중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에 우위를 둔 이러한 질풍노도 운동을 주도한 것은 헤르더였고, 그와 교우관계에 있던 레싱과 괴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본능적인 힘과 감정의 폭발에 예술적 형식인 균형과 질서, 즉 균제로 고전주의 미학을 확립한 것이 괴테와 실리였다. 괴테를 결정적으로 예술에 눈뜨게 한 것은 이탈리아 여행을 통한 고대예술과의 만남이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나는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실토했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절도와 균형이 예술적 조화를 이루는 고전미학을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그의 젊은 시절을 사로잡았던 질풍노도적인 취향은 극복되었다. 괴테 개인의 성장사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의 보배인 <파우스트>는 괴테가 젊은 질풍노도 시대로부터 출발하여 고전주의를 거쳐, 만년의 종합적 완성기에 이르는 전생애를 담고 있다. 즉, 괴테 자신의 모든 인생체험과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존재의 방황, 갈등, 구원 등의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거대한 노력의 산물로, 이 작품의 메시지는 인간은 자기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방황하지만, 이것을 계속하는 한 결국에는 하늘에 의해 구원된다는 그의 종교관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인간영혼의 구원과 구원을 향한 구도자로서의 괴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청년기에 괴테와 함께 질풍노도 운동에 참가했던 실러는 괴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셰익스피어, 레싱, 루소 등을 탐독했다. 처음에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압제에 반항하며 자유와 이성에 불탔던 그의 정신은 괴테와 교유하면서 차츰 문학적 성숙으로 변모해간다. 그의 <도적들>과 <돈 카를로스>는 작가의 자유이념과 정치이상을 잘 구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고매한 인격으로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는 인간적 믿음과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러한 실러가 46세로 요절하자 괘테는 절망감에 빠져 <내 인생의 절반을 잃었다>고 비통해했다 한다. 이와 같이 합리주의 정신에 바탕을 둔 이성존중의 계몽주의가 질풍노도와 같은 정신적 반동을 거쳐 질서와 균형이라는 고대의 규범에 승복하여 미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독일의 고전주의 경향은 19세기 초까지 계속되다가 곧 낭만주의 문학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19세기 전반 낭만주의 문학
18세기 말부터는 종래의 고전주의에 반대하여 개성과 독창성을 존중하는 낭만주의가 개화했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 감정, 형식보다는 내용, 보편성보다는 특수성, 규범보다는 개성, 현실보다는 상상의 세계를 중시하고, 자연과 민족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을 그 본질로 한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절정에 달했던 낭만주의는 19세기 말의 상징주의, 예술 지상주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 가득했던 낭만주의의 조류에 편승하여 러시아도 서양문학에 참여하게 되며 19세기 후반에는 우수한 장편소설로서 세계문학에 이바지하게 된다.
프랑스
프랑스에서도 19세기 전반을 지배한 것은 낭만주의 문학이었으며 프랑스 혁명과 루소는 모든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낭만주의는 특히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루소의 영향이 컸다. 프랑스의 낭만주의는 신비적인 경향의 흐름과 개인적 자유와 사회개혁에 대한 옹호를 나타내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신비적인 비합리성의 대표자로 샤토브리앙은 크리스트 교의 신비와 대중의 신성한 순진함 속에서 우주의 가장 장엄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는 이성의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여 신앙의 시대로 되돌리려 했다. 한편 프랑스 낭만주의의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면은 뮈세, 상드, 위고, 뒤마 등의 작품에서 잘 표혀되었다. 뮈세는 이지적인 면보다는 감정과 기분을 마음대로 표출하여 프랑스의 바이런으로 통했다. 어려서부터 시적 재능을 발휘하여 위고의 격려를 받기도 했던 그는 여류 소설가인 상드와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여행을 떠났으나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후 그는 수년 동안 <밤>이란 일련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발표했다.
상드는 목가적인 아름다운 전원생활에 관한 소설을 써서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농민이나 노동자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작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한 그녀는 결혼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여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 작가이자 열렬한 민주주의자인 위고는 그의 인도주의적 세계관과 기독교적인 사랑이 담긴 <레 미제라블>에서 한 인간의 사소한 죄가 영웅적인 인내로써 어떻게 보상되는가를 그려냈다. 만년에는 신에 봉사하고 신의 품안에서 인간의 완성을 도모하는 인도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885년 최초로 국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 때 상젤리제에서 소르본까지 추도 행렬이 줄을 이었고, 지금은 <위대한 영광의 판테옹>에 안장되어 있다. 한편 역사소설의 대가인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오늘날에도 많이 읽혀지고 있다.
영국
영국 낭만주의의 위대한 선구자는 워즈워스와 콜리지다. 워즈워스는 자연에 대한 깊은 신비적인 사랑을 표현했다. 자연의 표면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력을 결합시키는 보편적 정서로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콜리지는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시를 지었다. 영국의 3대 낭만주의 작가는 키츠, ^셸리, 바이런이다. 키츠는 옛 그리스 작가들이 미와 선을 동일시한 것처럼 미와 지를 동일시했다. 미는 진리요, 진리는 미라고 믿었다.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추방당했던 셸리는 후에 젊은 시절의 과격한 극단론을 수정하긴 했으나 불의를 미워하고 행복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의 완성은 사상과 행위의 완전한 자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10세에 남작 칭호를 이어받은 바이런은 셸리보다 더 도발적이며 모험적인 시인으로서 위선과 사회적 속박을 조소한 사람이었다. 자연과 아름다움을 찾아 유럽 일대를 방랑한 그는 대표작 <돈주앙>에 낭만주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낭만적인 기질을 생래적으로 타고난 시인이 바이런이었다. 시와 산문에 다 같이 능했던 왕당파인 스코트는 프랑스의 위고처럼 과거의 인물이나 전설 등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 스코틀랜드의 전설을 주제로 한 시와 모험담인 <아이반호>는 특히 중세생활을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동시대인의 감흥을 돋구었다. 한편 독신 여류작가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시라는 두 주인공이 <오만>과 <편견>의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인간성이 완성되어간다는 이야기를 통해 가정과 여성의 삶, 그리고 결혼을 통해 시대적 반향과 내면의 성찰을 함께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사실주의 수법을 예고했다.
독일
독일은 18세기 후반에 고전주의 작가 괴테와 실러 시대에 동시적으로 낭만파 운동이 힘차게 일어났다. 질풍노도 운동과 관련된 독일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괴테와 실러다. 두 사람은 극과 시에서 질풍노도 운동이 일으킨 격랑을 휠씬 뛰어넘었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학시대>라는 낭만파 최고의 안내서를 지었다. 실연한 젊은이의 감상적인 사랑의 이야기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로 전 유럽의 독서계를 강타했다.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초기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노발리스는 <밤의 찬가>에서 산문과 운문을 혼용해 신비로운 밤과 죽음을 예찬했고,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푸른 꽃)>은 신비에 가득찬 현실의 원래 모습에 대한 동경의 상징으로 주인공 하인리히가 찾아나서는 <푸른 꽃>은 낭만주의 문학의 상징이 되었다. 정통적인 유대교 신자에서 크리스트 교로 개종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하이네도 바이런처럼 사회에 대한 반항아였으며 셸리와 같은 훌륭한 서정시인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개인주의를 표방했으며 메테르니히 체제하의 보수주의에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인류의 해방전쟁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젊은이의 고뇌와 비통이 표출되어 있는 <노래의 책> 등, 그의 아름다운 서정시는 비견할 바 없는 부드러움과 우수를 담고 있어서 슈베르트나 멘델스존에 의해 음악으로 옮겨졌다.
미국
미국의 역사는 17세기 초부터 시작되지만 문학 측면에서는 대륙 낭만주의의 영향과 국내의 정치적 안정에 힘입어 19세기에 와서야 미국문학이 개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미국문학은 그 뿌리를 영문학에 두었기에 대륙에 대한 식민지적 열등감이 오랫동안 잔존했다. 미국문학의 아버지인 어빙은 <스케치 북> 등을 통해 역사가 짧은 미국사회보다 낭만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는 구대륙의 풍물을 그려냈다. 그리고 쿠퍼는 개척지를 무대로 문명과 자연의 대립, 백인 개척자와 원주민 인디언의 숙명적인 대립을 로맨틱한 모험 이야기로 표현했다. 미국의 지성 에머슨은 하버드 대학에서 행한 <미국의 학도>라는 강연에서 지성인들에게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으로 평가되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자연론> 등을 통해 인간 내부의 신성함을 주장하여 자기신뢰에 바탕을 둔 낙관적인 정신풍토를 확립했다. 에머슨의 사상을 대담하게 발전시킨 휘트먼은 시집 <풀잎>을 남겼고, 미국 문인들 중 세계문학에 미친 영향이 가장 크다는 시인 애드거 알란 포는 고도의 수사적 운률적 기교를 사용하여 서정적이며 쓸쓸한 가을 석양에 빛나는 청정한 호수와도 같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의 시 <에너벨 리>는 가장 널리 애송되는 시 중의 하나다. 천재적인 작가 나다니엘 호손은 <주홍글씨>에서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가슴에 <A(adultery, 간음)>자를 달고 다녀야 하는 여인과, 간통으로 함께 괴로워하다 결국 죄를 고백하고 죽는 딤스데일 목사를 통해 당시의 엄격한 청교도 사회와 죄의식으로 얼룩진 인간영혼의 어두운 심연을 매우 음울하게 그렸다.
<톰소여의 모험>과 함께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다. <톰소여의 모험>의 후편격인 이 작품은 일명 <미시시피 강의 오디세이>라고도 하는데, 미시시피강을 배경으로 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주인공의 타고난 순수함과 선량함이 타락한 사회와 벌이는 갈등을 보여준다. 죽음과 삶, 자유와 구속, 개인과 사회라는 명제를 재미있고 감명깊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멜빌은 인간과 고래의 싸움에 깊고 풍부한 의미를 부여한 <백경>을 썼으나, 당시에는 너무 어려워 완전히 묵살당했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재평가되고 있다. 이들 작가들은 문학의 불모지인 아메리카에 유럽의 낭만주의를 수입하여 모방과 수정을 통해 미국적인 낭만주의를 완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