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3장 서양사상
유토피아(Utopia) - 토마스 모어(Tomas More, 1467-1545)
비극적 최후로 인해 영국의 소크라테스로 인식되는 모어가 현실세계의 불합리한 모순을 파헤치고 인간의 절실한 염원을 담은 진보적 사상서, 이후 유토피아 문학의 실질적인 시작과 동시에 모델 역활을 하여, 엥겔스에 의해 베이컨의 뉴아틀란티스, 캄파넬리의 태양의 도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 3대 유토피아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극소수의 법률로 만사가 순조롭게 운영되고 덕이 존중되는 가운데,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영원한 사회를 만날 수 있다.
생애와 작품활동
에라스무스는 자랑스런 친구 토머스 모어가 런던탑에서 순교 했을때 토머스 모어는 누구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국은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와 같은 천재성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모어는 일반적으로 영국의 법률가, 정치가, 휴머니스트로 유토피아를 저술하여 근대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불린다. 런던의 재판관의 아들로 태어나, 라틴어 학교에서 수확한 후 이어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어와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나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이 학교를 그만두고 런던에서 법률공부를 했다. 1499년에 에라스무스와의 첫만남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그들사이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유럽휴머니즘의 우두머리였던 에라스무스는 모어가 본래 지니고 있던 성향을 강화시켜 역사연구를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모어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람은 영국의 휴머니스트이자 신학교수인 존 콜렛이었다. 이 저명한 휴머니스크들과의 우정어린 교분은 모어의 재능과 인품의 계발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어린시절에 시작된 학문연구와 당시의 경제관계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켜주었다. 그렇지만 모어는 직업적인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며, 곧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24세 때 하원의원이 되었으나, 헨리 7세가 의회에 청구한 왕녀의 결혼비용의 삭감을 주장하여 왕의 미움을 받고 정계를 물러난다. 그후 헨리 8세가 즉위할 때까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왕의 사절로 유럽대륙에 파견된다. 그가 대륙에 머물면서 여가를 이용해 집필한 것이 유명한 유토피아다. 1517년 왕의 간청에 의해 청치가 생활에 복귀, 하원의장을 거쳐 1529년 대법관이 되었다. 1532년 헨리 8세는 형수이자 부인인 캐서린이 왕자를 낳지 못하자 그녀와 이혼하여 궁녀 앤 볼레인과 결혼한다. 모어는 앤 볼레인을 정통왕비로 선언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1534년 그는 국왕이 영국교회보다 우위에 있음을 골자로 하는 소위 수장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이처럼 법률가로서 또한 독실한 카톨릭신자로서의 양심을 지키다 1년동안 런던탑 에 투옥 되었다가 참수 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모어의 400주기 기일에 즈음하여 그가 교황 정책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그를 성자의 명부에 올린다.
시대적 사상과 배경
양이 사람을 먹어 치우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탁월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인 모어의 이념과 저서에는 그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의 갈등이 반영되어 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사이에 영국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를 형성한 변혁의 서막 즉 봉건질서의 해체가 일어났다. 모어는 본원적 축적의 시작과 아울러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 그리고 이와 동시에 대규모로 이루어진 농민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빈곤화를 체험했다. 에라스무스가 후텐한테 보낸 서한에 따르면 모어는 전제정치를 극도로 혐오했으며 또 그만큼 평등을 소중히 여긴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모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전문가적인 안목으로 관찰한 경제적 이면은 다음과 같다. 즉 그는 양모업에 도입되기 시작한 자본주의적인 메뉴팩쳐 경제가 마치 소름끼치는 페스트와 같이 어떻게 온 나라를 뒤덮으며 많은 들과 집. 그리고 도시들을 파괴하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는지, 그리고 양을 치기위해 쳐놓은 울타리가 얼마나 엄청난 농민과 소작인들을 토지에서 몰아내는지, 그리고 직업과 고향을 잃어버린 대중들이 얼마나 빈곤하고 가련하며 또 어떻게 부랑자나 거지로 전락하게 되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국왕 헨리가 통치한던 시절만 해도 72,000여 명에 이르는 크고 작은 도둑들이 처형되었는데, 이를 보고 모어는 영주와 용병들이야말로 진짜 도둑들이라고 낙인찍었다. 모어는 인클로저 운동의 사회적인 결과를 인간들을 잡아먹은 양떼들로 형상화했다. 이런 점에서 모어는 마르크스로부터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탁월하게 묘사한 증인이자 비평가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완전히 제거시킴으로써만 착취와 적대적 계급이해관계가 해소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공산제적 공동삶 추구, 사적소유관계가 존재하는 곳,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곳, 이런 곳에서 정당하고 행복한 정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국가의 복지에 이르는 유일한 길을 소유의 평등을 도입하는 길이다. 소유물을 어떤식으 로든 평등하고 정당하게 분배하고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유일한 수단은 온갖 사적 소유를 모두 철폐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모든 것은 공동의 것이다 라는 선언이 지배 엘리트를 향한 반면, 유토피아의 근본명제는 유토피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산주의적인 재산공동체를 그 핵심사상으로 한다. 모어의 유토피아 와 더불어 시작되어 길고 복잡한 길을 거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이러한 사회질서를 옹호한 프랑스, 영국, 독일의 중요한 사상가들을 거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렀으며, 이들에 의해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토피아의 주요내용
유포피아는 그가 여행중 네델란드의 한 여행자 라파엘로부터 들은 애기를 모티브로 하여 엮은 것인데, 이 책은 2편으로 되어 있다. 1편은 당시 영국의 정치상황을 비판하고, 2편에서는 유토피아의 제도와 생활을 다루고 있다. 당시 영국에는 근대적인 산업과 상업이 싹트기 시작하여 농업위주의 장원제도가 쇠퇴하게 되자 귀족들은 저마다 공유지를 사휴화했다. 따라서 농노제도는 무너지고 일반서민들의 어려움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군주와 고관은 영토나 재산증식을 목표로 광분하고 있기 때문에 국왕이 자신보다 국민의 부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충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고, 절대왕정을 비판하는 동시에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에 따르는 혼란을 열거했다. 특히 사유재산에 대한 획득욕심, 자본주의적 영리활동을 비난하면서 카톨릭의 가부장적 왕정을 이상으로 했다. 모어는 스스로에게 엄격하여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러기에당시 영국귀족들의 사치를 용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범죄가 빈곤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보고, 백성의 빈곤은 주로 나태한 귀족들의 사치와 탐욕의 결과라고 믿었다. 이상이 1편의 내용이다. 2편은 9장으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에 그려진 유토피아의 모습을 재구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유토피아는 1760년의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왕국이다. 4방 200마일의 섬나라로 대륙에서 뻗어나온 갑 모양의 땅이었는데, 그 자방을 정복한 시조 유토푸스가 15마일 길이의 호를 파게 하여 대륙과 분리 시켰다.
1. 정치, 이 섬에는 같은 크기에 같은 관습을 가진 54개의 도시가 있고. 각 도시에는 매년 한 번씩 세 사람의 대표를 수도인 아모로우트에 보내어 국정을 토론케 한다. 시민들은 주로 농상에 종사하는데, 가족단위로일정한 기간 동안 시골의 농장에서 일하게 마련인기 때문에 누구나 농업기술을 터득하고 있다. 왕은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되고, 30세대가 한 단위가 되어 시포그란트 라는 수장을 뽑고, 200명의 시포그란트가 모여 종신직 왕을 뽑는다. 왕을 뽑은 시포그란트가 지켜야 할 가장 큰 율법은 국사를 결정함에 있어서 최대의 공정을 기하며, 시민을 노예화 하거나 정권을 함부로 바꾸는 반역은 삼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 경제, 주요산업은 농업이지만, 모든 시민은 제각기 한 가지씩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1인 1기의 원칙인데, 시포그란트들은 시민들이 놀고 먹는 것을 감시한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감시하는 것이 아니고 하루 6시간 일하고, 8시간 자며, 나머지는 각자의 취미에 따라 독서를 즐기며, 지상에서의 행복을 생의 목표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수요를 공급하기에 족할 정도의 노동만이 허용된다. 6시간씩만 일해도 모두가 워낙 사치를 모르고 검소하게 살기 때문에 물자가 남아돈다 철저한 계량경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도시인구의 조절법도 마련되어있다. 한 도시에 6,000세대 이상 살 수 없으며 한 세대는 최소 10명, 최대 16명의 가족밖에 가질 수 없다. 또한 여자는 남편에게 자식들은 부모에게 절대 복종한다. 각 도시에는 병원이 4개씩 있고 환자를 제외한 나머지 시민들은 공동식당에서 공동으로 장만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화폐의 유통이 전혀 없는 공동생활을 한다. 소를 잡는 일을 비롯하여 천한 일은 노예들이 맡는다. 유토피아는 죄를 지은 죄인들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노예로 삼아 일생동안 일을 시킨다.
3. 학문, 학자로서 성공할 자질을 가진 사람은 노동을 면제받고, 학문에 몰두하여 높은 수준의 학식을 과시한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들은 일반교육을 받으며, 또한 대부분의 남녀들은 평생 동안 여가를 이용하여 공부를 계속한다.
4. 도덕, 시민들은 인간영혼의 사멸을 믿고 후세에 선에 상을 받고 악에 대한 처벌을 받느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선이란 이성과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고, 이기심으로 남의 자유나 쾌락을 빼앗는 것은 사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낙은 진정한 덕성과 양심을 지켜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황금이나 화사한 옥에 대해서는 냉담하다 못해 죄악시 한다.
5. 결혼, 결혼에 대해서는 엄격한 율법이 있다. 남자는 22세, 여자는 18세에 결혼 할 수 있는데, 한번 결혼하면 이혼할 수 없다. 또한 간음하기 위해 남을 유혹하는 사람은 간음한 사람과 또같은 벌을 받는다.
6. 법률, 유토피아의 법은 극소수이고, 법률가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소박한 해석이 언제나 올바른 해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누구나 법률 전문가다.
7. 신앙생활, 거의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있으며, 또한 사제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나, 기독교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를 택하는 것을 말리려 하지 않고, 기독교인을 공격하지도 않는다.
8. 전쟁, 그들은 매일 군사훈련을 받지만 전쟁을 싫어하고 전쟁을 하더라고 전쟁에서 얻은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싸움 대신 기도를 드리고 자기 편이 이기고 있으면 병사들 사이에 뛰어들어 너무 가혹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타이른다. 유혈의 승리를 좋아하지 않고 적을 지혜 로 굴복 시키는 것이 권장된다.
유토피아와 역 유토피아
유포피아,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모어가 그리스어의 ou와 topus를 결합해서 새롭게 만든 말로 아무 데도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모어는 이 저서의 마지막 에서 유토피아 사회의 국민생활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유토피아인들의 생활을 본받으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랬으면 하는 마음은 간절하다 라고 말한 것처럼, 단순히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도달목표로서의 이상을 가리킨다고 하는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즉 유토피아는 현실로부터 동 떨어져 있어 현실과 대립하지만, 한편으로 현실과 완전히 절연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존재초월자 라는 것을 그 본질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과 관련을 가지고 있고, 그 사회적인 기능으로서는 현실에 대한 비판, 변혁의 지침이 되는 것이며, 단순히 막연한 꿈, 소원, 희망이 아니라 사회체제에 관한 구상을 포함하는 것이 엄밀한 의미의 유토피아이다. 제 1부가 당시의 영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가득 차 있는 전형적인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제 2부의 이상사회가 구상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모어의 유토피아 이외에도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 등이 출판된 것은 이러한 위기의식의 소산이라 보여진다. 산업혁명이 꽃피던 19세기에도 프랑스의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에의해 유토피아 정신이 이어지고 19세기 말 벨러미는 미국에도 '되돌아오면'을 출판하여 자본주의 미래사회를 낙관적으로 그렸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러 사회주의는 과학의 수준에 도달한다.
역 유토피아, 그러나 19세기 말에는 벨러미를 비판하는 모리스의 유토피아 소식 은 기계에 의한 환경파괴와 노동의 인간지배를 극복하여, 즐거움 그 자체인 노동이 실현되는 사회를 구상하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동경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웰스는 타임머신 이라는 공상과학소설에서 기계문명 발달의 악몽을 보여주는 역유토피아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흐름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불안을 배경으로 하여, 헉슬리의 먼진 신세계 를 탄생하고, 오웰도 1984년 에서 일당독제의 경찰국가에 관한 악몽을 묘사하여 냉전체제하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역유토피아들은 기계기술의 진보에 관한 낙관주의나 사회계획에 대한 안이한 긍정에 대한 반발로 씌어진 것이다.
현대적 의의
위에서 살편본 것처럼 모어는 플라톤의 국가의 영향을 받아, 16세기 영국의 정치적 투쟁 속에서 새로운 이상향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모습은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주민들은 될 수 있는 한 탐욕을 최소한 억제하도록 훈련되며, 공동생산과 균등분배로 경제생활를 영위한다. 그의 유토피아적 사회란 온건한 청교도주의와 도덕적 발전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 성격의 개혁시도는 휴머니스트의 온건함과 보수성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특히 제2권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유토피아의 공유제도, 통치자의 선거절자와 통치형태, 신앙과 도덕의 문제, 전쟁관 등이다.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유토피아의 통치자는 그가 반역을 음모하지않는 한 종신제다. 그런데 선거유세시 과대한 자기 선전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통치자는 국민의 도덕적 양심에 의한 엄격한 판단을 통해 선출되고, 선출된 다음에는 국민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 이런 점은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가 가질 수 있는 선거부정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끝까지 반대하여 참수형을 당했다. 확실히 그는 비도덕적인 국가권력에맞서 자신의 양심을 지킨 근대적 지식인의 표징이었다. 모어는 신앙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있었고, 자신이 국왕에게 요구한 것도, 자신의 신념을 평화롭게 지키는 것을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점에서 종교계에서는 유토피아 보다 카톨릭의 휴머니스트, 순교자로서의 모어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새로운 학문에 헌신한 르네상스 학자, 성공한 변호사, 16세기의 근대적 특징과 새로운 경제와 새로운 통치술에 대한 반대자, 중세 수도원적 이상향의 고수자인 모어는 자신의 이념보다 더 강력한 이념에 의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비극적 최후로 인해 그는 영국의 소크라테스로 비유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