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2장 동양문학
정지용 전집 - 정지용(1903-1950)
어느덧 제2의 애국가처럼 되어버린 <향수>의 작가 정지용은 생전에 3권의 시집을 간행한 바 있다. 제1시집 정지용시집 (1935), 제2시집 백록담 (1941), 제3시집 지용시선 (1946) 등이다. 이중 지용시선은 창작시집이 아닌 시선집으로 1집과 2집에 수록된 시들 중에 25편을 뽑아 재수록한 것이다. 정지용시집에는 모더니즘 지향적인 시들과 민요 지향적인 시들이 혼합되어 있으나, 백록담 에는 대체로 동양적 사유를 통해 자연을 탐구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언어의 세련미와 감정의 절제라는 측면에서 한국 현대시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생애와 작품활동
북으로는 소월이 있고 남으로는 목월이 있으며, 중앙에는 지용이 있다고 한국현대시의 맥을 설명하면 어떨까. 지용은 충북 옥천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와 1929년 일본 도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편집국장과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나,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까이하는 등 좌경으로 기울었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1948년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녹번동에 집을 마련, 서예를 하면서 소일하다, 한려수도를 여행하던 중 6.25를 맞아 상경하였다. 1950년 자택에서 북한군에게 연행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같이 수감되었다. 이후 평양으로 이감되어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같이 수감되었다가 폭사당했다고 전해진다. 그에 관한 연구가 남한에서는 사실상 중단되어 오다, 1988년 해금으로 다소 활기를 찾고 있다. 작품으로는 정지용시집에 89편, 백록담 에 33편으로, 총 122편을 남겼다.
정지용의 문학세계
지용이 최초로 발표한 작품은 22세 때인 1925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을 실은 것이나, 명성을 얻은 것은 24세 때인 1927년 <조선지광>에 향수가 발표된 이후다. 그러므로 향수는 그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지용은 <시문학> <구인회>의 동인이었으며, 1935년에 시문학사에서 첫시집 정지용시집이 나왔다. 지용의 제2시집인 백록담은 1941년<문장>사에서 발행되었고, 그 이후에는 사실상 작품활동은 중단했다. 백록담을 내놓은 시절이 가장 정신이나 육체가 피폐한 때 라고 회고했던 것처럼, 일제말기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이때는 <문장> <인문평론>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된 것을 보면, 당시의 그의 심정이 이해된다. 지용은 1930년 박용철. 김영랑 등이 창간한 <시문학> 동인지 창간호에 이른 봄아침 등을 실었다. <시문학> 창간을 계기로 순수문학운동이 일어났으니, 우리 문학사에서는 소위 시문학파 라하여 1920년 중반 이후 문단을 주도한 카프파의 계급주의 문학을 비판하고, 문학의 예술성을 주장했다. 시문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정지용. 신석정 등이다.
다음으로 1930년대 모더니즘은 김기림에서 출발되는 것처럼 흔히 이야기되나, 신단에서는 이미 정지용. 신석정 등과 함께 김영랑. 김형구 등 모더니스트로서의 경향을 지닌 시인들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1.감정의 무절제한 유로를 배격하고 2.이미지를 중시하며 3.언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의 조탁에 치중하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근거지는 <구인회>라 할 수 있는데, 9인 중 일부는 교체되기도하여 김기림. 정지용. 이상. 김광균. 신석정. 장만영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지용은 시문학파의 중심인물인 동시에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으로 볼 수 있다.
지용 시의 특징
지용의 시를 자세히 보면 바다의 시, 산의 시, 도회의 시, 향촌의 시, 신앙의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다양한 특징을 지닌 시인이어서, 어느 일정한 틀로 그의 전 작품을 분류할 수는 없으나, 몇 갈래의 특징적 경향은 나타난다. 먼저 고향, 해바라기씨 지는 해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민요적 경향이 강하다. 그의 민요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로 시작되는 고향은 소월의 산유화, 진달래꽃, 목월의 나그네 와 마찬가지로 애송되는 작품이며, 따라서 지용은 전통적인 면에서는 소월과 목월사이에 위치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순수시적 경향인데, 이는 30년대 시문학파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시문학파 중에서도 시가 언어예술임을 자각하고 특히 언어의 조탁에 몰두한 시인이 김영랑과 정지용이다. 그는 언어의 조탁을 위해 고어와 방언도 사용하고, 때로는 말을 만들어 쓰라고 한다. 순수시의 지향이라는 점에서는 영랑과 궤를 같이하나, 영랑이 음악성을 중시한 데 비해, 지용은 회화성에 더 치중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자연과학적 유물론에 반대하고, 현대의 기계문명을 비판하며 20세기 전반기에 일어난 모더니즘 기법을 수용한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라 할 수 있고, 불사조, 나무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국최초의 기독교 시인이 아닌가 보여지기도 한다.
주요작품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 시는 농경시대 한국인의 고향을 노래했다. 10개 연 중 홀수연은 고향의 잊을 수 없는 심상을 제시하고, 짝수 연은 잊을 수 없는 감정을 동어반복을 통해 강조하여, 홀수 연의 심상들을 연결하고 작품 전체에 통일성을 유지시켜준다. 소년기를 시골에서 보냈던 작가는 17세에 서울로 유학오면서,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 지내게 되고, 22세부터는 일본에 유학가서 그곳에서 느꼈던 고립감은 조국과 고향에 대한 향수에 잠기게 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속에서 이 시가 태어난다. 전통적이며 토속적인 시어를 써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시다. 날로 도시화, 비인간화가는 현대사회,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옛고향의 정취에 젖어들도록 하고 있다.
고향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이 작품은 시인이 고향에 와서 읊은 것이다. 고향은 천진난만한 웃음이 있던 곳이며, 얹고 돌아가 안기면 어머니의 품 속과 같이 포근한 정을 느끼게 하는 안식처다. 그러기에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찌든 삶의 모습을 보게 되거나, 생활의 피곤함을 느끼게 될 때면 꿈의 안식처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일제에게 짓밟히고 빼앗긴 고향은 옛 모습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다. 고향은 실재하나 이미 자기의 고향이 아닌 것이다. 고향상실에 대한 이러한 자각은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정지용의 역사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고향회복을 염원했던 식민지시대의 실향의식을 역설적 수법으로 노래한 시다.
문학사적 의의
위대한 시인은 시대 속에서 살면서도 시대를 초월하고, 유파 속에 있으면서도 그 유파를 뛰어넘는다. 우리 문학사에서 지용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소월. 지용. 목월을 잇는 전통적 정서와 가락에 따라, 지용은 민요시인으로 꼽지 않을 수 없고, 영랑과 함께 순수문학파의 거장이었으며, 신감각파라는 원치도 않은 형용사가 붙게 되었다. 그는 또한 그 다음 세대에서는 선구자의 위치에서 김기림. 김광균. 신석정.이상 등과 함께 모더니스트의 거장이 되었다. 그의 시는 도시의 문명적인 현대정신보다는 향토적 소재를 통한 향토정서 또는 서정성 등의 다양한 요소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김기림. 김광균과도 다른 결의 모더니스트였다. 그들은 사상적 한계를 가졌으나, 지용의 경우는 기독교적 신앙의 주제와 사상으로, 이러한 모더니즘의 한계를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8. 15 이후 지용의 사상전환은 그가 영영 문학에서 사라져버린 결과를 초래하였으나, 문학사적 위치를 볼 때 30년대 문학의 최고 정점에 섰던 그의 공적은 그가 사라진 뒤의 청록파 시인을 배출한 것으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대 한국시사에서 지용의 위치를 말한다면 20년대의 소월, 30년대의 지용, 40년대의 목월로, 우리 전통시의 계보를 이어주었다. 투명한 언어, 감각적 이미지로 우리 현대시를 풍요하게 가꾸었던 지용의 문학은 오랜 공백기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독자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말의 무한한 가능성을 개척하는 영광스런 역할을 했으면서도, 우리 문학사에서 실종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우리말의 비밀을 알고 말을 휘잡아 조종하고 구사하는 놀라운 천재이자, 한국인에게 영원한 고향의 이미지를 깨우쳐준 시인으로서 그 빛을 더해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