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2장 동양문학
감자 - 김동인(1900-1951)
환경적 요인이 인간 내면의 도덕적 본질을 타락시켜가는 과정을 그린 자연주의 작품으로,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자란 여주인공 복녀가 환경의 노예가 되어, 도덕성 제로상태의 동물인간으로 타락해가는 과정을 폭로하고 있다. 특히 결말 부분 복녀의 시체를 놓고 왕서방과 한의사, 복녀남편 사이의 금전거래 장면은 비정한 인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문체. 짜임 등에서 한국 단편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생애와 작품활동
이광수와 함께 한국근대소설의 선구자 김동인은 자연주의 작가, 탐미주의 작가(유미주의, 예술지상주의 작가)로 불린다. 호는 금동. 춘사. 평양의 대부호의 아들로 출생하여 금시계가 아니면 차지 않을 정도로 유아독존격으로 성장했다. 1912년 김동인은 기독교계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나, 성경과목에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되어 중퇴, 1914년 도일하여 1917년 일본 메이지 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한다. 그의 유학의 본래 목적은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으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그의 자존심과 빈번한 영화감상, 탐정소설과 문학작품 탐독으로 점차 예술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가 당시 가장 경모한 작가는 톨스토이뿐으로, 그를 제외한 문학, 특히 일본문학은 경시했으며,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작가라 경멸한 작가였다. 1917년 메이치 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그는 부친 사망으로 일시 귀국, 이듬해 거부의 딸 김혜인과 결혼하고 다시 도일하여 그림에 뜻을 두어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그의 문학적 경력은 1919년 전후해 시작되는데, 주요한. 전영택 등과 한국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1919)를 도쿄에서 자비로 간행했으며, 여기에 우리말로 쓴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리얼리즘, 또는 자연주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같은해 3월 3. 1운동으로 귀국, 아우의 부탁으로 격문을 초하여 주었다가 출판법 위반협의를 받아 6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단편 피아노의 울림, 중편 마음이 옅은 자여를 발표하여 문학비평가의 역할의 문제를 에워싸고 염상섭과 논쟁을 벌인다. 1921년에는 그의 대표적 단편 중의 하나로 쾌락주의의 인생관을 바탕으로 한 심미주의 사상을 표현한 배따라기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 무렵의 김동인은 경영난으로 <창조>를 폐간하며, 사적으로는 화류계 여성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방탕한 생활을 시작한다. 방탕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작품을 발표하여, 1923년에는 단편 이 잔을, 태형 등을 발표한다. 특히 이 잔을은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그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태도를 보여주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이어 환경 결정론의 사상이 엿보이는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 감자, 시골 황서방, 눈보라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수년간의 방턍생활로 많은 가산을 탕진했을 뿐만 아니라, 잇따른 사업의 실패, 부인의 가출과 이혼으로 인한 가정파탄 등으로 불행과 시련을 겪게 되며, 정신적인 고초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시련의 몇 년을 지내 후 1929년경부터는 그는 다시 창작활동을 재개, 단편 광염 소나타 를 발표하는데, 1935년에 발표하는 광화사와 함께 악마적 심미주의를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1930년 재혼한 김동인은 1932년까지 많은 장. 단편을 발표한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 죄와 벌, 신앙으로,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 등이 있다. 이중 신앙으로는 극심한 삶의 시련을 겪은 후 그의 신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며, 붉은 산은 그의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동인은 1933년 장편 운현궁의 봄을 발표하나, 모친 별세를 당하고 이후 불면증 증세가 악화되어 강한 최면제를 복용하게 되어 약물중독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이광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작가론이며 지금까지도 가장 우수한 평론의 하나로 인정되는 춘원연구를 비롯, 나의 문단생활 회고기를 발표한다. 1935년경에는 그의 순수 문학적 창작활동은 이미 현저하게 감퇴되어 광화사 외에 1938년에 단편 가두, 1939년에 김연실전, 1941년에 곰네 등의 발표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문학외적 활동으로 1939년 박영희. 임학수 등과 함께 소위 북지황군위문작가단 의 일원으로 1개월간 만주를 다녀옴으로써 민족적 분노를 사기도 한다.
방탕한 생활과 사업의 실패로 재산과 아내를 잃고 초래된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신문. 잡지 등에 닥치는대로 역사소설 사담 등을 썼으며 아편중독에 불면증까지 걸렸다. 6.25중에 서울 자택에서 중병으로 사망했을 때 누구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이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비참한 최후였고,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현재 <조선일보>사에서 동인문학상을 제정, 수여하고 있다.
문학적 특성
간결한 문체와 양식적 완결성이 잘 드러난 그의 작품은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또한 모든 작품에서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적 교훈주의를 배척하고,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운 순수문학운동을 벌였다. 그의 작품의 한국문학사적 업적을 요약해보면, 1.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서구적 자연주의 경향의 문학을 확립했으며 2. 본격적인 단편소설(배따라기, 붉은 산)을 개척한 점(그는 단편에서는 성공했지만 장편에서는 장편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3. 단편이 지니는 속성의 하나인 유머와 위트, 패러독스를 단일한 구성 속에 도입했으며 4. 문장을 혁신했고 5. 사재를 들여 본격적인 순수문예지 <창조>를 발간한 점 6.구어체 문장을 개척한 점 7. 근대적 문예비평을 개척한 점을 들 수 있다. 김동인은 그의 조선근대소설고에서 이광수의 불완전한 구어체 문장에 대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창조> 동인은 보다 철저한 구어체 문장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주장하며, 그 특징으로 1. -더라 , -이라 등의 구두에서 탈피, 2. 현재형 시제에서 과거행 시제의 개척 3. 영어의 He, She 등을 그 라는 대명사로 표기한 점 4. 사투리의 처음 사용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김동인의 문학적 특성은 일찍이 백철이 그를 예술지상주의 작가로 규정한 이래 김동리에의해 자연주의의 작가, 혹은 조연현에 의하여 예술지상적 또는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다양하게 규정되어왔다. 이러한 여러 규정은 김동인 문학세계의 다양성 혹은 그 사조적 바탕의 혼재성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계속 논란의 여지는 있다. 결국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주의와 유미주의의 두 봉우리로 가름할 수 있는데, 그 대표작이 감자와 광화사 다.
자연주의
자연주의 문학이 인생을 위한 예술 이라고 한다면 탐미주의 문학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김동인 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연주의다. 20년대에 한국문학에 수용, 혼류된 근대적 문예사조의 하나로서 자연주의의 가장 뚜렷한 영향과 흔적을 볼 수 있는 작가가 김동인이다. 그의 문학의 자연주의적 특성은 물질주의적. 결정론적 인간관과 반도덕성 등으로 그의 문학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유년기부터 욕구충족이 용이한 부유한 가정환경과 그의 선천적 기질로 말미암아 청년기에는 강렬한 쾌락주의적 인생태도를 지니게 된 듯하다. 전통적인 신앙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궁극적, 초월적 근거인 신에 대한 이러한 거부의 태도 속에는 인간을 다만 자연적. 동물적 존재로 규정하는 물질주의적 인간관과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는 자연주의적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 감자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인간관과 가치관을 완전한 형식을 통하여 극명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있게 자란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기품을 가지고 있는 복녀라는 한 여인이 생존을 위협하는 가난한 환경 때문에 도덕의식을 상실하고 동물적 인간으로 점차 타락해, 마침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자적인 냉정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감자에서 작자는 반사회적인 환경으로 인해 도덕성을 상실하고 동물적 존재로 전락해가는 한 여인의 삶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존재와 운명의 결정요인으로서의 환경을 강조하는 환경결정론 과 도덕적 가치부정의 자연주의적 인간관 가치관을 구현하고 있다.
탐미주의
김동인의 반도덕적이며 병적 광기를 내포한 쾌락주의는 그가 자연주의적인 일련의 작품들을 창작하던 1920년대 전반에 걸쳐 그의 삶을 지배한 듯하다. 그는 수년간 광포한 방탕생활을 하며 마침내 파산과 가정파탄이라는 개인적 파국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가 새롭게 출발한 사상이 감자 등의 자연주의적인 작품을 통해 부정하고 거부한 신이나 도덕 대신 그가 진정한 가치로 선언한 미 가 절대적 가치로 지향의 대상이 되는 소위 탐미주의다. 이러한 사고의 기초 위에서 탐미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는 두 작품 광염 소나타, 광화사가 창작되며, 이들 작품에서 작자는 일찍이 그가 보인 이광수식의 계몽주의에 대한 격렬한 반대입장과는 달리, 직접 그의 탐미사상의 설교사가 된다. 김동인의 탐미사상은 사상적으로 미숙한 것으로 그의 탐미주의 작품은 근원적인 예술충동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예술지상론을 펴기 위한 이데아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탐미주의는 그의 자연주의 작품에 비해 작품적 실천에 있어 뚜렷한 성취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이 점은 가령 오스카 와일드 같은 외국의 탐미주의 작가들이 무엇보다 자신의 작품의 형식이나 기교를 중시하며, 어휘나 문체의 미적효과나 작품의 미적구성에 큰 비중을 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
복녀 : 규율 있는 출신이지만 환경에 의해 지배를 받아 전락, 비극적 죽음을 맞음. 남편 ; 천성적 게으름뱅이. 아내로 하여금 매음으로 돈을 벌게 하고 자신은 무위도식함. 왕서방 : 중국인 지주. 한동안 돈으로 복녀를 샀다가 본부인을 얻게 되자 냉정하게 복녀를 버림.
작품의 주요내용
무대는 싸움. 간통. 살인. 도둑. 징역 등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이다. 복녀는 원래 가난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율있게 자라난 처녀이다. 이러한 복녀가 전락하는 것은 극도로 게으르고 무능한 남편과 결혼하고 부터다. 복녀를 데려오느라 조금 있던 재산을 다 써버린 20년 연상의 남편은 게으름과 불성실한 처신으로 호구의 방책을 놓쳐버리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로부터 전락을 거듭하게 된 복녀의 집은 마침내 칠성문 밖으로 나앉게 된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다간 굶어 죽을 판이 된 복녀는 거지로 나선다. 그러나 젊은 나이의 그녀에겐 그 일조차도 쉽지 않다. 그리하여 복녀는 하루 32전 벌이인 송충이잡이에 나선다. 매일 송충이잡이를 나가던 복녀에게 이상한 현상이 눈에 뜨인다. 젊은 여인들 몇이 늘 놀다시피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비결이 다름아닌 몸을 파는 것임을 알게 된 복녀는 자신도 못 이기는 체 이러한 거래에 동참하게 된다. 막상 나서니 이보다 좋은 벌이가 없다. 사람으로 못할 일도 아니고, 일 안하고도 돈 더 받고 긴장된 재미가 있고,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로 복녀는 점점 도덕의 구속으로부터 일탈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복녀는 감자밭에 들어가 감자 몇 알을 훔치다 밭 주인인 중국인 왕서방에게 들킨다. 이미 자기 육체의 위력을 알고 있는 복녀는 왕서방에게 죄값으로 몸을 주고 오히려 돈까지 얻어 나온다. 이로부터 왕서방과의 관계는 남편이 묵인하는 가운데 노골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 왕서방이 정식으로 부인을 얻어 성례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서방으로 인해 신세가 바뀌어지고 있던 복녀는 이 소식을 듣고 눈이 뒤집힌다. 왕서방의 혼례가 있던 날 밤, 복녀는 낫을 준비하여 강짜를 부리지만 그날 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나오는 것은 복녀의 몸뚱아리다. 낫을 들고 강짜를 부리다 그 낫을 왕서방에게 빼앗겨 오히려 자신의 목을 찔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녀가 죽은 뒤 사태수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사흘이 지났다. 한밤중 복녀의 시체는 왕서방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시체 앞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의사, 왕서방은 말없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세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한방의사의 손에도 십 원짜리 두 장이 갔다. 다음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사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실려갔다.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김동인의 문학은 춘원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해도 좋을 만큼,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문단 선배인 이광수와 깊이 연계되어 규정된다. 이는 김동인이 춘원의 소설을 사회교화 도구라 비판하고 자신의 문학적 지향을 참인생. 참예술의 완성에 두었던 데서 잘 드러난다. 1925년 <조선문단>에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몇몇 프로 비평가들은 빈궁한 삶을 소재로하여 그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를 신경향파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감자에서 작가의 관심은 사회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분노를 터뜨리는 데 있지 않다. 정직한 농가에서 절도있게 자란 처녀인 복녀가 빈민굴의 매음녀가 되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과정이 별다른 감정없이 그저 제시되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얌전한 농가에서 빈민굴로 전락)에 따라 복녀라는 인물은 변화한다. 입체적인 인물의 성격과 행동이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정론 의 영향을 여기서 볼 수 있는데, 이런 변화에 의해 감자의 인물들은 어떤 자의식도 갖지 못한다. 몸을 팔아 번 돈을 남편에게 자랑스럽게 내 보이는 복녀나, 아내의 죽음을 30원과 맞바꾸는 남편에게는 윤리나 도덕에 대한 의식이 없다. 그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뿐이다. 이런 특징들, 특히 결정론의 영향을 지적하는 데서 감자 를 자연주의로 보려는 견해가 생겨난다. 김동인의 작품 중 자연주의라는 평을 듣고 있는 것에는 배따라기, 감자, 김연실전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감자는 자연주의의 정신이 잘 구현되어 있다는 평을 받는다. 도덕이나 윤리. 법이라는 치장을 걸치기 전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잘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감자는 김동인이 지향한 문학정신의 한 결정체라 할 작품이다. 한국의 근대단편이 시작된 이래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로 창조된 복녀, 결정적 반전으로 경악을 안겨주는 극적인 구성, 이에 동원된 간결 명료한 문체, 특히 감자 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평가되는 방언의 문체화, 이런 것들은 김동인이 한편으로 춘원을 시샘하며 한편으로 그를 극복하고자 하였기에 이룰 수 있었던 대표적 성과다. 그러나 이 작품도 김동인의 문학을 말할 때 흔히 지적되는 역사의식의 부재 라는 한계 안에 갇혀 있다는 비판은 면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