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서양문학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 - 플로베르(Gustove Flaubert, 1821-1880)
플로베르의 사실주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한 여인이 이상을 갖는 데서부터 환멸과 절망에 빠지는 과정까지의 내용을 정확한 작품구성과 사실적인 묘사로 표현했다. 낭만적인 환상에 빠진 한 여인이 남편 아닌 남자와 사랑을 하다 결국 파멸하고 자살에 이른다는 진부하기조차 한 소재로 플로베르는 당대의 부르주아 사회와 그 사회가 양산해낸 인간유형을 일체의 로마네스크 한 요소를 제거하고 너무도 산문적 으로 보여주고 있어, 작가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사실주의 소설의 한 전범으로 간주되고 있다.
생애와 작품활동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오직 하나뿐인 올바른 낱말 을 고집하며, 동의어를 부정했고, 작가는 작품의 어디에도 존재하나 어디서도 눈에 띄어서는 안된다 며 철저한 객관성을 추구했던 작가 플로베르. 그는 명의로 소문난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낭만적이고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병원의 부속건물에서 태어나 자란 관계로 인간의 생사문제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서 자연현상에 대해서 냉정하고도 깊이있는 관찰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10세에 희곡을 창작하기도 했고, 그 희곡으로 친구들과 같이 연극을 하기도 했는데, 이런 방면에 놀라우리만큼 조숙했다. 18세에는 부당하게 퇴교당한 급우를 구제하는 운동에 앞장섰다가, 자신도 퇴학을 당하게 되어 집에서 입학시험공부를 하여 파리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강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대부분 고향에서 빈둥거리며 그리스 어와 라틴 어 공부에 열중했다.
24세경에는 신경증 발작으로 법률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와 문학에 몰두하면서 문인들과 사교를 넓혀갔다. 25세 때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도중 부뤼겔의 그림 성 앙투안의 유혹 에 감명을 받고 같은 제목의 작품을 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가정적으로 불행이 닥쳐와 그가 존경했던 아버지가 죽고, 곧 이어 사랑하는 여동생이 산욕으로 죽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조카딸 캐롤린과 함께 외부세계를 외면하면서, 고독하고 침울한 가운데 작품 쓰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런 가운데도 열 살 연상인 여류작가 루이즈 콜레와 깊은 관계를 잇고, 플로베르 자신의 문학관이 피력된 많은 편지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런데 부친의 제자 중에는 들라마르라는 의학도가 있었다. 그는 의사면허를 얻은 후 노르망디의 벽촌에서 개업하고, 델핀이라는 아름답고 재능있는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런데 그녀는 평범한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껴 애인을 두고 남편 모르게 돈을 빌려 쓰다 음독자살을 한다. 아내의 부정을 안 들라마르는 비탄 끝에 그녀를 따라 죽는다. 이것은 들라마르 사건 이라하여 당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사건이었다.
플로베르는 당시 성 앙투안의 유혹을 완성하고 친구인 브이에와 뒤캉에게 작품평을 부탁했는데, 졸작이므로 불에 던져버려라 라는 평을 받는다. 실망한 플로베르는 뒤캉에게 들라마르 사건을 소재로 작품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는 이 권유를 받아들여 뒤캉과 함께 18개월에 걸쳐 여행을 하면서 점차 낭만과 이념의 세계로부터 현실의 세계로 문을 돌려, 보바리 부인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1851년 여행에서 돌아온 플로베르는 크로아세에 틀어박혀 하루 평균 12시간씩 이 작품에 매달린 끝에 5년 후에 완성을 보았다. 이 소설이 <파리>지에 연재되는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다가, 1857년 풍속문란과 종교모독 등으로 기소되었다. 결국 승소하였으나 카톨릭교회에서는 이 책을 금서로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 책은 날개돋힌 듯이 팔렸고, 이 작품으로 그는 프랑스 리얼리즘의 거장으로 지위를 확립했다. 이어서 성 앙투안의 유혹의 제2고, 살람보 성 앙투안 의 제3고 등을 완성한다. 1878년 말 부바르와 페퀴셰의 자료를 보완하기 위해 모파상과 함께 프랑스 북부해안을 여행하고 나서 계속 집필에 들어갔으나, 도중에 뇌일혈로 급사했다.
리얼리즘 문학과 플로베르
183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세계의 지배적인 문예사조는 리얼리즘이었다. 고전주의는 이제 완전히 후퇴하고 로만주의(낭만주의)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기서가 두드러지게 약화되었다. 1870년경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은 한편으로 자연과학의 발전과 철학적 합리주의 경향에 호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짙은 감상주의로 타락한 낭만주의에 반발하였다. 그럼으로 리얼리즘의 특징은 #1낭만주의의 지나친 감상에 대해 반대했다는 점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연적 선과 자연의 신성함을 믿었다. 그들은 현실을 도피하여 과거 속에서, 이국적 배경속에서, 스스로의 상상 속에서, 아름다움과 위안 그리고 흥분을 찾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정서적 이상에 비추어 생활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리얼리즘 작가들은 실제로 본 것을 충실하게 묘사하여, 사실을 미화함이 없이 인간의 경험을 가능한 한 정직하게 표현하려 하였다. #2리얼리즘은 심리문제 또는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작가들은 인간행위의 상충하는 경향들을 상세히 분석하였으며, 환경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의 투쟁을 충실하게 묘사하였다. 문학작품은 이와 같은 깊은 사회의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일종의 고발문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3리얼리즘 작가들은 대개 당시의 유행하는 과학이론 내지 철학이론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부 작가들은 인간이 환경과 유전의 희생물이라는 결정론 의 입장을 취하는가 하면, 다른 일부 작가들은 인간의 본성이 대체로 짐승과 같은 선조로부터 물러받은 동물적 성질을 갖고 있다는 진화론 에 동조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일부 사람은 사회개혁의 정열에 불타서 산업혁명이 초래한 사회아고가 불평등을 규탄하는 작품을 썼다.
이와 같은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징조는 먼저 프랑스에서 나타났다. 특히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 등은 새로운 문학사조를 대변하였으며 전 세계적으로 광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중에서도 리얼리즘의 전통을 정확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가가 플로베르였다. 그의 걸작 보바리 부인은 인간의 향락에 관한 냉철한 분석으로, 낭만주의적 꿈과 현실과의 괴리를 보여줌으로써, 낭만주의적 생활철학의 부적당함을 비판한 작품이었다. 비록 이 책이 외설적이라고 비난받고 작가가 부도덕한 작품을 발표했다고 공격받았으나, 일부 문학평론가들은 그것을 근대문학상 최대의 소설 중 하나로 손꼽고 있는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
사랑의 열정과 성도덕의 타락을 통해 당대 부르주아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엠마 : 부농의 딸로 현실을 싫어하고, 몽상세계에서의 사랑 때문에 파멸하는 여인. 샤를 보바리 : 엠마의 남편으로 평범한 의사. 레옹 :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떠난 청년으로 엠마의 정부. 로돌프 : 유복한 생활을 즐기면서 여인들을 농락하는 호색한.
작품의 주요내용
노르망디의 시골의사인 샤를 보바리는 엠마라는 시골 부농의 딸과 결혼한다. 그녀는 미션스쿨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상이 높은데다 소설을 즐겨 읽었으므로, 화려함에 대한 동경과 정열적인 낭만을 가슴 속에 품어왔다. 그런 엠마는 이웃마을의 의사로서 그저 호인이고 평범한 소시민인 샤를 보바리가 상처한 후, 그녀에게 청혼하자 그의 아내가 된 것이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환멸만 줄 뿐이었다. 단조로운 생활, 몰취미한 남편 곁에서 그녀는 공상만 일삼으며 점점 우울증에 빠져든다. 샤를은 아름답고 젊은 아내의 침울함을 걱정하여 보다 쾌적한 도시 용빌로 이사를 간다. 엠마는 그곳에서 순정을 느끼게 하는 레옹이라는 청년과 교제를 갖는다. 그러나 그가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떠나자 마음이 공허함을 느낀다. 남자는 훨씬 자유롭다. 흥이 나는 대로 자기의 욕정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만든 법률이나 도덕에 얽매여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엠마는 어린애를 낳았지만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기에 위로를 얻지 못한다. 남자들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마음대로 여행도 떠나고 마음껏 향락을 즐길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의 운명은 남편과 가정이라는 굴레에 얽매인 채 사회적 관행과 여성 특유의 소심 때문에 활개를 쳐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엠마가 이러한 불만, 막연한 정열의 솟구침, 부도덕한 유혹의 심리적 갈등을 겪어낼 때에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 운명을 휘저어놓는다. 로돌프는 이 지방에서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하면서, 여인을 농락하는게 취미인 난폭한 호색한이었다. 그는 여인의 정숙이란 불편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내로서, 아름다운 엠마를 아무렇게나 다루었다. 엠마는 다른 남자와의 접촉을 통해서 심신이 현격히 변모해간다. 차츰 정숙함이란 걸 잃어버린 엠마는, 로돌프와의 불륜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드디어는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그러나 로돌프는 엠마의 탐스런 육체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지만, 그런 어리석은 올가미에 빠질 남자가 아니어서 매정하게 배신해 버린다. 한번 터진 둑에서 쏟아지는 물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일까? 많은 덕성있는 사람들은 엠마의 한번 실수를 용서하며, 이런 실패를 거울삼아 정숙한 여인에로의 복귀를 희망할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작가 플로베르가 그려내는 인물은 보다 더 실제세계 편에 선다. 이웃사람이며 이 세상 속물의 표본 같은 약제사 오메의 권유로 엠마는 오페라를 구경하러 갔다가 거기서 연정의 추억이 아련한 레옹을 만나, 또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순진했던 레옹도 이미 여인들과의 경험을 거친 후이기에 둘의 애정유희는 한층 노골적이다. 둘은 마차를 타고 교외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그 속에서 정사를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탈선행위도 얼마 가지못한다. 엠마는 낭비벽과 탈선에 소요되는 과다한 경비지출로 막대한 빚을 지고 파산에 이르게 되는데, 로돌프와의 관계를 유지하느라 그 도시의 악덕상인이며 중개업자인 뤼르에게 진 빚이 레옹과 접촉하는 동안에 더욱 불어난 것이다.
뤼르나 오메 등은 그녀를 둘러싼 부르주아 사회의 속악한 무리의 대표적 인물이다. 결국 재산이 차압되는 사태에 이르자 엠마는 창피를 무릅쓰며 로돌프에게 돈을 빌려보려 했으나 냉담하게 거절당한다. 헤어날 길 없는 절망 속에서 음독자살을 하고 만다. 그때야 비로소 아내의 부정을 안 샤를은 절망과 쇠약으로 고민하다가 망처의 뒤를 따른다. 그후 약제사 오메 등을 비롯한 용빌의 부르주아들의 저속하면서도 평화로운 나날이 변함없이 계속된다.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보바리 부인, 그녀는 바로 나였다고 실토한 플로베르의 말을 생각해본다면, 이 소설 속에서 그는 그의 이상과 좌절, 또한 그가 전부터 품고 있던 부르주아에 대한 반감을 작품 전면에는 노출시키지 않고, 엠마의 절망과 그녀를 이토록 만든 부르주아 사회의 냉담한 객관적 묘사를 통해서 은밀히 노출시키고 있다.
보바리즘
작품 속의 여주인공의 성향을 본따 보바리즘 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는데, 이것은 철학자 쥘르 고티에의 주장으로, 현실적인 자아가 이상적인 자아를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상적인 자아가 현실적인 자아의 덫에 걸려 숙명적으로 난파하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말한다. 이 작품은 신문의 사회면을 확대한 것처럼 실제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으나, 주제를 배후에서 힘차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플로베르의 정밀한 객관적 사실수법이다. 원래 플로베르는 현실적이기 보다는 살람보 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낭만적. 유미적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그가 이 작품에서는 흘러넘치려는 자기의 감정을 극력 억제하고, 이 마을을 몇번이나 실제 답사까지 하여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다음, 이것을 바탕으로 들라마르 사건 에 나온 인물이나 장소를 사실에 가깝게 재현했다. 작가는 여주인공 엠마의 동경과 환멸을 중심으로 남편 샤를의 범속함, 약제사 오메를 비롯한 주위의 어리석은 부르주아들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엠마의 비애는 플로베르 자신의 염세관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며, 스토리 전체는 단순한 통속적 사건의 울타리를 넘어, 모든 시대와 인간에 공통된 인간적 진실을 지닌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숭화시켰다. 플로베르는 이것을 묘사하는데 있어 임상학적 입장에 서서, 과학자와 같은 엄정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것은 그가 부친에게 물려받은 의학자의 혈통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선된 언어구사
객관적 수법과 함께 이 작품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문체일 것이다. 그는 진실을 표현하는 말은 단지 하나밖에 없다고 믿고, 매일밤 프로아세의 서재에서 한 줄의 문장을 쓰는 데 몇 시간을 소비하는 고통을 맛보았다. 이렇게 정선된 말을 다시 저자 자신이 몇 번이고 낭독한 다음, 추고를 거듭한 결과 다른 것에는 유례가 없는 면밀하면서도 생동하는 독특한 리듬을 가진 문체를 창조하게 되었다.
사실주의 작품
이 작품의 출판 직후에는 찬반이 엇갈렸으나 후세의 비평가들은 대체로 문학성을 인정하였고, 19세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작품이 지닌 문학사적 의의이다. 그가 보바리 부인 을 쓸 때의 태도는 대단히 순수하고 성실했으며, 문장을 구성하는 데 있어 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것은 소설이 갖는 산문예술로서의 의의를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며, 예술을 위한 생활 을 작가가 몸소 실천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종래의 작가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점이며, 사실주의의 승리를 초래케 한 요인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보바리 부인 을 프랑스 근대소설의 기원으로 보는 이유이다. 그는 발자크의 사회적 사실주의의 뒤를 이어 예술적 사실주의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졸라의 과학적 사실주의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소설은 사실주의 작품이면서도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는 데 힘쓴 예술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