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1부. 동, 서양 사상의 흐름과 고전
제3장 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 (2/2)
조선시대
억불정책과 산중불교
조선시대에 들어 불교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 일종의 자기 보호책으로서 호불론을 전개하여, 유불일치를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조선초기의 기화는 배불론에 대해 호교론을 펴고, 종교적 갈등을 모나지 않게 해소해 공존을 추구하려는 융화적 경향을 뚜렷이 나타냈다. 그는 유, 불, 도 3교의 일치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후 명종 때, 문정 왕후의 후원을 받은 보우는 선과 교가 하나임을 강조하고, 불교와 유교가 하나에서 유래했다는 융합론을 폈다. 그는 유교의 공자, 순자 및 노자 등 일체의 사상을 불교의 화엄일리 속에 융합시키고, 다시 여기에 선의 요소를 가미해, 교선일체에서 더 나아가 교선일체를 주장했다. 그후 휴정과 유정이 등장하여 불교사상을 진작시키고, 승병을 모집해 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휴정은 유, 불, 도 3교가 각각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궁극적인 진리에 있어서는 다 같다고 하였다. 기화가 (현정론)에서, 유교가 불교를 비난한 내용을 조목조목 들어 해명하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한 데 반해, 휴정은 거기서 더 나아가 전혀 상대를 비판함이 없이 일체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사상은 (선가귀감)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화된 유교
고려말 중소 지주계급 출신 사대부들이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주자학은 1392년 이성게,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혁론자들이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채용되었고, 곧 중세적인 조선 봉건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절대이념이 되었다. 조선초의 주자학은 고려 귀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현실적인 폐해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이 허구라고 비판함으로써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허물고, 주자학에 입각한 중세적 세계관의 확립이라는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연구된다. 반면 역성혁명을 반대한 일부는 지방의 중소지주로 머물면서 향촌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는 가운데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으니 이들이 사림파다.
사림파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부터다. 이 시기에 오면서 훈구관료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언관직에 기용하였다.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으로 연결되는 이들은 훈척세력의 비리를 맹렬히 공격 하였는데,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파들이 반감을 폭발시켜 사화를 일으킨다. 네 번에 걸친 사화로 그때마다 사람들은 큰 화를 입었지만,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잠재적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대에는 결국 정계의 주류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주리파와 주기파의 대립발전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과 주기론의 두 계통으로 발달하였다. 주리론은 주자의 견해를 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이(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유사)와 기 (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유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근본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 언적에서 시작되어 이황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의 주자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하였다. 그의 저서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요체를 10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일본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 은 서경덕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일원론 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화담집)을 지은 서경덕은 독자적으로 중국의 기철학을 수용하여 기일원론에 입각한 독특한 기철학 을 완성했다. 주기론은 (성학집요)의 저자 이이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기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기의 변화, 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는 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론에 있어서도 본연의 성보다 기질의 성을 더욱 중요시하였으며, 정치, 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 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후 영남과 기호의 두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하였다.
예학의 발달
조선유학이 예학 중심의 교조적 주자학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7∼18세기에 이르면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는 동시에, 통치능력의 상실에 따른 지배계급의 압박과 수탈이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봉건사회 자체의 해체 위기에 처하여 지배계급의 유학자들은 주자학적 명분을 더욱 강화하고 신분질서를 엄격히 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
조선후기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동은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체계에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교조화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있어왔는데 윤휴와 박세당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주자학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유교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비판적인 동향은 양명학의 도입으로 가속화되었다. 양명학은 명의 왕양명이 일으킨 주관적 실천적인 유학체계로, 주기론의 입장을 견지하여 조선의 사회변동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제 두는 이를 학문적 체계화하였다.
실학운동
지배계급의 정통 주자학이 끝까지 명분론과 주리론을 고집하는 동안 사상계의 일각에서는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을 지닌 학문 경향이 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는데 이를 실학 이라고 부른다. 실학을 담당한 계층은 양반계층 내부의 계급분화와 일부 벌족의 대토지소유로 말미암아 몰락한 양반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지배계급에 속했지만 현실행활은 일반민중들과 다를 바 없어 당시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수탈상을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고, 현실정치의 모순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관료로 진출하지 못한, 혹은 불우한 관료생활로 끝맺은 자신의 처지를 통하여 봉건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주자학적인 명분론의 강화로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 도저히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학문연구의 방향을 관제, 병제, 토지, 기술 등의 현실문제로 전환하고, 이러한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동안 지엽적인 지식들을 백과전서식으로 탐구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자연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학문대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실학자들은 학문 방법에 있어서도 중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주자학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경험적, 실증적인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근대성을 띠게 된다. 실학자들의 철학사상은 시대와 대변계급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현실의 변혁과 개인이 욕망을 긍정하는 주기적인 경향과 경험론적인 색채를 보이고 있다.
1.경세치용학파
실학사상은 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이이에까지 소급되지만, 본격적인 실학사상은 유형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초기의 실학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걸쳐 발전했는데, 흔히 경세치용학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이익에서 시작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된 사상으로, 당시의 사회적 모순이 토지의 과점에 있다고 보고 토지개혁 문제에 주력하였으며, 당시의 소농민계층을 대변한 양심적인 관료의 사상으로 후에 일부의 제자들은 그들이 지향한 농촌사회의 이념으로 천주교를 도입하기도 한다.
2.이용후생학파
18세기 중반에 일기 시작한 중기 실학은 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중국을 다녀오고,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북학파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주축을 이룬다. 이들은 대개 서울 출신의 학자들로 당시 현저한 발전을 보였던 상업과 수공업을 중시하고, 도시빈민의 생활상을 동정하여 이들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적 사상을 전개했다. 그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해 중국에 들어온 서구과학을 과감히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고, 그들 자신이 과학적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또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양반제도를 철폐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초기와 중기와 실학사상은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는데, 그는 현실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개혁안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청의 고증학을 이용한 유가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수사학(유학)의 입장을 확립함으로써, 기존의 주자학에 대체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을 제시했다.
3.실사구시학파
19세기 초반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학파가 바로 실사구시학파 이다. 이 학파는 경서 및 금석, 고전의 고증을 위주로 하여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 실증성과 해석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 사상은 묘하게도 김정희와 가까웠던 중인계급 학자들에 의해 후일 개화사상과 연결된다. 김정희와 더불어 초, 중기 실학과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당시 사회를 충실히 반영하는 철학체계를 구성한 학자는 최한기다. 그는 실학가 개화사상의 가교자로 평가되는데, 서구의 자연과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외국과이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윤리적인 면에서도 유교를 옹호하여 전형적인 동도서기론을 폈다. 최한기는 경험적인 인식론과 자연과학적인 학문관, 유교적인 윤리관, 정치개혁론 등이 모두 융해되는 방대한 기일원론의 철학체계를 구성하여 조선의 유학에 막을 내린다. 그의 기철학은 저거 (기학)에 담겨 있다. 이들 실학사상들은 교조적 주자학을 타파하고, 학문의 중심을 윤리, 도덕으로부터 정치, 경제, 자연에 대한 현실문제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모순이 지배계급의 부패, 무능과 더불어 토지제도, 신분제도 등의 봉건사회 자체에 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한 이상적인 농촌사회의 건설, 신분제도 철폐 및 과학기술의 수용 등 여러 가지 이상적인 방안을 내놓았으나, 시대적, 계급적 제한성과 제국주의의 침탈로 말미암아 근대적 사상으로까지는 성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됨에 따라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하게 되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뒤 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 운동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적인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에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고집했기 때문이다.
근대이후
불교자체 정화노력
그후 한국불교는 일제의 통치를 당해, 백용성, 박한영, 한용운 등이 나타나 불교 유신을 제창했다. 백용성은 전통적인 한국 선종의 특색을 다시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불교 본연의 진면목을 제시하고자 하여 대각교 운동 을 벌였다. 박한영은 한국의 전통적 선관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는 한편, 과학과 서구문물이 밀려오던 당시의 상황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불교를 제시하려 했다. 한용운은 철저한 유신을 주장하여,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에 정신문명의 원천으로서 불교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이회광이 친일불교운동의 일환으로 일본 조동종과 합종할 것을 추진한 데 대해, 한국불교의 전통은 임제종이라고 선포하여 조동종과 합종할 수 없다는 운동을 이끌었다. 국권이 상실되면서 한국불교교단은 일본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는 기구가 마련되지 않았다. 1941년 봄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아 종단의 이른을 조계종으로 결정하고, 1946년에는 기존의 명진학교를 동국대학교로 개칭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그후 효봉, 청담, 성철 등 큰스님들의 구조적 신앙자세는 1980년 10,27법난에도 꿋꿋하게 한국불교를 지켜나갔고, 1990년 불교방송(BBS)의 개국과 더불어 불교발전의 기틀을 마련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불교계는 돈오점수(깨달은 후 계속 닦음)와 돈오돈수(단번에 깨우쳐 단번에 닦아 마침)의 해묵은 이론적 대립문제, 중생구제보다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세속적인 교권 확대에 집착하는 일부 집단의 반종교적 행위문제, 타종교와의 융합을 통해 모든 인류가 화합하여 참된 인간을 완성하려는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문제 등 몇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유학
국권침탈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절인 유학자들을 이용, 성균관을 경학원 으로 격하시켜 한국유교의 맥을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전국 유림의 합의에 따라 경학원을 성균관 으로 환원시키고, 1964년 전국 유림의 결합체인 유도회를 결성함과 동시에, 성균관 대학교를 창설하여 유학정신에 바탕을 둔 대학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