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1부. 동, 서양 사상의 흐름과 고전
제3장 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 (1/2)
한국사상의 원류
한국사상의 원류가 되는 고대사상으로서는 상고시대의 원시신앙과 단군신화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우리 민족의 윤리관·가치관의 형성과 구체적인 생활양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애니미즘·토테미즘·샤머니즘 등의 우리 원시신앙은 고대 부족국가 확립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당시 씨족사회의 생활윤리규범을 제공하였고,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공동체 의식과 전통문화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원시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천인합일의 통일적 세계관과 홍익인간이라는 인본주의가 그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한민족은 고대에 형성된 우리 고유사상을 기반으로 유·불·선 3교와 서양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켜왔으나, 여기서는 불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우리 사상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
불교의 전래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경으로,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한창 발전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사회는 이미 씨족공동체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초부족적인 상태로 변해, 씨족사회의 무속신앙이나 조상숭배 사상만으로 새로운 고대 국가의 사회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따라서 불교라는 고등종교가 전래됨으로써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게 하여 고대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불교의 전래는 종교로서의 교리나 의식만이 아닌, 음악·미술·건축·의학 등의 문화의 전파까지 수반하는 것으로, 중국뿐 아니라 인도나 중앙 아시아의 문화도 소개함으로써, 한국의 고대 문화를 성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불교가 삼국에서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백제 침류왕 1년(384), 신라 법흥왕 14년(527)이다. 고구려에서 초기에 받아들인 불교는 중국에서 노장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려 했던 격의불교 였다. 예를 들면 불교의 공을 노장사상의 무로 해석하려 했다. 그뒤 문자왕 때에 이르러 불교 교학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중관계의 삼론종이 주류를 이루었다. 영류왕 때 일본에 간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는 중국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주로 율종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백제의 겸익은 성왕 때 인도에 직접가 소승불교의 논과 계율 관계의 경전을 가지고 와, 그중 율부를 번역해 백제 율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에서는 이외에 열반종·삼론종·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했다. 신라는 불교가 전래되기 전까지 문화수준이 가장 낮고, 고대국가의 성장도 늦었지만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고대국가의 체계를 정비하고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왕실과 밀착되어 상호이용의 관계를 가지고 국가적 후원 속에 확장되었다. 신라의 초기불교는 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의 승려 혜량은 진평왕 때 망명하여 최초의 국통이 되었다. 그뒤 원광은 중국에 유학해 불교를 널리 섭렵하고 돌아와서 세속오계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유학 이해는 조예가 깊어 세속오계 속에 반영되고 있다. 이는 당시 삼국통일을 앞두고 신라사회가 요청하던 사회적 질서·윤리를 불교의 권위를 빌어 제시한 것이다. 그 다음 자장은 대국통으로서 신라불교의 제도적 발전과 국가의 사상적 통일에 기여했다.
통일신라 삼국통일을 전후해 신라불교는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경전을 수입하고 교설을 소개하는 데 그친 이전의 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독자적인 교학 발전단계로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우선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체로서 그것을 실현한 후보다 넓은 세계관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삼국통일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의 높은 교학 수준을 널리 섭취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 있었다.
1.원효 한편 그 당시 인도와 중국 등 동아시아의 불교계는 대립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1.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 즉 석가 입적 후 1000년 인도 대승불교 철학에 발생한 공·유의 대립, 2.진(출세간의 진리)·속(세간의 진리)의 차별 문제였다. 여기서 공이란 영원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하는데, 중관학파는 공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유식학파는 공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대립하였다. 이 두 학파의 대립을 인도에서 해결하지 못하자 이 과제가 중국과 한국의 불교계에 넘어왔는데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원효다. 원효는「대승기신론소」에서 대립하는 여러 학파의 논리를 일심을 바탕으로 한 화쟁사상으로 화합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한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다는 일심이문론인데, 이 두 가지 문이란 진여문(중관학파)과 생멸문(유식학파)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대립한 듯 보이지만 일심(중생의 마음)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통하기 때문에 둘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이론에 입각해 세속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실천원리르 제시하고, 나아가 불교의 실천운동에 힘썼다. 그는 당시 신라불교가 주로 왕실이나 귀족 지배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일반민중과 유리되는 모순을 통찰해, 초탈한 행동으로 정토 사상을 통한 불교의 대중화에 전력 하였다. 원효의 사상은 당시의 중국에 수출되어 법장·징관 등에 영향을 주어 중국 화엄학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2.의상 그와 동시대의 인물인 의상은 원효와는 달리 유학해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어 문화에서 화엄학을 배웠다. 그때「화엄일승법계도」를 짓고, 신라로 돌아와「백화도량발원문」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실천적인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며, 원효의 경우와 같은 방대한 불교사상 체계나, 혹은 지엄의 문화에서 비길 만한 학문적 업적은 없다. 그는 법장의 이론적 태도와 구별되게 실천수행에 주력하여, 지엄은 의상에게는 의지, 법장에게는 문지의 호를 주었던 것이다. 의상의 이러한 경향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신라 화엄학의 특징을 이룬다. 의상과 그의 제자들의 실천 중시 경향은 신라 화엄학의 이론적 발전에 한계가 되어, 새로 대두된 선종의 공격을 받게 되는 나말여초에 이르러서는, 균여로 하여금 다시 지엄이나 법장 등의 중국 화엄학을 재발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의상이 뒤를 이어 화엄종을 하나의 종파로서 크게 발전시켰다. 이는 원효가 제자를 양성하지 않아, 고려대에 와서 의천에 의해 추앙되기 전까지 그의 사상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화엄종은 신라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종파일 뿐만 아니라 이후 줄곧 교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3.원측 화엄학과 더불어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은 유식학이다. 원측은 어려서 당에 가서 유식이론을 배우다가 후에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자, 그에게서 호법 계통의 새로운 유식이론을 배우고, 유식학의 주요경전의 주석에 힘썼다. 현장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규가의 토론을 벌일 때면 몰려든 스님들로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측은 법상종의 정통을 자처하던 규기와 그의 제자 혜소 등에 의해 이단시되어 배척당했다. 따라서 원측의 유식학은 중국에서는 계승되지 않고 신라에 전해져, 원측의 제자 도증이 귀국하면서 태현·경흥 등의 유식학자가 배출되었다.
선종의 전래 신라 하대로 들어오면서 불교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성립된 것이다. 원래 선종이 들어온 것은 통일 이전부터였다. 즉 달마시대를 제1조로 삼는 중국 선종이 6조 이후 남,북종으로 갈라지기 전에 제4조 도신의 선이 신라의 승려 법랑에 의해 전해졌으며, 이어 북종선이 신행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나 선종이 신라에서 크게 유행해 종파로 성립된 것은 821년, 남종선의 법을 도의가 귀국하면서 전한 때부터이다. 그후 계속해 홍척, 혜철, 무염, 도윤, 현욱, 범일 등 당에 유학했던 선승의 귀국과 더불어, 마조 문하의 여러 선풍이 각각 전래되면서 국내 각처에 선종 사찰이 세워져 선종 거점을 이룬 것이 이른바 구산선파이다. 통일 후의 신라불교는 화엄학과 유식학을 중심으로 교학면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그것은 고대국가의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있었을 때 그 지배체제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종은 교종의 기성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 사유방식을 극복케 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대두는 당시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세적인 지성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선승들은 대개 육두품 출신으로 지방호족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사원을 중심으로 거대한 장원을 형성하였다. 특히 나말여초의 선승들은 대부분 왕건에게 후삼국통일의 이념을 제시하고 나아가 왕건과 지방호족을 연결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학의 전래 한국에 유학이 전래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위만조선의 성립과 한사군의 설치를 계기로 해서 한자가 도입되어 사용되었으니, 이때 한문문화의 핵심인 유교사상도 함께 전래된 것으로 추측한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해나감에 따라 행정문서 및 외교문서 작성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고, 이러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한문에 능통한 유학자들을 관료로 채용했다.
삼국시대 고구려에는 태학이라는 국가교육기관에서 유학자를 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태학박사 이문진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에도 박사 고흥이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유학사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정도의 집단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늦게 유학을 신라에서는 불교로 사상통일을 이루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유교적인 덕목이 상당히 강조되었는데, 원광의 세속오계에 보이는 충효에 대한 강조와 임신 서기석에 보이는 충도에 대한 연마, 그리고 진흥왕 순수비에 보이는 자신의 내적 수양을 통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라는 구절 등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신라에 본격적으로 유학이 채용된 것은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치되면서부터인데, 아찬 이하의 한정된 관직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골품제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닌, 학문에 기준을 둔 관리가 일부에서나마 탄생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당시의 유학자로서는 강수와 설총이 있었는데 모두 문장에 뛰어났고, 유교적인 의리를 강조한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설총은 (화왕계)를 지어 군주의 도덕적 수양과 신하의 군주에 대한 참된 충성을 설파하여 당시의 유학이 전제왕권의 확립에 직접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유학자들은 모두 육두품 출신이라는 계급적 특성을 지니는데, 당시의 진골귀족들이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던 불교사상에 대해 충효라는 사회적 윤리규범을 내세워 왕권과 결합,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즉 신라의 유학사상은 왕권과 육두품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는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기구의 발전과 함께하고 있다. 원성왕 4년(788),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채용된 국학 출신의 유학자들은 인 이라는 보편적 원리를 근거로 한 국왕의 자애와 신하의 충성이 조화된 유교적 전체주의를 신라하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상정하고 지방호족의 할거에 따른 혼란을 충효라는 윤리의 확보에 의해 수습하려 하였다. 반진골, 반호족적인 입장에서 전제왕권을 지지하는 경향은 최치원, 김운경, 김가기 같은 도당 유학자들에게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당의 빈공과에 합격한 후 중국의 역사책에도 이름이 오를 정도로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자부심과 유학자적인 책인감을 가지고 그들은 시부책을 올리는 등 유교적인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호족세력의 발흥으로 말미암은 왕권 약화, 골품제의 한계 등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고려시대
선,교의 대립발전 신라하대 선종이 새로 성립되면서 시작된 5교 9산의 사상적 대립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게다가 화엄종 내에서도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선종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과 연결된 채 심한 분열상을 나타냈다. 고려 광종은 불교계 혁신을 위해, 당시 불교계를 교종과 선종으로 양립시키고, 교종은 화엄종 중심으로, 선종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법안종을 중심으로 통일하려 했다. 균여를 통해 화엄종단을 통합케 하고, 화엄종의 교리를 재정리하게 했다. 균여는 중국의 초기 화엄학을 재검토해, 중국의 지엄, 법장, 신라의 의상의 저서에 대해 주석을 썼다. 균여는 당시 교종의 2대 주류인 화엄종의 입장에서 법상종을 융회하는, 이른바 성상융회 사상을 폈다.
천태종 광종은 법안종을 후원함과 더불어 중국 천태종에도 유의해, 제관은 중국에 들어가 (천태사교의)를 지어 침체 되었던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켰고,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제13조가 되었다. 이처럼 광종 때의 교선통합은 천태종과 법안종이 서로 보완하는 입장에서 추구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개혁정치는 다시 보수세력에 의해 무산되고, 법안종이나 천태종은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지 못했다. 다만 그 융합사상은 뒤에 의천의 천태종 개창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후 100년 뒤 왕자 출신 의천은 불교계에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는 보수적인 귀족불교를 법상종이 융성하여 화엄종과 양립하였고, 따라서 선종은 제3종단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때 화엄종과 종측에서 등장한 의천은 법상종을 통합하고, 나아가 선종까지도 통합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교관겸수 와 지관 을 중시한 그의 교선통합은 교리적 발전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농후하여, 그가 죽자 천태종은 곧 쇠퇴하고 선종은 다시 독립하였으며, 화엄종은 균여파와 의천파로 분열되었다.
조계종 이후 얼마 안되어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고려 불교계에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선종의 부흥(조계종의 성립)과 신앙결사운동의 전개로 요약된다. 지금까지 왕실의 보호를 받던 교종세력은 무신정권에 반발하였고, 이로 인해 무신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대신 의천 이후 침체해 있던 선종세력이 최씨정권과 제휴함으로써 새로이 대두하였다. 이는 신라 말에 선종이 호족들에게 환영받았던 사실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계종의 세력을 크게 떨친 승려는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지눌의 사상은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돈오),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하며(후 점수), 이 수행에 있어서는 정, 혜를 함께닦아야 한다(정혜쌍수)는 것이다. 지눌의 이러한 사상은 중국 화엄종에서 방계로 취급되는 이통현의 화엄학과, 역시 중국 화엄에서 선교통합을 주장한 종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결국 선종을 위주로 교종과 조화를 시도한 것이다.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 라고 하여 교와 선이 본래 둘이 아닌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섭한 천태종보다는 교리적으로 한층 발전한 것이었다.
신앙결사운동 지눌은 이러한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피폐된 당시 불교계에 대한 혁신을 도모하여 신앙결사로서 수선사를 조직하였고, 뒤를 이어 진각국사 혜심과 원감국사 충지에 의해 조계종은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지눌의 심성론은 수선사가 주로 지방의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후기에 지방향리 출신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앙결사운동은 천태종 내에서도 일어났으니, 요세에 의해 조직된 백련사가 그것이다. 수선사와 함께 무신집권기의 가장 대표적 결사라 할 수 있는 백련사도 역시 불교계의 혁신과 기층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수선사가 기층민보다 지방의 지식인층을 주된 대상으로 하였음에 비하여, 백련사는 정토관에 보다 충실하여 기층사회의 교화에 전념하였다.
불교의 타락 그러나 이러한 불교계의 혁신적 기운은 몽고간섭기에 와서 단절되었다. 최씨정권과 밀착해 있던 수선사는 몽고의 억압을 받아 위축되었고, 백련사는 고려왕실 및 원황실의 원찰인 묘련사로 변질되었으며, 이에 대신해서 균여파 화엄종과 법상종, 그리고 (삼국유사)의 일연이 이끄는 선종 가지산파가 부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고려왕실과 원의 후원을 받으며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고리대나 양주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승려는 세속화되어 혼란한 고려사회를 더이상 이끌 수 있는 정신적 역할을 못하자, 이것이 곧 성리학의 수용에 따른 유불 교체의 요인이 되었다.
유학의 발전
고려시대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광종이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성종이 유학자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숭유정책을 실시하였으니 유교는 정치의 사상체계로 확립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는 이국의 본이요, 불교는 수신의 본이다 라고 한 최승로의 말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지배층인 귀족이 문신들로 구성되고 문치주의를 표방함에 따라 숭문의 풍조는 더하였다. 유학이 크게 융성한 고려 문종 때, 해동공자인 최충은 9제학당을 세웠고, 이를 모델로 하여 11개의 사학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학의 융성은 상대적으로 관학의 쇠퇴를 가져와 숙종 때부터는 관학의 진흥책이 도모되었다. 고려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함으로써 신라의 종교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이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가 성립하였으니 확실히 하나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유학자들은 과거준비에만 급급하여 유학의 이론이나 사상면에서의 폭넓은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훈고학, 사장학에 치중한 고려의 유학은 중기 이후 귀족취향의 보수적인 경향으로 떨어지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성리학의 전래 유학이 불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념으로 부흥되는 것은 고려의 귀족사회의 모순이 첨예화되는 13세기 후반부터이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는 신흥 사대부로 하여금 새로운 지도이념을 모색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들어온 성리학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성리학은 송의 주자가 완성한 것으로 한, 당시대의 훈고학적 유학 대신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신유학이다. 고려는 이미 심성화된 선종의 융성으로 성리학 수용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어 그것을 용이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성리학은 충렬왕 때 안향이 소개한 후, 백이정이 원에 가서 배워와 이제현, 박충좌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이색, 이숭인, 정몽주, 길재, 권근, 정도전 등이 발전시켰다. 이들 주자학자들은 자신이 처한 계급적 위치에 따라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 귀족관료 출신의 온건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한 향리 출신의 급진파로 나누어진다. 온건파는 토지개혁을 점진적으로 행할 것을 주장하고 불교비판에서도 불교의 교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닌 승려와 사찰의 폐해를 지적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해 급진파는 즉각적인 토지개혁을 통한 민생안정을 주장하고, 불교에 대해서도 사상 자체의 이론적 비판을 통해 불교 자체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결국 고려왕조에 대한 계속적인 충성과 역성혁명에 의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고 정몽주의 피살과 조선의 개국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