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1부. 동, 서양 사상의 흐름과 고전
제2장 중국사상과 흐름과 고전
중국사상의 원류
중국사상의 원류로는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사상,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사상을 들 수 있으며, 여기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사상까지를 포함하여 동양사상의 원류로 간주한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계속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중국사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현실주의적 경향
중국인의 사상은 현실생활에 밀착되어 있다. 추상적, 이론적 사색에 잠기지 않고 현세와 떨어진 피안 또는 형이상학적 세계 등을 추구하는 일보다는,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생각하는 데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조화적 경향
상대 개념의 사고형식이 현저하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물을 상대되는 두 요소로 나누어 파악하는 사고방법으로서 가장 전형적인 것은 음양사상인데, 그저 단순하게 모순 대립하는 두 이질적인 성격의 것으로 구분지어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적인 것으로 보는 동시에 이 양자의 조화와 안정을 중시한다. 그것은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중히 여기는 사고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천명사상
중국인은 고대 이레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종 하늘에 대한 숭앙의 염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은 천공이지만 단순히 자연현상으로서의 천공일 뿐만 아니라 조물주 또는 조화의 근원이어서 사람 및 기타 만물을 낳고 자연계 인간계를 주재하며, 이러한 작용은 모두 천명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사는 세계 전체를 천하라고 하고, 이것을 통치하는 지배자를 천자라 일컬으며 천자는 천명에 따라 천하에 군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은 이러한 모든 인간사의 주재자이므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사람의 길 은 하늘의 길을 근간으로 해야 하며, 요컨대 사람은 하늘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이사상
또한 천하의 관념과 관련하여 화이사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민족 특유의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중화라는 고도의 문화를 가진 한민족에 대하여 주변의 이민족을 이적(오랑캐)이라 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야만인으로 간주하고 이는 화의 문화를 추앙하고 화에 복속해야 하고, 중화의 문화가 미치는 모든 지역이 천하이고 그것이 세계 전체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위와 같은 특징을 가지는 중국사상의 흐름은 대개 4기로 나눈다.
태고-전한말기(BC 1세기 말)
중국사상의 성립
제1기는 중국사상의 성립기로, 은나라 때인 BC 15세기 무렵 이후이다. 은나라 때에는 제로 불리는 하늘의 신을 최고 신으로 삼고, 각 씨족의 조상인, 산, 강, 초목 등 기타 여러 신들을 숭상하여, 이러한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행운을 기원하며 또 중요한 행사는 점을 쳐서 신의를 확인하고 난 뒤 실행에 옮겼다. 주나라 때에도 은나라 때의 상제신앙을 이어받아, 하늘을 신앙 하였다. 그래서 주나라 초기에 주공이 제정했다고 전해지는 주례는 하늘과 그밖의 여러 신을 모시는 종교의식임과 동시에 천하통치를 위한 정치형태이자 동시에 신분제도를 규정하는 예제이기도 하였다.
제자백가 사상
중국사상은 춘추시대 후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친 시기(BC 6세기말~BC 3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는 중국사상에서 최고의 황금시대로 제자백가라 불리는 수많은 학파·사상가가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주요 사상가 군은 유가·묵가·명가·도가·법가·음양가의 6가였다.
유가사상
가장 일찍 등장한 것은 유가로서, 공구(공자)를 시조로 하여 맹가(맹자), 순황(순자)등으로 이어지면서 유력한 학파가 되었다. 유가는 전통적인 예에 입각하여 인류의 질서와 도덕을 중시하고,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인격의 도야를 목표로 하였다. 또 그러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인·의·예·지·신등의 덕목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성과를 정치의 장으로 확대시켜, 덕치주의를 주장했다. 이 훌륭한 인격의 형성과 이것을 기반으로 하는 덕치의 구상은 수기치인의 도라 하여 이후 오랫동안 유가사상의 근본을 이루었다. 묵적(묵자)으로 대표되는 묵가는 유가와 비슷한 점도 있지만, 유가의 형식주의와 불평등성을 신랄히 비판하고, 겸애교리, 즉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남도 사랑하여 자타가 상호간에 이익되게 해야 한다면서 인간평등을 외쳤다. 아울러 절약과 비공등 공리주의적인 주장을 폈다. 혜시·공손룡등으로 대표되는 명가는 사람의 인식과 언어의 논리를 분석하고 고찰했다. 도가의 무사상의 성립은 이같은 명가의 논리에 관한 고찰과 관계가 있었다.
도가사상
이이(노자)와 장주로 대표되는 도가의 사상은 무라는 성격을 가진 도를 만물의 근원으로 제시하고, 사람은 그 무인 도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무위자연을 설하며, 여러 집착에서 초월하여 절대경지에 이르는 것이 진실로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하였다. 그리고 유교의 인위적인 도덕윤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일반백성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있다. 상앙·한비로 대표되는 법가는 유가에서 중시하는 자연발생적인 불문율인 예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부정하고, 시대의 변화에 적합한 법(실정법)을 제정·공포함과 동시에, 신상필벌주의에 의하여 귀족·평민을 불문하고 그 법을 엄격하게 정진하고록 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군주권의 강화를 지향했다. 음양가는 추연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자연철학 및 역사철학을 내세운 사람들로서, 음양과 5행을 원리로하여 자연계·인간계를 망라하여 사상이 성립·변화하는 모든 양상을 설명하려 하였다. 이는 결국 중국인들로 하여금 자연현상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포기하게 만들어 중국과학 발전을 저해한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이상의 6가 외에 농업생산의 중시를 설하는 농가, 현종연횡등 외교상의 책략을 논하는 종횡가, 병법을 논하는 병가등이 있으며 또 복수의 학파사상을 두루 지니고 있어 특정 1가의 사상으로 볼 수 없는 사상은 잡가라고 하였다.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 초(BC 11세기)에 성립한 봉건제도의 정치제도가 붕괴되고 중앙집권체제로 옮겨가는 과정에 해당하며, 여러 나라 가운데 중앙집권화를 가장 빨리 추진한 진이 천하를 통일 하자, 그 중앙집권체제를 중국전역에 확대시행하였다.
이와 같이 선진시대에 있어서 중국사상 형성의 주된 담당자는 사대부 안정을 얻으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또 그러한 격변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활발한 논의를 전개했다. 그것이 제자백가 사상 내용의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여러 유형의 사상이 성립했다. 이 가운데 예와 질서를 중시하여 수기치인의 도를 설한 유가의 사상은 치자계급의 가장 표준적인 사상이다. 묵가는 공리주의 입장에서 유가가 중시하는 예를 비판한 분명히 성격이 다른 사상이다. 도가사상은 상식적인 사회생활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이었다. 법가는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체제로 변화해 가고 있던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학파와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진·한 시대초에 걸쳐(BC 3세기 후반∼BC 2세기 중엽) 여러면으로 사상의 정리와 이론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그 뒤를 한이 이어받아 강력한 제국이 성립되자 이것을 이론화시킬 정치 철학이 요구되는 동시에 사상의 통제가 시도되었다. 진나라 때에는 법가사상에 의한 사상통일이 이루어져 유가는 분서갱유라는 심한 탄압을 받았다.
관학화된 유교
한나라 초기에는 황로사상 이 유행했는데, 이것은 법가사상을 토대로 하여 노자의 허정무위의 설을 도입한 통치술 및 여기에 부수되는 처세관 이었으나, 무제(BC 2세기 후반) 때부터 유가사상 존중의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무제는 유교사상으로 천하의 사상을 통일해야만 한다는 취지의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 국교화의 길을 열었다. 즉 전한시대 말 성제·애제 무렵에 이르러 그 결실을 맺게 되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 가운데서 유가사상만이 정통사상으로 인정받는 유가일존의 상황이 도래되었다. 이 당시 역사 서술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있어, 전한의 사마천과 후한의 반고에 의해 사는 경에서 독립하여 독자적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사마천은「사기」에서 독특한 기전체를 확립하고, 반고는「사기」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한서」를 남겼다.
전한말∼북송중기 : 경학과 종교사상
경전연구 활성화
제2기의 시작을 이루는 유가일존의 사상은 왕망의 새로운 유교존숭 정책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후한도 유교존숭 방침으로 이어져 유교가 국가지도 이념으로 공인되었고, 유교를 국책으로 하는 상황이 이후 청나라 말기의 제3기가 끝날 때까지 거의 2,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처럼 유가사상이 권위를 갖게 되자 유교경전의 권위가 높아지고, 경전의 연구 주석이 활발히 이루어져 제 2기 동안에 각 경전에 대한 주석서가 수없이 만들어졌다. 경전도 5경에서 점차 수가 늘어나 13경이 되었다. 한편 경전의 원본 및 해석의 정리 통일을 꾀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서 당나라 초에「오경정의」가 만들어진 것을 비롯하여, 그것을 확대시켜, 제2기가 끝날 때까지「십삼경주소」라고 불리는 표준적인 주석이 성립하였다. 이와 같이 주석을 학문으로 하는 경학이 매우 활성화되었고, 유교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필수적인 교양으로 중시되기는 했지만, 그 권위는 다분히 형식적이었으므로 사상으로서의 활력이 부족하였다.
도참사상
실제로 민간의 실제 생활에 깊은 연관을 갖고 있던 것은, 한나라 때에는 음양오행설이나 참위설등의 신비사상, 위진시대(3∼4세기)에는 노장사상, 남북조시대로 부터 수·당시대에 와서는 외래의 불교와 신흥의 도교였다. 음양오행 사상은 전한·후한을 통해서 성행했는데 원래는 선진시대 음양가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음양오행의 변화와 결합에 따라서 자연현상과 인간계의 사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었지만, 점차 비합리·미신적인 요소가 증가되어 신비화 되었다. 참위는 참기와 위서를 말한다. 참기는 예언서, 위서는 천인합일·재이서상의 사상 및 음양오행사상·신선사상 등의 신비사상에 의하여 경서를 해석한 서책을 말한다. 참은 선진시대부터 행해졌지만 특히 한나라 때 유행하여 위서의 설에도 혼입 되었다. 위서는 전한시대 말부터 많이 만들어졌으며 위서의 설은 정통경학에도 도입되었다. 한나라 때에는 유가사상 전체가 신비사상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진시대에는 노장사상이 유행하였다. 귀족 등의 상류사회에서는 정치논의나 인물평론과 함께 현학이라 불리는 철학 논의가 성행하였는데, 삼현(「노자」「장자」「역경」)이 화제에 많이 올랐다. 죽림칠현 등으로 유명한 청담도 이러한 종류의 담론이었다.
중국적 불교의 성립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제2기 초에 서역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불타가 신선과 동일시된 시기도 있었지만, 이윽고 명상에 의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명지를 얻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위진시대로부터 남북조에 걸쳐 점차 성행하여 많은 불전(주로 대승불교의 경전)이 반입, 한역되었다. 일반에게 그 교리를 쉽게 하기 위하여 노장사상으로 불교용어를 설명하려 한 격의불교가 한때 유행하기도 했으나, 도안이나 인도출신의 구마라습 등의 본격적인 불전연구와 역경에 힘입어 격의의 영역을 벗어나 중국불교의 기초를 확립하고, 법현·현장 등은 직접 인도에 가서 불전을 가지고 돌아와 한역하였다. 또 도교와의 마찰로 수차례에 걸친 폐불정책의 타격을 받으면서도 발전을 거듭했으며, 특히 수·당나라 때(6세기 말∼9세기)에는 명승이 배출되어 수나라 길장등의 삼론종, 지의 등의 천태종, 신행 등의 삼계교, 당나라 현장 등의 법상종, 법장 등의 화엄종, 도선 등의 율종, 북인도 사람 불공삼장 등의 밀교, 혜능·신수 등의 선종, 선도 등의 정토교 등 많은 종파가 성립하여 중국 독자적인 불교가 확립되었다. 특히 중국남방 선종의 창시자인 혜능은 제자들을 통해「육조단경」을 남겨 인도식 불교와는 상당히 다른 중국식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이상 중국 불교의 전개를 살펴보면, 폐불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치 권력의 비호를 받아 국가진호의 종교로 발전했다. 또한 교의로서는 매우 고도의 이론이 전개되었지만, 민간에서는 현세 구복적 성격이 강했다.
국가에 의한 도교의 발전
도교는 후한 말 장릉이 일으킨 천사도(오두미교)와 이를 발전시킨 장각의 태평도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종래의 노장사상과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사상 등을 수용하여 건강법이나 연단술, 기타 장생과 복록을 얻는 법을 설하는 현세적인 민간종교로 성장해갔다. 도교는 어느 정도 도가의 설을 받아들였고, 노자를 교조신처럼 받들었지만 노장의 도가사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교의로서는 도가 외에 불교와 유교의 설까지도 받아들였다. 민간종교로 출발했지만 북위와 구겸지에 이르러 도교라는 종교로 발전하게 되고, 북위의 국교가 되어 폐불사건을 일으키면서 당에 이르러서는 최대의 세력을 떨쳤다.
북송중기 - 아편전쟁 : 성리학의 전개
성리학
성리학은 원시유교나 한 당시대의 훈고학과는 다른 유학으로 송학·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은 이론의 학문, 즉 철학이지만 경학의 면도 갖추고 있어, 경전을 깊이 고찰·연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불교의 이론이나 노장·도교의 설까지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종래의 유가사상에 결여되었던 고도의 철학이론을 수립, 그 이론에 의하여 경전을 새로이 해석했다. 그들이 구축한 이 독자적 철학이론 체계이론 신유학의 큰 특색이 있는데, 그 학문의 본질은 이론체계 수립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론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 자기인격 수양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성리학을 대성시킨 것은 남송의 주희로 북송의 주돈이(주염계), 장재(장횡거), 정호(정명도), 정이(정이천), 소옹(소강철) 등의 철학을 계승하였고, 특히 정이의 학설을 많이 수용·종합하여 주자학이라는 독자적인 학문을 완성했다. 주희의 철학이론은「근사록」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와 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는 사물본연의 상태를 규정하는 존재원리이고 기 는 물질의 근원이다. 이는 또 사람은 이렇게 존재해야 한다 는 이상적인 인간성의 전형이며, 사람은 이렇게 해야된다고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주희의 본체론은 모든 사물은 이와 기에 의하여 성립하고 존재한다고 하는 이기이원론 이지만 기보다 이를 근원적 존재로서 파악했다. 사람의 성에 있어서도 성즉리 라는 명제를 내세워 이에 의하여 성을 설하며, 사람의 성은 순수하고 지극히 선하다는 성선설을 내세웠다. 그리고 사람은 모든 사물의 이를 인식하여 마음을 이에 합치시킨 상태로 유지시켜 이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그것이 학문(수양)이라고 하였다. 또 화이의 구별과 오륜의 명분을 분명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후 주자학을 신봉하거나 계승하는 학자가 수없이 나왔다. 또 원나라 때에는 과거시험에서 경전의 해석으로 주자학계 주석설이 채용되었으며, 명의 영락시대(15세기 초)이후는 관학으로서의 주자학의 위치가 더욱 강화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루렀다.
양명학의 등장
한편 주자학과 경향이 다른 사상으로는 심학의 경향이 있었다. 같은 유가사상 내부에서 주희와 같은 시대의 육구연은 주희가 설하는 사물의 이를 아는 것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마음의 수련에 진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량·섭적 등의 사공학파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주자학을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여 주희와 각각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중에서 심학의 요소가 성장하여, 진헌장 무렵부터주자학을 탈피하기 시작하였고, 왕수인(왕양명)에 이르러 양명학으로 대성되었다. 왕양명의 저서「전습록」에 잘 나타나 있는 양명학은 심즉리 지행합일 차양지 설을 핵심으로 했고, 그중에서도 자기 마음의 양지(시비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선천적인 지력)를 신뢰하고, 양지의 판단대로 행위하라고 하는 치양지 의 가르침을 궁극적으로 하는 심중지·실천중시의 철학이었다. 한편 왕수인과 같은 연대의 나흠순·왕정상 등은 주자학에서 설하는 이른바 기보다도 근원적 존재원리인 이를 인정하지 않고, 기는 기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변화·운동하여 사물을 형성 한다고 하면서 이보다도 기를 근원적 존재로 보는 기일원론의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기의 철학은 그뒤에도 발전하여 청나라 중기의 대진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완성되었다. 대진에 의하면 기 즉, 육체에 부수되는 정이나 욕(주자학에서는 정이나 욕은 악의 근원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을 고유의 것으로 적극 긍정한 뒤 성선설을 제창했다. 주희의 이의 철학은 이라고 하는 사회규범을 중시하는 철학이기 때문에 관학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의 철학은 현실생활을 중요시하는 철학이고, 왕수인의 심학은 마음의 권위, 자기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철학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은 본래 비관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 주자학에서 설하는 규범과 별개의 원리에 따른 새로운 도덕을 확립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 점에서는 주자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또 주자학을 무너뜨리고 그에 대신할 수도 없었다. 왕수인 출현 후의 주자학계에서는 주자학보다 양명학이 우세한 시기가 있었고, 왕수인이 죽은 후에 2,3개파로 나뉘어 17세기 초까지도 양명학이 성했지만 그후 쇠퇴하였고, 아울러 수양학문으로서 성리학의 발전은 더이상 없게 되었다.
경제학, 고증학, 공양학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초(17세기 중반)의 혼란기에는 이에 대신하여 경세치용의 실학이 제창되었고, 정치론이나 사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의 중국지배가 확립되고 나라가 안정되자, 실학의 요소가 약해져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고문서를 실증하려는 청조고증학이 학계를 휩쓸었다. 그 고전연구가 성과에 의하여 종래의 고전해석에 수정을 요하는 곳이 많이 생겨났지만, 명교로서의 주자학의 권위에 흔들림이 없었다. 또한 19세기에는 정치색이 짙은 공양학이 성행하였다.
불교의 명맥유지
수·당시대에 융성했던 중국의 불교는 845년 제2기 말기에 당나라 무종 폐불과 955년 오대 후주의 세종 폐불 등 두 차례의 탄압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뒤 선종과 정토교가 살아남아서 제3기에는 이 둘을 중심으로 제종겸수의 형태를 취한 융합적이고 민중적인 불교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불립문자를 표방하여 불전의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타좌선정을 통하여 자력으로 불교이치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오로지 염불로써 극락정토 왕생을 얻을 수 있다는 정토교는 가장 민중적인 가르침이어서 폭넓은 귀의를 얻게 되었다.
도교의 민간종교화
도교는 가장 융성하였던 당나라 때를 이어 송나라 때에는 민간종교로 계속 번성하였다. 남송 때 금나라가 지배하는 화북에서 새로운 도교가 생겼는데, 그 가운데 왕철이 시작한 전진교는 주술성을 배제하고 타좌수양하여 도를 깨닫는 것을 지향했으며, 윤리적인 실천을 중요시하고 교단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유·불·도 3교 사이에서 유교는 불교·도교를 이단시하고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주자학이나 양명학도 원래 이들의 학설을 수용한 면도 있었고, 특히 양명학 계통에서는 3교의 조화합일을 설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불교에서는 내부적으로 여러 종파의 융합, 겸수, 특히 선종과 정토교의 융합을 주장하였는데 명나라 말에는 다시 3교합일론이 제기되었다. 도교에서는 이러한 3교합일의 풍조를 배경으로 선서(인과응보 권선징악 사상을 기초로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하는 책)를 많이 만들어 보급하였다.
서양학술의 전래
당나라 초(7세기)에 경교(크리스트교의 네스토리우스 파)가 전래된 일이 있었지만, 그로 부터 수백년이 지난 명나라 말(16세기 말)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카톨릭을 중국에 전해왔다. 1583년에 이탈리아의 마태오 리치는 중국 본토에 들어와 1601년 베이징(북경)에서 공식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밖에도 상당수의 선교사가 차례로 도래하여 지식층과 민중에 대한 포교로, 어느 정도 신자를 확보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자체보다 오히려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유럽의 과학기술(주로 수학·천문학·측량·수리·병기 등에 관한 기술)이 환영을 받았고, 특히 천문역학 면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그 뛰어남을 인정하여 공식채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럽의 학문은 명·청 시대를 통하여 이 방면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을 자극하여 학문진보에 기여한 바가 컸다. 왕수인의 심학이나 나흠순의 기의 철학 이 나온 16세기 이후(혹은 양명학이 쇠퇴한 명말 청초 17세기 이후)를 제 3기에서 제 4기로의 과도기로 본다.
아편전쟁이후 : 전통사상의 변용
중국의 근대화운동
1840∼42년의 아편전쟁으로 상징되는 구미자본주의 경제의 중국진출에 따라 중국의 서양 근대문화와의 접촉이 증대하였고, 이로 인해 전통사상이 충격을 받아 중국인의 사상 또한 근대화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에서 영국군에게 패한 뒤 태평천국운동과 그밖의 반란이 종종 일어났고 또 애로호 사건으로(1856)으로 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등 중국은 연이어 어려운 국면을 맞았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서양의 선진과학기술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통감한 유력한 관료들이 서양식 공장을 설립하여 병기나 함선제조에 힘을 쏟았다. 이를 양무운동 이라 하며 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서 중체서용론이 제시되었다. 인륜도덕 등 근본적인 정신적 기반은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를 지주로 삼고,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면에서도 서양의 앞선 부분을 받아들여 이용하자는 사고 방식이다. 정치면에서는 공양학자 강유위 등에 의한 변법운동 이 도모되었다. 청의 광서제는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조정의 정치대변혁을 꾀하였으므며, 이 의견을 받아들여 1898년 여러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것을 무술변법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신정은 약 백일 만에 서태후 등 보수파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변법은 실패로 끝났다. 강유위는「대동서」에서 제국주의의 침략과 내부적경직성으로 붕괴위기에 처한 중국의 현실을 타개할 방향으로 대동세계를 제시했다. 양무운동이나 중체서용론은 기술부문에서만 서양문화를 이용하려는 발상인 반면, 변법운동은 정치나 경제제도까지도 서양의 근대적인 요소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서양에 관한 지식도 충분치는 않았지만, 19세기 말부터 엄복이 T. H. 헉슬리의「진화와 윤리」(1893)를 번역한「천연론」(1898)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가 나와 서양사상 문화의 대량적인 소개와 수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여 외래의 근대적인 여러 사상괴의 본격적인 대결 또는 그 수용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점에 대하여 중국인의 대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손문의 삼민주의
서구화 반대론이나 전통문화 수호의 주장도 끝까지 끈질기게 나왔고 여러 논점을 둘러싸고 많은 토론이 되풀이되곤 했지만, 결국 대세는 서구사상을 받아들여 중국의 사상 자체가 근대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갔다. 이에 따라 청나라 조정을 타개하기 위한 혁명사상도 활발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손문의 삼민주의 로 이것은 유교적인 바탕 위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멸만흥한을 기치로 내건 반청조적인 면과 외국의 압박에 반발하는 배외적인 면을 겸한 것이었다. 현재 중국과 대만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손문은「삼민주의」를 남겨 현재까지도 중국국민당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손문 등의 혁명운동은 1911년 신해혁명을 성공시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다만 그뒤에는 북양군벌인 원세개 등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여 혁명의 성과는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모택동
제1차 세계대전 종결의 강화조약이 체결되는 데 있어서 일본이 중국에 제시한 21개 조의 요구에 대한 중국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학생들의 시위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항의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는데, 이는 정치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큰 문화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을 5·4운동이라 한다. 그 주류를 이룬 사상은 중국의 현상황을 대외적으로 반식민지, 대내적으로 반봉건제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단계를 보고,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의 입장에서 전통사상을 비판하고 철저한 근대화를 기한 것인데, 특히 민주주의와 서양학문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또 다분히 사회주의 색체를 띠고 있었다. 1921년 진독수등이 중국 공산당을 결성하였고, 손문이 주재하는 국민당은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하여 국민혁명을 추진했다. 손문의 뒤를 이은 장개석이 북방의 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벌에 성공하고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 주석에 취임했는데 장개석은 복고적인 정책을 취하여 공산당과 대립함으로써 국공은 분열되었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국에는 항일전쟁 시기가 오래 계속되었다. 이 사이 공산당은 모택동이 주석이 되고 제2차 국공합작도 이루어져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으나, 1945년 일본의 항복을 사이에 두고 국공의 내전이 재연되어, 1949년 결국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신민주주의 노선에 입각한 사회주의국가 건설이 시작되었다. 한편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혁명의 경험을 총결하여「실천론」을 저술 했다. 문화대혁명의 종말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모택동이 추진했던 각종 개혁과 대약진운동 , 그리고 중국의 전통문화를 철저히 파괴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던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사망(1976)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1978년 등소평은 주도권을 잡으면서, 4대노선(농업·공업·과학기술·군사)의 현대화 추구에 주력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모택동의 개혁이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가 송두리째 유린당하면서도 결국 남은 것은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갈등뿐이라는 현실을 중국인들이 깨닫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사상의 현대적 의미
개인의 내면적·도덕적인 자각을 중시하는 중국사상은 오늘날 현대 산업 사회에서 중요한 원리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소외·배금주의·환경오염 등의 병폐현상이 만연되고 있는 오늘날, 우주와 인간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인간과 자연간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한 중국사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