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1부. 동, 서양 사상의 흐름과 고전
제1장 서양사상의 흐름과 고전 (1/2)
서양사상은 인류역사의 변천과 더불어 약 2,500년 동안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발전해왔는데, 이들 사상의 공통점은 1차적으로 신과 자연,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근본원리를 도출하여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의미와 본성을 밝히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본성을 두 가지로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이성 적 측면을 중시한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적 욕구충족을 중시한 사상이다. 그리스 철학, 스토이즘, 합리론, 관념론(특히 칸트)은 이성적 측면을 강조한 사상인데, 주로 보편주의적 세계관을 취하였다. 반면 키레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경험론, 자연주의 윤리설, 공리주의 등은 감각적 측면을 강조한 사상으로, 주로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취했다.
서양사상의 원류
영국의 비평가 매튜 아놀드는 세계역사는 헬레니즘과 해브라이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고 했다. 이는 오늘날 서양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2개의 지주를 그리스 정신과 크리스트교 정신으로 본 것이다. 그리스 사상은 인간중심 사상으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존중하고 인간의 현세적 의미의 긍정과 자아를 강조하여, 후에 서양의 철학.과학.문학(사실주의).예술 등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반면 크리스트교 사상은 신중심으로 특히 영성과 덕성을 존중하고 내세적인 성격을 띠는데, 이는 뒤에 신학.예술.문학(낭만주의) 등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 사상(헬레니즘)
동양문명에 대응하는 가장 뚜렷한 서양문명의 원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원전 5세기경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나면서 그리스 사상의 무대는 그리스 본토에 있는 아테네로 옮겨져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때부터 서양사상의 원류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과학과 철학, 문학과 미술, 정치와 각종 제도 등이 이전에 비해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체계화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철학자는 3단계의 발전과정, 즉 1.자연철학 2.소피스트(궤변학파) 3.고전철학의 시기로 파악된다. 자연철학의 시기는 자연계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시기로서, 자연현상을 해석함에 있어 신화의 단계를 벗어난 수준이었고, 소피스트 학파는 주로 자연보다는 인간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의 지적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 라고 하면서, 인간의 감각적 경험과 그 유용성이 모든 사물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소피스트들에게 있어서 가치판단의 주체는 곧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진리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회의주의.개인주의에 대항하여 절대적 진리의 기준을 확립하려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로서 그리스 고전철학이 성립되었다.
1. 소크라테스
고전철학 시대에는 인식론과 윤리학 및 사회철학에 있어 치밀한 체계가 나왔는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서양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철학운동의 기수는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남긴 저술에 의해 그의 사상을 분석해볼 수밖에 없다. 소피스트들이나 소크라테스는 다 같이, 자연보다는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 점에 대해서는 공통적이었으나,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진리의 상대성 에 대해,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보편적.절대적으로 실재하는 진리나 지식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러한 진리나 지식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있는 보편적 이성 활동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진리와 지식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지행합일설을 제시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의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나 지식을 발견하고 이를 실행할 때에 선하고 행복한 삶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실제생활 속에서 악한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까닭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옳고 그른지를 모르는 무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델포이 신전에 씌어 있던 너 자신을 알라 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자각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참된 앎을 통해 덕을 쌓아 갈 때에 비로소 행복을 누린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덕복합일설은 앞에서 제시된 지행합일설과 그 맥을 같이한다.
2. 플라톤
인간의 이성 에 근거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졌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윤리사상을 이어받아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현상의 세계는 다만 이데아 세계의 불완전한 모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진리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선의 이데아를 모방해서 이를 실현해가는 것을 참된 삶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간이 자신의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자아를 실현해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자아실현은 구체적으로 지혜.용기.절제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정의 를 실현할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혜.용기.절제의 덕을 개인이 갖추어야 할 덕이라고 한다면, 정의 는 개인의 덕들이 사회 속에서 실현될 때 나타나는 사회의 덕, 즉 이상국가의 덕이다. 그의 이러한 정치사상은 정치공동체에서 인간의 삶이 가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에 관한 성찰을 담고 있는 <국가>에서 철인왕에의해 통치되는 정의로운 국가가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이 제시한 이러한 4주덕은 그 이후 서양사상에서 강조된 덕목이었다.
3.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최고선의 실현, 행복추구, 이성적 자아의 실현에 두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성에 의해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생활을 절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덕에 대해서 말하기를 단순히 지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위를 실천하고자하는 선의지 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의지를 함양하기 위한 실천적 덕으로서 중용(middle of the road)을 제시하였다. 중용이란, 이성에 의해 일상생활에서의 충동.정욕.감정 등을 억제함으로써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습관화한 덕이다. 그는 또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하면서, 개인의 이성적 자아실현은 사회나 국가에서의 실천적 도덕생활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고 정치사상은 정치학이 학문으로서의 독립된 지위를 얻게 한 그의 저서 <정치학>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정치공동체의 성격과 장단점, 가장 좋은 나라의 체제, 당시 국가체제들의 비판, 그 외의 서양정치학의 기본개념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한편 그리스의 역사기술은 그후의 역사학 발달에 크게 기여하는데,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그 주역이다. 기원전 5세기 초반의 페르시아 전쟁을 그린 <역사>는 동서양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는 최초의 서양 역사기록으로,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를, 폭군의 통치에 대한 법의 통치의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여러 지방에 걸친 그의 여행과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된 이 책에서, 우리는 동방대국의 침략을 물리친 그리스 인의 자부심과 자아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단초를 읽을 수 있으나, 대체로 문화적 설화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어 나타난 위대한 과학적 역사가는 투키디데스로, 그는 사료에 대한 주의깊은 검토를 바탕으로 역사를 자연과 구별지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아테네 인들에 대한 동정을 억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여 기술하였다. 그는 과거사실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교훈적 역사를 서술하고자 하였으나, 사회적.경제적인 면을 되외시하였다는 점에 그의 역사관의 결함이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기원전 334년)부터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제국을 건설할 때(기원전 30년)까지 300년을 헬레니즘 시대라 한다. 동서융합정책으로 그리스의 이상은 대부분 상실되어, 새로운 문명 즉, 그리스 문화와 동방문화가 혼합되어 새로운 그리스 풍의 세계적인 성격을 띤 문화와 구별하여 헬레니즘 문화(Hellenistic Culture)라고 부른다. 폴리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그리스인들의 공동체적 생활약식은 그리스와 국력이 쇠퇴함에 따라 점차 개인주의적 생활양식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지방을 위시한 동방문화가 융합되어 범세계적인 헬레니즘 문화가 발전되어감에 따라, 그리스 인들의 자유로운 안심입명을 시도하는 이기주의나 세계시민의 철학사상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그리스 문화를 로마까지 연결시킨 교량적 역활을 한 헬레니즘 문화는 상대주의.세계주의.개인주의.도피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는데, 대표적인 사상에는 스토아 학파(금욕주의 사상)와 에피쿠로스 학파(쾌락주의 사상)가 있다.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 사상은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제논에 의해 제시되었다. 제논은 인생의 궁극목적인 최고선과 행복이, 이성활동에 의해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apatheia)'를 유지해나갈 때 실현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생활태도로서 보편적 우주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법칙에 따르는 생활을 들었다.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윤리사상은 그후 2세기경에 이르러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 사상은 당시 로마의 만민법과 중세 및 근대의 자연법사상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윤리사상은 스토아학파의 사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에피쿠로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그는 정신적인 쾌락을 통해서만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정신적 평정상태(ataraxia)를 얻을 수 있으며, 진정한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플라톤의 4주덕을 받아들였다. 그 덕들은 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고 행위를 정당하게 판별할 수 있게 해주며 윤리사상은 그후 근대 영국 경험론과 공리주의 윤리설에 영향을 미쳤다.
로마의 사상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에 의해 고대사의 호수라고 평가되는 로마는, 그리스를 비롯한 이전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종합하여 전세계에 보급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그리스 인의 독창성을 로마의 조직성으로 엮어 오늘날의 서양문명의 기초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로마문화가 단순한 매개체 역할에 안주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독일의 법학자 예링은 "로마는 무력과 종교와 법률로써 세계를 세 번 통일하였다." 고말했듯이, 로마의 자연법사상과 크리스트교는 중세 이후 서양문명의 중요한 요소로서 성장하게 된다. 로마법은 일개의 시민법에서 시작하여 지역과 민족을 초월한 항구불변의 자연법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발전을 거듭하여, 서양세계에 자유 와 평등 의 관념이 싹트게 하였다. 또한 크리스트교는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기까지 박해와 순교를 거듭하였으나, 서로마 멸망 후에는 유럽세계의 혼란 속에서 정신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세계종교로서 교세를 확대하였다. 실제적인 지혜와 활동적인 생활을 높이 평가한 로마 인들은 추상적인 철학적 사고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상과 과학적 사고에서도 그리스 인을 모방하였고, 주로 현실의 필요에서 그리스 사상을 수용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법률과 종교를 기피하려는 젊은 귀족층에게 호소력을 가졌으며, 일반적으로 생활에 대한 물질적 해석을 합리화하였다.
한편 스토아학파는 낡은 전통적 방식을 존중하는 진지한 로마인들에게 공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것은 개인의 자제력과 의무감 및 정신적 평화를 존중하는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포에니 전쟁기간 중 영향력을 얻기 시작한 로마의 스토아 학파는 제정수립후 세네카, 아우랠리우스 등과 같은 대표적 사상가들을 배출했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문학가로는 우선 키케로를 들 수 있다. 그는 그리스 정신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비교적 독창적인 사유를 한 사람으로, <웅변에 관하여> <공화국론>등 여러 편의 저서를 남겼다. 그중 스토아 철학의 원리에 입각하여 실천윤리의 문제를 다룬 <의무론>은 그의 대표작이며, 그의 문체는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때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를 지낸 세네카는 철학적 에세이와 비극작품을 저술하여 그리스 3대 비극시인 이후의 최고의 비극작가로 평가되었다. 이우렐리우스는 로마 평화시대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이며, 대표적 스토아 철학자로서 <명상록>을 저술하였다. 역사서술에 있어서는 타키투스가 돋보이는데, 명저 <게르마니아>에서 당시의 로마를 비판하기 위해 야만인 들의 활력에 넘치는 건강한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로마공화정에 대한 저자의 향수도 함께 느낄 수 있다.
크리스트교 사상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약 1천 년간 지속한 중세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잔잔한 호수에 새로운 불순물 이 힘차게 쏟아져 흘러들어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순물이 게르만 민족이라 할 수 있는데,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호수는 다시 맑아지면서 새로운 물줄기가 근대라는 큰 바다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중세 속에서 계속 줄기차게 나오는 크리스트교의 샘은 서양사상의 또 다른 원류가 되었다. 원래 초기의 크리스트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수록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하는 인간적인 종교였다. 그후 구약성서에서 구세주로 예언되었던 예수(Jesus Christ)가 나타나 세계평화주의적 복음을 전파함에 따라 크리스트교는 일반대중의 정신생활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다. 예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윤리를 강조하였다. 이어서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사도들에 의해서 크리스트교는 세계종교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도들의 복음활동과 예수의 가르침을 수록한 경전이 <신양성서>이다. 로마 정부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후 중세에는 인간중심의 사상이 신 중심의 사상으로 전환되었다. 신 중심의 사상에서는 우주의 창조주인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우선적으로 믿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인간의 행복과 영생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신 중심의 윤리사상은 중세 유럽의 생활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 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이 중세의 학문과 사상을 압도하여, 철학이나 자연과학 등 기타 학문은 그 시녀역할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발전의 주체세력은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교수들이었고, 중세신학의 발전은 크게 2분될 수 있다. 1.예수 사후 8세기까지 신부들에 의해 발전된 교부철학과 2.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발전된 스콜라 철학을 들 수 있다. 교부철학은 주로 크리스트교의 정통교리를 하나로 체계화하여 교회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교부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는 크리스트교의 신앙을 그리스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위해 초월적인 이데아 사상을 강조한 플라톤 주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믿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 는 말로써 신앙과 이성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의 크리스트교 사상이 잘 반영된 <신국론>에서 그는 신국, 즉 내세는 지상의 세속적 역사과정 속에 투영된 것으로서,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의 실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인간은 교회를 통해서 신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는 인간구원을 위한 유일한 기관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자서전 <고백록>에서는 그의 젊은 날의 지적 방황과 30세가 넘어서야 기독교에 귀의한 종교적 개종과정을 담담히 고백하고 있다.
스콜라 철학은 교회의 교리철학으로서 중세철학과 학문의 절정을 이룬 중세의 종합적 세계관이다.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더 가까운 수정된 실재론을 주장하여, 보편적 존재는 영원불변의 실재성을 갖지만 본질로서 개체 안에 존재한다고 보며,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최종적인 공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표적 저술인 <신학대전>에서 스콜라 철학의 정수를 제시하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근대 초기(14∼16세기)의 사상이 형성될 수 있었던 계기는 14∼16세기에 나타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운동에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는 중세 신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연적이고 현실적인 인간본성을 다루었던 고대 그리스와 초기 로마시대의 문예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서, 기본적으로는 인본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이 운동은 고대사상에로의 맹목적인 복귀만을 추구하지 않고, 고대사상중에서도 형이상학이 아닌 인간현실에 바탕을 둔 지식이나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는 역사서술에 있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를 주장했는데, <군주론>에서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군주에게 수단과 방법의 광범위한 선택을 허용하여, 그간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정치적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정치를 완전히 세속적인 세계이해 에 기초하여 파악한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이론서를 저술했다. 르네상스는 근대 자연과학의 진정한 출발점 역활도 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중세의 우주관인 천동설을 뒤엎고 지동설을 주창하였고, 동년에 인체 해부학자 메살리우스는 <인체구조론>을 저술하여 인체구조의 해명에 중요한 진전을 이록했다. 르네상스 운동과 동시에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의 기본정신 역시, 세속화된 중세교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순수했던 초기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중세교회의 권위와 전통은 봉건사회의 신분제를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로 인해 개인의 내면적인 신앙생활은 점차로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되었다. 이러한 종교계 자체 내에서의 개혁운동을 시도한 대표적인 인물은 루터다. 그는 독일의 로마교회가 면제부를 판매한 것에 대하여 95개조 반박문 을 제시하며 항의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그후 스위스의 츠빙글리, 칼뱅 등에 의해 계승되었고, 전 유럽에 퍼져 프로테스탄티즘을 형성시켰다. 또한 영국에서는 16세기 후반에 청교도주의(puritanism)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처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나타난 사상의 핵심은 로마말기부터 중세까지 1,000년 동안 지배해온 신 중심의 윤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현실적 삶을 중시하는 데 있으며, 이는 근대 서양윤리사상의 형성에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17세기 과학혁명
근대에 들어오면서 중세문학의 여왕이던 신학은 물러가고 자연과학이 크게 발달했다. 대자연과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은 자연법 이라는 영원불변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그 법칙이 발견될 경우 인류의 행복이 증진되며, 그러한 자연법은 반드시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수학적 계산과 관찰에 의해 우주의 법칙이 설명되고 그로 인해 세계관의 변화까지 초래한 과학혁명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서 시작하여 케플러, 갈릴레이를 거쳐 1687년 뉴턴의 중력법칙 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과학사고의 혁명은 현대인에게 자연정복의 길을 마련해놓았고(이 자연정복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 어쨌든 현대문명의 본질을 전환시켜놓았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더욱 세련시켰고, 갈릴레이는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확인했다. 인류역사상 경이로운 천재 중 한 사람인 뉴턴은 선행업적들을 하나의 우주원리로 종합하여 우주 내의 모든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프린키피아>를 발표했는데, 이로써 전통과 권위에 맞서 싸우던 1세기 반의 과학혁명 은 절정에 달했다.
사상혁명
17세기에 일어난 과학혁명으로, 우주는 수학자가 창조한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이기 때문에, 이제 더이상 신의 섭리는 필요치 않다는 관념이 지배했다. 이러한 기계론적 우주관 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는 합리주의 정신을 성장시켜 다른 학문분야에도 폭넓게 적용되었다. 즉, 당시의 과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지식은, 종래의 신학적인 자연관과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식과 사유의 법칙을 형성하게 하였다. 근세의 자연과학에서 주로 사용된 방법론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사유와 지식의 근원을 경험 으로 보고 경험적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서 얻은 지식을 중시하는 이른바 귀납적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사유와 지식의 근원을 이성 으로 보고 과학적 논리나 추리에 의해서 얻은 지식을 중시하는 이른바 연역적 방법이다. 이런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지식은 전 학문영역에 적용되어, 근대적 사고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근대 중기에 영국이 경험론 과 대륙의 합리론 이 형성되었는데, 전자는 인간의 경험 을, 후자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였다.
영국의 경험론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 인물로는 베이컨을 들 수 있다. 그는 현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지식이 보편적인 지식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지식의 원천은 경험 이라고 하였다. 즉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인간과 외부사물을 인식하고 얻어낸 지식이 유용하고 참된 지식이며, 이를 통해서 행복한 삶이 실현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신논리학>에서 실험을 통하지 않은 이론, 또는 체계적 이론이 없는 실험은 다 같이 무용한 것이라고 경고하고, 위대한 진보는 이론과 실제의 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생활에서 참된 지식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시각에 내제하는 선입견과 편견 때문이라고 보고, 이것을 타파할 것을 역설하였다. 경험론에 입각한 베이컨의 사상은 홉스, 로크 등을 거쳐 공리주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대륙의 합리론
대륙의 합리론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은 개인의 편견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단편적이며 우연한 지식이라고 보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완전하고도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그는 이성활동에 의한 진리탐구 방법을 이른바, 방법적 회의 라고 하였다. 그는 확실하고 자명한 진리를 연역해내기 위해서는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기본명제를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기본명제를 찾기 위해 수많은 의심을 해본 결과 내가 지금 사유한다는 사실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석한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이것을 사유의 제1원리라 하였고,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모든 보편적 지식을 연역하고자 하였다. 데카르트는 이성 에 근거하여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고자 함으로써 근대적 사고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기계적인 자연계와는 별도로 신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고 중세적인 종교신앙을 기계적인 우주관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