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3장 동양문학
아큐정전 - 노신(1881~1936)
중국현대소설의 아버지인 노신의 중편소설로 과거 구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완전히 탈피하고 있다. 아큐 라는 중국의 전형인물을 주인공으로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봉건사회의 몰락과정에서 보여준 중국인의 나약석비극성비굴성 등 중국인의 약점을 고발하여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다. 주인공의 정신승리법은 중국인들의 정신적 자학을 뜻하는 말로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반봉건반제의 기치 아래 전개된 54 운동의 기수가 되고, 중국혁명의 사막인 문학혁명을 주도하며 중국민중의 길고 긴 잠을 깨운 그는 문학으로 중국인의 우매성을 해부했다.
* 생애와 작품활동
중국의 작가사상가인 노신은 1881년 예부터 절경으로 소문난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주수인. 필명인 노신은 투르게네프의 루딘을 모방한 것이었다. 당시 이름만 대도 다 알아주던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온 가족과 하인들의 애지중지 속에서 자랐다. 출생배경인 이런 노선이 급진적인 혁명사상에 눈을 뜬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릴 적부터 글 잘하는 수재로 소문난 노신이 13세 때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위한 과거시험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는 이때 받은 충격으로 병을 얻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거의 동시에 모두 사망,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된다. 훗날 노신은 나는 그때 비로소 세상 돌아가는 진면목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그 당시의 충격을 회고했다. 그리고 그의 고향 소흥은 실패로 끝난 두 혁명인 태평천국의 난(1861)과 신해혁명의 중심 영향권에 들었고, 당시 중국대륙을 유린한 외세진출의 통로 앞에 늘 놓여 있었다. 급진 혁명사상에 눈뜬 노신이 신학문을 배워 쓰러져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길을 오른 것은 스무 살인 1900년, 당시 우매한 중국 한의술 때문에 부친을 잃었다고 생각한 노신은 서양의학을 공부하여 의학구국을 생각했다. 그러나 세균학 시간에 우연히 본 러일전쟁 시사영화에서 한 중국인이 러시아를 위한 스파이 혐의로 일본군에 의해 총살되는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구경한 하고 있는 중국군중을 본 뒤, 그는 민중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 일보다 민족적 자각을 지키는 일, 즉 정신적 질병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라 여기고 의학을 중단하고 문학으로 전향했다.
그후 신문화운동에 참여하여 동경에서 (신생)을 발간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동생 주작인과 공동으로 성외소설집을 번역했다. 성외소설이란 당시 외국(유럽) 소설을 의미한다. 이때 그는 유럽의 약소민족의 문학, 슬라브 민족의 저항시, 니체 철학에 심취했다. 잠시 귀향하여 인습적인 결혼을 했으나, 그것은 그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북경에 가서 채원배에 초청되어 교육부 직원으로 일하면서 처녀작 (광인일기)(1918)를 썼다. 잡지 (신청년)에서 활동하는 한편 백화운동문화혁명에 참가했으며, 북경대학 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경사 도서관장을 겸했다. (광인일기)는 낡은 봉건왕조를 청산하려는 중국 젊은이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으며, 중국 신문예를 탄생시키는 출발이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발표된 (아큐정전)은 중국 국민적 성격의 전형을 풍자한 소설로서, 중국이 역사적으로 계승하여온 중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자기만족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며 사는 정신 승리법과 우매성, 약점을 아큐에 집약하여 냉철하게 묘사한다. 찬반이 일어나지만 반봉건의 신문화운동을 기원하는 젊은 진보파들에 의해 옹호되었으며, 54 운동, 비공 운동의 기수로 앞장서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청년지도기관인 주명사를 설립하여 계속 문학혁명에 앞방섰으며, 그가 관계한 여자사범대학에서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그에 동참, 당시 단기서 정부의 탄압(체포령)을 피해 북경을 탈출하여 교직을 광동 중산대학으로 옮겼다. 1927년 4월 국공분열 후 다시 국민당의 탄압이 시작되자 불안한 사회정세를 피해 상해조계에 숨어서 운동을 계속했다. 1931년 여름에는 뉴욕에서 열린 노동자문화 연합대회의중국측 명예주석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그는 북경대학 근무 당시의 제자 허광평과의 동거로 중국 인습을 깨뜨렸다. 그는 중국작가동맹 좌익계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면서 극좌(창조사채양사)와 대립하여 참된 프롤레타리아 문학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문학은 초기의 소설에서 차츰 평론수필로 옮겨갔고, 이른바 쫓겨다니면서 발바닥으로 쓰는 시기를 맞았다. 우의 양실추두형 등의 예술 지상주의를 계승한 임어당의 공격을 받았다. 중일전쟁 발발의 전년 1936년, 폐결핵과 천식이 악화되어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유해는 만국 빈의관에 옮겨 1만 명의 조객과 7천의 옹위를 받으면서 만국공묘에 매장되었으며, 그의 비석에는 민족혼 이란 글자가 새겨졌다.
* 노신의 문학세계
중국문학사에 수많은 별들이 있으나 노신이 남긴 작품만큼 인구에 회자되는 것도 흔치 않다. 그것은 노신이 누구보다 강렬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평생 글을 써왔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또 노신이 남긴 작품만큼 후대의 문학사조나 형식 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많지 않다. 노신이 이처럼 위대한 민족의 문학가로 평가받게 된 것은 그가 몸소 민족의 수난기를 살아가면서 민족의 고뇌를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선각자로서 껴안는 의연함을 가지고 끝까지 지켜나간 작가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노신의 문학생애는 전후 2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기(1918~1927)는 실험적 문학창작기로서 이 기간에는 (광인일기) (약) (고향) (아큐정전) 등 노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작들이 나왔다. 후기(1928~1936)는 문학 논쟁기로 단평, 장갑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체를 개발했으며, 노신이 문단의 중심적인 인물로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이기도 하다.
노신은 혁명가 이전에 뛰어난 문학가로서의 정신이 더욱 추앙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개 짧고, 가장 길다는 것이 (아큐정전)이지만 이것도 중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정취를 더하며 그 깊은 뜻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불과 몇 장의 에세이조차에서도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것이 비록 혁명을 위한 문학일지라도 안이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삼지 않는 향기 높은 문학, 그것이 노신문학의 위대성이다. 문학이 정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며, 정치체제가 바뀌었다고해서 읽히지 않는 글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이 아니다. 노신은 (현재의 우리들의 문학운동에 대하여)란 글에서 작가란 그 어떤 인물을 그리든, 그 어떤 소재를 사용하든 자유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작품에 민족적 혁명전쟁 이란 꼬리를 달고 그것을 내세워 기치로 삼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작품 뒤에 붙인 슬로건이 아니라 그 작품속에 깃들어 있는 진실한 생활, 눈부신 투쟁, 약동하는 맥박, 사상과 정열이기 때문이다 라고 강조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노신은 불행한 사람들의 정신개조를 생각하고 소설을 썼지, 결코 정치를 위해 소설을 쓴 것은 아니란 뜻이다. 인간이 바뀌지 않고는 사회도 바뀌지 않는다는 그 정신이 중국민족의 전형으로서 이 소설을 쓰게 한 것이다. 아무리 불행한 사람을 묘사하더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이 있음으로써 노신은 삶을 긍정적으로 보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독자들의 마음을 격려하고 내일을 향해 살아가는 용기를 불어넣는 점이다. 그가 남긴 문학은 체제가 어떻게 바뀌던 불멸이다. 사회 때문에 인간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사 변함으로써 인간을 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지적이다. 금세기 사가들이 노신을 중국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요 영수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신중국 정신건설의 지주라고 하기도 하고 중국 근대문학의 시점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 작품의 주요내용
아큐는 이름도 성도 없이 조씨 댁에 얹혀살면서 조씨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인물로 떠돌이패의 한 사람이다. 전형적 노예근성을 지닌 무지몽매한 쿨리(중국 하층민)의 상징이다. 아큐에 대해서는 이름과 출신지, 그리고 행적에 관해서도 결코 알 수가 없다. 그는 집도 없이 웨이장에 있는 동구 밖 사당에서 기거하고 있다.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으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는 일과는 달리 매우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어서, 마을사람들이 그를 건드려도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일관한다. 그의 신체적인 결함은 머리가 조금 벗겨진 대머리라는 것이고,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이러한 결점에 대해서 언급해도, 노름에서 많은 돈을 잃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아큐는 매사에 자신있게 처신했고 따라서 자연히 승리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아큐가 유명해진 것은 마을의 세도가 자오씨의 아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난 뒤부터다. 그에게는 매우 싫어하는 인물들이 있는데, 거지인 왕과 첸, 그리고 지주인 첸가의 아들이 그들이다. 특히 첸가의 아들은 서양식 학교와 일본유학을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 듯했고, 변발도 잘라버렸기 때문에 아큐는 그를 양놈이라고 욕했다. 그런데 아큐의 욕이 그의 귀에 들어가 화가 난 첸의 아들이 지팡이로 아큐를 두들겨 팬 것이다.
아큐는 장난도 몹시 즐겼다. 한번은 그가 비구니를 놀리려고 그녀의 볼을 꼬집었는데,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아큐가 여자를 안 것이다. 결국 이러한 아큐의 변화는 자오씨의 집에 쌀을 찧으러 갔을 때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자오씨의 집에서 일하는 젊은 과부 우마에게 수작을 걸어, 우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자오씨는 아큐를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고, 결국 아큐는 금 2천 문과 이불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그런 아큐는 우마와의 사건이 있은 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을 여자들은 아큐만 보아도 도망갔고, 남자들은 아큐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외상술도 주지 않았다. 전에는 친하던 사당 당지기도 아큐를 보면 언짢아하고, 더구나 그를 고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가 다시 웨이장으로 돌아온 것은 중추절 직후였는데, 그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새로 산 옷에다 모든 거래를 현찰로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신기하고 새로운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여자들은 아큐가 가지고 온 물건들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은근히 만나고 싶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큐가 도둑의 앞잡이였다는 소문이 나돌자 이러한 흥미는 자연히 시들해지고 말았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던 해, 9월 14일에 뜸으로 갑판을 위장한 파이 어른의 배가 자오씨의 선착장에 닿게 되었다. 혁명당을 피해서 이곳에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아큐는 혁명당을 알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혁명당에 놀라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아큐는 혁명당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4, 5일이 지나자 민심은 가라앉고 혁명당이 온다고 해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안심하게 된다. 아큐가 혁명당에 가입하기 위해 첸가의 아들을 찾아간 날 밤에 자오씨의 집이 습격을 당했다. 아큐는 자신을 내쫓은 자오씨에 대해서 감정이 있었고, 마을사람들도 자오씨의 집이 습격당한 것을 은근히 속으로는 기뻐했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두려운도 느꼈다. 어느 날 갑자기 아큐가 체포되었는데 누가 누명을 씌웠는지 몰라도 아큐가 자오씨의 집을 습격한 장본인이라는 것이었다. 아큐는 생전 처음 붓을 들고, 서명하는 대신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군중 속에 서 있는 우마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큐는무수한 인파들의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형을 받았다.
* 작품해설
이 작품은 신해혁명 전후의 무기력한 중국인을 회화화한 작품으로 노신의 작가적 지위를 문학사에 자리잡게 해준 대표작이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매우 싱거운 이야기에 불과하나, 이 작품이 그려내는 이른바 정신승리법 이라는 독특한 인간심성과 작품의 바탕이 된 시대성 때문이다. 신해혁명의 쓰디쓴 좌절을 맞본 중국인들은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저항할 줄 모르고 오히려 머릿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승리로 소화해버리는(소화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 아큐를 보고, 모두 자기 자신을 모델로 한 얘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창조말기의 침체된 봉건사회를 아큐라는 날품팔이 노무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아큐가 살고 있는 지방의 권력가와 그 가족연고자들의 권세를 둘러싸고 있는 이면에 대한 문제까지 희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여기서 노신은 등장 인물들의 혁명에 대한 불안한 모습과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되는 아큐의 허무한 인생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아큐에게서 볼 수 있는 공허한 영웅주의와, 그것과 표리를 이루는 불쌍한 패배주의의 민족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즉,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직시하지 못한 채 항상 자기기만으로 현실을 호도하면서 살아가는 아큐의 이른바 정신승리법을, 민족적인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낡은 지식인과 중국인들에게서 발견하고 이를 형상화한 작품인 것이다.
신해혁명에 관한 희망과 혁명의 기회에 편승하는 건달들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기탄없이 드러내보이는 작가는 아큐의 죽음을 구경거리로밖에 보지 않는 군중들에 대한 노여움을 아큐에 대한 동정으로써 질책하고 있다. 이러한 풍자적이고 야유적인 비판 속에는 중국인들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슬픔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실패를 교훈삼아 다시 민족 결의를 촉구하는 주제가 강하게 흐르고 있다.
(아큐정전)은 작가의 이러한 구국혼이 가장 깊이 농축된 작품이다. 따라서 어리석고 불쌍한 아큐, 그를 통해 근대화 과정에 소용돌이치는 중국민중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려보였다. 그런 아큐의 모습이 그때도 그랬지만 중국민중들에게는 각성 보다 위안 을 더 많이 주고 있어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닌 수가 없다. 노신이 입버릇처럼 내뱉던 푸념이 아직도 메아리치는 여운으로 남아 있다.
중국인은 누군가가 나서서 말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