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3장 동양문학
삼국지연의 - 나관중(1300~1400년경)
중국 4대기서의 하나. 명대의 나관중이 지은 중국 최초의 장편소설로, 중국인뿐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중국 문학작품인(삼국지연의)는 걸출한 소설문학인 동시에 인생의 철학서요, 최고의 병법서다. 이 소설은 100년간의 한말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치밀히 묘사함으로써 그동안 감추어왔던 정치적군사적 상층사회의 내부모순을 역사상 최초로 공개하고 있다는데에도 사적 상층사회의 내부모순을 역사상 최초로 공개하고 있다는데에도 큰 의의를 갖는다. 또한 이 소설은 다양한 인물을 통해 중국인의 각종 지혜와 사유방식을 소개하고 있는 인류의 귀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 (삼국지연의)의 성립
중국 역사장편소설 (삼국지연의)는 184년부터 280년까지, 즉 후한 말부터 위촉오 3국 정립시대를 거쳐 진나라에 의한 천하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유비,관우,장비 등 세 인물의 무용담과 제갈공명의 지모를 중심으로 하고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 기초하면서 70의 사실에 30의 허구를 섞어서 만든 소설이다. (수호전) (금병매) (서유기)와 함께 4대기서 중 하나로, 여기에 등장하는 문무를 겸비한 의리의 관우, 온후한 인군인 유비, 호탕한 호걸인 장비, 불세출의 대군사인 제갈량, 침착하고 용감한 조운(조자룡), 무용무적의 여포, 지장인 주유, 출중한 정치적 능력을 소유했으나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으로 묘사된 조조 등은 중국민중이 대망하는 여러 유형의 영웅상이다. 예부터 중국인들 사이에 흥미있는 이야기로 전해내려오다 9세기 말에는 연극으로 꾸며진 흔적이 있고, 송대에는 전문적인 배우까지 나왔다. 삼국지는 적어도 수백 년간의 이야기꾼들, 저잣거리의 재간꾼은 물론 불우한 서생과 문사 등 중국인들의 공동 저서로, 나관중은 그 대표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책으로 엮어 나온 것은 3단계를 거친다.
#1 (삼국지평화)의 성립과 간행으로 이것은 담화용 텍스트를 그대로 사용한 듯하며 읽을 거리로서는 매우 유치했다. 이 (평화)를 바탕으로 해서 소설로 꾸민 것이 #2 명나라 초기의 나관중에 의한 (삼국지연의)다. 황당한 부분을 고치고 촉한정통론의 입장에서 유비조조의 선악의 구분을 분명히하고, (삼국지평화)에서의 장비 중심을 관우 중심으로 다시 쓰는 한편, (삼국지)의 배송지의 주석이나 삼국극민간설화까지도 이용해서 10배 정도 늘려 (삼국지연의)를 만들었다. 이 나관중의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것이 24권 240절로 된 (홍치본) 또는 (가정본)인데, 그후 (이탁오평본)이 나온다. #3 청나라 초기의 모성산모종강 부자에 의한 (모종강본)의 간행으로 이 책이 다른 책을 압도하여 정본이 되었다. 중화민국의 아동도서관 간본은 (모종강본)을 정본으로 한 것이며, 1988년에 나온 우리 나라의 이문열 평역 (삼국지)도 이것을 역본으로 쓴 것이다.
* 주요 내용
후한 말기 조정에서는 환관이 실권을 잡고 정치가 혼란하여 백성들의 불평은 극에 달해 있었다. 도교 성향의 신흥종교의 교조인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는 이 틈을 타서 181년에 황건의 난을 일으킨다. 한나라 왕실의 후예이나 몰락하여 민간에 살고 있던 유비는 관우, 장비 두 장사와 도원결의 를 한 후 무리를 모아서 관군을 따라 싸움터에 간다. 황건적의 반란은 유비, 조조, 손견의 분투와 그밖의 여러 장수의 노력으로 겨우 평정되었지만, 난중에서 세력을 얻은 지방관이 각지에서 할거하여 기세를 올리는 바람에 한 왕실은 또다시 위태로워진다. 한번은 원소를 맹주로 삼아 연합군을 조직한 군웅이 임금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동탁을 치지만, 내분을 일으켜서 해산한 뒤에는 완전히 무정부상태가 되어, 원소, 원술, 공손찬, 여포, 유표, 손견 등이 서로 패권을 다투기에 이른다. 그 가운데서도 조조가 차츰 세력을 얻어 군웅을 멸하고 특히 기주의 영주인 원소를 관도의 싸움 에서 격파한 후부터 천하를 통일할 형세를 보인다.
조조는 황제를 등에 업자 그 상대자는 아버지 손견, 형 손책의 뒤를 이어 강남을 다스리는 손권이 있을 뿐이었다. 유비는 각지를 전전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는데, 이 사이에 남양에 숨어사는 제갈량(공명)을 삼고초려로 맞아들여 군사로 삼았다. 유표가 죽은 뒤 그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투항했으며, 유비는 당양에서 조조의 군사와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한때는 외아들 유선까지 난군 속에 잊어 버렸으나 부하인 조운(자룡)이 단신으로 뛰어들어 유선을 건져내고, 장비가 단 20기로 적을 장판교에서 막아내는 초인적인 활동에다 유표의 또다른 아들로 강하를 지키던 유기가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오는 바람에 겨우 위험을 벗어나 하구성으로 들어간다. 기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손권의 진영에서는 화전 양파로 갈려서 다투던 바람에 손권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숙주유 등의 강경한 주장과 공명의 교묘한 설득으로 싸우기로 결정하고 유비와 손잡고 조조와 맞섰다. 연합군은 공명, 주유 등의 계략을 실행, (삼국지)의 압권에 해당하는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의 군대를 화공으로 무찔러 대승한다. 유비는 그 사이에 기주를 점령했으나 이곳을 둘러싸고 손권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 유비와 손권의 누이동생과 정략결혼을 성사시켰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유비는 익주를 정복하여 근거지로 하지만 손권이 기주를 지키는 관우를 죽이고 이 지방을 점령한다. 이 무렵 조조는 병사하고 그 아들 조비가 뒤를 이어 한나라 헌제를 폐하고 위제의 자리에 오른다. 유비는 한의 뒤를 이어 성도에서 황제에 올랐다. 나라 이름은 한이나 영토가 파촉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촉으로 불린다. 그뒤 손권도 오나라 형제를 칭하여 3국분립이 이루어졌다. 유비는 공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제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도중에 장비가 암살되고 유비도 오나라 장수 육손과 이능에게 싸우다 패해 백제성에서 병사한다.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은 어리석어서 국정의 책임은 모두 공명에게 맡겨진다. 공명은 5로로 쳐들어오는 위군을 격퇴하고, 남만왕 맹획을 7번 사로잡았다가 7번 놓아주어서 심복시킨 후 오나라와 화를 맺고 오로지 위와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인다. 6번 둔산에 출진하나 그때마다 위의 명장 사마의에게 저지되어 마침내 오장원에서 병으로 쓰러진다. 그후 3국은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쇠약해지고 사마의 1족만이 세력을 얻는다. 264년 위는 촉한을 멸망시키나, 265년엔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위제를 폐하고 제위에 올라 나라를 진이라 했다. 진나라는 280년에 오를 멸망시켜 이로써 3국의 분립은 끝났다.
* 등장인물에 대한 재조명
이 소설에 묘사된 400여 명의 인물 가운데 주요인물들은 개성이 뚜렷하고 생동하는 예술적 전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전형적인 인물들은 곧 작자의 사상적 경향이 구체화되어 표현된 것으로,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를 옹호하고 조조를 배척하는 옹유반조의 경향을 갖고 있는데, 이는 봉건 전통사상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 유행하는 민중사관은 조조를 재평가함과 동시에 유비 집단, 특히 제갈량에 대한 비판과 의심을 여러가지로 제기하고 있다. 중국의 곽말약 이래 복권되기 시작한 조조는 이제 혁명가 또는 민중의 대변자로 격상되고, 유비 집단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가치체계에 고집스럽게 집착한 보수주의자들 이며, 부패하고 타락한 한왕조를 되살리려고 애쓴 반동집단으로까지 격하되고, 그 핵심인물인 제갈량은 반동집단에 논리를 제공한 몽상가 또는 대의보다는 일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인재가 풍부하고 지배체제의 기반이 잡힌 위나 오보다는 후발집단으로 인재난에 허덕이는 촉을 책한 야심가로까지 비판한다. 과연 그럴까?
1. 조조
조조에 대한 평가는 나관중과 (삼국지)의 저자 진수간에 다소 다르다. 진수는 조조를 다소 긍정적을 서술했으나, 나관중은 조조의 양면성을 다루되 다소 엄격했다. 조조가 걸출한 정치가요, 군사가이면서 한편 잔혹한 압제자였던 사실에 맞춰 소설속에서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닌 양면적인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먼저 정치가로서의 조조는 고도로 세련된 정치적 기술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흔히 조조를 평가할 때 협천자 영제후 란 구절을 쓴다. 그것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했다는 뜻인데, 이는 조조가 권력의 속성과 전통성의 관계를 그만큼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조조는 오랜 기간 실권을 잡았어도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없었다. 또한정치가로서의 조조는 지극히 민중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고 곡식을 풀어 백성을 부양했다는 기록은 있어도, 백성들을 무리하게 혹사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서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르되, 일단 한번 등용하면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았다. 그 결과는 그가 그 시대에 가장 많은 인재들을 거느릴 수 있었고, 뒷날 제갈량은 자기의 동학들이 조조의 아래의 미관말직에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아직도 그런 자리에 있다니, 도대체 위에는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있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 한다. 한마디로 말해 조조는 현실적인 정치가로서의 모든 자질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다음은 전략가로서의 조조는 항상 소수로써 다수를 이기고 약세로서 강세를 극복해왔다. 여포에게 거의 잡히게 된 위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장계취계(상대편의 계략을 미리 알아채고 그것을 이용하는 계략)로 결국 마릉산에서 여포에게 대승하고 위기를 승리로 바꾸는 임기응변의 능력을 보인다. 또한 조조는 당대의 문장가였다. 문장가로서의 조조는 두 아들인 조비, 조식과 함께 중국문학사에 기록될 정도다. 원래는 20여권의 방대한 양을 남겼으나, 아쉽게도 지금 남은 것은 30여 편의 시와 백여편의 문장이나 포고뿐이다. 한편 조조의 부정적 성격도 여실히 묘사되어 있다. 즉, 여백사의 전 가족을 몰살시킨 다음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 수는 있어도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반해서는 안된다 라며 이기적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성격은 유비와 대비될 때 더욱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작가의 성향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정치가로서, 전략가로서, 문장가로서 그처럼 뛰어난 조조가 오늘날 민중들의 의식 속에 간사하고 교활한 인물로 남아있는 것은 무슨 이유때문일까? #1 한민족의 정통사관을 점령하려 했던 나관중이 혈통을 근거로 당시 국력으로 보아 조조의 1/5정도이던 유비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결과 조조를 엑스트라의 위치로 전락시켰다. 마치 이순신 장군을 실제 이상으로 평가하기 위해 원균 장군을 악역을 내세운 우리처럼 말이다. 중국의 곽말약은 조조를 민중적인 혁명아로 내세운 반면 유비를 보수반동집단의 우두머리로 격하시켰고, 일본의 작가 진순신은 조조를 주인공으로 삼아 (연의)를 구상한 적이 있었다 한다. #2 통치자의 인간형에 대한 동양인들의 기호가 유교의 영향으로 조조의 재사형 보다는 한고조 유방이나 유비와 같은 덕장형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조조는 한 몸에 너무 많은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 그 중 한 가지만 가졌어도 그 분야에서 뛰어날 수 있다고 믿는 범인들의 시기심도 작용했으리라.
2. 유비
중국의 역대 창업자 중 그만큼 해놓은 일에 비해 민중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인물도 아마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민중적 인기의 근원을 그의 출신에서 찾는다. 고귀한 혈통이면서 삶의 밑바닥부터 출발하고 있는 그는 그의 대역이었던 출신성분이 낮은 조조와 대비하고 있다. 어떤 이는 그를 둘러싼 집단들의 성격이 법과 제도보다 인정이나 의리와 같은 1차원적인 감정으로 형성되어 있어 수백 년 동안 관료제에 시달려온 민중들에게 호감을 살 수도 있었다고 본다. 또 어떤 이들은 정통성에 있어 유리한 유비의 혈통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유비의 리더십의 형태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한고조 유방의 덕치(무위이능)를 선호했는데, 유방 자신은 이렇다 할 재주가 없으나 단지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이 출중했던 것이다. 그가 내세운 게 도가의 원리에 따른 무위의 통치였다. 2백년 이상 존속한 왕조의 창업자는 대개가 도가형의 치자가 많았다. 좀 비약해서 말한다면, 대부부늬 수명 긴 왕조는 도가형의 창업자로 시작해 유가형의 치자로 유지되다 그 유가형의 타락으로 망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유비에게 보이는 통치의 원리가 바로 도가형이다. (삼국지)에 그가 법률을 반포하고 제도를 정했다는 기록은 거의 보기 어렵다. 그가 지향한 것은 무위의 치 였고 그의 사표는 한고조 유방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는 다재다능에 힘입은 조조의 유위의 치 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한 통치자였을 것이다. 그밖에 유비의 민중적 인기를 더한 것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람에 대한 투자이다. 조조는 법가적 원칙에 벗어나면 가차없이 희생시켰으나(관우에게는 예외), 유비는 남달리 눈물이 많았고,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고 집단의 결속을 굳게 했다. 이러한 그이 인적 결속은 은연중에 민중들에게 전해졌으며, 또 나관중은 여기에 그를 인덕을 겸비한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그의 집단에 남다른 호감을 갖게 했다. 그에 대한 정사의 평도 대개 그러하다. 유비는 속이 넓고 굳세면서도 남에게 너그럽고 후했다. 사람을 알아보고 선비를 잘 대접해 한고조의 풍도가 있었으며 영웅의 기량을 갖추었다. 그러나 작은 정에 집착하여 소탐대실하는 일도 있었고, 사람을 부리는 기교가 지나쳐 냉정한 관찰자에게 역겨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형주를 차지한데 이어 또 서천을 빼앗아 한참 치솟던 기세가 어이없이 꺾이고, 결국 그의 촉이 3국 중에서 가장 허약한 나라로 주저앉고 만것은 그런 결점들의 결과가 아니었는지, 게다가 유비의 과거 지향적이고 보수적인 정치이념은 근대적 이념에 물든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못마땅한 데가 없는 것이 아니다.
3. 제갈량
사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만큼 걸출하게 묘사된 인물은 없다. 그는 무궁한 지혜, 탁월한 재능, 그 신기묘산의 용병술, 천하의 대세를 헤아리는 안목, 상대방의 내심을 읽어내는 통찰력, 당당하고 화려한 말솜씨는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우선 그를 비판하는 논거는 삼고초려의 부인, 천하삼분론의 독창성 부인, 관우와의 권력투쟁에서 보인 야심가적 기질, 군사적 요충지역을 마속에게 맡긴 용병술에 대한 의심 등이 그것이다. 나관중은 그를 (삼국지연의)에서 동남풍을 빌고 구름을 마음대로 부르는 도교적인 술사로 부각시켜, 한실 중흥에 몸을 바친 그의 충의가 초인적 신비에 가리고 있으며, 원래 그가 가지고 있던 비범함까지 의심받게 했다. 물론 제갈량이 자란 산동성은 예부터 도교의 성지였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그가 도교와 방술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짐작은 된다. 진수는 바로 그 제갈량에게 죽은 진식의 아들인데도 제갈량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제갈량은 나라의 승상으로서 백성을 따뜻이 어루만지고 예의와 규범을 보여주었으며, 벼슬자리를 줄여 백성의 짐을 덜고 권위와 제도에 따랐다. 법을 어기거나 일을 게을리한 자는 비록 가까운 자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고, 죄를 지었어도 스스로 빌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그 죄가 무거워도 놓아 주었으며, 교묘한 말로 변명하려는 자는 비록 그 죄가 가벼워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제갈량이 젊은 시절 몰두했던 법가의 한 전형을 보는 듯하다. 거기다가 한 국가의 승상이면서도 사후 재산이 겨우 뽕나무 800그루에 밭 50고랑이라는 그 검소와 무욕을 상기하면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신비한 술사로서의 묘사도 그의 면모를 손상시키지 못한다. 예부터 중국의 병가들은 전쟁에서 지형과 기후를 중히 여긴 전통이 있고, 제갈량도 마찬가지여서 거기에 관해 세밀한 관찰과 정보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10년간의 은둔 후에 유비의 삼고초려에 의해 세상에 나오면서 "유비, 그대는 기어이 나를 수고는 많고 얻을 것이 적은 그대의 꿈속으로 끌어들이고 마는구려." 지난 겨울 내내 달갑지 않은 명운을 피하고자 애썼지만 결국 그대를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소 라는 공명의 이 지탄은 촉의 운명을 미리 예감이나 한 듯하다. 충신으로서의 제갈량보다 신비스런 제갈량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 은혜를 입고 감격을 이길 길 없어 이제부터 출진하려 하옵니다. 표를 바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로 시작하는 그의 (출사표) 한 편에는 대의에 모든 것을 바쳐 생사를 잊고 선악을 초월하는 불꽃 같은 생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삶이 이룩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가 담겨져 있다. 한실중흥의 대의에 불타는 고결하고 깨끗한 의지, 자나깨나 한왕조에 대한 지고지순한 충성, 이 모든 것이 가히 감동적이다.
4. 관우
제갈공명과 함께 삼국지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가 지닌 충성과 의리는 동양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를 관공 또는 관성제라고 하여 신의 경지에까지 찬양하기도 한다. 특히 유비에 대한 충의의 화신을 보여주는 오관참장이나 지난날 은혜를 입은 조조에게 군법을 어겨가며 그를 살려주는 화용도의 이야기는 충효사상을 중시하는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를 모시는 관왕묘가 아직도 우리 곁에 있다.잠시 조조의 신세를 지면서 그를 아끼는 조조로부터 유혹을 받았으나 끝내 유비를 잊지 않고 돌아가는가 하면, 또한 조조에게 진 신세를 보답할 것을 잊지 않아 그의 생명을 살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군령을 어기면서까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조조를 놓아주는 그의 의리는 천하를 위한 대의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 끌린 소의라 할 수 있겠다. 대국을 볼 줄 모르고 마침내 살신의 화는 물론 오촉 연맹의 파괴까지를 몰고오는 그의 처신은 개인적인 의리와 그에 대한 사소한 공명심에 집착하는 관우의 또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5. 장비
관우와 항상 대립되고 교양이 부족하고 천박하지만 사랑스러운 난폭자로 묘사된다. (수호전)에서 말하면 이규에 해당될 것이다. 단순하고 난폭하긴 하나 어진 사람을 존경해서 유비에 대한 충성을 관우 못지않다. 두주불사로 부하를 다스림에 있어 사랑보다 채찍이 앞서 유비는 언제나 그 점을 충고했다. 부하의 손에 죽은 그의 최후는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장판교 일전에서 단신으로 조조 군사를 막아내는 위용은 독자들에 대한 강한 인상을 준다.
* (삼국지연의)의 예술성과 가치
중국의 역사에서 이야기거리가 될 만한 시대로 말하면 (열국지)의 내용이 되는 춘추전국시대는 너무 번잡하고, 항우와 유방의 다툼을 내용으로 하는 (초한지)의 시대는 단조로운 감이 있고, 오직 삼국시대는 번잡하지도 단조롭지도 않고 호화찬란한 무용과 책략이 재미있는 설화의 재료로 가장 좋았던 까닭으로 (삼국지연의)가 뛰어나다고 할 수도 있다. (삼국지연의)는 중국문학사, 특히 소설의 발전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연의 란 딱딱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서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이 책이 장편역사소설의 길을 열어놓은 후 역사소설이 크게 흥성했다. 희곡에 대해서도 큰 영향을 남겼는데, 통계에 의하면 경극 가운데만 하여도 삼국 이야기를 제재로 한 희곡이 140여 편이 된다고 한다. 그밖에 (삼국지연의)의 영향 하에 반백화의 비교적 알기 쉬운 역사소설이 대량으로 출현했다.
(삼국지연의)는 사회생활에도 큰 영향을 남겼는데 군사와 정치의 교과서로 쓰이기도 했다. 청나라 초기에는 만주어로 번역되어 청군에게 읽혔으며, 이자성이나 태평천국 등 농민군들도 이 책을 유일한 교과서로 삼아 싸웠다고 한다. 이 책의 이데올로기적 바탕인 전통왕조에 대한 충성은 민족독립의 사상과 연결되어 명나라 말기에는 군사의 사기를 고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젊은이는 수호지를 읽지 말고 늙은이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 라는 말도 생겼다. 아마도 (수호전)의 음욕과 잔학성이 젊은이들의 인격형성에 미칠 영향을 염려한 것과, 노인들의 머리에 지략과 잔꾀가 늘어나는 것을 경계한 뜻일 것이다.
(삼국지)에는 능력이 있는데도 기회가 오지 않아 뜻을 펴지 못할 때 쓰는 비육지탄, 출중한 것을 가리키는 백미 , 버릴 수도 쓸 수도 없을 때 쓰는 계륵, 임금과 신하 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수어지교, 지극한 정성을 나타내는 삼고초려 등 많은 고사성어의 원산지 역할도 하고 있다. 그리고 각 시대의 인민들은 도원결의 를 본받아 서로 믿으며 생사를 같이하는 풍조가 면면히 이어져왔고, 이와 반대로 봉건 통치자들은 충의 를 이용하여 봉건황제에게 충성하고 인민들의 투쟁의식을 마비시키려고 했다. 청대의 통치자들이 도처에 관우의 사당을 지은 것도 이런 의도였다. 민국에 들어와 54운동 시대에는 가치가 인정되지 않았으나 근래에 와서 다시 높이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최근 곽말약은 조조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희곡 (채문희)를 썼다. 그러나 황건농민봉기를 부정하는 태도, 관념론적 영웅사관, 지나친 신비주의적 경향, 숙명론 등은 비판의 소지를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