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위험한 성인 - 거협
상자를 열고, 자루를 더듬고, 궤를 뒤지는 도둑을 막으려면 반드시 봉하고 묶어놓으며, 빗장과 장식을 튼튼하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세속의 지혜다. 그러나 큰 도둑에 이르면 궤짝을 지고, 상자를 들고, 자루를 메고 달아날 판이라, 그들은 봉한 것과 빗장과 장식이 여물지 못한 것을 오히려 두려워한다. 그러니 고을의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곧 큰 도둑을 위해 쌓아두는 사람이 아닌가? 시험 삼아 논해보겠다. 이른바 세속의 지자로서 도둑을 위해 쌓지 않은 자가 있는가? 이른바 성인 치고 큰 도둑을 위해 지키지 않은 자가 있는가? 어떻게 그러한 연유를 아는가? 옛날 제나라엔 이웃 고을이 서로 바라보고, 닭과 개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며, 그물 치고 쟁기질하는 곳이 사방 2천 리나 되었다. 사경 안에 종묘 사직을 세워 읍옥과 주려와 향곡*을 다스리는 것이 무엇하나 성인을 본따지 않은 게 있었던가? 그러나 전성자*는 하루아침에 제왕을 죽이고 나라를 도둑질했으며, 그 나라뿐 아니라 성지의 법까지 도용했다. 그리하여 전성자는 도둑의 이름을 가지고도 몸은 요순의 편안함을 누렸으나, 소국은 감히 시비하지 못하고 대국도 감히 치지 못해, 12대에 걸쳐 제나라를 지배했다. 이것이 곧 제나라를 도둑질하고, 아울러 그 성지의 법까지 차지함으로써 도적이 몸을 지킨 것 아닌가? 그러므로 도척의 무리가 척에게 물었다.
"도둑에게도 도리가 있습니까?" 척이 말했다. "어디를 간들 도가 없겠느냐? 무릇 방안에 감춰둔 것을 알아맞추는 것은 성이요,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이요, 뒤에 나오는 것은 의요, 가부를 아는 것은 지요, 고르게 나누는 것은 인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못하고도 큰 도둑이 된 자는 일찍이 천하에 없었다. 이렇게 살펴보면 착한 사람이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면 서지 못하듯이 척이 성인의 도를 얻지 못했다면 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하에 착한 사람은 적으나 착하지 못한 자는 많다. 곧 성인이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은 적으나 천하를 해치는 일은 많다. 그러므로 말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차고, 노나라 술이 묽어서 한단이 포위되었다*. 성인이 생기자 큰 도둑이 일어났다." 성인을 배격하고 도적을 버려두어야 천하는 마침내 다스려진다. 무릇 냇물이 마르면 골짜기가 비고, 언덕이 무너지면 못이 메워진다. 성인이 죽으면 큰 도둑이 일어나지 않아 천하는 태평하여 일이 없다.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그치지 않는다. 비록 성인을 거듭 기용하여 천하를 다스려도 이는 곧 도척을 거듭 이롭게 할뿐이다. 두곡을 만들어 그것으로 되게 하면 곧 두곡을 함께 훔치고, 권형을 만들어 그것으로 달게 하면 곧 부절*과 옥새를 함께 훔치고, 인의로써 바로잡으려 하면 곧 인의를 함께 훔친다. 무엇으로 이를 알겠는가? 혁대고리를 훔친 자는 죽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문전에 인의가 있다면 이는 곧 인의와 지혜를 훔쳐서 두곡, 권형, 부새의 이점을 아울러 쓸 수 있는 자를 몰아내는 것은, 비록 높은 지위가 걸려 있다 해도 권할 수 없고, 형벌의 위엄으로도 금할 수 없다. 이렇게 거듭 도척을 이롭게 하고 막지 못하는 것은 곧 성인의 허물이다.
* 읍옥, 주려, 향곡: 행정구역의 단위. 3백 묘(1묘는 3백평)를 옥, 15호를 여, 1백 여를 주, 5주를 향이라 한다. * 전성자: 성은 전, 이름은 상. 황제인 간공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여 그의 증손 때부터 왕위에 올랐다. * 노나라의 술이.... 포위되었다: 초선왕이 제후들을 불러모았는데, 그 중 노공공이 바친 술은 묽고 맛이 없었다. 이에 선왕이 노나라를 치자 그 틈을 타서 양혜왕은 평소에 벼르던 대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였다. 노나라의 술 때문에 조나라가 공격당한 것이다. * 부절: 돌이나 대나무로 된 신분 증명서의 일종. 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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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는 자루의 끈을 단단히 묶고, 금궤나 상자에 자물쇠를 굳게 채운다. 이것이 이른바 세상 사람들의 지혜다. 그러나 좀도둑의 경우라면 모르지만 큰 도둑은 오히려 그런 것을 더욱 좋아한다. 그릇째 몽땅 들고 가기에는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할수록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통용되는 지혜란 큰 도둑을 대신해서 물건을 잘 보관해두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생각해보면 성인이니 지혜 있는 사람이니 하고 떠들어대는 사람들 치고 큰 도둑을 감싸주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가? 일찍이 제나라는 산물이 풍부해서 온 나라의 농사가 풍작이었다. 마을마다 부족함이 없었고, 조상과 토지신의 제사에서부터 행정 구역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성인의 치국법 그대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신인 전성자가 하루아침에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도둑질하고 말았다. 도둑질한 것은 나라만이 아니었다. 그는 성인의 치국법가지 그대로 적용하여 민심을 장악했으므로 나라를 훔친 도둑인데도 불구하고 요순 못지 않은 안정된 지위를 보존할 수가 있었다. 또한 그의 불의를 꾸짖는 나라도 없었고, 제나라를 정벌코자 토벌 군사를 일으키는 나라도 없었으므로 자손은 12대에 걸쳐 제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다. 언젠가 유명한 도둑 척에게 부하들이 물었다.
"도둑에게도 도가 필요합니까?" "물론이다." 척은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무엇을 하든 사람에겐 도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물건이 어디에 있는가를 꿰뚫어 보는 것이 성이요, 맨 먼저 침입하는 것이 용이며, 맨 뒤를 지켜 철수하는 것이 의다. 전진과 후퇴를 그르치지 않도록 상황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지요, 얻은 것을 공평하게 나눠주는 것이 곧 인이다. 이 다섯 가지 덕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 큰 도둑이 된 전례는 없다."
이와 같이 성인의 도에 의존하는 일은 착한 사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도척만 하더라도 성인의 동에 의하지 않고는 큰 도적이 될 수 없었다. 더구나 착한 사람이 적고 악한 사람이 많은 것이 이 세상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성인은 사회에 공헌하기보다는 해독을 끼친 편이 훨씬 더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차다. 노나라가 술을 아꼈기에 조나라의 서울이 포위당하였듯이 성인과 큰 도둑 사이에도 똑같은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성인이 있기에 성인의 지혜를 훔치는 큰 도둑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태평 시대를 실현하려면 도둑 따위는 안중에 두지 말고 성인부터 근절시켜야 한다. 냇물이 다하면 골짜기는 마르고, 언덕이 무너지면 못은 묻힌다. 마찬가지로 성인이 없어지면 큰 도둑도 자취를 감추게 되어 틀림없이 태평 무사한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성인이 존재하는 한 큰 도둑은 끊이지 않는다. 그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으로 성인의 지혜를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큰 도둑은 그만큼 살찌게 마련이다. 성인이 되나 저울을 만들면 도둑은 그것을 고스란히 훔치고 만다. 부절이나 옥새를 만들면 그것 또한 고스란히 훔쳐가 버린다. 또 인의를 말하면 인의까지도 그대로 훔쳐버린다. 혁대고리를 훔치는 자는 사형에 처하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나라를 도둑질한 자들은 모두가 인의를 간판으로 내세워 제후의 지위에 앉아 있지 않은가? 인의와 성지를 훔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의를 훔치고 치국법을 훔친 큰 도둑의 소행이 천하의 인정을 받는 세상에서 포상이나 형벌이 얼마만한 효과를 가져오겠는가? 고작 좀도둑을 막는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큰 도둑을 살찌게 하고 악을 억제할 수 없게 만든 책임은 다른 사람 아닌 성인이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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