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3장 동양문학
무정 - 이광수(1892 - 1950)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우리 나라 최초의 현대장편소설.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 신문학에 대한 향학열, 자유연애관 등을 주제로 봉건적인 것을 비판, 새 시대 계몽을 꾀한 이상주의자적인 소설로 신소설과 현대소설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고전적 여성과 신 여성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 지식인이 민족시대라는 개념에 눈을 뜨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낸 이 소설에서는 자유연애 관념, 생명중시의 태도, 동서양 비교론, 근대화 방법론 등의 문제를 나름대로 인식하게 된다.
생애와 작품활동
위기에 선 경계선의 작가 이광수, 그만큼 한 인물에 대한 양면적인 평가가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그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고,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입장에서 춘원문학의 혹평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그는 영욕을 함께해온 작가였다. 우선 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자, 우선 호는 춘원이고 소설가언론인평론가로서 활약했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5살 때 국문과 천자문을 깨우쳤고, 8살 때 4서3경을 읽을 정도로 천재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을 하다 1905년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에 유학했으나 학비곤란으로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학원에 편입, 이 무렵 홍명회문일평 등과 함께 공부하면서 시소설문학론 등을 쓰기 시작했다. 이 무렵 기독교의 성경을 접하고 또한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고는 그의 무저항주의에 공감한다. 또한 홍명회의 영향을 받아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당시를 풍미한 자연주의 문예사조에 휩쓸린다. 1910년에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15년에 김성수의 후원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 그뒤 귀국하여 1917년 한국 근대장편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무정>과 두번째 장편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발표하여 문학적 명성을 얻는다. 그의 출세작인 <무정> 속에 나타난 반봉건적 사상과 자율적혁신적 애정관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청년학생층으로부터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지만 유림층으로부터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19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했으며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 안창호의 민족운동에 공명하여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 계몽적인 논설을 많이 썼다. 1921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 변절자의 비난을 받으며 본부인과 합의이혼하고 허숙영과 결혼한다. 귀국 후 그의 문필활동은 계속되나 순탄치 않았다.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나 이 논문에 나타난 자학적부정적 민족관이 문제돼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한동안 문단에서 소외받는다. 1923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민족적 경륜>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고, <동아일보>에 <선도자(1923)>를 연재 발표하나 안창호를 모델로 한 그 내용이 문제돼 총독부에 의해 중단조치된다. 이광수의 문학적 특성은 1924년경부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즉, 그는 <영대> <조선문단>의 간행에 관여하는 한편 장편 <재생>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 표명된 기독교적 인생관은 그의 종교적 전환을 시사해주는 것이 된다. 또한 26년 <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8)>를 발표하여 역사소설의 장르를 개척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문학적 주조는 민족주의이상주의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그는 1930년 장편 <군상> 3부작을 발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당대현실의 비극성과 지향성을 제시혀며, 이어 장편 <흙(1932)>을 발표, 그의 민족주의적 이상주의를 표현했다.
40세를 전후하면서 그의 문학작품에는 이상주의와 종교적 색채가 짙게 반영된다. 33년 장편 <유정>을 통해 전신 지상주의적 애정관을 표현하는가 하면, 35년에는 장편 <이차돈의 사>를 발표, 종교 특히 불교 쪽으로의 뚜렷한 경도를 보여준다. <사랑>(1939)은 신문에 연재되지 않은 전작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이광수는 이 작품의 서문에서 <내인생을 솔직히 고백했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은 불교에 심취한 작가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한다. <사랑>은 <유정>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쓴 <사랑>에서는 <유정>에 이어 정신 지상 주의적 사랑의 가치를 역설하며 이로써 그의 후년의 종교적 경도가 심해진다. 1940년을 전후한 무렵부터 그는 일련의 친일행위로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된다. 39년에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무명>을 발표하지만 소위 <북지황군위문단>에 협력, 이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힌다. 이어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고, 이듬해에는 개명을 하고적극적인 친일행각에 나서며, 41년에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제의 강요로 각지를 순회하며 친일연설을 한다. 43년에는 조선총독부의 강권으로 한국인학생의 학병권유자 최남선과 함께 도일한다. 1945년 해방 후 그는 친일파로 지목되어 극심한 비난을 받는다. 그는 신병으로 고생하며 부인과 법적으로 이혼하는 등 시련을 겪으며 49년 반민족행위 처벌법에 의해 구속 중 병보석되었다가 50년 납북되었고 그후 자강도 만포시에서 병사했다.
작품에 있어서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그는 계몽적이며 인도주의적인 작품을 남겨 한국 신문학사상 공헌한 바 크다. 그는 한국문학사에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 작가로 평가되는데, 초기작품은 자유연애의 고취와 조혼폐습의 거부 등 반봉건 계몽적 성격이 강하며, <무정>에서는 신교육 문제,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는 최남선에 협력하여 <소년> <청춘> 등의 편집과 집필에 참가하면서 언문일치 등 신학문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초기의 신체시인으로서, 또한 최초의 근대소설 작가로서의 한국 현대문학의 실질적인 기초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초기에 강렬하게 보여준 민족주의 내지 계몽주의적 요소는 후일의 친일적인 행동에 의해 그 의미를 상실하고 사회적 현실을 천착하지 못한 면이 있어 친일작가로서의 비판도 여전하다.
문학적 특징
이광수에 대한 연구는 처음부터 객관적인 분석적 논의보다 극단적인 부정론과 긍정론의 두 갈래로 전개되어왔으나, 그의 사상적인 면을 배제한다면 #1신문학의 개척자로 최고의 작가라는 점 #2계몽주의 문학이며 설교문학이라는 점 #3역사의식이 다소 결여된 위선의 문학이라는 점 #4민족주의인도주의 문학이라는 점 #5연애소설의 창시자이며 대중본위의 소설을 썼다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이론이 없어 보인다. 백철은 이광수 문학의 사상적 배경과 스케일의 광대함을 특색으로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하여튼 춘원 이광수는 우리 나라 현대작가에서 가장 큰 작가다... 춘원은 문명비평가인 동시에 하나의 사상가였다. 그의 작품에는 사상이 들어 있어서 작품의 큰 비중이 되었다. 그리고 사상도 동서로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먼저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인도주의, 기독교사상불교에 대한 연구, 우리 나라 고대사에 대한 지식 등은 춘원의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다. 작품의 스케일이 큰 점도 우리 나라 현대작가로 춘원을 당할 사람이 없다. 그 문학의 폭량이 넓고 문맥이 굵고 어조가 유창한 것도 이 작가의 큰 특색이다. 말하자면 춘원은 우리 현대작가 중에서 거대한 작가다운 면모를 가진 유일한 작가다.>
이광수의 문학적 특성은 그의 문학세계의 방대함으로 인해 요약하기가 쉽지 않지만 대략 민족주의, 계몽주의, 이상주의, 사실주의 등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민족주의 그는 우리나라 최초최대의 민족주의 문학자다. 그의 평생에 걸친 작품 전체에 일관하는 가장 뚜렷한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민족주의이며, 그는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다. 소설을 쓰는 연구의 동기도 <조선과 조선민족을 위하는 봉사와 의무의 이행>에있다고 천명했다. 그의 민족주의 이념은 그의 생애와 작품을 일관하는 주요한 사상적 바탕이지만, 일제 말 그의 친일행각과 관련하여 그 내용과 의의에 대해 많은 비판적부정적 평가가 가해져왔다. 그 중요한 것으로는 그의 민족주의가 근본적으로 역사의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2. 계몽주의 이광수의 문학적 동기는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성을 띤 것이었다. 그는 당대의 한국민중을 계도할 선각자로 자임했고, 자신의 문학을 주로 그의 민족주의 이념을 계몽, 선전하는 수단으로 강조했다. 그의 계몽대상은 당시의 지성인이 아니라 지적 수준이 낮은 순박한 일반대중이었다. 이러한 일반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민족주의 이념이나 사상적 신념을 가르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은 설교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계몽적 태도의 과잉노출은 한편으로 작품의 구조적 긴밀성에 손상을 주고 결과적으로 그 예술적 감동성을 약화시켰다.
3. 이상주의 이광수 문학의 이상주의적 경향은 천도교 - 기독교 - 불교의 과정을 거치는 그의 종교적 편력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의 문학은 처음부터 다분히 이상주의적 경향의 기미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경향은 그가 당시의 현실로 인한 압박과 좌절 및 비극성을 절감할수록 그의 문학에서 심화되어 드러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민족주의 이념을 표방한 그의 많은 작품 중에는 민족이 처한 현실의 비극성이나 그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의 이념의 실현을 위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인물과, 그러한 이념이 궁극적으로 실현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인물과, 그러한 이념이 궁극적으로 실현된 이상의 세계가 한결같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적 인물과 세계는 지나치게 미화되어 비현실적이기조차 하지만, 당시의 독자대중들에게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의욕과 생기를 북돋는 효과를 발휘했다.
4. 사실주의 이광수가 취한 사실주의적인 방법은 문체 면에서 근대소설적 구어체 문체의 확립과,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묘사체 문체의 사용 등으로 나타난다. 언어나 문체외에 이광수의 사실주의적 방법은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사실주의, 멜로드라마적이고 공식적인 플롯 구성법, 평면적이고 유형적인 인물설정 등의 결함 등에의해 고도의 예술적 차원에로까지 승화되지 못했다. 결국 그가 취한 사실주의는 그가 천명한 계몽주의이상주의 작가적 입장에 의해 스스로를 제약, 한정된 성과에 멈추고 만 것으로 보인다.
주요 등장인물 형식: 경성학교 교사, 도쿄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와서 개화사상을 가르치고 선형과 영채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여 주기도 한다. 영채: 형식의 옛 약혼자로 구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투옥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된다. 선형: 김장로의 딸로 신교육을 받은 새 시대의 여성. 형식에게 영어 개인교습을 받다가 그와 친해진다. 형식과 약혼하여 미국유학을 가려한다. 병옥: 신사상을 가진 신여성으로 기차 안에서 자살하러 가는 영채를 만나 그녀를 계몽한다. 결국 영채와 더불어 도쿄 유학길에 오른다.
작품의 주요내용
이형식은 도쿄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 경성학교의 영어교사로 재직 중인데 미국에 유학가려는 김 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개인지도한다. 그러던 중 형식은 선형에게 매혹되어 차츰 연정을 품게 된다. 이 무렵 형식의 어린 시절 동무이자 옛 은사 박 진사의 딸인 영채가가 형식의 하숙집에 찾아온다. 그녀는 투옥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어 있었다. 몸은 기생이라 해도 형식을 사모하며 절개를 지켜왔다는 영채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형식은 바야흐로 선형과 영채라는 서로 다른 두 여자 사이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이때 영채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경성학교 교주의 아들 김현수는 배 학감으로 하여금 그녀를 청량사로 유인하게 하여 겁탈한다. 형식이 영채를 구하러 청량사로 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음날 형식은 영채가 있는 기생집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영채는 형식에게 유서를 남기고 평양으로 떠난 뒤다. 그러던 영채는 평양행 기차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도쿄 유학생인 신여성 김병옥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녀는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길이었는데, 영채의 신세에 대해 듣고는 영채를 교육하기 시작한다. 병옥의 말에 영채는 죽음을 택하는 대신 병옥의 집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녀는 봉건적 관념에서 벗어나 신여성으로서의 자질을 길러나간다. 한편 형식은 영채에 대해 자책을 느끼며 그녀를 찾기 위해 평야으로 간다. 그는 미친 듯이 평양 거리를 헤매며 영채를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한다. 그는 영채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에 돌아오니 김현수는 거짓 소문을 날조하여 형식을 경성학교에서 쫓아낸다. 그러나 김 장로는 그러한 난관에 빠진 형식을 자기의 딸 선형과 결혼시켜 둘이 함께 유학을 갈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런데 신혼여행 겸 유학길인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형식과 선형은 영채와 병옥을 만나게 된다. 영채는 병옥의 도움으로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고, 이제 일본으로 음악과 무용을 공부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 같은 우연한 만남 후 기차는 삼랑진 수해현장에 이르러 연착이 되고 만다. 형식과 영채는 담담한 마음으로 서로의 일행을 소개한다. 그들은 개인적인 생각을 버리고 모두 한 일행이 되어서 수재민 의연금 모집과 민중계몽을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고 함께 봉사활동에 임한다. 그들은 스스로 민족의 미래를 담당할 주체임을 역설한다. 이때 네 사람의 가슴 속에는 똑같이 <나의 할 일>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모두 한마음이 된 듯하다. 형식은 교육자가 되고, 병옥과 영채는음악을, 선형은 수학을 공부하고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들은 모두 조선을 위한 역군이 되려는 희망에 부푼다.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라 평가받는다. 이 소설은 한국 현대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며 당시 독자들의 바상한 관심을 모으며 연재되었다. <무정>은 초창기의 신문학을 결산하는 획기적인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에 해당한다. 한일합방 후 일제 탄압 아래 신음하는 동포의 민족주의 사상을 밑바탕으로 1910년대의 시대상을 형상화했다.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 신교육사상, 자유연애관과 신결혼관, 그리고 기독교 신앙 등을 주제로 하고 일체의 봉건적인 것에 대한 비판과 새시대의 계몽을 꾀한 이상주의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에 나타난 남녀간의 윤리가 지배적인 세대에 있어서 혁명적인 새로운 사상으로 한때 사회적인 비난을 면할 수 없었지만 차차 새로운 시대사조로 새 세대엑 환영받게 되었다. 작중인물의 대부분은 외국유학까지 마치고 온 지식계급, 이들은 새 시대의 인간상으로 내세웠는데 이것은 당시 독자에게 이상과 동경의 대상이기는 했으나 주요 등장인물의 특수계급화로 대중과의 유리는 피할 수 없는 결함이 되었다. 또한 작중인물인 이형식과 김선형은 막연한 인텔리 근성으로, 시급한 민족주의 각성을 구호로 하거나 당시의 민중의식을 포착한 리얼리즘의 소설이 아닌 계몽문학 또는 이상주의 문학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 작품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신소설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점이 없지 않으나, 세련된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구성이나 대화나 장면묘사 등 현대소설적인 조건으 갖추고 봉건잔재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31운동 이후 한국 현대소설을 가능케 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 작품을 현대문학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는 근거로는 근대적인 의식과 자아각성이 보인다는 점, 서술이 비약적추상적인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이고 세밀한 것이 되었다는 점, 선과 악의 이분법적 도식에서 탈피했다는 점, 구어체에 접근했다는 점 등을 들 수있다. 그러나 <무정>은 계몽성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문학을 위한 문학>이라는 근대적 문학인식은 김동인주요한 중심의 동인지<창조>가 나오면서 비로소 확산되기 시작했다. <무정>의 계몽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는 것은 인물들 사이의 관계에서다. 소설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관계유형은 교사 - 학생 관계다. 첫장면부터가 선형을 가르치러 가게 되는 이형식의 묘사이며, 선형 - 형식 외에도 노파 - 형식, 영채 - 병옥, 영채 - 기생 월화 등의 관계가 모두 사제관계다.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는 삼랑진 수해장면에서 이 점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형식이 신우선, 선형, 영채, 병옥에 대해 교사로서의 권위를 회복함에 의해 소설이 결말을 맺게 되는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통일성도 부족한 형식의 성격은 교사로서의 그의 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확신에 찬 선각자의 그것으로 변모한다. 교사는 학생을 계몽하고 학생은 다시 학생들을 찾아나선다. 이것이 <무정>의 계몽주의다.
그러나 1917년 당시만 해도 독자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수용되었던 계몽주의는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다른 상황을 맞게 된다. 교육과 계몽에 의해 사회가 변화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이 힘을 잃게 된 것이다. 춘원이 조선민족의 자기비하에 기반한 민족개조론을 써서 반발을 불러일으킨 일은 계몽주의의 쇠퇴를 잘 보여준다. 한편 그의 계몽주의는 그것이 민중의 주체적 역량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민중을 계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한계를 내포한다. 그것은 춘원의 민족주의가 가진 본질적 한계와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무정>의 근대문학사적 의의는 #1자아각성에 바탕을 둔 자유연애 및 민족주의 등 근대적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점 #2서구의 <novel>의 개념에 접근한 최초의 본격적인 장편소설이라는 점 #3최초로 포괄적획기적으로 당대의 사회사에의 접근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 #4근대소설다운 한글문체를 최초로 완성시킨 작품이라는 점 #5최초로 성격창조를 실험하여 성과를 거둔 작품이라는 점 #6최초로 사실적 표현기법을 시도, 성과를 거둔 작품이라는 점 등으로 요약된다.
1950년 625동란 중 납북되어 강제로 끌려가던 중 그해 10월25일 만포에서 병사하였다는 그의 뒤늦은 부음은 어두웠던 우리의 근대사를 생각케 한다. 1939년 이후 별절한 그의 친일행각이나 6.25중 <두번 다시 조국을 배신할 수 없다>며 북으로 끌려가, 문우이던 벽초 홍명회의 위로도 아랑곳없이 행려병자처럼 외롭게 죽어간 한 예술가의 슬픈 운명 앞에 뒤늦은 조사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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