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3장 동양문학
송강가사 - 정철(정철, 1536 - 1593)
일상적인 우리말을 구사해 한문학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정서를 그려낸 한 폭의 진경산수화와 같은 작품집. <송강가사>는 가사문학의 주옥 같은 절창을 담은 송강 정철의 국문 시가집으로, 고전시가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4편의 가사작품과 훈민가를 포함한 79수의 시조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영욕과 부침이 반복된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자연과 인간, 꿈과 현실에 대한 인식을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형상화하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과시한 한국문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송강의 생애
우리 국문학사상 쌍벽으로 꼽히는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를 두고 일반적으로 <장가의 송강>과 <단가의 고산>으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이는 단가에서조차 송강의 절대우위를 선언하기도 한다. 단가에 대한 평가가 그렇다면 송각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장가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조선시대의 문인으로 호는 송강. 동령부 판관을 지낸 부친과 대사간(사간원의 장)의 딸을 부모로 하여 4남 2년 중 4남으로 서울 삼청동에서 출생했다. 그의 큰누나는 인종의 숙의(왕비 다음), 작은누나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대군의 부인이었다. 왕실과 이렇게 가까운 처지이니 그는 어릴 때부터 자유스럽게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고, 특히 인종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은 그보다 나이가 두 살 아래여서 소꿉친구로 어울렸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송강이 10세(1545) 되던 해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8세의 경원대군이 임금이 되니 그가 명종인데, 임금이 어려서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영악한 여자여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을사사화를 일으켜 그의 집안도 화를 당해 일가가 몰락하게 되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송강은 유년취학이 어려웠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부친이 석방되어 전라도 담양으로 함께 내려오면서 부터였는데 그의 나이 16세였다. 이후 10년간 여기에 살면서 김인후, 기대승 등에게 수학했다. 이때가 송강에게 있어서가장 꿈에 부푼 시기였다. 그것은 다감한 소년시절을 성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며 학문을 닦고 시재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김성원, 고경명, 백광훈 등과 사귄 것도 이 시기였다.
26세 때 진사시험에 일등한 송강은 다음해(1562) 별시문과에도 장원하여 그의 문재를 떨쳤다. 이때부터 벼슬길에 오른 송강은 이후 파란만장한 운명을 맞이한다. 관직에 등용된 이후 도승지, 예조판서, 좌의정 등의 요직에 오르지만, 동서분쟁은 더욱 악화되어 송강은 어느새 서인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인과 마찰이 불가피했고 이로 인해 여러 번 유배생활도 했다. 45세 때 강원도 순찰사가 된 송강은 임지에 부임하여 화려한 관동의 풍경을 두루 소요하면서 유명한 <관동별곡>을 썼고, 백성을 선도하기 위해 <훈민가> 16수를 지었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성균관의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예조판서 등의 자리에 오르지만, 사헌부와 사간원이 술을 즐기고 포용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하여 담양으로 다시 내려와 독서와 자연을 벗삼았다. 정치적으로는 비참한 시기였으나 그의 작가 생활에 있어서는 가장 보람찬 시기였다. 그 유명한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후세에 길이 남을 가사들을 지었기 때문이다.
54세 때 전주에서 서인 출신인 동인의 정여립이 모반사건을 일으키자 그 반대에 있는 송강은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을 추방했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하여 선조의 노여움을 사 다시 귀양길에 오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피난길을 떠나던 중 개성에 이르러 개성사람들의 요구로 송강은 석방되어 남하하다가 북상하는 선조와 마주쳤다. 그는 충청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고 다음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황달병에 걸려 신음하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했다. 송강의 일생을 대별해보면 1. 파란 많은 관계생활, 2.이에 따른 유배생활, 3. 은거와 창작생활로 나누어볼 수 있다. 문집으로 <송강집> <송강가사> 등이 있다.
<송강가사>의 내용
상하 2권 1책으로 되어 있는 <송강가사>는 상권 총 24장에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가 실려 있고, 하권 총 20장에 <단가>라는 제목으 훈민가 16수등 총 77수가 실려 있다. 그 밖에 107수의 시조를 남겼다. 송강의 문학작품은 대체로 시조나 단가보다 장가가 더 유명한데, 그의 장가는 추종을 물허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단가는 도덕적 교훈의 성격을 띠고 있어 문학적 가치는 높지 않다. 역대로 많은 문인이나 관리들은 그의 가사를 즐겨 읊었는데, 특히 관동기생들은 필수적으로 암기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는 그 유명한 4대가사에 관해 살펴본다.
1. <관동별곡> 송강이 45세 되던 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한 후 산수풍경, 고사풍속 등을 읊은 것으로 가사문학의 백미를 이루는 대표작이다. 총 294구로 된 장가로 고래로부터 묘사와 조어의 기묘함을 들어 <악보의 절조>라고까지 평을 받은 가사다. 용어는 34언의 어조에 맞추어져 있으며, 한문어투가 비교적 적고 사용된 한자도 대개 우리말화한 것이다. 특히 감탄사의 중첩사용과 대귀법의 묘, 적절한 생략법의 구사는 뛰어난 문장의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 작품은 저자가 정치생활 중 비교적 득의한 시대의 것인만큼 가사 전체의 분위기가 명쾌하고 화려하다.
강호에 병이 깁퍼 죽림에 누었더니 관동팔백리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 드리다라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절이 압패셧다
로 시작되는 <관동별곡>을 두고 조윤제는 <사>의 호탕비장함과 <조>의 유창한 흐름을 들어 한국장가의 제1등이라 했고, 이병기는 기풍의 웅장함을, 김사엽은 우리말의 자유자재한 구사를 들어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라 했다. 그러나 이보다 25년이나 앞서 나온 백광홍의 <관서별곡>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이를 모방한 것이 발견된다. 제명과 내용, 저체적인 체제나 표현 등이 유사한 점이 많다. 때문에 <관동별곡>역시 <관서별곡>과 동공이곡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다만 송강의 <관동별곡>은 짜임새가 좀더 공교하고 가락의 흐름이나 조어의 기술이 보다 유창하며 세련되어 보이고 표현기교도 참신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인 틀은 <관서별곡>을 토대로 하여 이를 재구성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관동별곡>은 이후 조우인의 <속관동별곡>과 위세직의 <금당별곡>에 영향을 주어 그 맥이 이어지는데, <관동별곡>이 끼친 영향도 지대함을 알 수 있다.
2. <사미인곡> 이 작품은 송강이 50세 되던 해 당파싸움으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조정에서 물러나 4년간 전남 담양으로 내려가 은거하며 자신의 처지와 임금에 대한 사모의 정을, 한 여인이 그 남편을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마음에다 기탁하여 고백한 것으로, 뛰어난 우리말 구사와 세련된 표현으로 속편인 <속미인곡>과 함께 가사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2음보 1구가 총 126구에 달하고 3.4조의 음수율이 주를 이룬다. 구성은 #1서사 #2본사: 춘원하원추원동원 #3결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본사는 춘원하원추원동원 등으로 계절에 따라 짜여져 총 6단락으로 구분된다. 서사에서는 조정에 있다가 담양으로 퇴기한 자신의 위치를 광한전에서 하계로 내려온 것으로 대우(둘이 짝짓기)했다.
춘원에서는 봄이 되어 매화가 피자 임금께 보내고 싶으나 임금의 심정이 어떤 상태인지 의구하는 뜻을 읊었다. 하원에서는 화려한 규방을 표현해놓고 이런 것들도 임께서 계시지 않으니 공허함을 노래했다. 추원에서는 맑고 서늘한 가을철을 묘사하고 그중에서 청광의 임금께 보내어 당쟁의 세상에 골고루 비치게 하고 싶은 마음을 토로했다. 결서에서는 임의 그리워한 나머지 살아서는 임의 곁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가 되어 꽃나무에 앉았다가 향기를 묻혀 임계 옮기겠다고 읊었다. 전편을 통하여 한 여인의 독백으로 되어 있고, 여성적인 행위정조어투어감 등을 살리면서 봄여름가을겨울에 맞는 소재를 빌려 작자의 의도를 치밀하게 표현했다.
이몸이 생겨날 때 임을 따라 생겼으니 한 평생 연분인 줄 하늘도 모르던가 나 한몸 젊어 있고 임 한분 날 괴오시니 이마음 이사랑은 견줄데 전혀 없다
로 시작되는 <사미인곡>은 사용된 시어나 묘사 또한 비범한 것으로 높이 칭송되고 있다.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가히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비길 만한 작품>>으로 평가했고, 김만중은 그의 <서포만필>에서 <속미인곡> <관동별곡>과 함께 <<동방의 이소(중국의 굴원의 작품)요, 자고로 우리 나라의 참된 문장은 이 3편 뿐이다>>라고 절찬한 바 있다. 한편 <사미인곡>의 문학적 영향문제는 일반적으로 굴원의 <이소>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사미인>이라는 제명도 <이소>의 제9장에 있는 <사미인>이라는 편명과 같으며 <이소>의 충군적 내용이 이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언어표현기법형식구조 등 모든 면에서 송강다운 문학적 개성이나 독창성이 뛰어난 걸작이라 하겠다. 한편 후대에 이르러 이 작품을 본받아 동일한 주제와 내용을 가진 작품들이 나타났는데, 정철의 <속미인곡>을 비롯하여 김춘택의 <별사미인곡>, 이진유의 <속사미인곡>, 양사언의 <미인별곡> 등이 그것이다.
3. <성산별곡> 이 작품은 송강이 16세부터 27세에 등과할 때까지 10년간 낙향해 있던 곡인 성산이란 지명을 제목으로 하여 쓴 작품이다. 성산은 현재의 전남 담양에 해당한다. 여기서 송강은 그의 친척인 김성원이 지은 식영정과 서하당 등의 정자에서 지은 작품으로, 동문수학하던 친한 벗이자 친척이던 김성원의 은둔 풍류생활을 칭송하며 계절에 따라 변하는 주위의 경치를 노래했다. <성산별곡>의 내용은 성산의 아름다운 경계를 사계로 나누어 노래하고 여기서 자연과 짝하여 독서탄현으로 풍류를 즐기는 주인공을 찬미한 내용이다. 그 구성은 #1서사 #2춘사 #3하사 #4추사 #5동사 #6결사로 되어 있는데, 이 가사의 특색은 한 계절을 한 단위로 하여 엮어놓은 점이다. 총 169구로 된 이 가사는 송강 가사 중에서도 그리 평가되는 작품은 아니지만 <성산가단>을 활성화하고 동 가단을 송강문학의 산실로 만들어 우리 문학사를 크게 빛내주었다는 점에서 그 제작의 의의는 크다고 생각한다.
푸른 시내 흰 물결이 정자안을 둘렀으니 천손의 비단폭을 그 뉘가 베어내어 이엇는 듯 펼쳐놓은 듯 야단스런 경치로다 산중에 달력없어 계절을 모르더니 눈앞의 풍경이 사철따라 전개되니 듣고 보는 일이 모두 선계로다
이병기는 이 가사의 짜임새가 공교하다고 했고, 김사엽은 순수한 생활상과 그의 개성이 비교적 풍부하게 반영된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가사는 구성은 물론 조사법표현기교 등에 있어 송순의 <면양정가>의 영향을 받은 동공이곡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4. 속미인곡 이 작품은 작가의 나이 50세에서 54세 사이에 지은 것으로 두 선녀가 대화하는 형식으로, 남편과 이별하고 지상으로 내려와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심정을 읊은 것으로 2음보를 1구로 하여 96구에 해당하며 기본율조는 34조로 되어 있다.
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오구려 백옥경 좋은 곳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날도 다 저무는데 누굴보러 가시는고
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사미인곡>의 속편이다. 그러나 <사미인곡>보다 언어의 구사와 시의의 간절함이 더욱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미인곡>에서는 한자숙어와 전고가 간혹 섞여 있는 데 반하여 <속미인곡>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이를 증명한다. 연군의 뜻을, 임을 이별한 한 여인의 애달픈 심정에 의탁시킨 이 노래는 <사미인곡>과 같이 서정적 자아의 독백으로 이끌어 간 것이 아니라 보조적 인물을 설정하여 대화체로 진행시켰다는 점에서 참신한 맛을 볼 수도 있다. 특히 <사미인곡>의 결사는, <임이야 나를 몰라주실지라도 나의 충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일방적인 연군의 소극성을 보였지만, <속미인곡>은 보다 적극적으로 임까지도 오래도록 구슬프게 하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을 지을 때보다 작자의 생각이 한결 원숙해진 후의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김만중도 전후 미인곡 중 <속미인곡>이 더 고상하다고 했는 데, 이는 <속미인곡>의 표현이 지니는 진솔성과 간결함 때문이라 하겠다.
송강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선풍도골 같은 뛰어난 용모와 괴벽에 가까운 강직한 성격, 그리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대쪽 같은 송강의 성격은 불의를 용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정치가의 필수 조건인 관용과 아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선천적인 기질은 자연히 술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초연히 속세를 떠나 시와 술로써 인생을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그는 정치인으로서보다 시인으로 더 대성한 사람이며, 만약 그가 없었다면 우리 국문학에는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송강가사>는 종래의 한자투어의 형태를 탈피하여 44조 운율에 의하여 자유자재로 우리말을 구사했으며, 그의 호탕하고도 비장한 시풍은 우리 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송강의 작품에 대해서는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형용의 묘와 말의 기이함은 참으로 악보의 절조임에 틀림없다>고 했고,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우리 나라 노래 중 정철이 지은 것이 가장 훌융하며 <관동별곡> <사미인곡><속미인곡>이 후세에 성행했다>>고 평가했다. 끝으로 송강문학의 의의와 국문학적 위상을 점검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전반적으로 한문학이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 문학을 문학답게 만들어낸 사람 중 하나가 송강이고 그의 문학이었다. 우리 문학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15세기의 훈민정음 창제는 우리 문학의 성장발전에 획기적인 촉매제가 되긴 했으나, 송강 당시만 해도 아직 한문학의 풍토가 지배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우리 문학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실로 막대하다.
(2) 우리 문학 소산의 요람지가 되어 우리 문학사를 크게 빛내준 <성산가단>을 송강이 활성화시켰다는 점이다. 송강은 당시 시가활동의 무대였던 식영정서하당소쇄원환벽당 등 이른바 성산가단에 출입하면서 활발한 시가 활동을 폈는데, 앞서 언급한 <성산별곡>을 비롯, 많은 단가한시가 여기서 산출되었다.
(3) 송강처럼 문학에서 우리말의 고유미를 발견하고 이를 대담하게 활용한 작가도 드물다. 즉, 그의 국어활용술의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이 때문에 그의 문학적 효과는 말할 것도 없고 독자로 하여금 친근감을 갖게 했다. 김만중이 송강의 문학을 높이 평가한 것(특히 속미인곡)도 송강의 이 국어활용술에 있었던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4) 송강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의 계보를 형성했다. 조우인위세직김상용 등에 영향을 주어 이들로 하여금 <매호별곡> <송관동별곡> <조우인> <별사미인곡> <훈계자손가> <오륜가> 등의 시가를 낳게 하여 그 계보를 형성한 것을 보게 했다.
위와 같은 점에서 송강과 그의 문학은 우리 문학사상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식영정 경내에 있는 표적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위대한 시인은 종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 위에 시를 쓴다. 이곳 식영정 마루턱에 서면 바람도 옛운율로 불고 냇물도 푸른 글씨가 되어 흐르나니 우리는 지금 풀 한포기 흙 한줌에서 송강의 가사 성산별곡을 온몸으로 읽는다.
식영정 : 시도기념물 제1-1호 (담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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