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장 서양사상 편
종의 기원 - 저자 : 다윈(1809 - 1882)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후 자연선택설로 다시 한번 인간의 세계관을 바꾼 책. 다원이 진화론에서 주장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등의 이론은 19세기 이후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갈턴의 우생학과 스펜서의 사회적 다위니즘에 영향을 미쳐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의 이론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다윈이 젊은 시적 비글 호 항해기간 동안 지질학, 생물학연구를 통해 얻어진 수많은 증거들을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는 것이 흥미있으며, 생물학에 있어서의 뉴턴을 표방했던 그의 과학방법론도 엿볼 수 있다.
생애
자연선택설로 인간의 세계관을 바꾼 영국의 진화론자. 그의 조부도 진화론의 선구자인 그는 작은 도시의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애든버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으나 결국 박물학자가 되었다. 졸업 해인 1831년부터 5년간 해군의 측량함인 비글 호에 승선하여 과학탐험을 위한 세계여행에 나선 것이 다윈의 일생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된다.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섬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면서 동식물과 지질을 조사하여 진화론의 기초가 된 자료를 수집했다. 귀국 후 지질학회의 라이엘과 가까이했다. 그는 라이엘의 저서인 <지질학원리>와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특히<인구론>에서는 그는 식량보다 더 많은 인구가 생기는 현상을 자연계 전체에 적용시킬 경우 약한 자가 식량을 위한 투쟁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윈은 그후 20년간의 용의주도하고 광범한 연구를 통해서 1859년에 마침내 <종의 기원>을 출판했다. 그에 앞서 1858년에 당시 말레이 반도에 있던 영국의 박물학자인 월리스부터 다윈의 주장과 똑같은 내용의 진화설의 원고를 받고 미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즉, 우선권을 다투는 불쾌한 싸움이 될 것 같은 곤란한 사태로 번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동논문으로 <자연도태, 생존경쟁에 있어서 적자가 존속하는 것에 의한 종의 진화에 관하여>를 린네학회에 발표했다. 그러나 출판계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재미있게도 다음해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자 초판 1,250부가 당일 매진될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이어 1871년 <인간의 유래>가 출판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윈 이전의 진화론과 다윈의 진화론
생명의 진화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의 단계>에서 엿보여지고 있으나 현대의 진화론과는 입자을 달리하고 있고, 18세기 중엽까지는 우주만물은 전지전능한 신이 창조했고 생물의 종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크리스트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어서 진화의 개념은 대두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근대에 와서 프랑스의 뷔퐁, 영국의 에라스무스 다윈 등에 의해 진화가 새롭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물진화론을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표한 첫번째 학자는 프랑스의 라마르크(1744-1829)였다. 라마르크는 <동물철학>(1809)에서 동물은 생활환경이 변하면 습성도 변하고 그 결과 새로운 습성에 따라서 많이 사용하는 기관은 더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한다는 이른바 용불용설 (제1가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얻은 획득형질의 유전 (제2가설)을 인정한 그의 생각은 오늘날의 유전학지식에는 맞지 않다. 다윈은 진화론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언급되나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동식물의 종은 모두 다산이며 생존 가능한 개체수보다 훨씬 많은 자식을 만든다. 그래서 개체 간에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일어난다. 이때 같은 어버이로부터 출생한 개체 간에도 조금씩 변이가 보이기 때문에 생존에 유리한, 즉 가장 잘 적응한 변이를 가진 개체만이 살아남는다. 이러한 자연선택이 몇 대에 걸쳐서 계속된다면 새로운 종이 형성되고 그 유리한 변이성이 누적되어 종의 다양화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즉, 생물의 변이-생존경쟁-적자생존-자연선택의 과정이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이다.
종의 기원의 내용
풍부한 실증적 사실에 의거하여 진화론을 전개하고 결국 생물이 진화한다는 사상을 일반에게 인식시킨 것은 영국의 다윈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진화론 자체가 충분한 설득력도 있었지만, 그의 자연도태설이 산업자본주의 시기의 자유경쟁의 이념과 일치되었고, 종교와 모순되는 학설일지라도 그것이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갖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종의 기원>의 완전한 제목은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내지 생존경쟁에 있어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이다. 서론에서는 본서가 저자 학설의 요약임을 밝히고 이어 각 장의 구성의 의미를 논한 다음, 자연선택이 종의 변화의 유일하지는 않으나 가장 중요한 방도라고 확신하고 있다.
제1장에서는 <사육할 때의 변이>에서 사육에 의해 생물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즉 인위선택이 주제가 되어 있다. 제2장에서는 자연계의 종이 변종과 구별하기 어려운 점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속 중의 종의 위치를 분석하고, 종의 변종에서 생성되었다고 보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생존투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생존투쟁은 생물과 물리적 환경조건과의 사이, 이종의 생물 사이, 동종의 생물 사이 등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데 모두 생물의 격렬한 증식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것이다. 가장 격렬한 생존투쟁은 동종의 개체 간 또는 변종 간에 보이며, 이것이 자연선택의 기초를 이룬다. 다윈은 생물에 있어서 생물끼리의 관계는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제4장 <자연선택 또는 최적자의 생존>은 앞장에 이어 조금이라도 유리한 변이를 갖는 개체가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을 기회를 더 많이 갖는다고 말하고, 이 생존, 즉 최적자의 생존(스펜서의 표현)을 자연선택 이라고 부른다고 서술하고 있다. 제5장에서는 최초의 2장과 다소 중복되는 점도 있지만 변이의 기본적인 성질이 정리되어 있다. 모든 변이 간의 상관성이 강조되고 기관의용 . 불용의 영향도 인정되고 있다. 변이는 원칙적으로 유전한다는 것이 다윈 이론의 전제로 되어 있다.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5장으로 끝나고 그뒤 부분은 대체로 보론이라 할 수 있다. 제6장에서는 자기 이론의 미비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제7장에서는 자연선택설에 대한 주요한 이론에 대해 자연선택이란 유용한 구조의 발달단계를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는 바이바트의 의견이다. 이에 대해 다윈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광범위하게 원용하고 있다. 제8장 <본능>에서는 꿀벌 . 개미 등의 고도한 본능이 어떻게 발달해왔는가 하는 점이 문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제9장 <잡종>에서 잡종의 생식 불능성은 종의 창조에 있어 특별히 부여된 것이 아니라 변종으로부터 종이 생성한다는 의견을 막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서술하고 있다. 제10장과 11장은 지질학상의 문제, 제12장 및 13장은 생물지리학상의 문제, 제14장은 형태학상의 문제인데, 그러한 학문상의 모든 사실이 자연도태설로 설명될 수 있다는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이 책의 일관된 흐름은 진화요인론이라 볼 수 있다.
그는 5년간의 항해 동안 원시종족을 방문하기도 하고 엄청난 수의 동식물을 관찰하면서, 동식물의 종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지질시대사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아직 진화의 원인이 무엇인가는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거기서 문제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경쟁을 통해서 자연선택(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다윈은 두번째로 중요한 저술인 <인간의 유래>에서 더욱 충격적인 결론을 발표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선조가 오랑우탄. 침팬지. 고릴라 등의 선조와 관계가 있는 원숭이와 같은 동물이라는 결론이었다.
진화론의 영향 및 현대적 의의
근대과학의 발달에 있어 그중 물리학에 있어서는 갈릴레이와 뉴턴의 시대인 17세기, 화학의 경우에는 라부아지에와 돌턴이 활약한 18세기 후반을 그 전환점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근대생물학의 전환점을 어디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우나 다윈과 멘델의 시기인 19세기 중엽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위에서 본 것처럼 다윈의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래 또 한번 사람들의세계관을 변화시켰다. 진화론을 모르고서는 19세기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의 발달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이론의 영향 및 현대적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다윈 학설의 수정
다윈의 진화론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진화의 증거를 굳힌 점과 다른 하나는 자연도태설에 집중되고 있는데, 다윈도 자연선택설에서 라마르크처럼 개체변이에 의한 획득형질이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늘날의 유전지식으로는 개체변이는 유전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즉, 1870년대에 바이스만은 체세포와 생식세포는 전혀 다르다는 세포설에 입각하여 전자의 변화가 후자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후천적 성격은 단지 체세포에서만 얻어지고 부모의 생식세포 안에 있는 성격만이 유전되기 때문에 후천적 성격의 유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성직자 멘델은 완두콩의 교배를 바탕으로 결정적인 유전법칙을 공식화했고, 폴란드의 식물학자 드 브레스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입각한 돌연변이설을 발표했다. 그는 다윈이 주장한 것처럼 진화란 사소한 변이로 일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갑작스러운 돌연변이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했다. 돌연변이가 환경에 알맞을 때는 돌연변이를 한 개체가 생존경쟁에 이기며 그 후손이 그 인자를 유전받게 된다. 그의 학설은 다윈 이론의 약점을 보완하여 진화론은 다윈이 제시한 것보다 완전한 것이 되었다. 그는 유전이 신체적인 면에서와 같이 정신적인 면에서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문명사회의 경우는 열악하게 태어난 자도 인도주의에 의해 생존해갈 수 있는데, 이는 자연도태원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우수한 유전형질을 소유한 자만이 생존, 번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단종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이 우생학은 과거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배척운동의 일환인 이민제한법과 단종법, 그리고 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이 행한 유대인 배척, 대량학살과 같은 인종차별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1972년부터 우생학이 사회생물학으로 다시 부활되어 현재 그 존재양식을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에서 노벨상 수상자도 참여한 정자은행 문제는 이 사상의 한 예로 나타난 것이다.
2. 종교계의 반응
인간의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진화론은 크리스트교의 창조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어서 미국에서는 최근까지도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한 공립학교도 있으며, 진화론과 창조론 양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법정논쟁이 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 논쟁은 1세기 이상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3. 사회적 다위니즘
사회적 진화론이란 다윈이 생존경쟁과 적자생존 원칙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한 것으로 스펜서, 헉슬리, 헤켈 등이 주장했으나 후에 인종주의와 전쟁찬미론을 야기시키고 약육강식의 상황을 정당화하는 반동적 사상으로 왜곡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즉, 우수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제국주의의 이론적 지주가 되기도 하고 보수주의, 자유방임주의, 개인주의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리하여 앵글로색슨 계통의 영국과 미국인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인 자부심을 갖게 되고 러시아 민족은 범슬라브주의를 제창하며, 튜턴 계통의 독일민족은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웠다.
생물학과 인류학에 혁명을 가져오고 이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다윈의 명저 <종의 기원>의 힘이 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