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장 서양사상 편
프린키피아 : 저자: 뉴턴(1642~1727)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로 이어지는 고전물리학의 완성자 뉴턴의 역학체계를 기술한 책. 이 책은 뉴턴의 3대 발견, 즉 중력법칙, 미적분, 빛의 입자설 중 중력법칙에 관한 것으로 어려운 기하학 법칙을 사용하고 있지만, 모든 물체 사이에 존재하는 만유인력(보편중력)을 가정하고 세 개의 운동법칙을 바탕하여 수학적인 추론을 통해 천체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당시 유럽 사상계 전체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생애
뉴턴과 동시대의 시인인 포프는 뉴턴을 두고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밤의 장막 속에 갇혀 있었는데 신이 말하기를 뉴턴이여! 거둘지어다 하니 만사가 광명 속에 드러났다 고 격찬했다. 인류역사상 경이로운 천재 중의 한 사람으로 영국출신의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갈릴레이가 사망한 1642년 영국 링컨셔주울즈소프에서 허약한 상태로 태어났다(그뒤 꼭 300년 만인 1942년에는 20세기 후반의 최고의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이 태어남). 중학교 때부터 수학에 흥미를 갖게 되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케임브리지 재학시절 뉴턴은 염세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해외무역과 상업이 성해지고 대학의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시대에 구태의연한 연공서열적인 학내인사가 횡행하고, 퇴폐적인 생활에 빠진 교사와 학생이 적지 않아 부패한 대학에 대한 청교도적인 반항과도 같았다.
1665년 말 케임브리지에 페스트가 유행하자 고향인 울즈소프로 내려가 이 당시가 나의 발명을 위한 인생의 봄이었기 때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 수학과 철학에 몰두했다 고 그가 훗날 회고했듯이 고향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고향에 머문 1년 반 동안 사과나무에서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떨어지지 않는가 라는 의문 속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등 주요구상이 형성된다. 69년 스승인 베로의 루카스 교수직(석좌교수)을 이어받아 수학을 강의하고 이어 반사망원경을 제작했으며, 72년 왕립협회 회원이 되어 두문불출, 연구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오랜 노력의 결과로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다. 86년 국왕이 대학의 규정을 침해하고 베네딕트 파의 신부 프란시스에게 학위를 주어 케임브리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하자 이에 저항하는 대학전권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 결국 왕을 패배시켰다. 88년 프란시스 사건에서 보여준 굳은 자세를 인정받아 대학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1년간 런던에 체재했다. 그때 로크, 페피스 등 정부고관들을 알게 되고 그후 행정직을 구하려 했지만, 토리 당의 시대였기 때문에 휘그당이었던 그에게는 적당한 자리가 없었다.
명예혁명의 와중이던 1689년 케임브리지 하원으로 선출되고 96년에는 조폐국장, 1703년에는 왕립협회 회장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2년 뒤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기사작위를 받고 1710년 그리니치 천문대 감찰위원장에 취임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다 1727년에 죽은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프린키피아>의 성립 배경
17세기 중엽의 천문학 및 역학의 중요문제는 갈릴레이의 낙하운동에 관한 연구를 일반화한 역학의 근본원리를 확립하고, 동시에 천체 간에 작용하는 힘의 성질을 구해 행성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3법칙을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이 두 가지를 해결한 것이 본서라 할 수 있다. 뉴턴의 3대발견이라고 하는 것은 만유인력, 미적분, 빛의 입자설 로서 이것들은 모두 천체의 운동과 관련한 연구성과이다. 예컨대 스펙트럼의 연구도 렌즈의 빛깔을 없애고 망원경을 완전하게 하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했다. 이러한 발견들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20대 초반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가 천문학 및 중력의 문제에 진지하게 매달린 것은 1679년 이후로 보인다. 이보다 앞선 66년에 후크는 중력이 지면으로부터 높이에 따라서 변하며 그 크기는 진자를 사용하여 잴 수 있다고 말하고 행성의 운동도 이와 같은 구심력에 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74년 별의 시차에 관한 논문에서는 만유인력의 존재를 주장하고 역2승 법칙을 제출했다. 또 이탈리아의 보렐리는 혹성과 위성의 운동을 실 끝에 돌을 매서 돌리는 운동과 비교하여 원심력 . 구심력의 관련을 제시했으며, 호이겐스는 전자시계 에서 구심력을 수식으로 나타냈다. 79년에 뉴턴은 후크의 편지에 대한 답장 속에서,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는 실험으로서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물체를 떨어뜨리면 물체는 직하로 떨어지지 않고 약간 동쪽으로 치우치는데, 그 값은 예컨대 100피트 높이에서 떨어뜨릴 때 런던에서 1/11인치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84년 1월에 렌, 후크, 핼리 세 사람이 로열소사이어티에서 천체 문제에 대한 공동회합을 갖고 케플러의 3법칙과 호이겐스가 발견한 구심력의 값으로부터 중심력은 거리의 2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하면 어떠한 궤도를 그리는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핼리는 8월 케임브리지의 뉴턴에게 찾아와 이 문제를 물었다. 뉴턴은 그 자리에서 단지 원이라고 대답하고 이것은 이미 1679년에 계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계산기록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나중에 다시 계산해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때부터 뉴턴은 역학 및 만유인력 문제에 힘을 기울여 연구한 후 10월 신학기 때에 그 결과를 <물체의 운동>이라고 제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뒤 이 내용이 확장되어 1686년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제목으로 그 제1부가 로열소사이어티에 제출되었다. 핼리의 경비부담으로 1687년에 3부까지 모두 500쪽 정도로 출판되었다.
<프린키피아>의 내용
이 책은 <서언>에서 물리학상 곤란은 모두 운동의 현상으로부터 자연계의 힘을 탐구하고, 그 다음에 이 힘에 의해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다고 논술하고 있다. 다음 <정의>에서 질량. 운동량. 힘 등을 정의하고, 이어서 절대시간과 상대시간, 절대공간과 상대공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질량에 관해선 밀도와 체적의 적이라 정의하고(뉴턴은 물체를 동종의 입자, 즉 원자의 집적이라 생각하여, 여기서의 밀도라는 것은 단위체적 내의 원자 수를 뜻한다고 한다), 절대시간에 관해선 절대적이고 참되고 수학적인 시간은 그 자체로서 그 본성에 의해 다른 대상에 관계없이 똑같이 흘러간다 고 말하고 있다. 다음에 절대운동과 상대운동의 구별을 논하여, 양자는 원운동에 있어서 원심력에 따라 구별되는데, 그것은 단지 외관적인 원운동엔 원심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논한다. 다음에 <운동의 기본정리 또는 법칙>에서는 유명한 운동의 3법칙 을 논술한다. 본론에 들어가 제1권은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극한의 개념과 정적분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각종 정리를 기하학적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다. 중심력으로 인한 운동에 있어서 면적가속도 일정의 증명이나 주기가 반경의 3/2승에 비례하고 동시에 속도가 반경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증명, 그리고 그 역의 증명, 이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역비례하는 힘으로 인한 운동은 힘의 중심을 초점으로 하는 하나의 원추곡선을 그린다는 것, 그리고 그 역의 증명 등이 들어 있다. 또한 타원진동 및 단진동, 2체문제, 3체문제, 구형물체 간의 인력, 그밖의 인력운동의 유비로서 빛의 반사. 굴절의 문제 등도 논하고 있다. 제2권도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같은 제목으로 유체 내의 물체의 운동, 부력, 에테르에 의한 저항의 유무, 토리첼리의 정리, 파동의 전파, 수면파, 탄성파, 음향의 전파, 유체의 원운동 등을 논하고 있으며, 데카르트의 와동설(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에테르가 회전하고 행성들은 이 와동에 의해 마치 가벼운 물질이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끌리듯이 태양 쪽으로 끌리면서 회전한다고 하는 설)을 부정하고 있다. 제3권 <우주의 조직에 대해서>에서는 전 2권의 수학적 원리를 물리학에 응용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기 위해 통속적인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먼저 자연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의 규칙으로서, 자연은 헛된 일을 하지 않는다. 동조의 작용은 동일한 원인으로 귀착시키지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자연은 언제나 단순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실험적 자연과학에서의 귀납법의 의의를 논한 뒤, 천체현상의 여러가지 관측치에서 여러 별의 거리와 질량을 정하고 질량이 무게에 비례함을 논한다. 또한 지구상의 각 점에서의 중력 가속도의 차이나 밀물. 썰물이 달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을 상세하게 수량적으로 말한다. 마지막으로 초월적인 신에 대하여 말하고, 태양. 행성 및 혜성의 배열은 단 하나인 전지전능한 존재자의 결의 및 지배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여기서 그는 신의 일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철학의 임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중력의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는 것, 이것에 대해서 가설을 내놓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있다.
과학상 업적 및 평가
자연법 사상, 합리주의, 진보관, 인도주의 등으로 특징되는 17세기의 지적 혁명, 특히 17세기의 과학혁명은, 관찰과 수학적 계산에 의해 우주의 합리적 법칙을 설명하여 세계관의 대변화까지 초래한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이의 결함을 수학적으로 보완한 독일의 케플러, 망원경을 발명하여 관찰을통해 지동설을 확신했던 이탈리아의 갈릴레이 등의 개별적 발견들을 종합적인 원리로 통일하여 우주 내의 모든 물체의 운동을 설명했던 뉴턴에 와서 그 절정에 달한다. 그는 24세경까지 그의 3대발견 이라 불리는 #1 역학분야에서의 중력의 법칙(만유인력) #2 수학분야에 있어서의 미적분의 발견 #3 광학분야에서의 빛의 입자설을 이미 발견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중력법칙의 수학적 설명은 1685년에 와서야 가능했으며 2년 후에 그의 획기적 내용을 <프린키아>에 담았는데, 이 저술에 의해 여러 천문학자들의 수많은 선행업적들이 하나의 우주원리로 종합되고 특히 그것은 간결한 수학공식으로 표현되었다. 중력법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우주 안의 모든 입자는 상호간에 잡아다니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은 상호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질량에 정비례한다. <프린키피아>의 출판으로 전통과 권위에 맞서 싸우던 1세기 반의 과학혁명은 완성된다.
1. 뉴턴 방법의 중요성
사실상 뉴턴의 업적이 기여한 것은 과거의 많은 선행연구를 간단명료한 수학적 공식으로 종합했다는 사실보다는 그의 과학적 사고의 진행절차와 사고방식이었다. 뉴턴의 데카르트적인 연역법을 새로운 실험적 방법과 조화시킴으로써 과학적 절차에 적절한 방법을 제시했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를 활용하면서도 일차적으로는 경험과 사실에 의존했다. 뉴턴은 그러한 원칙에 입각해서 우선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에 따라 여러사실로부터 기본원리를 끌어내 전개했으며, 그 다음에 논리적으로 예상되는 결과가 사실상 일어나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유사한 증거를 경험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추상적 이론과 경험적 증거를 다 함께 만족시키는 그의 방법은 그 이후의 과학적 탐구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고 타당한 설명의 절차로서 널리 인정되었다. 중력의 법칙을 예로든다면,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경우 뉴턴은 중력의 원인이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질량에 비례할 것이라고 추리했으며, 그런 까닭에 전 우주를 통해 중력이 보편적으로 작용한다는 논리를 타당하다고 가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논리적 가설을 지구를 도는 달의 운동에 맞는가 테스트해보고 그밖의 행성운동 내지 지구상의 물체들의 경우까지 적용시켜 옳다는 것을 밝혔다.
2. 비판적 평가
뉴턴에 의해 한층 발전된 과학적 사고의 혁명은 당시 일어난 정치적 혁명보다도 인류역사에 더 광범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때 이루어진 과학적 발견은 한층 더 발전되고 응용되어서 현대인에게 자연정복의 길을 터놓았다.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 라는 기계론적 세계관 은 이후 400여 년 동안 현대문명의 바탕이 되고 있다. 이는 여러 자연철학자들, 특히 베이컨, 데카르트의 주장들을 뉴턴이 종합한 것이다. 베이컨은 관찰자와 대상물을 분리하여 객관적 지식 을 얻으려는 과학적 방법을 제시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객관적 지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을 지배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베이컨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향한 문을 열기 시작하자 수학의 중요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했던 데카르트가 새로운 기틀을 잡고 나섰다. 곧이어 뉴턴이 데카르트를 뒤따랐다고 뉴턴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라는 만물상을 여는데 소용되는 모든 도구들이 갖추어지게 된다. 과학문명의 발전이 인류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파괴와 공해 등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연 인류의 일반적인 복지를 지향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탈피하여 자연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세계관(일명 유기체적 세계관 )을 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그가 주장했던 이론들도 19세기 말 맥스웰의 전자기학,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등에 의해 수정받게 되고, 이 모두를 종합하려는 시도가 뉴턴의 300년 후배이며, 케임브리지의 루카스 교수직의 후배이기도 한 스티븐 호킹에 의해 초끈이론 으로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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