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장 서양사상 편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 : 저자: 갈릴레이(1564-1642)
관찰과 실험을 통한 근대 과학적 연구방법론의 문을 연 갈릴레이의 필생의 역작으로 이 저작 때문에 교회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지구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구조와 태양 중심의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의 장단점을 토론하는 대화형식의 책. 두 우주구조가 모두 가설적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코페르니쿠스 구조의 장점을 누구나 인식할 수 있게 함으로써 급기야 갈릴레이 자신과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교회당국의 탄압이 노골화 되었다.
생애
기울어져가는 피사 탑에서의 물체 낙하실험을 하고, 피사 대성당의 청동램프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으며, 종교재판 후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고 중얼거린 갈릴레이.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근대 물리학의 창시자인 갈릴레이는 피사에서 출생했다. 1575년에 수도원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불만을 가졌다. 81년에 피사대학의 기예학부에 입학하여 피사의 사탑 예배당에서 천장에 매달린 램프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여 맥박계에 응용했다. 83년 이후 수학연구를 시작하여 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도가 되고, 85년에 피사대학을 중퇴한후 피렌체에서 수학연구를 계속했다. 89년에 피사대학의 수학강사, 후에 베네치아 공화국(북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동안 축성술. 기계공작 기술상의 여러 문제를 연구하다가 동력학의 연구로 진출했는데, 우선 낙체의 문제를 추구하기 위해 진공 속에서의 낙체에 관해 수학적 방법을 이용해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추론을 더했다. 또 그 결과를 사면상의 실험으로 실증함과 동시에 그 극한의 경우로서 수평면상에서는 일정한 속도를 가진 물체는 그 속도를 잃다는 등속직선운동을 추리하여 이른바 관성의 법칙에 도달했다. 더 나아가 진공 중의 탄도운동은 연직선상의 등가속도 운동과 수평선상의 등속운동의 합성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명백히 함과 동시에, 그 궤도는 그 양선을 포함하는 면에서 포물선이 된다는 것을 제시한다. 한편 1609년에는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망원경을 개량해서 그 배율을 높여 천체관측에 처음으로 사용, 목성의 위성을 비롯한 여러 별을 발견함으로써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던 지동설 을 확신하게 되었다.
10년에는 피렌체 공국의 구주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궁정소속의 제일 수학자가 되었는데 형식상으로는 피사대학 교수도 겸했다. 이때부터 지동설을 둘러싸고 낡은 아리스토텔리스 학파, 로마교황청 당국자 등과 타협을 보지 못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6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이 학설이 금지되어 갈릴레이는 수년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다. 그후 갈릴레이는 그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던 오르바누스 8세가 즉위하자 다시 새 학설을 담은 책을 낼 것을 결심하고, 수년 동안 집필한 것을 당국의 검열을 마쳐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라는 제명으로 32년 출간했다. 그런데 이 저서에는 표면상 천동설 의 승리를 구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지동설이 옮음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격렬한 비난을 받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표면상 굴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생애는 엄중한 감시하에 피렌체 교외의 자택에서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이 동안 파도바 시대의 성과를 집대성한 <역학대화>를 완성하여 감시의 눈을 피해서 38년에 네덜란드의 한 서점에서 간행했다. 이 무렵 실명하게 되어 감시도 다소 완화되고 죽기 직전에는 토리첼리도 제자가 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죽은 후 공식으로 장사를 지내는 일도, 묘비를 세우는 것도 허가되지 않았다. 그의 저서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가 금서목록에서 풀린 것은 1835년이 되어서였다.
저술배경
본서의 정확한 표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 거기에서는 4일간의 회합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대해 논의되었으며 어느 쪽에서나 똑같이 철학적. 자연학적 근거가 제시된다>고 되어 있다. 원서는 4절판, 458쪽의 대작이다. 저자가 본서의 저술계획을 처음으로 밝힌 것은 1610년으로 코지모 2세의 수상 빈타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완성하고자 하는 주요저작은 우주의 체계 또는 구성에 대해 2권...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그보다 수십 년 전 1597년경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해 8월 4일에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이와 같은 코페르니쿠스 설의 입장에서 일반적인 가설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자연적 결과의 원인을 찾아내고 있다. 나는 이에 찬성, 또는 반대되는 각각 많은 근거와 논증을 썼다 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거의 35년의 장기간에 걸친 관측. 사색 . 실험의 결과가 특히 망원경제작(1609) 이후의 업적이 본서에 가득 담겨져 있다. 그리고 저자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옮기기 위해 넘어야 했던 수많은 스콜라 학 체계의 장벽이 어떠한 것이었고, 그리고 그가 이것을 어떻게 돌파했는가 하는 것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1616년 드디어 로마 교황청은 저자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문책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까닭으로 본서에는 그 주장을 완화하기 위한 숱한 배려가 기울여졌다. 그러나 완성된 형태로서는 이 주장을 감출 수 없었다.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의 내용
저자가 봉직하고 있던 궁정의 토스카나 대공 코지모 2세에의 헌사, 독자에 대한 서문으로 시작하여 본문은 4일 간에 걸쳐서 세 사람이 교환하는 대화형식으로 전개된다. 갈릴레이를 대변하는 살비아치는 실재했던 피렌체 인이며 그의 제자였다. 양식있는 평범인을 대표하는 사글레드는 역시 실재했던 베네치아의 세력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을 지키는 심플리치오는 저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의 이름을 빌린 것이며 페리파토스 학도이다. 저자 자신의 생각은 살비아치의 입을 통해서 우리의 공통적인 친구, 린체이 학사원 회원 의견이라는 형식으로 서술된다. 4일이라는 구분은 테마별로 되어 있다. 즉 <독자에 대한 서문>에 의하면 세 가지 주요문제가 논의될 것입니다. 첫째로 대지에서 이루어지는 경험...둘째로 천계의 제현상... 셋째로 바다의 만조 인데, 이들 세 문제가 각각 제2, 3, 4일의 대화의 주요 토론주제다. 제1일은 천동설을 주장하는 페리파토스 학도의 학설일반의 추진력 그 자체의 검토라는 예비적 단계로서, 우선 아리스토텔레스 <천체론>에 대한 비판적 주석의 형태로 시작하여 단순물체와 합성물체, 단순운동과 합성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의 불충분함을 폭로하고, 교묘하게 운동일반에 대한 갈릴레이의 생각을 도입시킨다. 이어서 천체와 대지와의 유사성. 부등성의 문제로 옮아가서 천체 중에서 가장 가까운 달이 비교의 상대로 선택된다. 이렇게 하여서 스콜라 학도의 추론의 근거가 박약함을 밝힌 다음, 제2일 대화는 <대지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으로 옮아간다. 이를테면 배의 마스트 위에서 떨어진 돌은 배가 움직이거나 정지함과 상관없이 동일장소에 떨어지는 사실에 추론하여, 가령 대지가 움직이고 있다 해도 탑 꼭대기에서 떨어진 돌은 정지하고 있을 때와 똑같은 장소에 도달함을 논증, 지동설을 취하면서도 일상 우리가 주위에서 보는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증명함으로써 지동설이 천동설과 같은 가능성을 지님을 명시한다. 그밖에 만약 대지가 움직인다면 우리는 항상 격심한 바람을 맞을 것이라는 등 당시의 페리파토스 학도들의 상식적 견지에서 본 반론과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에서 나온 자연철학적인 반론이 몇번이나 심플리치오의 입을 빌어 되풀이 서술하고, 이것이 다시 살비아치의 입을 통해 명쾌하게 차례차례 해결되어 간다.
그 사이마다에 스콜라 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경묘한 유머로 심플리치오에게 퍼부어진다. 그리고 본서 중에서 가장 활발하고 재미있는 대화가 계속되는 2일의 말미는 동시대의 스콜라 철학자의 전형인 로헤르의 <천문학상의 논쟁과 새로운 일에 대한 수학적 논고> 및 키아라몬티의 <반티코>의 반지동설적 논증에 대한 일대 격파인데, 그들의 논증과 살비아치의 응수는 연극처럼 생생하며 우스꽝스럽고 스콜라 말기의 자연철학자들의 자기 모순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제2일의 대화에서 지동설의 가능성을 보여준 저자는 제3일에 들어서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개연성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는 상술한 키아라몬티의 또 한 권의 저서 <3신성에 대하여>를 들고 나와 키아라몬티가 1579, 1600, 1604년 나타난 신성이 모두 월하계의 영역, 즉 스콜라 학설에서 달의 천구보다 아래쪽에 있었음을 여러가지 계산으로 증명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불변이라 말하며 천상계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 수 없음을 논증하려 한 데 대해 공격을 가하고, 저자 스스로 계산하여 키아라몬티의 계산이 틀림을 폭로, 이들 신성은 모두 항성천, 즉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야 할 천계에 있었음을 증명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의 주요명제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스스로 망원경으로 관측한 목성의 위성, 빛의 광침작용 등에 의거하면서 모든 행성의 코페르니쿠스적인 배치에 대해 스콜라 학도를 대변하는 심플리치오의 입으로 용감히 말하게 한다. 제3일의 대화에는 망원경에 의한 관측에 의거하면서 지동설의 개연성을 밝힌 다음, 마지막 제4일에는 마침내 그 필연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 필연성의 논거는 조석현상에서 취하고 있다. 즉 용기를 정지시켜 두고서는 물(바다)에서 결코 조석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조석현상이야말로 지동설을 논증하는 필연적 근거라는 것이다. 본래 이것은 저자의 잘못이었으나 아직 만유인력설이 성립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조석현상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려면 이러한 저자의 설이 그 당시에는 가장 유력한 이론이었을 것이다.
갈릴레이의 공헌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의 운동과 지상물체의 운동은 별개의 법칙을 따른다고 생각했고 낙하물체도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실험을 통해 공기마찰에 따라 어느 정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제외하면 무게에 관계없이 동일속도로 떨어진다는 자유낙하에 대한 법칙 을 발견했고, 이는 1971년 공기가 없는 달표면에서의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그의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은 후에 뉴턴의 운동 제1법칙으로 확립된 관성의 법칙 이고 그외에도 진자의 등시성발견. 망원경발명 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험을 통한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의심조차 금기시되던 천동설을 부인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을 옹호한 점일 것이다. 그는 진정한 과학은 관찰과 실험 그리고 수학적 결합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신념 하에 2천 년 동안 불변의 진리로 신봉되어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론을 철저한 실험과 관찰로 검증을 계속하여 그의 오류를 바로잡았는데, 그의 이러한 실험 중심의 연구자세는 현대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두 우주구주에 관한 대화>가 출판된 직후에 그는 많은 논란에 휩싸여 그의 옛 친구이던 교황 우르반 8세도 불쾌감을 나타내고 마침내 1633년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결국 자신의 신념을 형식상으로 철회하고 천동설이 옳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법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고 중얼거린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와 과학의 불양립성을 인식시켰으며 중세의 카톨릭 세계관 에서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 으로의 전환을 재촉했다. 비록 그는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은 받았지만 그는 크리스트 교의 권위를 내세운 불합리한 독단조차 수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후세에 독단론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또는 사상의 자유를 말살하려고 하는 지배집단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갈릴레이는 정당하게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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