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동양사상>편
<순자> 저자: 순자(BC 315~236년경)
순자는 <동양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린다. 소크라케스의 사상을 플라톤이 이상주의적으로 계승한 데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으로 계승했는데, 마찬가지로 공자의 사상을 맹자가 이상주의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순자는 현실주의적으로 이어받았다. 성악설에 입각하여 인간의 후천적인 노력을 강조한 순자는 인간이라 근원적으로 사회적 동물로 보았다. 그는 사회적 분업원리를 통한 엘리트 중심의 군주국가체제를 옹호했으며, 인간에 의한 자연의 이용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교육과 사회제도의 중요성을 설파함으로써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종합하여 진한 이후 중국에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성립.출현에 기를을 마련했다.
생애
BC 3세기경의 중국사상가. 이름은 황. 순자는 전국시대 조나라 사람으로 그의 출생 및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하기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가 태어난 조나라는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중국 변두리에 위치한 나라였다. 그는 50세 무렵에 문화가 발달한 제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학술적인 체계를 세웠다. 당시 제나라의 민왕은 학술장려에 힘써 학자를 우대하는 한편, 수도인 임치 부근에 문화지역을 마련하고 이곳에 큰 저택들을 지어 학자들이 여기서 살며 학문을 연구하도록 했다. 이곳에는 유학자들이 자유로이 토론도 하고 학문연구도 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순자는 이곳에서 선학들이 연구한 학문의 지식을 흡수,분석하면서 그의 학문적 분석체계를 세워나갔다. 순자는 민왕의 뒤를 이은 양왕에 의해 학자들의 수석의 자리라 할 수 있는 좨주로 초빙되었다. 후일 사마천이 <사기>에서 <<순경(경은존칭)은 조인이다. 나이 50에 처음으로 제에 유학했다. 순경은 세 번 좨주가 되었다. 제인이 순경을 참소하자 초로 갔다>>라고 밝혔듯이 순자가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참소로 그 직책에서 물러나 제나라를 떠났다. 그는 초나라의 재상인 춘신군의 도움으로 난능현의 장관자리를 얻게 되나, 곧 춘신군의 한 문객의 춘신군에게 그를 멀리 하도록 권해 그를 파직시켰다. 여기서 물러난 순자는 고향 조나라로 돌아왔으나 춘신군은 그를 다시 불러 다시 장관에 등용했다. 그는 제나라로 돌아오기 전에 진나라에 잠시 초빙되어 상앙의 법치주의를 채택하여 정치체제의 혁신을 통한 통일의 기틀이 마련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거기서 그는 성문법에 바탕을 둔 통치와 행정의 능률화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후 춘신군의 암살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오직 저작에만 힘썼다. 순자는 자기가 공자를 계승했다고 자부했으나, 그의 성악설은 맹자의 성선설과 충돌하여 이상론을 원칙으로 삼는 유교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제자백가 중에서도 중국 고대사상을 최후로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임에 틀림없다.
순자의 사상
공자의 유가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어 유가학파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다 같이 공자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으나, 그들의 주장은 상반되는 점이 많고 후세의 학문에 미친 영향 또한 다르다. 그들의 학문계통을 보면 맹자는 공자의 직계제자인 자사의 계통이고, 순자는 특히 <예>를 강조한자하의 계통에서 나왔다. 같은 유학자이면서도 순자는 여러 면에서 맹자에 비판을 가했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성악설을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한 증거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지니고 있고,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며 끊임없이 갈구하고 이로 인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며, 이러한 욕구제한의 가장 좋은 방법은 <예>라 했다. 특히 공자나 맹자의 효제 제일주의에 비 을 가해, 효제는 소행이고 이보다 의를 좇아서 군주를 섬기는 <충의>가 더 큰 행동이라고 했다. 이는 공자 이래 효 제일주의에서 탈피하여 충의를 보다 중요한 도덕적 순자의 <성악설>과 <충의론>은 다음에 오는 법가사상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1. 천론
맹자의 이상주의와는 달리 순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 초인 적인 일체의 권위를 부정한다. 고대중국 전통사회는 경천사상에 바탕을 두고 천을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인격신으로 생각했다. 공자.맹자.자사에 이르러 천의 인격적 이미지는 벗겨졌지만 천은 더덕의 근거로서 본체론적 의미를 지닌다. 천은 인간에 앞서 있으면서 인간에 내재한다. 인간의 최고경지인 성인은 내재하는 천을 발견,발현시킴으로써 천일합일의 경지에 도달한다. 순자는 <천론>편에서 전통적인 천관을 자연물이고 인간은 생물이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천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인은 천을 알기를 구하지 않는다. 군자는 나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문제를 신중히 하고 하늘에 달려 있는 문제를 추구하지 않는다. 하늘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군자는 이것을 이용한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거나 일식. 월식이 일어나도 두려워할 것 없다. 두려운 것은 인요다. 즉,정령을 제때 발하지 못해 백성들이 굶주리고 어지러운 것을 말한다. <천론>편은 <비상>편과 아울러 순자의 과학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2. 성론
대부분의 사회이론이 그 사람의 인성론과 깊은 관계가 있듯이 순자의 성론은 그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순자는 <성악>편에서 인성이 악함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사람의 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함이 있다. 이것을 따르므로 쟁탈이 생겨나고 사양함이 없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미워함이 있다. 이에 따르므로 남을 해치는 일이 생기고 충신이 없게 된다.>>
인간이 성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면 악하게 된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본성은 마찬가지다. 성인은 악한 본성을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서 변화시켰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맹자가 인성이 선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성과 위(인위: 인간이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만들어놓은 것)를 구별하지 못한 말이라고 비판한다. 인성이 악하기 때문에 인간에는 <교육>과 <예>가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3. 사회사상
순자는 <왕제>편에서 <<힘이 소만 못하고 달리는 것이 말만 못한데 소나 말이 인간의 부림을 당하는 것은 그런가? 사람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을 밝힌다. 그리고 <비상>편에서는 <<사람이 사람 된 까닭은 두발에 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판단력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해 자신의 욕망만족을 먼저 추구하지만 인간에게는 판단력이 있다. 인간은 오랜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타인과 협력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된 것이 라고 한다. 일종의 사회계약론이라 하겠다. 일단 사회가 구성되고 나면 질서유지가 필요하다. 질서유지는 분, 즉 신분질서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순자는 세습제나 종족적 특권은 부정하지만 능력에 따른 계급의 발생은 당연한 것으로 본다. <<계급의 최정상에 인군이 있고, 인군은 절대권력으로서 분을 관장해야 한다>>고 한다.
4. 정치사상
순자는 무엇보다도 경험을 중시한다. 그래서 과거의 축적으로서 현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의 정치사상은 과거를 향한 복고적 이상주의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현실주의다. 정통유가들은 선왕들을 높이고 왕도와 패도를 대립적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순자는 후왕을 더 높인다. <비상>편에서 <<후왕을 버리고 상고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버리고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순자에 있어 후왕의 법은 곧 선왕의 법의 구체화인 것이다. <왕제>편이나 <왕패>편에 의하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이상정치는 왕도보다도 패도를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순자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파악한다. 군과 민을 연결시키는 것은 <인의도덕>이 아니라 <이익>이다. 군이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신상필벌에 의한 실력정치.능력정치를 실시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은 법을 중시하게 되고, 한편 인간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능력있는 사람의 배출을 돕게 된다고 한다.
5. 정명론
<천론>편이 순자의 자연관이 과학적임을 보여준다면 <정명>은 그의 인식이론이 과학적임을 보여준다. 정명은 공자에게서 시작된다. 정명에는 윤리적.사회적 측면에서 명분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와 논리적 인식적 측면에서 개념을 바로잡는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현실지향을 버리지 못하는 중국사상가에 있어 후자의 의미도 궁극적으로는 전자에 귀일된다. 공자의 정명이 주로 전자에 속한다면 명가는 후자에 속한다. 그러나 명가는 개념을 실과 독립적으로 논하여 궤변에 빠지고 말았다. 순자는 두 측면을 다 지니면서 궤변에 빠지지 않고 명(개념).사 (판단).변설(추론)을 실과의 관계 하에서 분류하여 설명한다. 명에는 단명.겸명.별명.공명이 있는데, 명에 차이가 있는 것은 천관,즉 감각기관이 있고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여진 대상을 마음의 미지가 종합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순자는 개념을 분석함과 동시에 인식작용에 대해서도 해명코자 노력했다. 이상 천론. 성론. 사회사상. 정치사상. 정명론을 통해 볼 수 있었듯이 순자의 사상은 과학적이요 헌실적이며 실제적이다.
<순자>의 내용
오늘날 우리가 보는 <순자>는 20권 32편으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순자 자신이 저술하고 일부는 제자들의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근학>편에서 인간의 본성은 학문을 한 후에야 선해진다는 것으로 교육의 효과를 명시하고,<수신>편에서는 본성을 교정하는 방법으로 예와 사법을 중시할 것을 논했다. <불구>편은 사리의 근본을 깊이 고찰하여 경우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할 것을, <영욕>편에서는 영광과 치욕은 사람이 스스로 취함에 기인함을 논했다. <비상>편에서는 미신을 배척하고 선왕의 제도와 문물은 모두 상고할 수 없으니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는 후왕의 것을 본받아야 함을 논하고,<비12자>편에서는 맹자.자사 등 12자를 논하고 있어 그의 박식함을 알 수 있고 사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효>편에서는 주공.공자의 도를 찬양하여 유가학설을 옹호하고 있고, <왕제>편은 인간사회의 원리를 예의로 삼았으며, <부국>편은 사람의 물욕을 배척하지 않고 예의를 잃지 않는 범위에서 공리를 경시하지 않는 생계의 원리를, <왕패론>은 정치기술을, <군도>편에서는 정치의 근본을 위정자의 인격에 두는 인격본위의 정치를 강조하여 인치와 법치의 득실을,<천론>편은 천도와 인도를 구분하여 인간이 하늘에 가리어 사람을 모르는 장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는 정신을 논한 것으로 그의 철학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
<정론> 편은 묵자의 공리주의를 배격했고, <예론>편에서는 예의 기원과 예의 세 가지 근본, 즉 정치적 법제와 사회적 전례, 그리고 윤리적 예의를 논했다. <악론>편에서는 음악은 사람의 성정을 다스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음악의 원리,음악과 인생과의 관계를 논했다. <해펴>편은 사람들이 그릇된 주장을 하는 것은 마음 한구석이 욕망이나 이익에 가리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이성이 가려지고 막힌 것을 벗겨줌으로써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심리학 이론이며, <정명>편은 바른 논리는 바른 인식에서 나온다는 논리학 이론이다.
순자사상의 평가
1. 순자의 논리는 전편에 걸쳐서 인간의 성악의 관념이 일관되고 있다. 즉, 인간이 선천적인 본성에 지배되지 않고 후천적인 <인위>를 존중했다. 여기에서 맹자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맹자는 <예>를 <인의> 정신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으나, 순자는 <예>를 인성의 타고난 악한을 없애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는 도덕에 있어서 <예>를 가장 중요시했다. 공자사상의 핵심은 <인>이고 맹자는 인을 더욱 확대시켜 <인의>를 강조했으며, 순자는 <인>을 들고 <의>를 실천하는 덕으로서 <예>를 강조했다. 이리하여 <인.의.예>는 유교의 기초가 되는 3덕이 된다. 이 3덕은 중국인들이 수천 년 동안 지켜온 행동 규범이기도 하다.
2. 순자만큼 후천적인 학문을 중시한 사람도 없다. 그는 끊임없는 노력을 중시하여 그의 중심사상을 <노력주의>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물론 이러한 사고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에서 유래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사람의 본성은 악하지만 후천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대중국에서는 재해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했는데, 인간의 후천적인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는 일를 부정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대의 선왕을 군주의 이상형으로 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반대하여 현재의 정치는 현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현실에 노력한 왕, 즉 후왕이 정한 정책이나 제도에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는 후왕사상을 주장한 것도 그의 이러한 후천적인 노력주의 사상에 근거한다고 보여진다.
3. 순자의 뛰어난 점 중의 하나는 그가 공자의 사상을 잘 요약했을 뿐만 아니라, 도가.법가.묵가와 같은 다른 학파의 사상을 공박하지만 않고 훌륭한 사상은 받아들여 그 자신의 학문적 성격을 넓혔다는 사실이다. <순자>에서 보이는 인식론과 논리학 이론이 보이는 것도 그의 폭넓은 학문연구의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영향은 지속적으로 미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한비자.이사가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와 그들의 이론을 발전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법가와 순자의 사상이 근본취지는 다르지만 순자의 예(인간 욕구제한을 위한 중용적 기준)가 법에 근사한 것임을 생각하면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또 한무제 때의 동중서가 순자를 칭찬한 사실은 한대의 정치와 결합한 유가사상이 순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특히 그의 성악설은 한의 양웅.왕충 이하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성론자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당 이후 유가들이 그들의 도통을 찾기 시작하면서 순자는 차츰 유학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당나라의 한유만 하여도 순자를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송 이후에는 성악설, 또 한 현실과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의 주장은 이상론을 원칙으로 삼는 유교에서 이단시되어오다 18세기에 접어들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