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동양사상>편
대학 - 작자미상
<대학>은 유교사상의 핵심을 밝힌 <정치와 개론사>로 원래 <중용>과 함께 <예기> 중의 한 편이었으나, 이것을 주자가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지식인 필독서인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의 하나로 편찬한 때부터 널리 읽히게 되었다. <대학>이란 <대인> 성인남자의 <학(교육)>을 줄인 말로 그 핵심은 수기치인도, 다시 말하면 내성외왕의 도이다. 교육의 목적(명덕.신민.지선)과 8과제(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현실적인 <치국평천하>를 설하는 <대학>은 <천인합일의 도>를 제시하는 <중용>과는 상효 표리를 이루는 경전이라 할 것이다.
<대학>의 제목과 저자에 대한 논란
<대학>은 <중용> <논어> <맹자> 와 함께 사서하 하여 시.서.역의 3경과 더불어 유가의 기본경전으로 꼽힌다. 시.서.역의 3경은 아득히 옛날부터 있어온 명칭이나, 4서는 송대의 주자에 의해서 비로소 생겨난 명칭이다. 오늘날 유가의 경전을 총칭하여 <13경>이라고 하는데, 이 13경은 3경과 <예기> <춘추>를 합쳐 5경이라 하고, 춘추의 3전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 예기의 3례 <주례> <의례> <예기>와 <논어> <맹자> <효경> <이아>를 말한다.
<대학>이라는 명칭에 대해 몇 가지 이설이 있으나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대학>을 <치자의 학>이라고 보는 설과 다른 하나는 <대인의 학>이라고 보는 설이다. 정현은 < <대학>은 그 기록함이 박대하여 이것을 배우면 가히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하여 대체로 전자의 입장을 취했고 사마광도 이에 동의했다. 후자는 주자가 주장한 설인데, 그는 <대학>을 <대인 (성년남자)의 학 (교육)>이라 했다. 그러면 대학의 본뜻은 어느 것이 타당할까? <대학>의 핵심사상은 한마디로 <수기치인의 도>라 할 수 있는데, 먼저 자기자신을 닦고 나아가 남을 다스리는 도리를 말하고 있는 <대학>은 바로 <대인지학>이요 <치자지학>인 동시에 더 나아가 <인간지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대학>은 지금처럼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던 것이 아니라 5경 중의 하나의 <예기>의 49편 중 42편 <대학> 편을 당의 한유가 독립시킨 것으로, 송의 사마광이 <대학강의>를 저술한 이래 주자는 더욱 <대학>을 숭상하여 1189년 <대학장구>를 저술, <대학>문장의 순서를 고치면서 경1장과 전10장(제5장은 주자의 보전)으로 구분,경은 공자의 말, 전은 공자의 제자 증자가 부언 해설한 것이라고 했다. 공자의 가르침은 증자-자사-맹자-정자의 계통으로 전해내려왔다고 하는 <도경전>을 완성하고 또 <대학>을 4서의 하나로 삼음에 따라 중요한 위치에 섰으며, 이후 <정주학>이 유행함에 따라 읽히게 되었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정자는 대학이 공자의 유서라고만 했을 뿐 저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주자는 <대학>을 경 1장과 전 10장(제5장은 주자의 보전)으로 구분,경은 공자의 뜻을 공자의 제자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뜻을 증자의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했다. 자사가 증자의 제자이니, <대학>은 결국 자사의 저작이 아닐까 하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던 것이 청대에 고증학의 발달과 함께 <대학>의 저작 및 저작연대가 아주 달라졌다.청대의 고증학자 최술은 자사의 작으로 정설화되어온 <중용>도 맹자의 이후의 작이라고 규정했고, 최근 중국학자 호통.전목 같은 학자는 <대학> <중용> 의 자사 작을 부인하고 진.한 사이에 무명씨에 의해 이록된 저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대학>의 작자에 대해서 여러 주장이 있으나, 유교의 정신을 가장 조직적으로 기술했고 또 증자의 말을 가장 많이 인용한 점으로 보아 증자 이후 공문의 제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대학>의 내용 및 근본사상
먼저 언급해둘 것은 현존 <대학>은 <예기>에 수록되었던 그대로의 <대학> (대학고본)이 아니라 주자가 새로 정리한 <대학>이란 점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는 <예기>의 <대학>이 착간이 되어 그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착간이란 글씨를 써둔 대쪽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대쪽에 글씨를 썼는데, 그 대쪽의 앞뒤가 바뀔 수 있다. 주자는 <예기>에 수록된 <대학>편은 틀림없이 착간이 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 <대학>편의 내용을 지금의 현재의 순서로 정리하여 이를 <대학신본>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그러나 왕양명은 대학신본은 완본으로 탈락과 착간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주자는 <대학>의 내용이 3강령 8조목을 서술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그 집차를 경 1장, 박 10장으로 장구를 정했다. <대학>은 유학의 요지를 오나전히 조직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경전이다. <대학>의 구성은 2편으로 되어 있는데, 제 1편은 경문으로서 <대학>의 총론에 해당하며, 제 1장에는 3강령, 제 2장에는 8조목이 서술되어 있고, 제 2편 전문은 경문에 대한 각론으로 3강령 8조목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따라서 3강령 에서는 <대학>의 근본사상인 수기치인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고, 8조목 에서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3강령 3강령은 대학 서두에 나오는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신민 재지어지선>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 명명덕, 둘째 신민, 셋째 지어지선의 3자를 완성하는 일이다. 명덕을 밝힌다 함은 덕을 닦아 일신을 수양하는 일이고, 백성을 새롭게(친하게) 한다 함은 자기완성을 이룩한 훌륭한 인격자가 백성을 지도하여 새로운 백성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명덕을 밝히는 것은 수기이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치인이다. 지어지선은 마지막 귀착점을 말하는 것이니, 그의 심술을 지극한 경지에 둔다는 뜻이다.
(1)명명덕 : 주자는 <명덕>이란 본래 갖추고 있는 성이라 하고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래서 허하고 영하며 항상 빛난다. 중리를 갖추고 있으면서 만사에 합당하게 적응하는 덕이 된다. 그러나 그 본체는 항시 빛나고 있어 한시도 쉬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이 때 묻지 않게 하고 늘 밝게 닦아서 원래 하늘에 타고난 대로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명명덕이란 양심을 계발하고 덕성을 함양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도덕적 지. 정. 의를 닦는 일이라 하겠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수신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근본이 어지럽고서 말단이 잘 다스려질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한 구절은 분명히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개인적 도덕의 완성을 꾀한 것이라 하겠다.
(2) 신민 : 이 용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고주(왕양명계통)과 신주(정자와 주자계통)인데, 고주에서는 친민이란 친애의 뜻으로서 천하국가의 인민과 친해지는 일을 말하고, 정자는 신민 즉,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자는 이 설을 계승하여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새롭다는 말은 옛것을 바꾸는 것이다. 즉 스스로의 명덕을 밝힌 후에는 마땅히 이웃도 그렇게 되도록 영향을 미쳐서 이웃으로 하여금 역시 묵은 때를 제거할 수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친>과 <신> 두 가지 견해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나 학자 수로는 주자의 의견에 따르는 사람이 많다. 아무튼 명명덕과 신민(친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에 중국사상의 근본인 정교일치가 그능케 되는 근거가 있다. (3) 지어지선 : 지선에 머무른다 함은 도덕적 부동불이 상태에 머무르는 일을 말하는데, 여가서도 고주와 주자주 사이에 차이에 있다. 고주에 따르면 지어지선은 <선을 행해서 미처 지극한 데 이르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족하고, 일출일입에 조수함이 없으면 또한 백성을 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어지선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자는 <지극한 선은 사리의 당연한 극치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다 지극히 선한 데에 머물러 변함이 없음을 말한다. 즉, 천성의 극을 다하고 한치의 사욕도 없는 그런 경지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주자가 말하는 우주의 본체인 이의 세계의 표현이요, 형이상학의 견지다. 동시에 명명덕이나 신민이나 모두가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마치 서양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부동심)와 비슷한 개념이다.
위에서 말한 명명덕과 신민의 개념과 지어지선의 관계는 무엇일까? 지어지선은 <대학>의 도의 도달점이요 귀결점이다. 명명덕(도덕)과 신민(정치)의 결합점인 것이다. 대학지도는 명명덕과 신민이 지어지선해서 비로소 유가의 근본사상이 계통있게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2. 8조목
8조목은 3강령을 실천하는 순서요 단계이다. 이를 열거하면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이중 개인적 실천윤리인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의 5조목은 정치윤리인 제가.치국.평천하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결국 유학의 도는 그 근본이 <수신>에 있고 또 그 근저에는 <격물치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8조목에는 각 조목을 설명하는 글, 즉 전이 있는데, 유독 격물치지에 관한 전은 소실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주자가 스스로 격물치지의 전을 보완했는데 이것을 주자의 부인하고 보전장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왕양명은 8조목설을 부인하고 원래의 6조목설을 주장했음). 그만큼 격물치지를 중요시한 것인데, 이 격물치지의 해석에는 72가지 설이 있었다 한다.
(1) 격물 : 격물은 대학지도에 있어 가장 근저를 이루는 조목인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역시 이설이 있다. 따르면 격물은 천하사물의 이에 궁극함을 말하고, 왕양명은 격물이란 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했다. 양자의 설을 비교하면 물은 주자에 있어서 이이고, 왕자에 있어서는 의이며,격은 주자에 있어서는 지이고, 왕자에 있어서는 정이다. 주자에 의하면 천하사물은 각기 이를 갖추고 있으나 이를 궁극해나가면 천하 사물의 표리와 실체가 훤하게 관통된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주자의 해석이 너무 광범한 것을 반박했다. 왕자에 의하면 물은 사물이니 나의 의지있는 것이 물이다. 나의 뜻이 사친에 있으면 사친이 곧 물이요, 나의 뜻이 사군에 있으면 사군이 곧 물이라고 했다. 즉 격물은 뜻이 있는 바의 물에 대해 부정한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다.
(2) 치지 : 격물에 대해서 주자와 왕자 두 사람 사이에 이론이 있듯이 치지에 관해서도 그 설이 일치하지 않는다. 먼저 주자의 설에 의하면 치지란 지식을 다하는 일디다. 즉, 지식의 계발을 뜻한다. 주에 이르기를 <치란 추극함이요, 지란 지식을 말한다. 나의 지식을 끝까지 추구하여 알아야 하는 일이면 모르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함이다>라고 했다. 즉, 자기의 의식을 한없이 넓게 하고 깊게 해서 천하일체의 사물에 대해 모르는 바가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왕양명은 주자의 광범한 해석을 피하고 <치자지아>라고 했다. 즉 <치지라고 하는 것은 후세 유가들이 이르는 것과 같이 그 지식을 충광함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본래 타고난 내 마음의 양지에 이르는 것을 말할 뿐이다>라고 했다. 즉, 지란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양지를 말하는 것이고, 치란 이 양지에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치지에 대한 주.왕의 설은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보통 말하는 바의 지식을 추극하여 외부적으로 발전하여 사사물물에 불통함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자기자신의 내부에 구비하고 있는 선천양지에 도달케 하여 사물을 바로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에 있어서는 객관적 지식의 수집, 궁리주의, 선지후행설이 될 것이며, 왕자에 있어서는 선천양지의 지각,직각주의, 지행합일설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치지격물란 주자에 의하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후천적인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뜻이고, 왕양명은 의지가 존재하는바 사물에 의해서 부정을 바로잡고 양지를 닦는다는 것이다.
(3) 성의: <대학> 중에는 명언이 많지만 특히 <성의>에 관한 장은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데, <의>란 주자에 의하면 <의자심지소발>이라 했다. 즉, 사려.정서.욕망 등의 총칭이다. 그리고 심이란 의의 본체로서, 욕망을 의라 한다면 심은 마치 품성과 같은 것이다. <성>이란 참된 것이다. 대학에 이르기를 <이른바 자기의 생각을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같이 악을 미워하고 잘생긴 여인을 좋아하는 것같이 성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스스로 자족해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스스로 속이지 않음은 소극적인 면이요, 스스로 마음에 흡족해함은 적극적인 면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니, 스스로 속이지 아니하면 자연 스스로 흡족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을 막고 마음에 흡족하게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학은 여기에 <신독>을 말하고 있다. <신독>이란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즉, 독거에 불선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소인은 한거에 보통 불선을 저지르게 마련이며, 이것이 쌓여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4) 정심 : 뜻이 성하게 되면 정심이 생긴다. 정심이란 마음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감을 뜻한다. 무릇 사람의 마음에는 분노.공포와 두려움. 즐거움.우환 등의 정서가 있어 때때로 정심을 잃게 하므로, 뜻을 지성으로 갖는 동시에 그 본체인 마음을 정한 위치에 두도록 힘써야 한다. 만약 마음이 정서와 감정에 지배되어 그 정상을 잃을 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분간치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정심의 중요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5) 수신 : 수신은 글자 그대로 몸을 닦는 일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인격의 수양을 말한다. <대학>의 말로 하면 수신은 곧 명명덕하는 일이다. 수신의 방법은 지금까지 말한 정신.성의 치지.격물을 바로 행하는 데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치지격물에 의해서 지를 닦고 성의로써 의지를 옳게 가지며 정심에 의해서 정서를 바로잡으면, 거기에 절로 수신이 되고 인격이 완성되어 명덕이 저절로 밝아질 것이다. 여기에 비로소 근본의 확립을 보게 된다. 이는 바로 <대학>에 나타난 신천도덕사상의 극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완성된 인격, 밝혀진 명덕은 천하국가에 사회적.객관적으로 투사되어서 제가.치국.평천하되는 것이다.
(6) 제가 : 대학에서 말하는 제가는 가족생활의 도덕적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자신의 수양 없이 그 집안을 다스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제가의 요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쪽에 치우치는 것, 즉 편협한 행위를 경계함이다. 사람이란 자기가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것에도 치우치게 마련이고, 자기가 천히 여기고 밉게 보는 것에는 치우치게 마련이며, 자기가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것에는 치우치게 되고, 자기가 슬프고 긍휼히 여기는 것에도 치우치게 되며, 자기가 오만하고 게으르게 다루는 것에도 치우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것의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것의 좋은 점을 아는 사람이란 천하에 드물다. 만약에 감정에 치우저 집안을 다스리려고 할때 거기에 공평을 기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가를 위해 <효제>를 강조하기도 한다.
(7) 치국 : 치국의 요체는 제가에 있다고 했으니, 그 집안을 잘 다스릴 때 비로소 그 나라가 다스려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8) 평천하 : 평천하의 기본은 제가와 치국이다. 임금이 노인 섬기는 도리를 다할 때 백성들이 이것을 본받아 자기의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게 될 것이고, 또 임금이 장자를 대하는 도리를 다할 때 백성이 이것을 본받아 형제의 도를 다할 것이고, 또 임금이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때 백성들 역시 마음가짐이 중후하게 되어 감히 임금께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대학은 백성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치자의 마음으로 삼도록 하고 있다. 즉, <군자민지부모 민지소호호지 민지소오오지 차지위민지부모>라고 했다. 즉,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나 또한 싫어하나니, 이것은 백성을 위주로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되는 생각이라고 본다. 이밖에도 평천하의 조항에는 이보다 의를 중히 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대학>에 대한 평가
<대학>은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기본경전의 하나다. 송나라의 정이천은 <대학>은 공자학파의 전통 속에 살아 있는 책이며, 초학자는 이곳을 지나 덕의 길로 나아가는 문이다>라고 말했다. <대학>을 읽다 보면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익히고 깨달은 진리는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하며, 학문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고는 부수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다. 해도 변화하는 만물의 현상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학문하는 사람은 지식에 앞서 학문의 본질과 명철한 지혜의 눈을 뜨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 행간에 도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학문의 방향이 인간과 사회의 활동을 위한 쪽으로 전개 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학문을 하는 학자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지식도 중요하지만,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실제사회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대학에서는 3강령 실현의 수단으로 수기를 첫째로 내세우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대학은 그 이상실현의 수단으로 근본을 세우는 일, 즉 나 자신이 먼저 완전한 도덕적 본체가 되기를 요구한다. 이런 사고는 유교전체를 통한 근본사상의 하나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아울러 <대학>에서 제시하는 정치의 순서가 논리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다. 즉, 대학은 평천하의 수단으로 치국을 말했고, 치국의 전제로 제가를 주장하고 있다. 사실 제가 없이 치국이 될 수 없으며, 치국 없이 평천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순서의 설정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대학>의 이처럼 특징적인 내용도 있으나 한 두 가지 미흡한 점도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 관념적 도덕주의에 빠져서 물질적 측면에 대한 언급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은 <대학>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에 있어서는 정치의 일면인 부국강병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 간단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맹자가 유가에 입각하고 있으면서 경제적인 면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학의 핵심사상은 한마디로 <수기치인도>라 할 수 있는데 즉, 먼저 자기자신을 닦고 나아가 타인을 다스리는 도라 할 수 있다. 이는 개인생활의 수양과 사회생활과의 결합, 곧 윤리와 정치와의 결합을 논하는 학문이었으나 군자의 학문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