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동양사상>편
맹자 - 맹인 (BC 372?~289?)
권력과 부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전국시대에 <인의>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주창했던 맹자의 정치방법론이 담긴 책, 맹자는 극심한 사회변화 속에서 절대군주 중심의 강력한 국가 공리주의를 배격하고, 성선설에 기초하여 지식인들의 자율적인 도덕원리에 입각한 <인정>과 <왕도사상>을 피력했다. <맹자>에는 이와 같은 맹자사상의 전모가 주로 그의 제자,또는 당시 군주들과의 대화 속에 생생한 필치로 전개되고 있다.
생애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와, 공부기간을 다 마치기 않고 돌아온 아들에게 짜고 있던 베를 끊어 교훈을 준 <단기지훈>의 고사로 유명한 맹자와 그의 모친.
맹자는 중국 저국시대 유교사상가로, 공자 사후 100년 정도 지난 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있으나 정확한 생물연대는 알 수 없다. 맹자는 현 산동성의 추현지방인 주나라 사람이며, 노나라의 귀족인 맹손씨 집안의 자손이라 전해지고 있다. 공자와 같이 맹자도 아버지를 일찍 잃었는데,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네 살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배려와 지도 속에서 자랐다. 맹자와 그의 모친은 처음에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으나, 맹자가 언제나 시체를 매장하고 장례식을 올리는 놀이를 하자 그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고 팔고 하는 놀이를 하므로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니 비로소 맹자가 공부하는 흉내를 내었다. 즉,아들을 기르는 데 좋은 환경을 찾아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는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져오고 있다.
젊었을 때 노나라로 유학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에서 배우고, 뒤에 제자들과 양나라의 혜왕, 제나라의 선왕, 추나라의 목공, 등나라 문공 등에게 유세를 하고 돌아다녔으나, 만년에는 향리에서 후진들을 지도하며 그가 제후들이나 제자들과의 대화내용을 엮어 <맹자>를 집필했다. <맹자>는 오랫동안 읽히지 않다가 당나라 때 한유가 이 책을 세상에 밝혔고, 그것이 북송에 계승되어 차츰 중요시되었으며 남송의 주희가 4서의 하나로 삼았다.
공자와 맹자는 성격상 차이점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공자는 내성적이고 세련된 선비였으며 조심성있고 말하기 앞서 깊이 생각하는 반면,맹자는 외향적이었으며 그 시대의 위대한 예언자로 그의 재치는 널리 주목을 끌었다. 공자는 어려운 질문을 받게되면 머뭇거리기도 했으나, 이와 달이 맹자는 그의 적대자들을 몰아치는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대적 배경과 맹자의 사상
공자의 유가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어 유가학파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다 같이 공자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으나,그들의 주장은 상반되는 점이 많고 후세의 학문에 미친 영향 또한 다르다. 그들의 학문계통을 보면 <인의>를 강조한 맹자는 공자의 직계제자인 자사의 계통이고, 순자는 특히 <예>를 강조한 자하의 계통에서 나왔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유력한 제후는 스스로 왕을 칭하고 무력으로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들의 목표는 제나라의 환공이나 진나라 문공과 같은 패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맹자는 그의 이상주의적인 사상을 제후에게 유세하고 다니면서 패도를 부정하고 왕고를 제창했다. 맹자의 사상 속에서 두 개의 중요한 지주를 찾는다면, 하나는 윤리사상으로서의 성선설이요, 다른 하나는 정치사상으로서의 혁명론이 될 것이다.
1. 맹자는 인성론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을 내세우고, 그 증거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인의예지라는 4덕의 싹이 되는 4가지 마음이 있는데,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그것들이다. 이를 <사단설>이라 한다. 이 사단설을 바탕으로 <오륜>을 설명했다. 즉,부자 사이에는 친이, 군신사이에는 의가, 부부에는 별이, 장유사이에는 서가, 붕우사이에는 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맹자의 성선설은 약 50년 후배인 순자의 성악설과 아울러 인성론의 두 전형이 되었다. 성선설에 근거를 둔 맹자의 윤리사상은 인간의 내면에 신뢰를 두는 것으로 <주관적 윤리학> 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인간의 내면에 신뢰를 두지 않고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는 순자의 성악설을 <객관적 윤리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비된다.
2. 맹자는 정치론에 있어 <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제창했다. 이는 힘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로써는 인심을 얻을 수 없으며, 인애에 의한 왕도로써만 민심을 얻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정치철학으로 왕의 덕의 유무에 따라 천명이 따른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덕이 없는 악덕군주를 신하들이 몰아내는 것이 혁명이며, 이는 민심이 천심을 따라서 행하는 일이라 하여 후세 왕조교체에 있어서의 선양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맹자와 민심에 대한 강조는 이른바 <역성혁멍>의 긍정이라는 과격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임금도 임금답지 못하면 교체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 사상에 철저했다.
다음의 제의 선왕과 맹자와의 다음 문답은 그의 혁명론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제의 선왕이 묻기를 <무왕(의 왕)이 주(의 폭군)를 몰아 냈다고 하니 그런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대답하기를 <옛기록에 있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여도 좋습니까?> <인을 해치는 자를 적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이라 하며, 잔적지인을 일부(일개의 필부)라 합니다.일부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아직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 대화는 은의 마지막 왕인 주처럼 국왕이 포악무도할 경우 한갓 하찮은 사나이로 전락한 것이므로 죽여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게 맹자의 생각이다.
이 같은 맹자의 혁명론의 근거에는 그의 민주주의와 애민사상이 있다. 민과군주와 사직의 세 가지 중에서 민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한 맹자의 말에서 민을 나라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그의 민본주의 사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왕도사상>은 이상주의적인 사상이어서 결국 채택되지 않았다.
<맹자>의 내용
<맹자>는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혜왕편. 공손추편. 등문공. 이루편. 만장편. 고자편. 진심편으로 엮어져 있으며, 각 편을 다시 상하로 나눈 14권본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중 양혜왕. 공손축. 승문공 등의 3편은 맹자가 각국의 제후들을 만나 민본사상에 기반을 둔 정치를 강조하며 제후를과 나눈내용이며, 이루편 등 4편은 고향에 돌아와서 제자들과 정치에 관한 토론을 벌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편의 대부분은 명백한 주제가 들어 있다.
1. <양혜왕>편 : 모두 23장으로 되어 있다. 그는 전란으로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유력한 군주로 하여금 천하를 통일하게 하고 평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각국 제후들의 초청에 응했다. 제의 선왕에 가장 기대를 걸고 그에게 민생을 안정시키고 교육을 보급시켜 민중의 지지를 얻는다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즉, 무력을 위주로 하는 패도를 피하고 천명에 따라 민의를 존중하는 왕도를 제창했던 것이다. 그의 의견이 한때 수용되는 듯 했으나 제와연이 무력으로 전쟁하자 맹자는 선왕을 포기하고 다른 제후들과 대해서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왕만한 정치력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그의 설득은 공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그의 왕도사상에서는 천명(민의)에 바탕한 백성의 저항권이 인정되었고 <서경>과 더불어 <역성혁명이론>을 제공했다.
2. <공손축>편 : 모두 23장으로 되어 있다. 제국에 체재하는 동안 맹자가 강설했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왕도. 양기. 사단에 관한 논설은 유명하다. 왕도론은 전편과 거의 같고,양기론은 마음을 주재하는 <지>이외에 육체를 지배하는 <기>의존재를 지적,이를 높이 키워서 도의와 합치시키는 것을 <호연지기>를 기른다 하여 왕도 강설자의 용기를 지탱하는 전재로 삼았다. 또한 이 입장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문제삼아 과거 현자의 처세방식을 비판하고 거취의 진퇴를 분명히 한 공자를 찬양했다. 아울러 성선설의 내용을 이루는 4덕과 4단을 논하고 있다.
3. <등문공>편 : 15장으로 되어 있다. 왕도정치의 일환으로 그가 제창한 그 유명한 <정진법>이 설명된다. <정진법>이란 토지를 우물정자(井) 모양으로 나누어 중앙은 조세용 공전으로 하고 그 주위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개념인데. 이어 당시의 지식인을 매혹시킨 농가나 묵가의 사상을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자급자족의 근로생활을 제창하는 농가가 실제적으로는 교역경제에 의존하는 맹점을 공박, 사회발전 면에서 농가를 거부하고 분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절약을 중히 여겨 박장을 권장하는 묵가가 어버이의 장례만은 후하게 하는 모순을 공박, 왕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들 이단을 배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대장부론>을 토해낸다.
<천하라는 넓은 집에 살고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대도를 실천하여 뜻을 이루면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나아가고, 뜻을 이루지 못하면 혼자서 자기의 도를 실천하여, 부귀도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하지 못하고 무거운 무력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게 되어야만 그것을 대장부라 한다.>
4. <이루>편 : 정치.윤리.교육.경전.인물평론 등에 관한 어록으로 61장으로 되어 있다. 모두가 짤막한 구절로 되어 있으며 배열도 순서와 통일이 결여되어 있어 제자들의 편집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모아진 어구 그 자체는 다른 편의 결함을 보완하고 맹자사상을 복원하는 데 도움되는 것이 많다.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존립할 수가 있으나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그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
5. <만장>편 : 18장으로 상편은 제자인 만장의 물음에 대답하고, 요.순.우 등의 전설을 비판했다. 하편 역시 만장과의 대화를 통하여 왕도 강설자의 생활신조를 보다 상세하게 말했다.
6. <고자>편 : 36장이다. 상편은 주로 인성론이 들어 있는데, 전반에 있는 고자와의 논쟁은 유명하다. 논쟁은 두 사람이 모두 비유를 써가며 팽팽하게 맞섰으나, 맹자는 그것을 승리의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상편의 후반은 이미 나온 왕도. 양기. 4단 등 과 관련되는 수양론으로 밤낮으로 양심을 지키도록 노력하고, 외계의 자극에 따라 악으로 달리기 쉬운 관능욕을 자제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 입장은 단적으로 <야기를 간직하라>라고도 하며 <욕을 적게 한다>고도 하여 송유의 수양론에 영향을 주었다.
7. <진심>편 : 84장의 짤막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맹자는 요순 이래 500년마다 1시기로 보는 성현계보를 말한 뒤 열렬한 기백과 자신을 가지고 그 자신을 공자 다음 가는 왕도 제창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인생삼락>이 여기서 그려지는데, 1.부모형제가 안녕한 것 2.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 3.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기쁨이 그것인데, 천하를 얻은 것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가는 자는 쫓지 않고 오는 자는 거부하지 않는다. 나에게서 떠나는 자는 그대로 두고 가르침을 받고자 오는 자는 그 사람의 과거에 구애됨이 없이 맞이한다.>
요컨대 <맹자>전체의 주축은 <왕도사상>의 강조이고, 입설의 근거로 <성선설>과 강설 때 솟아나는 기백도 간과할 수 없는 요점일 것이다. 문제는 내용에 어울리게 투지가 넘치는 박력을 나타내 보이고, 구성 및 수사도 긴밀한 추고를 거쳐 개성적이다. <장자> 내편과 함께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교묘한 비유를 구사한 나머지 수사 그 자체에 뜻밖에 많은 기변이 숨어 있다.
맹자사상의 현대적 의의
맹자는 공자사상을 계승발전시키고 유학의 체계를 확립하여 대체로 공자 이후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제2의 성현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인의>의 도를 확립하고 인정을 왕도의 기초로 하여 왕도. 패도의 변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사람을 끄는 웅변, 도덕적 용기,그리고 깊은 신념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대중화시켰고, 또한 농가가 묵가 등의 이단을 철저히 배격하여 유학을 전국시기에 돋보이게 했다.
맹자는 원래 기백이 강하고 언변에 능해서 호연지기를 설하는 곳, 대장부론을 설하는 곳, 출처진퇴를 설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감동적이다. 특히 <맹자>를 읽다 보면 마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궤변을 문답으로 몰고가 물리치는 장면을 연상케 되는데, 그의 웅변, 그리고 적절한 인용과 교묘한 비유는 탁월하다. 공자와 맹자는 거의 같은 사상을 가졌으나 성격이나 사상적인 면에서 미묘한 차이점이 있었다.
1. 공자는 인을 주장했지만 맹자는 인의를 주장하여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이다> 라고 규정했다. 2. 두사람 모두 훌륭한 정부에 관심을 가졌지만 공자가 군주는 전능한 성전이라는 인식과 다만 치자에 대한 백성의 신임이 중요함을 인정했을 뿐이라, 맹자는 정부는 백성을 위해서, 그리고 백성의 승인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여 백성을 군주보다 더 중요한 존재로 간주했다. 맹자는 <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가 있다. 백성을 장악하라. 백성의 마음을 장악하는 길은 오직 하나가 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마련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고 했다. 3. 위와 같은 논리에서 백성에게 천명을 어긴 박덕한 군주를 교체할 수 있는 역성혁명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런 점에서 거의 현대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자로도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정직이고 변함없는 관계를 밝혔을 뿐이다. <치자는 치자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그리고 아들은 아들답게>라고 <논어> 에서 밝혔다. 4. 두 사람 다 훌륭한 정부는 물심양면의 복지에 의존한다는 견해를 용인했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맹자는 그의 선생보다 훨씬 더 자세했다. 그에게는 백성이 부유하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진법.조세관리.자원보존과 같은 앞서 말한 각 분야에서 그의 신념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또한 <맹자>는 오랫동안 한 유가의 저작으로 제자류에 끼여 평가될 때는 찬반 양론이 있어왔는데, 당의 한유가 이 책을 옛글 중에 유일한 것으로 격찬함으로써 차츰 눈길을 끌기 시작했고, 남송의 주자가 <대학> <중용> <논어> 와 함께 4서의 하나로 삼은 이후 초학필독의 고전취급을 받았으며, 절대적 권위가 주어져 한민족의 정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평가를 떠나서 본서의 현대적 의의를 든다면,
1. 성립연대 및 성격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 많은 전국시대의 저작들 중에서 본서와 같은 것은 유력한 길잡이로 믿을 수 있는 사료가 되고, 사상사뿐 아니라 문화상의 연구 면에서 매우 귀중하다. 2. 본서의 내용은 전국 유가의 사상. 감정. 생태는 물론이고, 정치. 윤리, 교육에 관한 제언은 현대에도 참조할 만한 많은 지혜와 교훈을 간직하고 있다. 3. 본서는 단지 맹자 개인의 언행론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최초로 나타난 자서문학으로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