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동양사상>편
논어 - 공자(BC 552~479)의 제자들
우리가 서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과 그리스 신화를 읽듯이 동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 중의 하나가 <논어>다.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집으로 <하늘의 소리>로 사람의 일을 말한 책이다. 송의 주희가 과거 문인들의 필독서로 4서 (논어.맹자.중용.대학)를 펴내고 그것이 원대 이래 과거시험의 기본교재로 채택됨에 따라 노자의 <도덕경>과 더불어 동야의 정신문화 세계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고전 중의 하나다.
공자의 생애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방황하는 청년들이 생애의 지침이 될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주저없이 권한 책이 <논어>였고, 동양역사학의 아버지 사마천은 <사기>에서 노자. 맹자. 순자. 한비자 등 다른 제자백가들은 <열전>편에 기록하면서 제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를 <세가>편에 기록하고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공자, 그는 누구이고, <논어>는 어떤 책인가?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유교의 개조인 공자의 이름은 구, 공자라로 할 때의 자는 존칭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창평향 추읍에서 하급무사 출신의 숙량흘과 내연의 처인 징재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공자는 일찍이 양친을 잃고 생계를 위해 창고나 가축 관리인 노릇을 하는 동안 곡물출납이 공정했고 가축도 급속도로 번식시켰다. 정해진 스승은 없었으나 나름대로 학문에 힘썼다. 당시의 천하는 하극상 풍조가 만연해 제후들은 주나라의 권위를 업신여겼고, 노나라에서도 임금 소공은 3환은 횡포에 분노하여 무력으로 이를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제나라로 망명했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제. 송. 위. 진 등 여러 나라를 전전했다. 생명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며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예>를 탐구하다 보니 자연히 고대의 역사 .정치.사회.윤리 등 광범위한 지식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주나라로 가서 옛 의례를 연구하고 노자를 만나 예를 묻기도 했다. 공자가 주나라를 떠나려 하자 노자는 공자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고 한다.
<부유한 자는 금전을 주고 친절한 자는 충고를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한마디 충고를 하고자 한다. 재기가 넘치고 추리력이 풍부한 자는 흔히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남을 비평하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학문이 있고 책읽기를 즐기며 논쟁을 잘하는 자는 몸을 위태롭게 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는 남의 결점을 꼬집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을 다만 한 사람의 아들이나 한 신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53세때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화평회의가 있었는데, 제나라의 임금은 노나라 임금을 협박하려 했다. 그러나 노나라 임금을 수행하고 있었던 공자가 제나라 임금을 질타하여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54세에 대사구 (법무대신)가 되었으며, 다음해 3환의 세력을 없애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공자의 등용 이후 노나라는 질서가 잡히고 이웃나라에서 점차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이웃나라에서는 공자를 제거할 간계를 꾸미고, 임금 정공이 제나라에서 보내온 미인들에 정신이 팔려 정무를 등한히 하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다. 그후 14년간 조. 위. 송. 정. 진. 채. 초 등의 여러 나라를 주유하면서 자신의 <이상정치>를 실현해보려 했으나 어느 임금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의 눈에 비친 제후들의 모습은 무력에 의한 영토확장과 권모술수에 의한 권력쟁탈전뿐이었다.
69세에 노나라로 돌아온 뒤 정치에 대한 꿈을 단념하고 제자교육에만 전념했다. 제자는 천명에 이르러 그 중 6예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 유교에서는 덕행. 언어. 정사. 문학을 이른바 공문4과라 하는데, 공자에 의하면 덕행은 안연.민자건.염백우.염중궁.언어에는 재아.자공.정사에는 염유.계로,문학에는 자우.자하가 뛰어났다고 한다. 이들을 공문10철이라 한다. 병에 걸린 공자는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아아, 철인은 떠나려고 하고 있다> 고 탄식하며 죽어갔다. 향년73세.
시대적 배경과 공자의 사상
1.시대적 배경
이민족인 견융의 침입으로 주나라가 낙양으로 동천한 후각 지방의 제후들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면서 춘추시대(BC 770~403, 5패 : 환공. 문공. 장왕. 합려. 구천)와 전국시대(BC 403~221, 7웅 : 제(齊), 초(楚), 진(秦), 연(燕), 위(魏), 한(韓), 조(趙)가 시작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정치적으로는 혼란기였으나 사회. 경제. 사상적으로는 변화와 발전의 시대였다. 이러한 난세를 극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제자백가의 사상적 황금시대가 펼쳐지고, 이후의 중국사상은 제자백가 사상의 재해석에 불과하다. 공자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키 위해 현군을 찾아 주유천하 했는데, 이들제자백가 사상은 주로 정치문제와 윤리문제 등 현실문제에 중심을 두었다. 이는 인도나 오리엔트 사회에서 보여지는 신과 내세관의 문제와는 대조적인 것으로, 중국인의 현실주의와 물질주의의 국민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제자백가의 사상 가운데 중국과 동아시아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유가이다. 유가는 춘추시대의 공자가 창시했고 전국시대의 맹자와 순자가 사상적 체계를 정립했다. 진시황제에 의해 한때 탄압받기도 했으나, 한무제 때 국교화되면서 동양사상의 주류로 발전했다.
2. 공자의 사상
공자사상의 중심은 <인> 이며, 인의 가장 순수한 상태가 <효> (부모자식간의 사랑)와 <제>(형제간의 사랑)이다. 따라서 효제를 인간행위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효를 바탕으로 <수신제가>를 이룬 후에 나아가 <치국평천하>를 완성하는 것이 바로 군자의 도리라 했다.
공자의 사상이 잘 담겨 있는 <논어>를 보면, 공자의 이상은 군자를 키우는 데 있다. 즉, 유교의 정치와 목적은 소인을 군자로 끌어올리는 일아라 할 수 있다. 군자는 교양이 있고 고귀한 인격자를 말하며,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정직성과 정의감, 군주에 대한 충성심,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진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군자는 이와 같은 도덕적인 덕목과 함께 현실생활에 있어서도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공자는 군자의 교육으로 <예.악>을 강조하고 있다. 한대에 유교가 관학이 되면서 의식과 예법이 특히 중요시되었고 이로 인해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는 의식과 예절이 강조되고 예.악이 인간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인간의 내면적인 덕과 외적인 예절을 균형있게 갖추는 중용의 행동이야 말로 유가사상의 행동원리가 되었고, 이와 같이 중도를 추구하는 타협정신은 이후 중국문화의 사상적 기반으로 정착되어갔다. 공자의 유가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면서 <유가학파>로 발전되었다.
3. 유교경전
그런데 유가사상은 다른 사상가들과는 달리 그들의 학문과 사상 속에 중국의 전통사상을 함축시켜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유교경전으로 성립시킨 장점이 있는데 유교의 경전에는 4서5경이 있다. 당나라 때까지는 5경이 중요시되었으나 송대이후 주자학의 발달로 사서를 더 중요시했다. 5경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를 말한다. <시경>은 기원전 10세기에서 7세기까지 만들어진 300여 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은 정치적 사건을 읊은 시와 의례적인 송가, 그리고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애정시 등 다양하다, 그러나 시경은 단순한 민요라기보다는 리듬과 운율을 다듬어 인위적으로 정리된 문학작품이다.
<서경>은 주초 이래의 왕의 담화내용과 역사적 문서를 담고 있다. 한대에서부터 금문상서와 고문상서로 나뉘어졌는데, 고문상서는 상당 부분이 위작이라 하여 그 진위를 둘러싸고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역경> 은 주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점을 치는 내용이다. 8괘와 64괘를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은나라 때 신에 문의하여 점치던 것을 주대에 와서 8괘를 이용하여 점술이 만들어진 것이다. <예기>는 의식과 의례에 관한 주대의 자료들을 모아서 한대에 이를 편찬한 것이다.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를 간단하게 편년체로 서술한 것이다. 이 책은 간결하고 사실적이지만, 인간행위의 기본을 의리에 두고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또 공자 자신이 이 책을 편찬했다는 전승은 잘못된 견해라는 시각도 있다.
4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다. 이중 <대학>과 <중용>은 <예기> 가운데서 <대학> 편과 <중용>편을 독립시킨 것이다. <논어>는 공자와 제자신이의 문답집으로 제자의 질문에 대해 공자가 자세히 답한 것을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의논하여 정리한 것으로 공자사상이 가장 정확히 담겨져 있다. <맹자>는 맹자의 어록을 정리한 것이다.
<논어>의 내용
지금 전해지고 있는 논어는 <학이>편으로 부터 <요왈>편까지 20편으로 되어 있고, 전반 10편을 상편, 후반 10편을 하편이라 한다. 각 편의 이름은 요즘과는 달리 각 편의 첫 문장의 두세글자를 따서 편명으로 붙였다. 즉, 1편의 <학이>편은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의 첫머리를 딴 것이다.
<논어>의 전반과 후반은 문체가 다르고 각 편은 서로 연결이 없는 것 같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그의 <인> 사상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그러나 <논어>는 그 표현된 말이 부드럽고 쉬운 반면에 뜻이 깊고 오묘해서 구절 하나를 해석하는 데도 많은 논의가 거듭되어왔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환경과 시대정신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지 거기에 적힌 <논어>의 본래의 뜻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자는 <<만약 <논어>를 읽고 서도 별다른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읽지 않은 것과 같다>> 고 했다. 여기에서는 각 편에서 한두 구절씩 널리 알려진 말들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학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2. 위정: <안다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나는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30세에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40세에는 판단에 혼란이 없었고, 50세에 천명을 알았으며, 60세가 되어서는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70이 되어서는 마음이 동하는 대로 움직여도 법도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3. 팔인: <웃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않고, 예의를 차리는 데 공경스럽지 못하며, 상사를 당하여 슬퍼하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을 가지고 그의 사람됨을 평가하랴.> 4. 이인: <옛날에는 말을 앞세우지 않았으나 그것은 실천이 따르지 못할까 봐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5. 공야장: <약삭빠른 말, 좋은 듯이 꾸미는 얼굴, 환심을 사기 위한 공순은 좌구명(<춘추좌씨전>의 저자)도 부끄러워했거니와 나도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6. 옹야: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곧 정직함이니, 정직함이 없어 살아가는 가는 것은 다행이 화를 모면하고 있는 것이다.> 7. 술이: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게넓고 소인은 항상 조심에 차있다.> 8. 태백: <공손하면서 예의가 없으면 힘이 들고, 신중하면서 예의가 없으면 두려워지고, 용맹스러우면서 예의가 없으면 난동을 저지르게 되고, 곧으면서 예의가 없으면 박절해진다.> <나라에 정도가 행해지는데 빈천하게 산다는 것은 수치다. 나라에 도가 행히지지 않는데 부귀를 누리는 것은 수치다.> 9. 자한: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것이다.> 10. 향당: <자리가 바로 깔려 있지 않으면 앉으시지 않으셨다(공자의 태도를 제자가 적은 글).> 11. 선진: <사람을 섬기지 못하고서야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12. 안연: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정치란 바로잡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군군, 신신. 부부. 자자).> 13. 자로: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을 내린다 해도 복종하지 않는다.> 14. 위영공: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 자체를 고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를 잘못이라 하겠다.> 15. 계씨: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상둥이다.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고, 곤란해져서 배우는 사람은 또 다음이다. 곤란해져도 배우지 아니하면 그러한 사람이 곧 하둥이다.> 16. 양화: <약삭빠른 말과 좋은 듯이 꾸미는 얼굴에는 인이 드물다.> <나이가 마흔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으면 마지막이다.> 17. 미자: 이 편은 공자와 은나라의 3인,백이.숙제 그밖의 현인들의 출사와 은거에 대한 기록이다. 18. 자장: 이편은 공자의 문인들의 말을 간추린 것이 많다. 공자의 말과 같은 무게가 있다. 19. 요왈: <하늘의 뜻을 모르면 군자노릇을 할 길이 없다. 예를 모르면 남 앞에 나설 길이 없다. 말을 모르면 남을 알 길이 없다.>
비록 짧고 평이하고 당연하면서도 무한한 힘을 가지고 읽는 이의 마음에 파고드는 말이라 하겠다. 이처럼 간결하고 비약적인 스타일이기 때문에 <논어>는 독서법이 필요하다. 주희가 말한 <논어>의 독서법은 읽고 뜻을 알 수 없거든 생각을 해보아라. 생각해도 뜻이 밝혀지지 않으면 다시 읽어보아라 라고 했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읽지 않도록 조심해라. 조금씩 읽어라. 그렇게해서 전체에 다다르게 된다 라고 했다.
공자사상의 현대적 의의
공자는 평생 정치와 교육의 두 분야를 추구했지만, 정치가라기보다는 교육자로서의 업적이 두드러졌다. 그는 다른 어떤 사상가보다도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인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실천을 전제로 한 개인의 도덕적 규범인 <인>과 공동의 규범인 <예>를 강조하여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이상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그리고 이상적인 인간상으로는 <군자학>의 면려를 강조했으며 정치의식에 있어서는 <덕치주의>를 강조했다. 다시말하면 당시 어지러운 세상에서 위정자는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은 충성된 마음으로 섬겨야 하며,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공경하고 형제끼리 우애하며 친척끼리 화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자는 이것을 지키는 것이 곧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도리라고 지적, 군자의 도를 제시했다.
한편 공자는 이전의 중국문화를 정리하여 윤리. 도덕. 역사. 교육 등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확고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여 미래의 방항을 잡아주었다는 점에서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공자사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은 점에서 지적을 받고 있다.
1. 공자의 사랑은 너무 인간관계에만 치중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나, 경제적.사회적 발전 측면에는 소극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상은 자본주의 하에서 변모하는 인간의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상은 자본주의 하에서 변모하는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경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복고사상으로 인한 미래지향성의 결여다. 난세를 다스리려면 주나라 제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사상은 개혁의 목표를 과거에로 지향함으로써 그의 철학은 기존세력의 계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기여했으나 새로운 사상이나 진보세력의 발전을 저해했다. 결과적으로 1912년 신해혁명 뒤 중국에서는 진독수.호적.노신 등에 의해 정통적인 중국 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법은 1973년 <비림비공> 운동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으나 4인방의 실각 이후 진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몇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사상은 인간 대 인간 관계의 극치이며,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윤리학에도 크게 기여했다. 만약 현대사회의 특징을 인간부재. 자아상실로 요약해볼 때 이 처방에 <논어>가 가지는 가치는 무한하다고 볼수 있다. 양나라의 황간은 <거울이 제아무리 맑아도 몸의 앞부분만을 비추지만 <논어>는 상하 좌우 다 비춰준다>고 했다. 공자는 인류의 스승이고 <논어>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규범을 담은 전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