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동양사상>편
선가귀감 - 휴정(1520~1604)
일생동안 성. 속의 세계를 넘나들며 살다간 휴정이 선종과 교종으로 대립하던 당시의 불교상황을 타개해하기 위해 저술한 선.교사상의 종합개론서. 선은 곧 부처의 마음 이고 교는 곧 부처의 말씀 이며 무언에서 무언으로 이르는 것은 교 라 하여 선과 교의 개념을 분명히하고 선의 교에 대한 우월성을 인정하긴 했으나, 선과 교는 상호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보완될 수 있음을 밝힌다. <선가귀감>은 휴정이 방대한 불전을 요약하여 핵심적인 내용을 뽑아 자신의 주석을 달고 평과 송을 덧붙인, 불교 입문자를 위한 선종 입문서적인 성격을 갖는다.
생애
서산대사 하면 우리는 임진란 때 의병을 이끈 스님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그의 진정한 업적은 그러한 세속적인 공헌에 못지않게 <선가귀감>을 통한 선.교 양종의 융합을 시도한 종교적 측면에도 있다. 그의 생애는 성과 속의 두 세계를 부단히 넘나든 분방한 일생이었다. 국난에 떨쳐 일어선 고승 서산대사 휴정은 1520년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서산이란 본래 묘향산의 별칭인데, 만년에 그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법명은 휴정, 호를 서산. 청허라 했다. 9세에 부모를 잃고 훗날 임꺽정을 진압한 안주목사 이사증의 양자로 입적되어 서울에 올라온다. 15세에 진사시에 낙방하자 지리산에 들어가 영관을 은사로 승려가 되어 30세에 승과에 장원급제한다. 36세 때 교종과 선종의 일을 총괄하는 양종판사(교종판사와 선종판사)가 되고 이어 보우대사의 후임으로 선.교 양종의 일을 총관리하던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다. 한편 이런 불교진흥이 이루어지자 유교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은 물끓듯이 일어나 승려들을 비난했고, 그 비난은 주로 보우에게 집중되었다. 휴정은 3년 동안 이 일을 본 후 일체의 승직을 사퇴하고, 역시 명예는 자기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이어 금강산.묘향산.지리산 등을 두루 여행하게 된다. 그는 금강산에 있으나 묘향산에 있으나 항상 1,000여 명의 제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제자들에게 칼쓰기.활쏘기 등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3년 전에 정여립 모반사건도 일어나는데, 여기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잠시 투옥된 적도 있었으나 곧 혐의가 풀려 석받되었다.
1592년 일본군은 동래를 함락시키고 신립 장군이 충주에서 패하자 선조의 어가는 마침내 의주에 도착하고 선조는 휴정을 찾았다. 선조를 만난 휴정은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나라의 위급함을 앉아서 볼 수는 없습니다. 늙은 스님은 절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하고 젊은 스님들은 나라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이에 선조는 휴정을 8도 16종도총섭으로 삼았고 73세의 휴정은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려 1500명을 모으고 이들을 지휘했다. 이때 그의 제자들 중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유정(사명대사).영규.처영이다. 그후 승병들은 서울탈환에 공을 세웠고 전국 각지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난이 잠잠해질 무렵 휴정은 승병의 지휘권을 유정과 처영에게 넘겨주고(영규는 금산싸움에서 조헌과 함께 전사) 1594년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원적암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휴정의 생애는 무엇이 참된 승려의 길인가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 여파는 마침내 전국의 승려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그것이 결국 선불교 중흥의 새 장을 열기에 이르른 것이다. 실로 조선불교는 휴정이라는 거대한 봉우리의 출현으로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도 매우 잘 지어 불교의 깊고 신묘한 경지를 읊은 불교시와 애국시가 많이 남아있다. 저서에는 <청허당집><선가귀감> 등이 있다.
한국불교의 흐름과 <선가귀감>의 집필동기
1.한국불교의 흐름
고구려 소수림왕 (372) 이 땅에 불교(교종)가 공인된 이래 통일신라의 원효에 의해 신라사회에 불교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신라말에는 선종계열이 들어와 9산 을 형성하여 교종계열의 5교 와 함께 공존하게 된다. 5교 9산의 사상적 대립이 고려초에도 이어지자 교와 선을 통합하려는 운동이 일어나는데, 대각국사 의천은 교선의 교리를 융합하여 천태종(교종 중심의 통합)을 창시하고, 고려후기 무신정권하에서는 보조국사 지눌이 선. 교겸수를 주장하며 조계종(선종 중심의 통일)을 창시한다. 그러나 고려후기 불교는 극도로 타락하여 더 이상 고려사회의 정신적 이념역할을 할 수 없게 되자 마침 그 당시에 원나라에서 들어온 성리학(철학적 유교)이 새 시대의 지배이념으로 자리잡게 되고(유.불 교체), 이후 유교는 조선왕조의 정치와 종교(철학)의 양측면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교종 이란 득도를 하는 데 있어 경전을 중시하여 왕실과 귀족이 주로 신봉했고, 정치에 적극 개입했으며, 반면에 선종 은 불경보다 참선을 주로 하여 문자를 모르는 호족이나 신분상승에 한계를 느낀 6두품들이 주로 믿었으며 초세속적인 경향을 띤다.
2.<선가귀감>의 집필동기
<선가귀감>은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어온 선종의 사상과 방법을 간추린 선종이론서로 제자인 사명대사가 간행했다. 이 책의 저술동기는 사명대사가 쓴 발문에 잘 기록되어 있다.
200여 년 동안 불법이 쇠잔하여 선.교의 무리들이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교를 주장하는 사람은 오직 찌꺼기에만 맛을 붙여 모래알만 셀 뿐 5교의 위에 직지인심하여 스스로 깨쳐들어가는 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 선만 주장하는 사람은 스스로 천진된 것만 믿어서 닦고 개치는 일에 힘쓰지 않고 돈오(깨달음)한 뒤에 비로소 발심하여 만행을 익히는 뜻을 모른다. 이렇게 선과 교가 뒤섞여 모래와 금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 위태롭구나, 도가 전해지지 못함이 이같이 심할까. 겨우 이을락 말락하여 마치 한오리 머리카락으로 천근 무게를 달아올리듯 거의 땅에 떨어진 듯하더니, 우리 스님께서 10년 동안 서산에 계시면서 소를 먹이는 틈틈에 50여의 경론과 어록을 보시다가 이중 요긴하고 간절한 것이 있으며 기록해두셨다. 그러나 모두가 너무나 미욱하여 법문이 높고 어렵다고 탈을 잡으므로 이를 불상히 여겨 구절마다 주해를 붙여서 해석하고 차례로 엮어놓았다.
이 발문대로 서산의 저술동기와 그 고심참담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불교계는 내우외환이 겹친 시기였다. 조선왕조는 개창과 동시에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고 불교는 공식적으로(비공식적으로는 명맥이 유지되었음) 국가와 인연이 끊어지게 된다. 태조 때 도첩제(승려허가증)를 실시하고 태종과 세종은 불교종파와 사원의 수를 정리하는 등 고려시대의 전성기와는 달리 크게 위축된다. 또 승려들이 본분을 잊고 수도를 소홀히 하는 등 내부적 타락도 심했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서산은 이 책을 저술하여 그 지침을 삼게 한 것이다.
<선가귀감>의 내용
<선가귀감>의 휴정은 첫머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내 비록 하찮은 사람이기는 하나 바다같이 넓고 아득한 <대장경>의 세계를 헤쳐나갈 후배들의 수고를 덜어줄까 하여 가장 요긴하고 간절한 것들을 뽑아추린다. 참으로 말은 간단하나 뜻은 두루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로써 스승을 삼아 끝까지 연구하고 묘한 이치를 깨닫고 나면 마디마디에 살아 있는 석가여래가 나타나시리니 부디 힘쓸지어다.
<선가귀감>의 주제는 마음과 깨달음의 효용에 관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평등하며 본래 범부와 성인이 따로 없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미망에 빠진 이와 깨달은 이가 있고 범부와 성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때 스스의 가르침을 받아 문득 진실한 내가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깨닫는 일이 있으니 이른바 돈오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게 보지 말 것이니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고 한 것이 그것이다. 깨달은 다음 잘못 익힌 것을 끊어서 범인이 성자가 되도록 하는 것을 점수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높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니 부지런히 털고 닦으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스스로를 낮게 보는 것은 교를 배우는 사람의 병이 되고 자신을 높게 보는 것은 것은 배우는 사람의 병이 된다. 또한 교를 배우는 이는 참선문에 오입하는 비밀한 법이 있는 것을 믿지 않고 거짓으로 가르친 문에 깊이 걸려 있어 진과 망을 다른 것으로 여기어 진이나 망에만 집착하여 관행을 닦지 않는다. 그리하여 남의 보배만을 세고 있으니 스스로를 물러나 움츠리고 있다. 한편 참선을 배우는 사람은 교문에 닦고 끊는 바른 길이 있는 것을 믿지 않아서 물든 마음과 익힌 버릇이 일어나더라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공부의 정도가 유치함에도 불구하고 법에 대한 거만한 마음이 많기때문에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높아진다. 그러므로 옳게 배워 마음을 닦는 이는 자신을 낮추지도 않고 높이지도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인데, 그는 이러한 선.교의 두 관점을 중심으로 자신의 불교관을 전개한다. 이 책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1선.교의 정의 #2불교승려가 지켜야 할 계육 #3선종 5가에 관한 철명이 그것이다.
1.선.교의 정의 : 이를 부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선이요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교이다. (2) 선은 곧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곧 부처의 말씀이다. (3) 무언에서 무언으로 이르는 것은 선이요, 유언에서 유언으로 이르는 것은 교이다. (4) 마음은 곧, 선법이요 말은 곧 교법이다.
이 정의는 대개 선.교에서 논하던 것이나 하나 일도일법인 선과 다도다법인 교의 구분을 이토록 선명하게 규정한 점이 탁월하다 하겠다. 또 실지어구자 와 득지어구자 를 설명하여 법은 이름도 없고 형상마저도 없는 것이므로 말이나 마음으로 사량분별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를 말로 표현한다면 이미 썩어버린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는 죽은 물건에 불과할 것이며, 마음에서 얻은 이는 시정의 잡담이라도 훌륭한 설법이 될 뿐만 아니라, 새들의 노래마저도 제법실상의 깊은 뜻을 가르치는 법문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서산의 선교관은 선을 우위에, 교는 하위에 두는 것을 알 수 있다.
2.불교승려가 지켜야 할 것에 대한 그 대강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학자는 활구에는 들고 사구에는 들지 말라. (2) 공안에 들어 공부할 때의 마음가짐은 닭이 알을 품은 것같이,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같이,굶주릴 때 밥을 생각한느 것같이,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는 것같이,아이가 어미를 그리는 것같이 꼭 투철을 기해야 한다. (3) 도에 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믿으면서 스스로 낮추지도 말고 스스로 높이지도 말라. (4) 음탕한 마음으로 참선하면 찐 모래에다 밥짓는 것 같고,살의를 품고 참선하면 귀를 막고 소리를 듣는 것 같고,투기심을 가지고 참선하면 새는 병에 물붓기와 같고,망령된 생각으로 참선하면 똥냄새를 맡는 것 같아서 아무리 닦아도 마도만 이룰 뿐이라 등으로 설명한다.
3.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각 종파,곧 임재종.조계종.운문종.법안종 등 5개 종파의 전등과 종풍을 약술하고 있다.
사상적 기여
한국불교의 흐름에 있어서 조선 500년은 사상적 방황기이며 불교이상의 혼돈기였다. 사회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 그러했고 불교 내부의 자각적 계기가 미약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불교의 교단은 선.교양종으로 축소되어 근근히 그 명백을 이을 따름이었다. 고려시대 이래 교종과 선종의 대립은 거의 숙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양자의 화합이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이 양종의 대립은 상대방을 비난하며 심각한 양성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때에 휴정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선과 교의 두 길을 명쾌하게 규정짓고 이들이 둘이 아님을 철두철미 역설하여, 선을 주로 하고 교를 융합하려는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이운동의 바탕이 되는 근본사상은 원효의 통불교사상과 보조의 선.교겸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영향을 발휘하여 불교통일을 가져온 것은 휴정이라 하겠다.
비록 양종의 융합이 휴정의 독창적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설들력이 있었다. <<교에서 선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휴정의 주장에는 확실히 선 우월적 사고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선.교겸수와 견성성불이라는 그의 슬로건은 양분된 불교계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견인차였다.
이런 점들이야말로 휴정의 사상적 기여라 할 수 있을 것이다.휴정 이후 우리 나라 불교는 휴정에 귀일 하는 법류를 이루었고 휴정의 중심사항으로 거의 통일을 보았다. 그러나 휴정이 주장한 종지와 종풍은 바로 한국불교의 종지와 종풍이란 할만하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비단 불교문제에만 국한되었던 것이아니라,유가.불가.도가사상이 궁국적인 진리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3교통합론>을 주장한 데도 있다. 또한 휴정의 회통사상은 하나의 이념에만 그치지 않고,진리면과 현실 면을 모두 원융무애하게 회통시킨 그의 생활에서도 나타난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70여 세의 노구를 이끌고 국난극복에 앞장섰으며,전란이 끝난 뒤에도 85세에 생을 마치는 날까지 나라를 걱정하여 제자들에게 뒷일을 당부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제자들이 서자전승 (대를 이어 계승함)하는 법맥을 강조하여 이른바 불교문중의식을 조장하는 폐해를 끼쳤는가 하면 한국불교의 사상적 원류를 중국에서 찾으려고 하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측면이 지적될 수 있으나,휴정은 성과 선을 긋고 자신의 아성 속에서 홀로 살다간 선승이 아니라,회통적 큰 인격이 몸에 밴 그대로의 삶을 살다간 성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