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동양사상>편
징비록 - 유성룡 (1542~1607)
<징비록>은 임진왜란으로 초토화한 주국 앞에 국정의 책임자중의 한 사람인 서애 유성룡이 바친 만년의 참회록.유성룡은 선조대에 활약한문신으로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그는 병조판서,영의정 등의 직책에 있었다. <징비록>은 왜란과정의 수기와 왕에게 올린 글 및 각종 문서를 모은 것이다.전란 전의 대일관계,전쟁의 진행상황,향후의 대비책 등을 포괄적으로 개진하고 있어서,그의 문집인 <서애집>과 함께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자주국방의 바이블>이다.
생애
임진왜란을 극복한 조정의 사령탑 유성룡은 경북 의성에서 양반집 가문에서 태어난다.호는 서애.어려서부터 천부의 재질을 보여 6세 때<대학> 8세 때 <맹자> 9세 때 <논어>를 배웠다. 21세 때 도산서원의 퇴계를 찾아가 주자가 지은 <근사록>을 공부한다. 이미 62세의 원숙한 경지에 오른 이 당대의 석학을 찾은 것은 그의 일생에 큰 전기를 가져왔다. 불과 몇달밖에 머무르지 않았으나 유성룡은 퇴계의 학문과 인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퇴계도 그를 하늘이 낸 사람이라 하여 장차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3세에 생원.지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25세 때에는 대과에 급제했다. 1569년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갔다가 다음해 귀국했다. 그후 부제학.대사간.도승지.경상도관찰사.예조판서.대제학 등의 벼슬을 지내고, 1590년 우의정으로 승진하자 임진란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형조좌랑 권율을 의주목사에.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에 천거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모시고 평양에 이르렀으니 반대파의 모함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났다.그러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어 이듬해 명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그후 충청.전라.경상도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고,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는데, 이때 군대양성.화기제조 및 성곽수축을 건의,군비확충에 노력한다. 그러나 반대파들의 모함으로 또다시 물러났다가 1600년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은거했다. 그가 벼슬을 물러나 것은 우리 후손을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만년에 낙향하여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징비록>은 빛을 불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징비록>의 집필동기
<징비록>은 임진왜란으로 초토화된 조국의 비극을 기록한 넌픽션 스토리이며 국난극복의 역사철학이다. 임진왜란후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각종 사건과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대일외교관계 및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임진왜란의 중요한 사료는 몰론 조선왕조 사회에 관한 고전적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징비>라는 말은 <시경>의 <소비편>에 나오는 <미리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서애는 <징비록>서문에서 이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와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란이 일어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그중 난전의 일도 왕왕 기록한 것은 그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오호라! 임진의 화는 참혹했도다. 한순간에 3도가 떨어지고 8도가 와해되어 임금이 파천했는데 그리고도 오늘이 있음은 천운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내가 지난일을 징계하여 (징) 후환을 삼가노라 (비)>했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소이다. 나같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도 구차스럽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음은 어찌 임금님의 너그러운 은혜가 아니겠는가? 걱정과 가슴 두근거림이 조금 진정됨에 지난일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둘 바가 없도다. 이에 그 한가로운 가운데 그 듣고 본 바 임진년에서 무술년까지의 일을 대략 서술했고 그뒤에 장계.소차.문이 및 잡록을 붙여는데,비록 보잘 것은 없으나 역시 모두 당시의 일들이므로 전원에 살며 삼가 힘써 충성하고자 하는 뜻으로 또 어리석은 신하의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고자 하는 바이다.
이 서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징비록>은 과거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수 없는 뚜렷한 저술의도를 가진 저술이다. 서애는 임진왜란 중 국가의 중책을 맡아 직접 견문함과 동시에 자기가 다룬 공문서를 정리하는 등 풍부한 사료와 지식으로 <징비록>을 저술했다. 그러므로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대한 종합적인 저작이 되는 셈이다. 서애는 당파에 있어서는 동인이요 그중에서도 남인에 속했다. 그러나 <징비록>을 저술함에 있어서 당색을 떠나 가능한 한 객관적 입장에 서려 했고,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평함에 있어서 그 경위나 배경을 골자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서술은 그도 역시 당쟁 중의 인물이긴 했으나 관계를 떠나 낙향 후에 그가 <징비록>을 저술할 때는 좀더 큰 것을 생각하며 담담한 심경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년간이나 경영한 것이 다만 쓸데없이 빈말이 되었구나.지나간 것이 이와 같으나 오는 것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 한없는 세월에 지사의 감개만 더할 뿐이다. 금년에 내가 눈 속에 얼어죽는다면 내년에 누가 큰 그릇에 떡국을 먹는다 하여도 내가 알바가 아니로다.
서애는 임진왜란 중 자기와 관계한 문수 등을 정리하면서 허탈감에 사로잡힌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심경은 스스로 겪은 민족의 수난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안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징비록>은 난전과 난중의 일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징비록>의 내용
본서의 찬술이 끝난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그가 낙향한 지 3,4년 후로 추측되며,친필로 쓴 <초본 징비록>은 지금도 하회종가에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약 30년 후에 후손에 의해 처음으로 <징비록>이 간행되어 세상에 유포 되었다. 우리는 흔히 <징비록>이라 하면 이 간행본을 말하지만,간행본도 16권본과 2권본의 2종류가 있기 때문에 <징비록>은 모두 3종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초본 징비록>이 가장 근원이 된다.
본서의 내용은 임진란의 발단으로부터 시작하여 난중의 여러사건을 수술하고 그 뒤에 <잡록>을 싣고 있는데,그 서술방법은 한 사건씩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임진왜란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저술이기 때문에 그 주내용을 이루고 있는 기사는 역시 저쟁경위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치. 경제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하는 한 예로 난중의 식량문제와 명군과의 정치교섭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을 들 수 잇다. 난중의 군량과 식량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로서 서애가 이의 해결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것이나.명군과의 정치교섭도 직접 담당한 것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난중의 정치.민정도 저자가 직접 체험하고 시찰한 것이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참상 역시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책의 내용 중 몇부분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전 조정에서는 일본의 동태를 걱정하여 충청.전라.경상도에 명해 병기를 정비하고 성을 수축케 했다. 그러나 태평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안밖이 편안에 젖어서 백성들은 노역을 꺼려 원성이 거리에 자자했다. 나의 어떤 친구는 그것을 보며 <성을 쌓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니며 고을 앞에 강이 있으니 어찌 날아서 건널 것이가? 공연히 성을 쌓느라고 백성들을 괴롭히는가?라고 했다.그 당시 사람들의 의견은 모구 이러했다.>>
<<임진년 봄에 신립과 이일을 보내 변방의 군비를 순시케 했는데 점검한 것이라 겨우 활. 화살. 창뿐이었다. 도읍에서는 문서의 기록만으로 법을 피했다.>>
<<17일 이른 아침에 왜군 침략의 급보가 처음으로 조정에 이르고 얼마 안되어 부산함락의 소식이 이르렀다. 순변사 이일이 서울에 있는 정병을 거느리고 가고자 병조의 병적을 가져다 보니 모두 거리의 훈련되지 않은 병정과 서리. 유생이 반수나 되었다. 임시 겸열하니 유생은 관복을 갖추고 과거 보는 시험지를 들고 있으며 서리들은 평정건을 쓰고 군사로 뽑히는 것을 모면하려는 자들로 뜰에 차 있었다.>>
이상은 우리 백성들의 심리상태나 사기 등에 관한 기록이다. 또한 전투에 관해서도 신랄한 전략적 비판을 가하고 있다. 행주대첩과 진주성의 싸움에 대해서도 <징비록>에서는 비판하고 있으며, 신립 장군의 충주패전은 조령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지 못한 전략적 실패로서 슬픈 일이라고 평하고, "옛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후회한들 어찌하오리만은 후일의 경계가 되겠기로 상세히 기록하여둔다." 라고 했다. 임진란의 여러 장수 중에서 이순신은 가장 훌륭한 전략가로서 찬양되고 그를 추천하는 데서부터 주요 해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서애의 인물평이나 사건평은 그의 당색이나 주관을 감안해야 되겠지만 그의 여러 전투에 대한 전략적 평가는 한국전사를 연구하는 데 기본이 된다. 할 수 있다. 그럼 백성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기록을 보자.
<<임금께 군량을 제외한 나머지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고자 아뢰니 허락하다. 왜군이 서울을 점거한 지 벌써 2년,전화를 입어 천리가 쓸쓸하고 백성은 농사를 짓지 못해 아사하는 자가 속출했다. 성줄에 남아 있던 백성은 내가 동파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부축하고 이고 지고 하여 온 자가 헤아릴수 없었다. 어떤 명나라 장수는 길가에서 어린애가 죽은 어미의 젖은 빨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군중에서 기르고 있다.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10에 쌀1을 섞어 물에 타서 먹였으나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 생명을 건진 것이 얼마되지 못했다. 어느 날 밤에 큰 비가 내리는데 굶주린 백성이 내 주위에서 신음하는 슬픈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더니 아침에 깨어보니 쓰러져 죽은 자가 심히 많더라. 대저 서울에서 남쪽 끝까지 왜적이 가로 꿰뚫고 있었으며 때는 4월인데 인민들은 모두 산과 골짜기에 피난하여 한 곳에도 보리를 심은 곳이 없었으니 왜적이 수개월이나 있었더라면 우리백성은 죽었을 것이다.>>
<징비록>의 평가
임진란관계의 기록으로는 우리 나라의 <조선실록>을 비롯하여 중국이나 일본에도 몇가지 기록이 있으나,이 <징비록>처럼 임진왜란을 대국적으로 관찰하고 종합적으로 기술하여 후손에게 전해준 저서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저자 자신이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전쟁을 진두지휘한 사람이므로 그의 기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애가 본서에서 기술한 인물평이나 사건에 대한 평들도 그의 당색이나 주관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지만,일차적으로 그가 기술한 여러 전투에 대한 전략적 평가는 한국전사 연구에도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징비록>은 훌륭한 사료가 되는 동시에 또한 전쟁문학의 가치도 있으니 이것이 임진란관계의 문헌으로서 가장 중요한 책이요,당시 조선왕조 사회의 기본 사료이며 우리의 고전적 문헌으로 많은 역사적 교훈을 주는 저술이라 하겠다.
저자는 전란 중에 처음에서 끝까지 국난을 처리했으며 전쟁 후에는 낙향하여 전원 속에서 지나간 날의 전쟁의 성패를 조용히 반추해보고, 그의 명석하고 정확한 판단력을 한 자루의 사필에 경주함으로써 앞일을 징계하여 뒷걱정을 조심한다는 국가의 대계를 토로했으니,이러한 그의 정치가다운 양심과 애국자다운 모습이 이 책 속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내용에 있어서도 그의 유창한 필치와 탁월한 식견으로 전후 7년 동안의 조선.중국.일본 세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와 전국의 추이를 명쾌하게 묘사하고 간결히 기술하여 그 당시 민족의 수난상을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현재 국제화.개방화 시대에 직면하 우리들에게 다시금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결의를 더 한층 환기하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