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동양사상>편
<대승기신론소> 저자 : 원효(607~686)
<대승기신론소>는 프랑스의 폴 드미에밀이 <대승불교철학의 가장 명쾌한 개론서>로 극찬한 <대승기신론>(인도의 마명)을 원효가 해설한 책으로 <금강삼매경론>과 더불어 원효의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저작이다. 불교의 원산지인 인도에서도 해결을 보지 못했던 철학문제인 <공.유의 대립>을 극복,독특한 <화쟁사상>으로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사상의 방항을 제시한 원효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불성>이 내재해 있다는 <여래장사상>의 본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원효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일심사상>과 <대중불교>의 전개라는 그의 염원이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생애
우리에게 김춘추의 딸인 과부 요석공주와의 로맨스,그리고 당나라에 유학을 가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다음날 깨달음을 얻어 도중에 돌아온 멋진 사나이로 알려진 원효, 원효는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지 1백여 년 만에 나타난 우리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학자이며 사회지도자였다. 성은 설씨,원효는 법명,설총의 아버지, 29세 때 출가하여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했고, 34세 때 의상과 함께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나, 고구려의 순찰대에 잡혀 실패하고 10년 뒤에 다시 떠나, 도중 당항성의 어느 무덤에서 잠결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는 이튿날 <<모든 사물과 법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온다. 그후 분황사에 있으면서 <통불교>(원효종.해동종)를 제창하여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려고 노력했으며,장안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바칠 기둥을 깎으리로다>>라고 노래했다. 그 뜻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태종 무열왕이 듣고서 홀로 된 요석공주와 짝지어주니 설총을 낳았다는 공주와의 로맨스는 널리 알려져 있다. 파계한 뒤 스스로를 소성거사.복성거사라 칭하며 속인 행세를 했고,<화엄경>의 이치를 쉽게 풀어 <무애가>라는 노래를 지어 민중 속에 전파했다.
신라왕비의 종기의 치료를 위해 당나라에서 <금강삼매경>을 들여와 왕이 설법을 듣고자 대법회를 준비하도록 했느나 설법할 사람이 없어 모두 낭패한 상태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 당시 박식하기로 유명한 대안법사가 천거되었으나 그는 다시 원효를 추천하고 물러났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효는 우선 이 경전에 대한 주석서를 쓰기로 하고,소를 타고 가면서 소의 두 뿔 사이에 책을 걸쳐놓고 먹을 갈아 <금강삼매경소>5권을 썼다. 그러나 현존하는 <금강삼매경론>은 이것이 아니다.그를 시샘하는 자들이 그것을 훔쳐갔기 때문에 원효는 다시 <약소>3권을 집필하여야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드링 원효의 대작이라 일컫는 <금강삼매경론>이다. 원효는 이것을 가지고 당시 신라불교의 대표사찰인 황룡사에서 왕과 고승대덕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경전의 깊고 오묘한 이치를 설파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후 절에서 저술과 참선으로 말년을 보냈다. 그는 불교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총100여 부240권 중 20부 22권만이 현존한다. 특히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즐겨 인용했고,<금강삼매경론>은 그의 세계관을 반영한 그의 대저술이다.
원효의 불교사상
원효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그러기 위해선 겸손하라>>는 것이다. 원효는 인생의 비극이 싸움에 있으며 이싸움을 피하기 위해 아집과 자만심을 버리고,본래부터 <나>라는 존재가 따로 없으니 나를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살라는 것이 원효가 남긴 사상적 교훈이다. 원효의 불교사상은 1.화쟁사상 2.일심사상 (원융회통사상) 3.정토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같다.
1.<화쟁사상>은 서로 간의 다툼을 화합하려는 것이다. 그가 살던 당시의 불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론이 분분하여 혹은 나만 옳다 하고 남을 그르다고 하며,혹은 내 학설은 옳고 남의 학설은 틀리다 하는 단순한 이론만 횡행하고 있어 드디어 쟁론이 강과 바다를 이룬 상황>>이었다. 이 <강과 바다>를 이룬 쟁론을 화합한다는 것이 원효가 시도한 과업이었다. 즉 서로 모순 대립한는 것처럼 보이는 각 경전의 불교사상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하나의 원리로서 회통시키려 했다. 원효의 화쟁은 서거정의 <동문선>이 전하는 것처럼 <<여러 갈래의 각기 다른 쟁론을 화합하고 유와 무의 대립된 견해를 귀일시키는>>것이었다.
2.이러한 화쟁은 <일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 원효사상은 달리 표현하면 <일심을 통한 화쟁사상> 혹은 <일심을 통한 원융회통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불교의 모든 교설은 불타의 깨달음을 원천으로하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경론과 교설은 이 <깨우침>의 영역이다. 즉 모든 경론이 한 마음의 펼침이며 그것들을 모으면 그대로 <일심>으로 귀일되는 것이다. 또 여러 갈래의 종파 또한 한마음의 펼침에 불과하며 요약하면 역시 일심일 뿐이다. 이처럼 원효의 논리는 개합과 종요의 회통원리인 것이다.
3. 정토사상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기본원칙 위에 어려운 볼교경전을 몰라도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만 위우면 누구나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단순한 신앙이었고 현세의 고해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갈 수 있고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내세신앙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과 자장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불교의 수용 면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충과 일반 서민층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에 혜숙.혜공.대안 등이 대중속에 깊이 파고들어가 서민 대중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화시킴으로서 유익한 의지처가 되게 했다. 원효 역시 이들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괴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지방의 촌락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가로써 가무하고 잡담하는 가운데 불법을 널리 알리어 샐생활을 불교화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무애가에는 본체(리)와 현상(사)이 소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당시의 귀족 중심의 불교에서 민중불교로의 불교 대중화를 시도했다. 그의 포교로 신라하대에는 신라인들의 대부분이 불교신자가 되었다 한다.
<대승기신론소>의 내용
1.<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은 2세기경 인도의 시인이자 고승인 마명대사가 대승불교의 근본 뜻을 이론과 실천의 두 측면에서 설명한 책으로 줄여서 <기신론>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찬이라는 주장이 있어 저자문제는 오늘날까지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으나, 설사 인도에서 찬술되었다고 해도 그곳에서는 크게 읽히지 않고 중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하며, 이는 원효가 해설한 <기신론소>의 영향이 컸다.
<기신론> 해석서 중 혜원.원효.법장의 주석서를 3대소로 지칭하고 있으나,혜원의 것은 가짜라는 설과 함께 질로나 양으로 보아 원효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면,법장의 것은 원효의 것을 그 분과와 어구해석에 있어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원효의 <기신론소>야말로 최고의 <기신론>해설서라 할 수 있다. 원효 자신도 그러한 위치를 알고 있었던 듯,<<종전의 주석가들은 허심탄회하게 논지를 바로 찾지 못했으니 근간을 잊고 곁가지를 얻는 데 그쳤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기신론>에 대해 무려 7종의 연구서를 냈고,특히 그의 <기신론소>는 일찍부터 중국의 불교학계에서도 높이 평가했다. 그런 의미에서 원효는 <기신론>의 <재발견자> 요 <선양자> 할 수 있다.
2.<대승기신론소>의 내용
원효가 생존했던 당시의 불교계는 인도는 몰론 동아시아의 사상적 대립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종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 즉 1.공 (무).유의문제 2.진 (출세간적 진리) 3.속 (세속적 진리)의 차별문제였다. 그런데 원효는 많은 경론을 섭렵한 끝에 이 문제들을 근본저그로 해결할 수 있는 논리를 마명의 <기신론>에서 발견하여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사이을 화합시키고,진과 속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진속일여)라는 주장을 폈다. 마명은 <기신론>의 첫머리를 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불보(부처님),법보(부처님 말씀), 승보(불제자)의 삼보에 대한 찬양하는 권두시로 시작하고 있는데 원효는 이 권두시에 대한 해설로 <기신론>의 사상을 요약,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원효는 <일심> 이란 관점에서 불교의 모든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삼보에 귀의한다라는 것은 외부의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귀의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의 마음속으로의 귀의를 의미하며, 그렇게 되면 불법의 가르침도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되고 영원한 마음(진여)은 현실 속에서 오염(생감)되어 나타나는데, 참된 마음과 현실의 마음은 어떤한 관계에 있으며 현실의 마음은 어떠한 양상을 갖는가? 마명은 진여와 생멸의 마음을 포괄하여 대승(여래장)이라 칭했는데, 대승이란 곧 <중생들의 마음>이다. 그런데 대승인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지만 진여와 생멸의 두 방향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아니면서도 하나인 것도 아닌 것을 <아라야식> 이라하는 데, 이러한 아라야식에 의해 진여의 세계(각, 깨달음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불각, 타락의 세계)는 같은 것으로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불각은 피할 수 없으며 깨닫기 위한 끝없는 몸부림이 시각 단계이고,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인 본각(구경각)은 우리의 본래마음인 진여의 세계다. 불각 때분에 생기는 기본적인 세 가지 모습을 <삼세>라 하고 그로부터 파생되어 더욱 복잡해진 여섯 가지의 모습을<육추>라고 한다.
그러나 불각의 과정이 인간세계의 전부는 아니며, 각이라고하거나 불각이라고 하거나 그 둘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기신론>의 주장이다. 한마음(일심)에 의해 진여(본체론적인 중관학파)와 생멸(현상론적인 유식학파)이 <기신론>에 이르러 비로소 종합되는 것이다. 중관.유식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세속(속).출세간(진)의 차별까지도 <기신론>에 의해 합리적으로 극복된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자세. 그것이 결정짓는다. 무궁무진한 여래의 진여한 마음을 가진 우리의 마음이 생각하고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 그 존재의의나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신론> 의 사상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얻은 그의 깨달음으 내용과 신기할 만큼 일치하고 있다. 이<기신론>을 보고 원효는 얼마나 기뻤을까? 원효는 <기신론>이 바로 자신의 구도적 학문과 삶의 자세(진속일여의 자세)와 너무도 일치함에 크게 감명을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원효는 그것을 한 마디로 규정하고 있다.
"하나인 마음 이외에 다시 무슨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리석어서 그 하나인 마음을 잘 모르고 방황하는 까닭에 그 고요해야 할 바다에 파랑이 일고 기복이 생기며 갖가지 평화롭지 못한 인간의 한계상황은 생겨난다."
<기신론>은 이러한 마음, 곧 <일심>에 관한 설명이며 원효는 그것을 독특한 입장에서 해설하고 있다. 권두시의 이러한 내용은 <기신론>의 대의를 표명하고 있지만 원효의 독창적이고 해박한 해설에 의해 더욱 참신함을 갖는다. <기신론> 자체의 이러한 내용은 어느 불전과도 다른 독특한 것이다. 흔히 불전들이 어느 한사상을 말한는 데 비해 <기신론>은 불교 교리를 전체적으로 조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승의 삼보에 관한 문제나 인간이 도달해야 하는 열반이나 진여의 상태, 또한 진여의 상태에서 타락해 있는 모습들에 대한 기술은 실로 불교 전체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원효사상의 의의 및 영향
이상으로 원효의 생애,<대승기신론소>를 살펴보았는데, 그의 종교사상은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모름지기 원효는 한국불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으며 한국불교는 원효를 통해 비로소 총화불교, 즉 화쟁의 불교에 이르렀다. 원효 이후 한국불교는 신라말의 5교 9산으로 부터 고려의 5교 양종,다시 조선시대의 선교 양종이 되고 결국에는 선과 교가 합하여 일종으로 된 것은 원효의 화쟁에 의한 모든 종문의 회통사상의 영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원효의 진가를 재발견한 고려 의천의 교선일치 그 뒤를 이어 보조의 선교일화, 조선시대의 사명 등에서 원효가 이룩한 한국 불교의 전통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원효는 불교의 도덕적 논설에서도 <화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그 덕목을 1.현상문 2.입의문 3.차별문,그리고 끝으로 4.화쟁문이라 했다. 플라톤은 지혜.용기.절제.정의의 <4주덕> 기독교의 믿음(신).소망(망).사랑(애), 중국의 유교에서는<인의예지신>을 각 각 덕목으로 강조했으나, 원효는 모든 차별의 덕목들을 일관하는 화쟁의 문을 따로 열었던 것이니 이는 원효의 사상이 지닌 원융의 정신을 여실히 나타낸 것이다. 여러 종파들이 원효를 통해서 일관된 의미를 가지게 되고 그 속에서 각파의 의미가 다시금 살아나서 <교>와 <선>이 그 상극성을 극복하고 공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원효는 당시 사상계의 최고정점에 올라 왕과 대중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었으나, 스스로를 낮추어 대중 속에 들어가 호홉을 함께한 인물이다.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 원효는 계속적으로 인용되고 있고 특히 중국에서는 원효의 소를 <해동소>라부르고 중국의 화엄철학을 대성한 법장의 사상 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불교경전을 다 읽고 완전히 소화하여 당시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인도.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의 철학적 문제를 해결한 특출한 사상가였으며 실로 한국사상사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