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일러두기
1. 본서는 <장자> 3편 33장을 완역하되, 종래 위작이라고 지적되어온 <외편>, <잡편>에서 부분적으로 무잡한 구절을 골라 제외함으로써 장자 사상의 적확한 이해를 꾀했다. 2. 각 편과 장을 다시 의미에 따라 분절하여 평이한 현대문으로 역출했으며, 원문 및 해의를 달아 원의를 밝혔다. 3. 저본으로는 왕선겸의 <장자집해>를 썼고, 기타 제본을 참조했다.
해제
1. 장자의 생애와 시대 배경
장자는 장주를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장주의 저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중국에서 '자'는 '선생'이자 '선생의 말씀'을 뜻했기 때문이다. 장자는 노자와 함께 노장이라 불리기도 하고, 남화진인이라 존칭되기도 한다. 그것은 그가 노자와 함께 고대 중국의 3대 학파 중 하나로 꼽히는 도가의 중심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특히 비실천적, 도피적, 방관자적 사상가라는 혹평 아래 경원되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점, 즉 얕은 지혜와 눈앞의 욕망, 입신 출세 따위를 조소하는 그 점 때문에 숭앙받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단순히 세상을 버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생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기>에 의하면 위혜왕(기원전 370-317년 재위) 및 제선왕과 동시대인이라 한다. 또 학자에 따라서는 기원전 369-286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많은 연구가들이 <장자>에 나오는 역사상의 실존 인물과 전국 시대의 문헌을 비교함으로써 그의 생존 기간에 대한 고증 작업을 하고 있으나 앞의 것과 큰 차이는 없다. 그의 생존시기는 이른바 전국 시대 중기로서, 춘추 시대 이래 약육 강식을 거듭하여 전국 칠웅이 중원의 패권을 다투던 시대다. <장자>에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이 단편적으로 그려져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위왕은 무단히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니, 그 시체가 나라 안에 넘칠 지경이다.'(인간세)
춘추 전국 시대는 급격한 변혁기였다. 후대의 한유가 말했듯이 천하를 혼란 속에서 건지려는 사상가들 탓에 '공자의 자리는 따뜻해질 겨를이 없고, 묵자의 굴뚝은 검어질 수가 없는' 다망한 시대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상을 받은 것은 새로운 지배 계급이고, 하층민들은 다시금 조여드는 속박 속에서 노예의 노예로 전락할 뿐이었다. 혼란이 휩쓸고 간 그 황폐한 땅은 장자에게 누적된 반성과 실망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염세적인 경향을 띠게 하였던 것이다. 장자의 출생지는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 부근인 몽 땅으로서, 당시엔 송나라에 속해 있었다. 송나라는 주나라에게 멸망한 은나라 주왕의 서형, 미자를 시조로 오랜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나, 당시엔 한낱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임금 자리를 둘러싼 골육 상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물론 송나라에도 제환공의 뒤를 이어 천하의 패자가 되어보겠다는 야망을 품었던 양공(기원전 649-636년 재위) 같은 임금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국력은 점점 쇠약해져서 장자의 생존 시기에는 마침내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즉 송왕 척성은 아우인 언에게 쫓겨 망명을 했고, 왕이 된 언은 제, 초, 위와의 싸움에서 거둔 일시적 승리 탓에 걷잡을 수 없이 오만해져서 더욱더 미치광이 같은 짓을 할뿐이었다. 피를 담은 가죽 부대를 공중 높이 달아매 놓고 활을 쏘아 피가 쏟아지게 하고는, '내가 하늘을 쏘아 이겼다.'면서 사람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했다. 또한 주색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고, 이를 간하는 신하가 있으면 활로 쏘아 죽이는 짓거리를 자행했다. 그 포악 무도함 때문에 그는 '송걸왕'이란 별명까지 얻게 되고, 마침내 기원전 286년, 제, 초, 위 3국 연합군에 패하여 죽음을 당했으며, 나라는 이 3국에 의해 분할되기에 이르렀다. 장자는 이런 사실을 직접 보았거나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라도 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장자의 경력에 대해서는 <사기>에 '일찍이 몽의 칠원 지방에서 관리 노릇을 했다.'고만 간단히 전해올 뿐,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장자>의 <외편>과 <잡편>에는 그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것(지락)과 제자가 있었던 것(산목, 열어구)이 전해온다. 또 그의 가난함을 나타내주는 것으로는 감하후에게 돈을 빌리러 갔던 이야기(외물)와 다 떨어진 누더기 차림으로 위혜왕을 만나러 갔던 이야기(산목)가 있을 뿐이다. 전국 시대는 유능한 인재를 널리 필요로 하는 시대였다. 자신을 인재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제후를 찾아가 자기의 사상을 토로했고, 제후들은 이런 인재들을 다투어 맞아들여 국력을 배양하려 했다. 그러나 장자는 이런 시대적인 움직임에 대해 어디까지나 초연했다. <사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초위왕이 장자의 높은 명성을 전해듣고 그를 재상의 자리에 앉히려 했다. 초왕의 사자가 후한 폐백을 가지고 찾아오자 장자는 웃으며 말했다.
"과연 금이란 돈은 대단한 것이며, 재상이란 벼슬은 가장 높은 자리일 수 있소. 그러나 교제에 바쳐지는 소를 보시오. 여러 해 동안 맛있는 먹이를 먹고 비단으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제단으로 끌려가고 마오. 그때 가서 들판을 생각해보아도 이미 때는 늦지 않겠소? 모처럼 편히 살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지 말아주시오. 나는 자유를 속박당하느니 차라리 시궁창에서 놀고 싶소. 관리 따위는 질색이니 내멋대로 살게 내버려두시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어쨌든 간에 그가 명리를 하찮게 보았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는 제후들 밑에서 벼슬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했다. 당시 제위왕이 천하의 학자들을 불러모아 학술연구원을 만들었던 직하의 학원에도 나가지 않았을 정도였다. 민본주의 사상을 내세우며 천하의 제후들을 살인자라고 비난했던 맹자도 이 직하 학원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데 반하여 장자가 직하 학원을 찾아간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장자가 천하의 학자들과 전혀 무관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당시 직하에서 넉넉한 생활을 보장받고 있던 학자들은 종래의 실용과 실천을 목표로 한 학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꾀하려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송연, 윤문, 전병, 신도 등은 직하에서 자라난 학자들로서 뒤에 도가라 불리었는데, 이들의 사상이 장자의 그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장자와 직접 교류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혜자(혜시)뿐이며, 그의 이름은 <장자>속에 자주 나온다. 전국 시대 변론술의 발달은 마침내 일종의 논리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혜자는 그 대표적 인물로서 명가라 불리는 논리학파에 속해 있었다. 혜자는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장자>에 그가 내세운 명제가 실려 있다. 가령 '해는 한낮이 되면 곧 기울고, 만물은 생겨나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혜자의 말은,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제물론)는 장자의 말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장자>에는 장자가 혜자의 무덤 앞에서 좋은 의론 상대를 잃은 것을 탄식하는 이야기(서무귀)가 나온다. 그러나 장자는 혜자가 혜왕 밑에서 재상 노릇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 같다. <장자>속에 나오는 혜자가 장자와 의론을 교환할 때마다 항상 곤경에 몰리고 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장자는 시류에 초연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나갔다. 따라서 그의 처세 방식과 사상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2. <장자>의 구성 및 성립 과정
<장자>는 의론문과 우화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 6만 5천여 자, 33장에 이르는데, 이것은 <내편> 7장과 <외편> 15장, <잡편> 11장으로 되어 있다. <내편>의 각 장 제목은 그 주제에 따라 붙여져서 장의 제목 자체에 뜻이 담겨져 있으나 <외편>과 <잡편>은 별의미 없이 첫머리에 나오는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이런 점이 내용, 문장과 더불어 각 장의 성립 연대를 밝혀내는 근거가 되고 있다. 각 장의 세목은 다음과 같다.
<내편> 소요유, 제물론,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 <외편> 변무, 마제, 거협, 재유, 천지, 천도, 천운, 각의, 선성, 추수, 지락, 달생, 산목, 전자방, 지북유 <잡편> 경상초, 서무귀, 측양, 외물, 우언, 양왕, 도척, 설검, 어보, 열어구, 천하
지금의 <장자>는 진나라 곽상이 주석을 가하면서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4세기). 이보다 앞서 기원 1세기에 간행된 <사기>에는 '장자 10여만 글자'라고 씌어 있으므로, 전해지는 것보다 4만 자나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사기>보다 2세기 뒤에 간행된 <한서예문지>에는 52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지금은 다만 곽상이 간추려놓은 33만장만이 현존할 뿐이다.
위진 시대에는 <장자>가 널리 읽혔다. 곽상 이외에도 27장으로 된 최선의 책과 26장으로 된 향수의 책 등 여러 개의 산정본이 있었음이 <경전석문서록>이라는 책에 전해지지만 이것 역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튼 원본 <장자>의 내용이나 그 성립 연대에 대해서는 달리 상고할 길이 없다. 다른 많은 선진 시대의 고전들과 마찬가지로 원저서가 후세 사람들에 의해 첨가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다가, 다시 간추려 편집되어 오늘에 전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장자>중 장자 자신의 손으로 씌어진 부분은 어느 곳일까? 여기에 대해서 송나라의 소식(동파)을 비롯한 많은 연구가들이 여러 가지 의론을 전개했는데, <내편>중에서도 '소요유'와 '제물론'뿐일 것이라는 가정이 통설로 되어 있다. <내편>은 일관된 사상 체계와 문장의 품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논어>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외편>과 <잡편>의 장 제목이 본문 첫머리에 나온 글자를 따서 붙여진 것으로 미루어보아 <내편>이 오히려 <외편>이나 <잡편>보다 후대에 씌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또 같은 <외편>과 <잡편>도 전부가 후세 사람에 의해서 고쳐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과 일부만을 의심하는 설이 있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외편>과 <잡편>에는 분명히 잡다한 사상들이 뒤섞여 있으며, <내편>과 모순되는 것도 많다. 가령 <잡편> 중 '도척'에는 장자 본래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쾌락주의적인 요소가 농후하다는 점이 바로 그렇다. 또한 <내편>의 어떤 한 장을 풀이한 것처럼 보이는 문장도 있는데, 예를 들면 '제물론'과 '추수'의 두 장은 내용 면에서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볼 때 <외편>과 <내편>의 상당 부분은 후세 사람의 가탁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잡편>의 끝장인 '천하'는 당시의 온갖 학설을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선진의 여러 학술을 개론한 것이다. 이 부분은 한대 초기에 장자 학파에 의해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성행하던 각 학파의 진수가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어 선진 사상 연구에 중요한 문헌 자료가 되고 있다.
3. 장자의 사상
장자는 꿈 이야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눈을 돌려 꿈의 세계로 도피하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꿈 이야기 속에는 잠을 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냉철한 통찰이 담겨져 있어 인간의 지와 사물과의 관계를 추론하고 있다.
'지적인 인식은 대상을 얻은 다음에 비로소 확정되는 것이나, 대상이 되는 사물 자체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대종사)
장자는 현상계의 본질을 변화 가운데서 추구한다. 만물은 한순간도 그칠 사이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변화한다. 장자는 모든 변화의 근원인 동시에 일체의 변화를 지배하는 근본 원리를 상정하여 '도'라고 이름 붙였다. '도는.... 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마음으로 느껴 얻을 수는 있어도 감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으로, 천지 개벽에 앞서 존재했다. 귀신도 상제도 하늘도 땅도 그 연원은 모두 도이다.'(대종사) 도는 사물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다. 이 도를 가지고 사물을 보면 일체의 사물에 구별이 없어진다. 도는 원래 무한정한 것이므로 사물의 구별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는 무한정한 자연을 한정지으려 한다. 사물을 대비하고 분별하여 질서를 세우려 하는 것이 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사물을 분별해야 할까?
'모든 존재는 저것과 이것으로 구분되나, 저것 쪽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은 이것이 된다. 즉 저것이라는 개념은 이것이라는 개념과의 대비에서 비로소 성립되며, 이것이란 개념은 저것이란 개념과의 대비에서 비로소 성립된다.....'(제물론)
인간의 판단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지에 의지해 자기의 판단만이 옳다고 서로 맞서 싸운다. 이것이 지적 동물인 인간의 비극의 뿌리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를 버리지 않는 한 이 비극의 뿌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지의 한계를 자각하고 지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려면 사물의 차별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
'진인은.... 만사를 있는 그대로 내맡길 뿐, 작위하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슬퍼할 것도 없다. 자기 자신도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보고, 죽음으로 인해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다. 지에 의해 도를 해치지 않고, 인위로써 자연을 해치지 않는 생활 방식이란 바로 이것이다.'(대종사)
자연 그대로의 인간인 진인은 장자가 그린 인간의 궁극적인 이상상이다. 사물을 차별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생성 변화하는 외계의 사상에 무한으로 순응해가는 자유로운 정신이 바로 진지인 것이다. 지에 구속되어 자연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인간이 진인의 자재로운 경지에 도달하려면 자기 자신의 자연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도와 일체화한다.'는 말은 완전한 무아의 상태로 돌아가,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장자에게 자유란 인간이 자기의 속박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도를 체득함으로써 현상계의 차별과 대립의 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간, 즉 '주어진 현실 속에 살면서도 그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자재로운 정신의 소유자'만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쓸모없는 것일수록 인위와의 관계는 멀어져서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다. 인간이 그 어떤 것의 도구도 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어야만 천수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육체가 쓸모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편안한 생애를 보낼 수 있다. 하물며 재덕이 쓸모없는 인간이 천수를 제대로 누리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인간세)
<사기>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장자의 학문은 노자에 기초를 두고, 공자의 무리들을 비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사마천 당시부터 '유가를 조롱하고 인간의 노력을 부정한 사상가'라는 인상이 강하게 박혀 있었던 것 같다. 확실히 세속적인 권위나 가치관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달리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여, 공자가 죽은 뒤 형식화해버린 유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그러나 장자가 유가의 시조인 공자 그 개인을 부정한 것일까? 공자는 <장자>속에 가장 빈번히 오르내리는 인물이지만 정면으로 통렬한 비판을 받은 것은 겨우 몇 군데 뿐으로, 대부분의 경우 '아직 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문장 가운데는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명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인간으로서의 노력을 버리지 못하는 공자에 대한 깊은 공감이 엿보인다.
장자를 유가 출신으로 보는 견해는 바로 이런 점에서 연유한다. 장자의 사상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제물론'에 양행이라는 말이 있다. 일체의 모순과 대립이 모순한 채 긍정되고 대립된 채 의존한다는 무한히 자유로운 경지를 의미하는 말인데, <장자>는 바로 이를 바탕으로 씌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장자>에는 견실한 사변과 분방한 공상, 신중한 몸의 보호와 함께 몸을 내던지는 자기적인 도약 등 온갖 대립적인 요소가 한자의 오묘한 뉘앙스 속에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이처럼 독특하고도 양의적인 필체가 <장자>의 구성에 시적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한 이래 도가의 모든 학파들은 한 때 세력을 잃고 회남왕 유안 밑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에 그들이 지은 <회남자>란 책은 내용 또한 <장자>와 흡사하다. <장자>가 일반적으로 널리 읽히게 된 것은 위진 시대(3세기)에 들어와서부터였고, 노자와 장자를 합쳐 '노장'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후로 <장자>는 유가의 경전이 공식적인 학문으로 인정받는 이면에서 많은 독자들을 얻게 되었다. <장자>는 여러 방향으로 이미지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문장상의 특징 이외에도 다방면에 걸쳐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을 정치와 종교, 문학 예술 측면으로 나누어 조명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정치
평자에 따라서는 장자 사상을 단순하게 약자를 위한 철학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현세계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 약자가 <장자>를 통하여 고민과 번뇌로부터 해방되어 정신적인 위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 일반 대중의 눈을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변혁에 대한 의욕을 상실케 하는 마약이라고 비난하며, 장자에게 봉사하는 것을 노예 근성이라고 규정해버리기도 한다. 양쪽이 다 <장자>가 미치는 영향을 잘 지적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장자는 약자에게 구원이 되는 동시에, 그 정신을 잠들게 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가 약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세상의 강자인 지배 계급들에게까지 골고루 읽혀졌다는 편이 오히려 더 정확하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치 사회를 지배해온 표면상의 이념은 유교의 도덕론과 명분론이었다. 그리고 그 완고한 멍에와 굴레는 지배층에게도 숨쉴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이 답답함을 <장자>를 통해 해소했고, 잠시나마 우주와 일체가 된 경지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노장을 대표로 하는 도가 사상은 유가 사상과 표리 관계를 맺으면서, 그 내부로부터 봉건적인 지배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해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이 사상은 하나의 가치가 되어 반역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가령 근대 초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노장'이 말하는 무위 자연의 다스림 속에서 이상적인 정치 형태를 찾았던 것이다.
* 종교
한대에 인도에서 전래한 불교는 장자의 인식론을 매개로 하여 순식간에 중국인의 정신 세계를 잠식해 들어갔다. 특히 중국에서 번성한 선종은 장자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장자의 사상은 또 후대 도교에도 이용되었다. 후대 도교란 한위 육조 시대에 재래의 신선 사상이 세속적인 이익을 염원하는 토속 신앙과 결합해서 생겨난 것이므로 장자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장자>에서 볼 수 있는 천수를 온전히 하겠다는 염원이며, 즐겨 신선을 등장시키는 점 등이 이용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당대에는 <장자>를 <남화진경>이라 하여 도교의 경전에 포함시켰으며, 장자 역시 남화진인으로 불리면서 열선으로 추앙받기에까지 이르렀다.
* 문학 예술
<장자>는 그 문장이 오묘하고 발상이 자유분방하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문학서이다. 예부터 중국의 문장가들은 대부분 장자를 통해 문장력을 길러왔으니, 도연명과 이백, 소식 등 그 이름을 들자면 한이 없을 정도다. 또 문학이 정치나 도덕과 분리되어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을 차지한다는 근대적인 문학관을 확립시키는 데에도 장자의 '무용의 용' 사상은 커다란 역할을 했다. 장자의 사상 중 가장 뛰어나고 후세에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은 결국 내적인 정신의 자유를 구가하며 유유 자적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소요유>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한마디로 장자는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고, 사생을 초월하여 절대 무한의 경지에서 소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인생은 모두 천명이라는 숙명론을 취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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