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 知此兩者亦稽式, 常知稽式, 是謂元德, 元德深矣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고지선위도자, 비이명민, 장이우지, 민지난치, 이기지다, 고이지치국, 국지적, 불이지치국, 국지복, 지차양자역계식, 상지계식, 시위원덕, 원덕심의원의, 여물반의, 연후내지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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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다섯째 장
직역
예로부터 도를 잘 행하는 자는 그것으로 백성을 밝게 하지 않고, 그들을 어리석게 하였다.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것은 그들이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나라를 도적이오, 지혜로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복이다. 이 두가지를 아는 것이 또한 둘도 없는 형식이니, 항상 이 형식을 아는 것을 가리켜 그윽한 덕이라고 한다. 그윽한 덕이여 깊도다. 멀도다. 사물과 더불어 되 돌아간다. 그러한 이후에 큰 따름에 이르게 된다.
해석
밝다는 것은 똑똑하게 한다는 뜻이다. 백성들이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나라를 다스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현대의 독재정권들은 3S(스포츠, 스크린, 섹스)로 사람들을 어리석에 만들었다. 그렇다면 노자는 이런 우민화 정책을 군주에게 권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우민화정책이 아니다. 정치를 하는데 어려움은 무엇인가. 바로 서로의 이익을 조절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과 그 기득권을 향해서 달려드는 사람들을 조정하는 일이다. 이제는 댐하나, 다리하나, 도로도 정부가 마음대로 놓지 못한다. 왜인가. 군사정권이 아니라 문민정부이어서 그런가. 그런것도 있지만 이제는 양보할 줄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것을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서 밝은 대낮에 커다란 후랫쉬를 들고 설치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공익을 위해서 무얼하자고 한다면 사람들은 찬성은 한다. 단. 단 자신의 것에는 손을 대서는 안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바대로 한뎌면 상관이 없다. 모두들 그렇게 말한다. 공익을 위해서 해도 좋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에게 조금의 손해라도 와서는 안된다. 그것이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어도 안된다. 그래서 강 상류 지방의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서 마을에 공장을 유치하려고 하면 하류 지방의 사람들, 의회는 벌떼 같이 일어난다. 그러나 상류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하류지방의 자금을 끌어다 쓰려고 하면 얼굴을 붉히며 따진다.
"왜 우리돈을 다른 곳에 쏟아 붙는가. 상류 지방의 주민들은 그들이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편하고 이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은 메스미디어가 너무나 잘 발달이 되어 있다. 이런 때에 정부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정책을 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약간의 손해를 보는 것이 후일 큰 얻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는 꿈인가 보다. 한 두명의 천재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곤 한다고 말한다. 이익을 쫒는 방향일 때는 그렇다. 그러나 대도를 따르는 길일때는……. 사물과 함께 되돌아가는 이 길이야 말로 큰 따름이다. 바로 존재계를 따르는 것이다. 근원에의 회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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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그 옛날 무위자연의 도를 잘 행한 사람은 백성을 밝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그것으로 그들을 어리석고 순박하게 했다. 백성들을 제대로 잘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지혜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해치는 적이요,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의 복이다. 이 두 가지는 정치에 있어서 영구 불변의 법칙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이와 같은 법칙을 아는 것을 그윽하고 불가사의한 덕이라고 한다. 그윽하고 불가사의한 덕은 깊고도 멀다. 그것을 지닌 사람을 만물과 더불어 도에 복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완전무결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주
명민: 백성을 밝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든다는 뜻. 여기서 밝음이란 세속적인 간지에 의해 교활하게 된 것을 말함. 우지: 어리석게 한다는 뜻, 본문에서는 순수하고 소박한 상태에 있게 한다는 의미임. 지다: 지혜가 많다는 뜻임, 본문에서는 교지와 세속에 닳고닳은 약삭빠름을 말하고 있음. 계식: 법칙, 법식, 규정을 뜻함. 해식으로 표기된 판본도 있음. 현덕: 그윽하고 불가사의한 덕, 신비하고 오묘한 덕. 여물반의: 만물과 더불어 순수한 도에 복귀한다는 뜻임, 반은 반과 같음. 연후내지대순: 그런 뒤라야 완전무결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해
옛날에 도를 체득한 이는 지혜로써 정치를 하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다스리면 백성들도 순박함을 잃어버리고 교활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다스리는 것은 나라에 해로움만 끼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무위 무사의 정치는 백성들을 어리석고 순박하게 만들어 나라를 복되게 한다. 지혜란 인간의 정신적, 물리적 욕망을 자극하게 된다. 그것의 충족을 위해서는 서로 싸우고, 속이고 빼앗는 등 인간은 구제 불능의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이와 같이 혼란에서 구제 받고자 한다면 태고의 순박함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순박함이야말로 참되고 순수한 도의 본모습인 것이다. 도의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덕을 알고 만물과 더불어 참된 근원인 도에 복귀한다면, 그것이 완전무결한 도의 작용에 순응하는 길이다. 이 장은 자고로 노자가 우민 정치를 부르짖는 대목이라 하여 학자들간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문명사회가 낳을 것으로 인간의 갖가지 욕망을 자극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인간은 서로 싸우고 빼앗고 죽이는 등 니전투구의 혼란상을 조성한다. 그와 같은 환경에서는 평화와 행복이란 찾아볼 수 없고 인간은 서로 구제 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노자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부정적 시각으로 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원시인도 가지고 있는 소박한 일차적 욕망(먹고, 마시고, 잠자는 등)은 그도 긍정하고 있었다. 노자가 염려하는 것은 문명사회가 제공하는 지혜와 지식에 의한 이차적 욕망이었다. 즉 권력에의 의지, 물욕, 명예욕, 허영심 등은 병든 문명사회가 만들어 낸 정신적인 공해로 보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인간의 자기 구제는 불가능하다고 그는 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충족하기 위하여 인간은 서로 속이고, 빼앗고, 모함하며, 국가간에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이어지는 등 문명사회의 지식과 지혜에 의한 병폐는 심각한 것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 현과 우도 문명이 일어난 후 사회생활이 다원화, 분업화되면서 생겨난 것이므로 그와 같은 겉치레가 없는 순수 태고의 순박한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지론이다. 그의 이와 같은 지론은 후세 법가 계열의 학자들에 의하여 오용된 감이 있다. 즉 진의 상앙, 한의 한비, 진의 이사 등의 냉혹한 인간 조종술과 우민 정책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권모술수에 의한 잔혹한 정책은 노자의 참된 뜻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권모술수의 이론적 배경을 노자에서 구하고 있으나 그것은 그의 진의를 왜곡시킨 것이며 아이러니컬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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