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常.
천하유시, 이위천하모, 기득기모, 복지기자, 기지기자, 복수기모, 몰신불태, 새기태, 폐기문, 종신불근, 개기태, 제기사, 종신불구, 견소왈명, 수유왈강, 용기광, 복귀기명, 무유신앙, 시위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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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두째 장
직역
하늘 아래 시작이 있으니 이것을 천하의 어미로 삼으라. 이미 그 어미를 얻었으면 그 자식을 알아야 한다. 이미 그 자식을 알았거든 다시 그 어미를 지켜야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다.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 몸이 끝날때 까지 다함이 없을 것이다. 그 구멍을 열고, 그 일들에 건너다니면, 몸이 끝나도록 구하지 못할 것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고하고, 부드러운 것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그 빛을 사용하여 그 밝음으로 다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는다. 이것이 항상됨을 익히는 것이다.
해석
도에서 하나가 나온 것이 하늘 아래의 시작이다. 이것은 근원을 가리킨다.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이것에 머무르면 안된다. 이 상태는 갓 태어난 아이의 의식상태이다. 이상태에서는 인간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만물을 구분할 줄 모르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겠는가. 그래서 어미의 자식을 알라는 것이다. 이제 만물은 구분이 된다. 개물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아는 것이다. 지식이다. 만물은 지식으로 다가온다. 노자는 지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식은 필요하다. 나무를 나무로 보지 못하고 강물을 강물로 보지 못한다면 그는 며칠 못가서 죽으리라. 자 이제 지식을 알았다. 우리가 시식을 아는 것은 도의 자식을 알고 있는 상태이다. 만물을 구분할줄 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그 어미를 지킨다. 만물이 자신만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차별화 시키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평등하다. 사물의 특수성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모든 것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한 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우치는 것이 그 어미를 지키는 것이다. 그럼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으리라.
구멍은 무엇이고, 문은 무엇인가. 바로 밖과 통하는 통로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아홉개의 구멍과 감각기관 즉 몸이다. 이것을 닫아라. 이제 그는 만물을 구분하게 되었다. 그럼 어미를 지켜라. 그 어미를 지키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을 닫고 구멍을 막고 내면으로 길을 떠나라는 것이다. 내면으로 떠나는 길은 설명하는 것보다 스스로 해보는 것이 더 낳으리라 본다. 그 길은 스스로 가는 것이다.
문을 열고, 구멍을 열면 이제 그는 밖의 사물에 사건에 뛰어다닌다. 그는 많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은 아들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신토록 그 어미를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씨앗은 작다. 그러나 하나의 씨앗은 어미다. 그 어미를 보는 것을 밝음이라고한다. 부드러움은 새싹이 자라나는 모양이다. 이 부드러움을 지켜나가면 거대하게 클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부드러움을 지켜라. 그럼 누구보다도 강해진다. 그 빛을 이용하여 그 어미를 볼 수 있는 데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게 된다. 빛이란 인간의 내면의 눈이다. 쉽게 말하면 통찰력이라고 할 수 도 있다. 나무를 보고 작은 씨았까지 알수 있는 눈으로 그 어미를 보고 그 근원을 보아 사람, 사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차별성을 떨처 버린다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는다. 근원은 변함이 없다. 아니 변화환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자신의 관념이다. 이 고정되어 있는 자신의 관념을 부수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살아숨쉬는 도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이 항상됨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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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천하에는 시초가 있다. 그것이 천하의 어머니이다. 이미 어머니를 알았으니, 다시 그 아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 아들을 알고 다시 그 어머니인 도를 지키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욕망이 일어나는 구멍을 막고 물욕이 들어오는 문을 닫으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수고롭지 않을 것이요, 욕망의 구멍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작은 것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밝은 것이요, 부드럽고 약한 것을 잘 지키는 것이 강한 것이다. 그 겉에 드러나지 않은 빛으로 밝음의 본바탕인 도에 되돌아가게 한다면 자신의 몸에 재난을 초래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을 도의 영원함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주
시: 처음, 시초, 태초, 이것은 도를 가리킨 말임. 모: 어미, 근본, 근원, 이것도 도를 지칭한 말임. 자: 아들, 자식, 도를 모체로 하여 생성된 우주의 삼라만상. 색기태: 태는 구멍을 뜻함, 모든 욕망이 생기는 내부의 구멍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뜻임. 폐기문: 외부에서 들어오는 유혹과 물욕의 문을 닫는다는 뜻임. 근: 노고, 수고로움. 광: 빛, 광선, 여기서는 지혜를 상징한 말임. 복귀기명: 그 밝음의 본바탕인 도에 되돌아 간다는 뜻임. 여기서 밝음은 지혜와 도를 상징하고 있음. 습상: 습은 습과 뜻이 통하며, 습상은 도의 영원함을 배운다는 뜻이다.
해
도는 천하만물의 시초요 어머니이다. 먼저 도를 알면 천하만물의 원리를 아는 것이 된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사물의 지엽적인 것과 피상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며, 도에 어긋나는 무리한 행위를 하여 몸을 망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모든 욕망이 일어나는 자기 내부의 구멍을 막아 버리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물욕과 정욕의 문을 닫아 버린다면 마음의 안정을 얻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다. 작은 것을 잘 보는 것을 밝음이라고 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을 강함이라고 한다. 도는 스스로 강한 체하지도 무리한 힘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부드럽고 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천하의 그 무엇도 그것을 지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도는 진실로 강한 것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슬기로움으로 만물의 본바탕인 도에 되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의 몸에 재앙을 끼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도는 만물의 근원적 지혜요, 영구 불변의 실재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이와 같은 도의 근원적 지혜와 영구 불변성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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