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풀이와 죽음 그리고 배려 - 윤영환
한은 품고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전쟁처럼 감당하기 힘든 경우나 큰 어려움을 만나지 않는다면 한은 잘 맺히지 않는다. 현재 러시아가 침공한 우크라이나 국민은 집은 고사하고 가족을 잃어 한 맺힌 이가 수두룩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에 민감한 이유는 수천 년을 전쟁과 더불어 살아서다. 한은 기쁘거나 희망찬 환경에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어둠을 좋아하며 우울하거나 부정적인 환경에 머물다 알맞은 보금자리를 가진 이가 나타나면 한은 곧바로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 뒤론 되도록 나오려 하지 않고 엉킨 실타래처럼 막막하게 숨는다. 잘 풀리지도 않을뿐더러 풀려 하면 더 비틀어 버린다. 그렇게 한은 참으로 잔인하도록 문신처럼 박힌다.
이 한을 풀어보려 마땅한 사람을 찾아 이야기하거나 종교를 찾기도 하지만 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국 풀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입으로 풀었다고 하지만 그 속내의 진정성은 검증이 어렵다. 그런데 가끔 시골에서 평생 살아오신 어르신을 보면 한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데 이런 경우는 대부분 풀렸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는 먹어감에 따라 어느 정도 한을 풀어주는 묘한 장점이 있는데 죽음에 가까운 나이가 될수록 효과가 있다. 한이 아니라면 세월이 가져다주는 나이는 대부분의 억하심정은 다 풀어낸다. 그러나 한을 완벽히 풀어내는 힘은 없다. 얼추 한을 잊고 사는 수준에 머물게 하며 우리는 다 풀어낸 것으로 착각할 뿐이다.
한은 잊히는 일에는 맺히지 않으며 잊히지 않는 사건에 붙는데, 한번 찾아들면 도움이 되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 눈물이 맺히거나 화가 치밀도록 만든다. 그게 싫어 사람은 이 한을 풀기 위해 온갖 방법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작은 문제는 누구라도 만나 이야기하며 풀어내지만, 여간해서 한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스스로 풀어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절대 남이 풀지 못하며 한이 풀렸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한을 품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종종 듣는 대사가 있는데,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이다. 잠시 후 죽는데 남은 한이 있을 리가 있나. 곧 죽음만이 한을 풀어내며 그렇게 지독한 것이 한이다.
한과는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이다. 한은 외부로부터 내게로 와서 맺히지만, 정은 내가 밖으로 준다. 따라서 내 마음속에 있던 정을 잘 받아 가진 사람에게는 동질감을 느끼며 친절하고 정성을 다하는 편이다. 그래서 한 맺힌 사람보다 정든 사람에게 호감이 더 가며 같아지려 노력하고 뭔가를 자꾸 친절히 안내한다. 정떨어진 사람이 싫은 건 내가 준 정을 다시 가져왔기 때문이고 다시 주기 싫어서다. 정과 한은 아무런 관계도 없으나 둘 다 사람을 이끄는 힘이 강하다. 다른 점은 정은 말을 많이 하게 되고 한은 입 다물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에 관해 사람들이 말을 아끼는 이유는 말해봐야 상대도 내 한의 실마리를 못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정에는 이끌리지만, 한에 이끌리지 않는 이유는 한은 나만 가지고 있고 내 한을 남은 가지고 있지 않아 내가 어디를 가도 나만 갖고 있어서다. 따라서 이끌지도 않고 이끌릴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을 어떻게 외면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죽어야 할 일은 아니다. 바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된다. 나만 가져야 하는 자연스러운 일을 거부하니 나만 괴롭다. 세상 모든 것은 자연스러움을 거부할 때 역효과가 일어난다. 지구도 인간이 자연을 거부하고 파괴해대니 망해가고 있지 않은가. 내게만 어떤 사건이 벌어져 한 맺힌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자리가 생기면 가슴으로 들어와 맺히려 애쓰는 자연스러운 것이 한이다. 그걸 거부하고 벗어나려고 하면 되레 역효과를 맞이한다.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위해 다스림이 필요하고 토닥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이 내 마음을 흔들려 하면 잘 다루어 재울 필요가 있다. 다스림의 방법 중 추천하고자 하는 것이 ‘문사철’이다. 바로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이다. 내용을 보면 문학은 본인이 어떻게 한을 풀어내는지, 역사는 어떻게 한을 다스렸는지, 철학은 한과 같이 사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한을 겪어본 사람들의 경험담이고 나와는 다르지만 나름 자신의 한을 내놓는 좋은 지침이 된다. 잘 다스리면 가슴에서 떠오르지 않으며 곤히 지낸다.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는 절망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마지막 처방전인 죽음이 와야 끝난다. 여한이 없도록 인생을 사는 일이 그래서 힘들다.
방송이나 영화를 보면 한을 품은 귀신이 나오기도 하는데 풀어내지 않고 죽음을 떠안았기 때문이다. 누명이나 교통사고 등 어처구니없이 죽었기에 한을 품고 돌아다닌다는 설정이다. 그래서 무당이나 종교인을 동원해서라도 이 영혼이 가지고 있는 한을 산자가 풀어주려 애를 쓰는 것이다. 한을 품고 돌아가신 부모가 있는 경우 그 자식이 부모의 한을 풀어드리려 애쓰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한은 그렇게 대물림도 된다. 살아있는 사람도 죽은 이의 한을 풀어주려 애쓰는데 산자가 한을 가지면 얼마나 고통이겠나. 삶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느니 다스리라는 것이다. 잘 다스리며 산다면 문제없지만 그렇지 못하면 큰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살인까지 가는 일도 있다. 화병으로 세상을 등지는 사람은 대부분 다스리지 못한 결과로 그리된 것이다.
가장 빠른 방법은 한을 심어준 사건 당사자를 만나는 방법인데 의외로 단시간에 한이 사라진다. 문제는 못 만나니 문제가 된다. 대부분 현세에 없거나 연락 두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라든가 유사한 책들이 봇물이 터지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이 겪은 일이고 그 책 속에는 자신의 한이 들어있고 자신의 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적혀 있다. 부적이든 기도든 모든 걸 동원해 우리는 어쨌든 한을 다스리며 살아간다. 신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수도한다는 수도자는 한이 없다고 보나. 모든 인간은 말은 없어도 고유의 사연을 가지고 있고 한이 되는 사연은 스스로 풀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를 보며 이들의 한을 걱정했다. 슬픈 곳엔 항상 한이 서려 있고 억울하게 떠난 사람 한을 풀어주려 애를 쓰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일이지 한을 품고 떠난 사람을 위로할 수는 없다. 늘 한이 맺히지 않도록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야 하고 배려가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한다.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면 외부로부터 오는 한은 차단 된다. 정약용 선생의 말이 있다. 혀 밑에는 도끼가 한 자루 있는데 잘 놀리면 득이 되고 잘못 놀리면 서로를 해한다고 쓰여있다. 무심코 뱉어내는 말이지만 듣는 이는 심각한 경우를 본다.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알지도 못한다면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임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한은 거기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머니의 한은 나를 대학에 보낼 형편이 못 되어 못 보낸 것이 한이라 말씀하셨다. 심지어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이 이야기를 하셨다. 치매에 걸리셔 내가 뒤늦게 대학을 다닌 사실을 잊으신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말하지 못하는 사연이 있고 한이 되어 남는 사연도 있다. 이것을 풀지 못하면 죽음이 올 때까지 가슴에 멍울이 지는 것이다. 종착지는 죽음이다. 그전에 최대한 이 실타래를 푸는 일이 도리다. 그래야 편히 가는 것이다. 곧 한과 죽음은 하나임을 우리는 알고 살아야 배려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배려만이 한 맺힘을 막는 유일한 길이다. 질병도 예방이 중요하듯 한이 오는 일도 미리 막는 일이 우리가 살며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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