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을 뚫다
이사를 가게 되면 그 동네에서 자주 갈 구멍가게와 선술집을 뚫어야 한다. 나처럼 도서관이나 성당 말고는 외출이 없는 사람은 매우 중요한 일다. 특히 술집의 경우는 분위기가 편해야 하며, 혼자 앉아 한잔해도 눈치 보이지 않아야하며, 외상이 돼야 한다. 삼겹살집이 나의 레이더에 걸렸다. 그 간판이 마음에 든다. “이 정돈(豚) 돼야지”다. 기가 막힌 문장이다. 삼겹살이 이정도 되는지 가게 수준이 이 정도는 돼야하는지 각종 생각이 들지만 글월대로 돼지고기가 이 정도는 돼야지다. 싸다. 며칠 다녔다. 나만 외상이 된다. 고로 뚫었다 말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돼지 돈(豚)과 비슷한 한자가 집 가(家)다. 지붕아래 돼지(가축)를 키우는 것이다. 우리민족도 마찬가지고 다른 민족도 만찬가지다. 지금도 이 풍습은 강원도나 우리 시골에 남아있다. 파키스탄, 이라크 변두리엔 지금도 수천 년간 가축을 집안에 키우고 있다. 예수의 탄생은 희한한 것이 아니다. 가장 따뜻한 곳이 집안에선 가축이 길러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 겨울 외양간에 들어가 소똥을 치우던 기억이 있는 데 얼마나 따뜻한지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소의 몸에서 나오는 체온이 실내에 돌기에 얼음 따위는 얼지도 않는다. 가끔 뒷발질 하면 소의 엉덩이를 삽의 평평한 면으로 때리며 “주인도 몰라보는 놈!”하고 윽박지르던 생각도 난다.
지금 내가 뭔 소리 하는 겨?
그건 그렇고...
한잔 하고 집으로 왔는데 골목-골목이라 하기엔 매우 넓다.-이 쩌렁쩌렁하다. 이사 와서 최초로 듣는 어른들의 목소리다. 워낙 동네가 고요해서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린다. 그런데 들어보니 남자가 여자를 패고 있다. 어린 딸은 매달리며 엄마를 때리지 말라고 운다. 그런데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가는 곳이 내가 사는 건물이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난리가 났다. 각종 비명소리와 목이 찢어져라 우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소름을 돋게 한다. 옛날 같으면 벌써 내려가 말렸을 것이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나는 늘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썼다. 더 이상 이웃에 대해 참견하고 싶지 않다. 목격자 조서 쓰는 데만 두 시간이 넘어간다. 우리나라의 헌법은 이웃을 돕는 자를 심각하게 괴롭힌다. 오늘 뉴스를 봐도 헌법을 손대는 정치인들이 왜 병신소리를 듣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안타까운 건 저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이다. 그래서 아직도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용서 못하고 있음이다. 이 글을 적고 있다 보니 아래층이 잠잠해 졌다. 오늘밤이라도 저 가정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한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단골이 생겨 좋다. “아무 때나 와서 드세요.”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적적하면 아랫동네로 내려가 TV도 보며 한잔 마시고 올라올 생각이다. 처음에 갔을 때는 경계의 눈초리들이 심했다. 내가 워낙 키가 크고 덩치가 커서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묶어 등 위에서 찰랑거리니 누가 나를 정상인으로 보겠는가. 아마도 그들의 보편적 인식은 내가 좀 깼다고 본다. 사람은 다 똑같다고. 외모는 중요하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외상이라는 특혜가 주어진 것이 아닌가. 내가 이 낯선 곳에 와서 고마워 할 사람이 한 분 더 있는데 그 분에 대해 따로 쓸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이 글 질을 좀 그만 두려고 하는데 좀처럼 멈추질 않는다. 종이 상자에 처박아 둔 원고에 자꾸 눈길이 간다. 글 쓰지 말자고 늘 다짐한다. 쓸데없는 다짐인가? 지금도 가끔 버스정류장에 나가면 시를 쓴다. 그 정류장의 느낌을 적는다. 병이다. 접자. 그만 쓰자고 오늘도 다짐한다. 구했다던 직장은 굿바이 됐다. 또 알아보자. 아름다운 일자리로 쌀부터 사자.
들리는 샹송(chanson)들이 사람 녹인다.
오늘문득 : 2010.04.28 23:03 윤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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