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외로움
어려서부터 외로웠다. 1년에 이사를 두세 번씩 다녀 친구를 사귈만하면 그 동네를 떠나야 했고 형제들은 터울이 많아 대화가 힘들었다. 누나와는 아홉 살, 형과는 일곱 살 터울이다. 누나는 틈만 나면 책을 무더기로 사와 무섭게 가르쳤다. 군대 저리가라였다. 배워야 한다고, 무식하면 사회에서 대접도 못 받는다고 정말 무섭게 나를 가르쳤다. 이사 갈 때면 책이 이삿짐의 절반이었다. 기댈 곳 없던 나는 오로지 어머니만 따라다녔고 어머니는 나를 안쓰러워했다. 그럭저럭 살다 마포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학창 시절 모두를 보냈다. 친구들이 많았고 임명장이란 임명장은 다 받았다. 공부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미소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싱가포르로 돈 벌러 가고 형은 주먹의 세계로 가고 누나는 가난이 지긋지긋하다면서 10만 원 수표 뒤에 편지를 써놓고 가출해 버렸다. 나는 강해져야 했다. 강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어머니와 나뿐인 집에서 어머니는 미소를 잃었지만, 나의 성적표는 어머니를 웃게 했다. 나는 오로지 어머니 때문에 공부하게 된 셈이다. 뭐든지 나 스스로 결정해야 했고 가정을 이끌어야 했다. 아버지는 돈 버는 데 실패했고 나는 짐이 되기 싫어 해군에 간부로 입대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고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전역해서 어머니를 돕고 싶어도 군에 몸이 소속되어 돕지 못했다. 중사로 진급했어도 알리지 않았다. 의무 기한이 차 직업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곧바로 전역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걱정됐다.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였다. 수십 개의 직업을 전전했다.
아버지는 60세에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누나는 선암으로 50도 안 되어 하늘로 가고 뒤이어 아내도 아파트 장만 일주일 만에, 그 젊은 나이에 림프암으로 하늘로 떠났다. 치매를 앓던 어머니는 누나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녔고 끝내 홀로 침대에서 저승으로 갈 때 신을 고무신을 머리맡에 두고 숨을 거뒀다. 수면 유도제 봉지들을 보는 순간 자살임을 직감했다. 올 초에 부천에 있는 한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형이 길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시신을 수습하겠냐는 전화였다. 그것으로 나의 모든 가족은 내 곁을 떠났다. 자식도 없고 친척도 없는 신세가 됐다.
술로 지냈고 그 여파로 중병에 걸렸다. 지금도 술을 마신다. 잠을 자기 위해서, 그리고 외로우니까. 모든 인간은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 세상과 이별할 때도 홀로 간다. 같이 가주는 이는 없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사람들은 극복이란 말을 한다. 외로움도 극복하고, 고독도 극복하고, 슬픔도 극복하고…. 신도 만들어 죽으면 천국 간다고도 한다. 뭘 그리 극복하는가.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내가 지금 후회하는 건 나를 위해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아내를 위해 친구를 위해 살았다. 왜 나를 위해 살지 않았나.
유아독존이란 말은 고집불통을 이야기하는 단어가 아니다. 세상에 나를 대신해 나를 살아주는 이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홀로 존재하며 하루하루를 불살라 버리는 지속성에 놓여있다. 태울 것이 없다면 천천히 가는 것이다. 노인들의 고독사는 배고파서 벌어지지 않는다. 외로워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움이다. 살며 겪는 모든 일은 내 몫이다.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안고 가야 한다. 남을 쳐다보지 말 일이다. 우리나라 이웃들처럼 정이 많은 민족도 없다. 서로 돕고 위안을 주지만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나는 오늘 매우 외롭다. 그 외로움은 아무도 모른다. 남 일이니까. 내 일이 아니잖나. 어떠한 선택도 내 마음이 결정한다. 많은 장례식을 내 손으로 치렀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으니까. 그게 현실이다. 그것은 인류의 반복이고 육신의 한계다. 당연히 거쳐야 하지만 행복하게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다. 외로움 속에 묻혀 가는가, 행복하게 웃으며 가는가는 유아독존인 나의 마음에 달려있다. 슬퍼한다고 해서 외로움은 떠나지 않는다. 늘 맴돌며 나를 쥐어짠다. 외로움을 비웃는 나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것이 삶의 의미다.
2024.12.10. 13:18 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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