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에 관한 잠시의 생각 - 윤영환
“젊다고 몸을 함부로 놀린 게 다치는 겨.”
이 말은 농사를 짓다가 다친 아들에게 연고를 발라주며 99세 노인이 74세 아들에게 하는 말이다. 67세 어르신이 형들이 ‘막내 심부름’ 시켜대서 짜증이나 경로당에 안 간다고 한다. 이게 웃을 일 같지만 남 일이 아니다. 나도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화에 나는 대비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군대에 있거나 사회초년생들은 150세를 예상한다. 지금의 노인은 먹고살기 바빴고 자식들 굶기는 문제나 교육에 일생을 들어 바쳤다. 일감을 주면 일은 잘하는데 노는 일을 못 한다. 지금도 노는 데 어색하니 짜장면을 참아가며 손자 용돈을 준비한다.
자동차는 기름을 넣고 달리다가 떨어지면 멈춰 선다. 인간도 주어진 에너지를 다 쓰면 멈춘다. 그러나 기계가 농사를 짓고, 드론이 사람을 대신해 농약을 뿌려대고, IT 기술이 발전하면서 에너지가 남아돌며 우린 늙는다. 평균수명은 의료기술의 발달도 있지만 이러한 에너지 고갈이 적어지면서 늘어난다. 게다가 죽을만하면 병원에서 살려낸다. 2~30년 키워 놓고 80년을 자식한테 기대는 삶도 평탄하지 않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말을 명절 때마다 절받으며 듣는다. 이젠 오래 사는 일이 민폐다. 자식보다 더 사는 노인도 있다.
그렇다면 내 남은 인생은 누가 책임지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바로 자신이다. 노후를 설계하는 방식이 연금도 있고 보험도 있고 다양하다. 그럴 능력이 있는가? 다년간 노인 자살률이 세계 1위를 기록하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다. 이 외로움을 누군가는 해결해 준다는 믿음은 버리길 바란다. 주변 친구도 갈 날만 기다리지, 별 도움도 안 되고 친구조차 없는 사람은 그냥 선택하는 것이다. 사는 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고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는 무너짐 때문이다. 내 부모도 이 나이에 갔는데 내가 무슨 죄로 이 나이를 넘기고 사는가 하는 한숨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든다.
예전엔 60세만 넘어도 백과사전이 걸어 다닌다고 말했다. 그만큼 오래 살았고 배울 점이 많아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노인은 다르며 살아온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내가 가끔 찾는 94세 어르신이 있다. 안부도 여쭙고 조언을 듣기 위해서다. 잔소리가 별로 없고 단답형이다. 늘 그분을 뵈며 ‘나도 저렇게 늙었으면’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는 분이다. 실로 내공이 대단하신 분이다. 나에게 젊은이가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나이 들수록 시대에 적응하고 깨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변화를 추구해야만 노년이 행복하다. 젊은이로 돌아가 도전하고 진보적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뭔가를 해주리라 믿는 아둔함은 버려야 하는 시대다. 65세 노령연금이 67세 내지는 70세로 연장하는 법안이 오고 간다. 죽음은 선택이지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동물처럼 가죽만 남길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문학을 추천한다. 문학에 골몰하고 뇌를 회전하는 순간 깨어난다. 고스톱을 치면 치매를 예방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새로운 일을 제시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일이 노년의 행복이다. 나도 살맛 나고 후대에 표본이 된다. ‘표본이 된들 무엇하랴!’라고 생각이 들면 끝난 삶이다. 독서가 중요하고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나를 표현하는 일의 근본은 글이다. 나의 가치는 나를 표현하는 것에 달려있고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욕을 먹어도 나를 수행하며 표현하고 늙는 것이 바로 자신이다. 그도 희망이 없으면 가는 게 도리다. 쓰는 일이 어렵나? 어려우면 동네도서관에 가보자. 어렵지 않다는 걸 바로 안다. 쓰는 일은 에너지를 가장 덜 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동 아닌가?
첫머리에 말한 99세 할머니의 자랑거리는 일기다. 뭔가를 기억해내고 쓴다. 내가 살아 있음을 매일 글로 표현한다. 별다른 의미가 있지 않지만, 기록문화로 값어치가 있다. 모 작가는 성경을 읽고 모 작가는 불경을 읽으며 아이디어를 찾기도 한다. 이 어르신의 일기는 ‘아이디어 집’ 아닌가? 노인이 존경받아야 마땅한 시대에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살아내고 있지 않음에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나머지 시대를 설계하지 않는다. 젊은이가 찾아와 조언을 구하지도 않고 대화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하자. “그건 고민도 아니야. 나 때는 말이야...”하고 시작하는 경험이 고정화된 의식구조 때문이다. 마치 훈장이나 되는 듯 고생은 혼자 다 한 듯 지금 이 시대에 고민하는 젊은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기억은 몇십 년 전에 멈추어 오늘을 적용하니 말이 통하겠나? 나머지 시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사는 일이 숙명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60세가 넘으면 인생을 되돌아보고 정리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100세가 기본이다. 지금 편안하면 그만일까? 노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역사고 이 시대 산 증인이다. 문인 중에 치매 걸려 벽에 똥칠하는 사람 봤나? 내가 늙었다고 판단 되는 순간은 늦은 일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그 많은 연륜에 뭘 주저하나. 바로 표현하라. 그것이 다시 사는 인생이다. 그 시작점이 예술이며 예술의 원천은 문학이다. 임종실을 알아보기 전에 시경을 보라. 내 생각에 하찮은 시라도 그것은 그 시대 그 문학이다. 남기자. 당신 가죽 말고 이 시대를 살다 간 당신의 이름을.
2023.03.28. 04:03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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